<한국소설 2019년 4월호 157-174쪽 (발행 한국소설가협회, 서울. 2019. 4. 1.)>
【나의 인생 나의 문학】
푸른 삶과 문학 활동 48년
허만길
(문학박사/시인/소설가)
■ 아버지의 애국독립운동으로 일본 출생, 경남 의령 성장
나의 아버지 허찬도(許贊道 1909-1968년) 선생의 처음 이름은 허기룡(許己龍)인데, 1919년 10살 때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경찰의 추적을 당하였다. 1936년(27살) 경상남도 진양군 집현면 장재못(저수지)에 양수기(무자위)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가뭄 걱정을 덜어 주려는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며 폭력을 행사한 집현면 주재소 구로다(黑田) 부장을 가격하여 진주구치소에서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는 1940년(31살) 일본 오사카부의 군수물 공장 아사히철공소(朝日鐵工所)에서 고야마(湖山)로 불리며 일하다가, 아사히철공소 조선인화친회(朝鮮人和親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서, 동맹파업으로 공장 가동을 멈추게 하였다. 일본 신문에 보도되고, 한겨울 밤중 7명의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호송되는 도중 끝까지 남은 2명의 형사들과 격투 끝에 탈출하였다.
아버지는 경찰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1941년 2월 고향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에 살고 있던 아내(노갑선盧甲先 1908-1998년)와 8살 된 딸(허맹준 1933-1960년)을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나는 1943년 일본 교토부(京都府) 구세군(久世郡) 오쿠보무라(大久保村) 오아자(大字) 오쿠보나이(大久保內) 30번지 셋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뒤 교토부 오쿠보 비행장에서 노무자 일을 하던 중 강제징병을 당했다. 시가켄(滋賀縣) 훈련소에서 이질을 앓아, 치료받으면서 일본인 군의장(군의관 우두머리)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일깨우고, 군의장의 도움으로 5개월 만에 병역 해제증을 받아 귀가하였다. 1944년 7월 가족들을 대한민국 고향으로 먼저 보내고, 대한민국이 독립할 때까지 일본 거주 동포들에게 항일 정신을 북돋우었다. 따라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난 지 1년 4개월 뒤 조상이 살아온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260번지에서 자라게 되었다. 나에게는 3살 아래의 여동생(허맹임 1946-1985년)이 있다.
증조할아버지 이후의 종가의 대를 잇는 외아들인 나는 부산중앙중학교 국어과 교사 시절 23살(1966년)에 나보다 1살 아래로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동광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지전 교사와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부산동광초등학교의 국어과 학습지도 연구학교 운영결과보고회에 평가위원으로 참석했다가, 아내를 소개받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한 아들(미국에서 컴퓨터공학 연구)과 두 딸이 있다.
■ 진주사범학교(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서 4.19혁명 주도
세 살적(1946년)에 겨드랑이에 《천자문》(千字文) 책을 끼고 서당에 다녔다. 서당 입학 1년 뒤에는 《이천자문》(二千字文)을, 그 다음해에는 《통학경편》(通學徑編)을 공부했다. 초등학교 1학년(1949년) 때부터 명절이면 친척들에게 《토정비결》을 보아 주었다.
6.25전쟁 때에는 장병들의 주검의 재를 담은 ‘주검의 재 상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면민들은 면사무소에 행사장을 차리고 추도식을 올렸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1953년) 때부터 학생 대표로서 전사한 영령을 위해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1954년) 때 학예회에서 웅변을 하고, ‘사육신’ 연극의 성삼문 역을 맡았다. 선생님은 성삼문 역은 나의 성격에 어울리고, 외워야 할 대사가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5년 3월 22일 나는 칠곡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학업 우등상, 개근상, 전교 학생장(자치회장)으로서의 공로상, 의령 교육감상(*‘교육감’은 뒷날 ‘교육장’으로 명칭 변경)을 받았다.
1955년 4월 경남 진주시 진주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객지에서 엄청난 가난과 고난과 고학과 보람의 연속이었다. 비가 내리면 한잠 자지 못하고 방에 비가 떨어지는 하늘이 보이는 천장 없는 양철 지붕을 쳐다보며 물을 받아내야 했고,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해 자주 서무실에 불리어 가곤 했다. 그래도 1958년 3월 중학교 졸업식에서는 고등학교 입학시험 교내 최종 모의고사 1등 학생에게 주는 ‘학업 장려상’을 비롯하여 학업 우등상, 도서위원장 공로상, 3년 개근상 등을 한 아름 받았다.
초등학교 교원양성 국립고등학교로서 수재들이 모인다는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1960년) 때에는 학생회장(학생위원회 위원장.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으로서 진주시의 4.19의거(4.19혁명)를 이끌었다. 이때의 일들은 나의 저서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에 나타나 있다. 나는 진주사범학교를 최우수 성적(남자 2명. 여자 1명)으로 졸업하여 18살(1961년)에 부산시내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았다.
■ 세계 최연소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증(18살) 및 고등학교교원자격증(19살) 취득
나는 진주사범학교 3학년 17살 때(1960년 9월) 국가시행 중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 합격으로 18살(1961년 4월 10일)에 중학교 교원자격증(전공과목 국어과)을 받았다. 중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에서는 1차 필기시험으로서 전공과목 국어, 공통과목 일반사회와 교육학 시험을 치렀다. 1차 시험 합격 뒤 2차 전공과목 구술시험에서는 김형규 서울대학교 교수와 홍웅선 문교부 학무국장(뒤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 역임)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또한 2차 수업실기시험에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국어과 학습지도안 작성 및 국어과 학습지도 시험을 치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0일(18살)로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던 것이다.
다음해에 국가시행 고등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역시 수석 합격으로 19살(1962년 12월 6일)에 고등학교 교원자격증(전공과목 국어과)을 받았다. 나의 중학교교원자격증 취득 및 고등학교교원자격증 취득은 각각 국내는 물론 세계 최연소 교원자격증 취득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기네스협회(코리아기네스협회) 사무국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나의 중학교교원자격증 취득 및 고등학교교원자격증 취득 증빙서류를 갖추어, 1989년 4월 13일 영국 기네스본부(Guinness PLC)를 방문하여, 세계 기록 여부 심사 요청을 한 결과(*서울서 발행되는 ‘일간스포츠’ 1989년 4월 15일 11쪽에 보도), 영국 기네스본부에서는 세계 각국에 알아보면서 심사한 결과 나의 중학교교원자격증 취득(18살 20일) 및 고등학교교원자격증 취득(19살 8개월)이 세계 최연소 취득 기록임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1989년 7월 2일 한국의 부산에서 개최된 제1회 영국 기네스본부 주관 한국진기록대회 때 영국 기네스본부에서 대회 참관인 자격으로 파견한 안나 니콜라스(Anna Nicholas) 님을 통해 알려 주었다.
나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네스본부 발행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에는 이 두 기록이 실리지 않았으나, 1991년 2월 25일 한국의 서울에서 발행한 한국어판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 발행 신아사, 서울. 1991. 2. 25.)의 <한국편>(302쪽)에는 내가 국내 최연소 중학교교원자격증 취득자(18살. 1961년 4월 10일) 및 최연소 고등학교교원자격증 취득자(19살. 1962년 12월 6일)임을 기록으로 실었다. 한국어판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은 영국 기네스본부(Guinness PLC) 발행 《기네스북》(The Guinness Book of Records)의 한국어 번역본(번역자: 박영숙. 주한 영국대사관 수석 공보관)에 <한국편>을 첨가한 책이다.
내가 17살에 국어과 전공으로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18살에 중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음을 알게 된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박사는 1962년(19살) 4월 7일과 4월 8일 이틀간 서울 자택으로 나를 초청하여 치하하면서, “나는 열일곱 살에 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허 군은 열일곱 살에 이미 중학교 국어과 교원자격고시에 응시, 합격할 수 있었으니….” 하며, 내가 최현배 박사 자택에 머물면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고 하였으나, 나는 가정 상황이 그럴 수 없을뿐더러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걷겠다고 했다. 1970년 최현배 박사가 돌아가시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때, 나는 몇 사람과 함께 박사의 널을 영구차로 모시었고, 한글학회 직원 2명과 함께 정부의 문화공보부에서 내 준 차를 타고 장의(葬儀) 행렬의 맨 앞장(선도차)을 섰다.
■ 교육과 학문 활동
나는 진주사범학교 졸업 직후 18살(1961년 3월 31일)부터 2005년 8월(62살) 정년퇴임 때까지 44년 5개월(부산시내 초등학교 및 중학교 교사 6년 8개월, 서울 시내 고등학교 교사 19년 3개월, 교육부 국어과 편수관 및 교육부 공보관실 연구사․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 진로교육연구부 연구사 7년 3개월, 서울 시내 중학교 교감 5년 3개월, 서울 시내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장 6년) 동안 제자 교육, 교육 정책 수립 및 추진, 학교 경영에 힘썼다.
교육 활동 가운데는 해마다 개최되는 전국교육자연구발표대회(중등학교 교원부)에서 내가 23살(1966년)에 최우수상(푸른기장증)을 받은 것은 대회사상 최연소이며, 앞으로도 이 기록을 깨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는 부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녔고, 서울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51살) 홍익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19살(1962년)에 ‘부산시민헌장’을 공동초안 하였고(1962년 8월 15일 제정 선포), 20살에 부산직할시 교육발전위원회 창립위원(위원장 부산시장 김현옥)을 맡았으며, 20살부터 24살(1967년)까지 부산시교육연구소 현직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내가 23살(1966년)에 한글학회 부산지회 주최로 국어학 연구 발표를 할 때 외솔 최현배 박사가 서울에서 내려와 찬조 특강을 하였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허웅 교수도 참석하여 격려하였다. 나는 24살(1967년 5월)에 최연소 한글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교육부(문교부) 국어과 편수관으로서는 국어과 교육과정 개발 및 운영, 국어 교과서 편찬, 한글 맞춤법 개정 및 표준어 규정 개정 추진(1998년 1월 1일 확정 고시), 국어심의회 운영, 국어순화운동협의회 운영, 어문 정책 수립, 우리나라 국어과 교육사상 처음으로 초등학교 국어과 교과서를 단일형 ‘국어’에서 ‘말하기·듣기’, ‘읽기’, ‘쓰기’ 3책으로 분화하기(1987년 6월 문교부 확정. 1989년 3월부터 시행)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나의 학문 활동은 국어학, 언어 이론, 국어 정책, 국어 교육 및 음성 언어 교육, 국어 사랑 이론, 진로 교육, 교육 철학 및 교육 일반, 문학 평론, 향토사 연구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 전국적인 우리말 사랑 운동 전개
나는 고등학교 교사 재직 중 1968년(25살)부터 전국 규모의 우리말 사랑 운동 전개로 1976년 국가적, 제도적 차원의 국어 순화 운동 기틀 마련에 기여하고, 국어 사랑 이론 정립에 힘썼다.
1967년(24살)부터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면서 수도 서울의 말이 어느 지역보다도 모범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어, 속어, 욕설, 비도덕적 언어,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 등의 남용으로 우리말이 황폐해 가고 있음을 절감하고서, 조직적, 지속적, 전국적으로 우리말 사랑 운동을 펼치기 위해 1968년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국어반을 조직 운영하였다.
그 결과 1971년(28살) 문교부(교육부)에서 나를 문교부 언어생활 연구위원으로 위촉했다. 1974년부터 서울 경복고등학교 우리말사랑하기회(국어예몽반) 운영을 통해 우리말 사랑 운동을 전국 규모로 펼치고, 1975년 대통령 특별보좌관(철학박사 박종홍) 자문 응대 등을 통해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어 순화 운동을 국가적, 제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대통령령 제8,208호로 1976년 8월 4일 정부 11개 관계 부처 실•국장 중 1명씩의 당연직 위원과 각계 대표인사 9명으로 ‘국어순화운동협의회’가 구성되고, 11월 15일에는 문교부 국어심의회의 규정을 개정하여 대통령령 제8,279호로 ‘국어순화분과위원회’를 신설하였던 것이다.
또 나는 국어 사랑의 이론 정립에도 열의를 기울였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나의 우리말 사랑 운동에 관해 교육계, 학계, 일반 국민, 정치인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가는 그 시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의 저서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2003년)에 나타나 있다.
■ 1971년 복합문학 창시 및 첫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발행
나는 3살 서당에 다닐 때부터 책과 늘 함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고등학생이 읽는 월간 《학원》을 읽었는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검은 별’을 읽으며 연재소설과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졸업식 직후 김내성 지은 탐정소설(추리소설) 《마인》을 거의 자지도 않고 읽으면서 이광수의 소설 《유정》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1955년) 여름방학 때 외할아버지한테서 역학(易學)의 팔괘(八卦)와 택일법(擇日法)을 배우면서(뒷날 나는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 역임), 외사촌이 보던 김동리 지은 평론집 《문학과 인간》을 읽었는데, 문학의 비평에 눈을 뜨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아버지의 일터인 진주봉래초등학교 구내 이발소에서 아침과 오후에 보조이발사로 일했는데, 그때 고학하는 고등학생이 약 열흘 간격으로 싼값으로 책을 빌려주는 일을 했으므로, 나는 월간지 《야담》, 《야담과 실화》 등 많은 책을 빌려 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도서관이 처음 생겨 나는 도서위원장을 맡았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고 대출하는 일을 보면서 시, 소설, 과학, 철학, 예술 등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사범학교) 재학 중에는 과학, 법학, 철학, 문학, 교육학 등 각 영역의 전문 서적을 광범위하게 깊이 있게 읽었으며, 이때 중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부터는 국어학, 국문학, 국어교육학, 세계 문학 이론 등 전문 서적을 집중적으로 철저히 읽었다.
그런데 나는 문학 서적을 읽을 때면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왜 문학 장르는 시, 소설, 수필, 희곡, 시나리오 등으로 거의 고정적으로 분류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문학 장르를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28살에 1971년 9월 1일 ‘복합문학’(複合文學, Complex Literature )을 창시(창안)하여, 그 첫 작품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일부를 1971년 9월 1일 발행 월간 《교육신풍》(敎育新風. 발행 교육신풍사, 서울)에 처음 발표했다. 월간 《교육신풍》 1971년 9월호에는 작품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가 ‘복합문학’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과 ‘복합문학’의 간략한 특성을 밝혀 두었다. 이 작품은 《교육신풍》 1971년 11월호까지 연재되다가, 출판사가 폐간됨에 따라 작품 연재도 중단되었다. 나는 이때를 나의 문학 창작 활동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실제로는, 나는 이보다 약 2년 전 1969년(26살) 10월 26일 새벽 0시 43분에 ‘복합문학’의 첫 작품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집필을 완료했다.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복합문학’ 형태로 집필하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집필을 시작한 때는 다시 이보다 약 2년 전 1967년(24살)이었다.
1980년 4월 26일 교음사(서울) 발행 단행본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머리말에서는 ‘복합문학’의 정의(definition), 효용(utility. usefulness) 혹은 의의(significance), 구상하게 된 동기 등을 비교적 구체적이면서 명료하게 밝혔다.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가 단행본으로 출판되자, 《동아일보》(1980년 4월 30일), 《조선일보》(1980년 5월 13일), 주간 《새한신문》(1980년 6월 19일. 대한교육연합회), 《경남매일신문》(1980년 5월 1일. 마산), 월간 《한글 새소식》 95호(1980년 9월 5일. 한글학회), 월간 《시문학》 1980년 7월호 등에서 크게 소개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CD-ROM판) 및 《두산백과사전》에서는 2001년 9월 ‘복합문학’을 등재하여 풀이하였다.
나는 ‘복합문학’ 창시자(창안자)로서 ‘복합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거나(definition) 설명해(explanation)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복합문학(複合文學, Complex Literature): 대한민국의 허만길(許萬吉, Hur Man-gil. 1943- . 시인. 소설가. 문학박사)이 1971년 창시한 문학 형태로서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완성함에 있어, 시(서정시․서사시․극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수필(일기, 편지) 등 문학의 여러 하위 장르를 두루 활용하여, 전개상의 변화와 활력을 꾀하고 주제의 형상화에 상승효과를 거두기 위해 복합장르로 구성한 문학 형태. 허만길은 문학 형태에 창조를 주어 문학을 참신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복합문학을 구상하였음. 허만길은 첫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월간 《교육신풍》(敎育新風) 1971년 9월호-11월호에 일부 연재하고, 1980년 4월 26일 단행본으로 출판하였음.”
■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1990년) 성과
나의 본격적인 문학 창작 활동은 1971년 9월 ‘복합문학’(複合文學, Complex Literature )을 창시함과 동시에 그 첫 작품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월간지에 연재하고, 2년 뒤 월간 《현대문학》 1973년 9월호에 수필 ‘말버릇 체험’을 발표하고, 1975년 수필집 《빛이 반짝이는 소리》 발행 등으로 이어진다. 1989년 《한글문학》 제9집(1989. 2. 20.)을 통해 시를 추천받고, 1990년 《한글문학》 제12집(1990. 10. 5.)을 통해 소설을 추천받아 시인과 소설가로서도 문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던 시기에 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로서 교원국외연수단을 인솔하여, 1990년 6월 13일 중국 상하이 마당로(馬當路) 306롱(弄)에 아무 표적 없이 중국인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를 둘러보고, 연수단 앞에서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를 읊고, 귀국 즉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을 펼쳤다. 중국 상하이 시장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에 표적을 만들어 주고, 또 그곳을 상하이시(上海市)에서 특별한 관심으로 보전해 주기를 바라는 편지도 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곳은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이 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 시초가 되는 시인데, 《한국 시 대사전》, 허만길 시집 《아침 강가에서》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전해지고, 문재구 문학박사(시인)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한국현대시인협회 편찬 《동북아 시집》(발행 천산. 2008년)에 실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은귀 교수가 영어로 번역하여 《Poetry Korea Vol.7. 2018》 (발행 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Korea Committee. 2018년)에 실리고, 2010년 ‘한국 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충청남도 보령시 《시와 숲길 공원》에 시비로 건립되었다.
■ 정신대 문제 제기 및 정신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년) 발표
나는 아버지한테서 어릴 때부터 일제의 정신대(종군위안부) 이야기를 들어 온 것에 교훈을 받아, 18살(1961년) 초등학교 교사 임용 때부터 정신대 문제를 꾸준히 주장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일제의 정신대 문제를 그냥 역사의 뒷전에 묻히게 할 수 없다는 양심에서 정신대 문제를 효과적이고 대중적으로 제기하기 위해 정신대 문제를 주제로 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A Feast in the Village of Natives’)를 1990년(47살) 10월 《한글문학》 제12집 115-134쪽(편자 한글문학회. 발행 미래문화사, 서울)에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정신대 문제를 국내외에 역사적 관심사로 불러일으키는 주요 발단을 이루었으며, 정신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단편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은 2007년 《두산백과사전》에 등재되어 풀이되고 있다.
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발표 즉시 문인과 언론을 비롯하여 각계로부터 큰 관심을 끌면서, 잊혀 가던 정신대 문제를 일깨우는 촉매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구인환(문학 평론가, 소설가) 교수는 ‘원주민촌의 축제’는 ”일제의 압정에 항쟁하며 독립의 열매를 키우던 치열한 삶이 해외 동포의 고국 방문이란 연결고리로 외손인 민속학도에 의해 그 신비가 벗겨지는 충격과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고 했다.(한글문학 제12집 136쪽. 1990년).
구인환 교수는 이 소설이 발표된 지 약 한 달 뒤 1990년 11월 초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국 소설가협회 세미나에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야말로 잃어버릴 뻔했던 한국 문학의 한 사명적 영역을 일깨워 준 훌륭한 작품이며 한국 소설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작품으로 평가했다고 한글문학회 안장현 회장과 나에게 전해 주었다. 시인 안장현 한글문학회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문학사에 길이 기록될 수작”이라고 극찬했으며, 1991년 11월 30일 한글문학상 시상식에서도 안장현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극찬을 되풀이했다.
이 작품이 한글문학상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됨을 계기로 나는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를 각계에 하면서, 계속 종군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관심사로 환기시킴과 동시에 정신대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언론에서는 《주간조선》(1991. 12. 15.), 《한국일보》(1992. 1. 6.), 《조선일보》(1992. 1. 18.), 《동아일보》(1992. 1. 21.), 《주간경향》(1992. 2. 9.),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비상기획위원회 공동 발행 《비상기획보》(1992년 봄호. 1992. 3. 1.) 등이 크게 호응했다. 1992년 1월 언론에서 일제 때 12살 초등학교 어린이들마저 정신대에 끌려간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다고 하자, 그동안 내가 제기해 온 정신대 문제는 급속도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나는 정신대(종군위안부) 문제 제기 주요 공로로 2004년 12월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2010년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 회고》를 발행했다.
■ 푸른 삶과 문학 활동 48년
나는 어릴 때부터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이치에 몰두해 왔다. 그러한 과정은 나의 저서 《인류를 위한 참얻음》(1980년),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2007년) 등에 나타나 있다. 교육과 학문과 문학 활동 역시 나의 삶의 주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생을 푸르게 살고자 노력했다.
나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2019년 현재로부터 48년 전 1971년 ‘복합문학’(複合文學, Complex Literature )을 창시함과 동시에 그 첫 작품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월간지에 연재하고, 월간 《현대문학》 1973년 9월호에 수필을 발표하고, 1975년 수필집 《빛이 반짝이는 소리》를 발행하고, 1989년 《한글문학》에서 시 추천을 받고, 1990년 《한글문학》에서 소설 추천을 받은 것을 주요 바탕으로 한다.
나의 저서는 학술서 《한국 현대 국어정책 연구》,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 시집 《아침 강가에서》, 수필집 《열네 살 푸른 가슴》 등 많이 있다. 학술지와 문학지와 잡지와 신문에 발표한 수많은 학술 논문과 문학 작품(단편소설, 시, 수필, 문학평론)이 있다. 작곡된 시로는 ‘악성 우륵 찬가’, ‘우리 자연 우리 환경’, ‘해운대 달밤’, ‘우정의 자리’, ‘의령 아리랑’, 여의도 꽃길‘, ’한강샛강다리‘, ’자굴산‘ 등 약 20편이 된다. 건립된 시비로는 고향 경남 의령군 칠곡면 애향비 ’내 고향 칠곡‘, 개화예술공원에 ’당신이 비칩니다‘, 시와 숲길 공원에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와 ’아침 강가에서‘가 있다. ‘본다이 아침 해변’을 비롯해 여러 편의 시가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영어로 발표한 문학평론들이 있다.
나는 2019년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충남 보령시 시와 숲길 공원의 《한국문인 인물자료 100년보존 타임캡슐》에는 나의 약력과 주요 저서들을 보관하고 있는데, 2115년 4월 25일에 열어 보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푸른 삶의 보람을 일구어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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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만길 약력
▲아버지 허찬도 선생의 애국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교토(京都) 오쿠보(大久保) 출생.
1944년부터 대한민국 경남 의령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석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박사. 1971년 ‘복합문학’(複合文學, Complex Literature) 창시(‘복합문학’ 두산백과사전 등재). 시인(1989년 ‘한글문학’ 시 추천). 소설가(1990년 ‘한글문학’ 소설 추천). 국가 시행 세계 최연소 중학교교원자격증(18살) 및 고등학교교원자격증(19살) 받음(‘기네스북’ 한국편 등재)
▲진주사범학교(초등학교교원양성 고등학교과정) 학생회장으로서 진주 4.19혁명 주도
▲정신대문제 제기 및 정신대문제 첫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년) 발표(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표창. ‘원주민촌의 축제’ 두산백과사전 등재). 대한민국 광복 후 최초로 199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성과(충남 보령시 ‘시와 숲길 공원’에 허만길 시비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자리’ 건립. 시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
▲서울 경복고교 교사•교육부 국어과 편수관•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 연구사•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국무총리실 소속 한국청소년개발원 협력연구위원•한국진로교육학회 이사•서울특별시교육청 진로교육추진위원장•서울 당곡고등학교 교장 역임
▲(2019년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글학회 회원. 한국국보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신문예문학회 자문위원
▲저서: ‘한국 현대 국어 정책 연구’.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 운동 회고’.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 ‘우리말 사랑의 길’.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 (시집) ‘당신이 비칩니다’, (시집) ‘열다섯 살 푸른 맹세’, (시집) ‘아침 강가에서’, (수필집) ‘열네 살 푸른 가슴’, ‘(수필집)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 (수필집) ’빛이 반짝이는 소리‘. (깨달음) ’인류를 위한 참얻음‘, (고등학교 교과서) ’진로 상담‘(공저) 등. 그 외 많은 학술 논문, 단편소설, 문학 평론 발표
▲노래 작사: ‘악성 우륵 찬가’, ‘우정의 자리’, ‘여의도 꽃길’, ‘한강샛강다리’, ‘해운대 달밤’, ‘의령 아리랑’, ‘자굴산’, ‘우리 자연 우리 환경’ 등 약 20편
▲시비: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시와 숲길 공원), ‘아침 강가에서’(시와 숲길 공원), ‘당신이 비칩니다’(개화술공원). ‘내 고향 칠곡’(의령군 칠곡면 애향비)
▲번역된 시: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일어. 영어). ‘아침 강가에서’(영어), ‘본다이 아침 해변’(영어). ‘남태평양에서’(영어) 등
▲수상: 황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표창. 순수문학 작가상. 문예춘추 청백문학상. 한글학회 이사장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