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넷의 일본 남자, 어린아이가 그린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세계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얼마 전 소더비 경매에서 13만 달러에 팔렸고, 19세기의 자포니즘 Japonism이 서양인을 설레게 했던 그 파장만큼 그의 악동 같은 어린아이가 지구촌 구석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지구를 일곱 바퀴 돌 정도의 마일리지를 축적하며 여행하고 그림을 그리는 요시토모 나라.
이 지구별 여행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네 가지 키워드를 준비했다.
<몽유병> 1995.
여행 테크닉이 아닌 감각을 배우다
‘1959년 12월 5일 이른 아침, 나는 이 작은 별을 찾아왔다.’ 요시토모 나라가 어느 잡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단행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스러운 태양계 제3의 혹성, 그 별의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시골 마을 히로사키 시. 그가 유난히 긴 겨울과 눈이 많이 내리는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화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눈보라 때문에 바깥세상으로 한 발도 뗄 수 없는 시골 마을에서의 긴긴 겨울을 그는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를 보면서 언젠가 도전하게 될 모험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던 소년의 여행의 서막은 그런 것이었다. 록 음악 듣기와 그림 그리기를 시계추처럼 반복하던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학비를 털어 유럽 여행을 떠난다. 유럽의 그 많은 나라가 1센티미터도 안 되는 두께에 담긴 <지구 여행 유럽 편>이 유일한 가이드였을 만큼 여행 문화가 척박한 시절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치킨과 비프,어느 쪽으로 하시겠어요?”라는 물음에 “양쪽 다”라고 대답했더니 정말로 두 가지를 다 주던 그 여행을 시작으로 그는 그야말로 보헤미안처럼 떠돌았다.
유럽의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명소나 유적을 찾아다니기보다 유스호스텔이나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록, 영화, 문학에 대한 서로의 취향을 나누고, 온갖 라이브 공연을 쫓아다니며 그는 미술의 ‘테크닉’이 아닌 ‘감각’을 키워나갔다. 거장들이 채워놓은 미술사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여정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그는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지도 삼아 젊은이들의 정신, 패기 그리고 시대 감각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이해했다. 지구 일곱 바퀴 반의 여행은 학교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보다 거칠지만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소중한 감각들을 그에게 주었다.
1. <착한 새끼 고양이> 1994 2. <깊고 깊은 웅덩이에서 Ⅱ> 1995 3. <쌍둥이Ⅱ> 2005
독일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리고 해방
그는 스물여덟 살 봄부터 마흔 살 봄까지 12년을 독일에서 보냈다. 1987년 세 번째 유럽 여행에 나선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살고 있는 친구 고바야시의 조그만 다락방에 놀러 갔다가 독일 유학을 결심한다.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그가 미술 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가 고백하듯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유럽의 구석구석을 방랑한 그가 12년간이나 독일에 정착한 것은 약간 놀랍기까지 하다.
1988년 봄, 나라가 독일에 살고 있는 동안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독일에 계속 살 생각인지를 묻는 질문에 “실은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면 쓸모없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참고 있다. 일본에 있으면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 작업량이 지금의 절반밖에 안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강하지 못해서…”라고 답했다. 작업에 있어서는 거의 결벽증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그에게 독일은 눈으로부터 고립돼서 그림과 상상밖에는 할 수 없었던 그의 고향 히로사키와 같은 곳이었다.
유학 생활 초, 독일어에 능하지 못했던 그는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일본에서 그렸던 아이들이나 동물 모티브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배경에 풍경 등을 그려 모든 이에게 설명하려 했다면 독일에 온 뒤부터는 보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만 그렸다. 이 고독과 고립의 시간에 탄생한 것이 지금은 나라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바로 그 심술궂게 생긴 꼬마 아이다.
1. <우주 무용수> 1991 2. <칼 휘두루기> 1998 3. 요시토모가 젊은 시절 뺘졌던 펑크록 앨범들. 4,5. 로댕갤러리에 설치된 서울 하우스 내부 2005.
1. <어머니> 1987. 2. 요시토모 나라의 여행 사진들. 3. <1999> 1985. 4. 도쿄 교외에 있는요시토모 나라의 스튜디오 2004.
펑크 록 서서히 꺼져가느니 확 타버리는 게 나아
나라는 작업을 할 때 창고 같은 커다란 작업실에서 록이나 펑크 음악을 ‘방방’틀어놓고 그리기에 몰두하는 습관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곡을 들으면 그림을 몇 개 그릴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어느새 잔뜩 사게 되고야 만다는 CD를 들으면서 그는 창작에 몰두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록 다방에서 DJ 아르바이트를 할 만큼 록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스무 살 때 대학교 진학을 위해 옮겨간 나고야에서 밴드 ‘더 스타 클럽 The Star Club’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래, 그의 캔버스 화면에는 그 밴드가 부르는 곡의 가사가 빈번하게 인용된다.
화집의 제목 ‘칼 휘두르기 Slash with a Knife’도 그들의 곡명에서 따온 것이다.‘서서히 꺼져가느니 확 타버리는 게 나아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라는 작품 제목도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이 1994년 자살할 때 유서 말미에 인용한 말로 그의 작품 속 아이들은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펑크 록의 정신을 닮아 있다.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리는 듯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있거나 해골을 밟으며 조용하게 칼을 드는 아이, 자신보다 나약한 토끼의 목을 무심하게 조르는 아이 등 언뜻 귀여워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시니컬한 미소와 음모를 갖고 있는 사악함과 고독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나라의 피에 흐르고 있는 펑크 록의 정신 때문이다.
<기운내> 2001.
아이 포커페이스로 살기
이제는 ‘나라표’ 아이가 돼버린 2등신의 동글동글한 아이. 심술궂고 사납게 치켜뜬 눈, 앙다물거나 비웃는 듯이 일그러진 입, 거기에 톱을 들고 있거나 머리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고 이빨을 집게로 뽑아 드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사실 뿔만 안 달렸지 작은 악마쯤으로 보인다. 요시토모 나라의 일러스트 속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귀엽고 순진한 어린이의 이미지를 배신한다.
이 아이는 나라 본인이 밝혔듯이 자신의 분신이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들 사이에서 외롭게 자란 그는 단체 행동이 서툴러서 행진을 할 때에도 같은 쪽 손과 발을 함께 내미는 꼬마였다. 부모 무릎이 아닌 보육원에서 세상을 배운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것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단 것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슬픔을 느끼고, 처음으로 왕따를 당하고, 처음으로 왕따를 시키는 세상사 게임의 법칙을 알아버렸다.
그 시절 소년이 겪은 두려움과 허무와 사악함과 고독과 슬픔이 모두 녹아 있는 것이 나라가 그리는 아이다. 반항심, 고독함, 막연한 두려움 등을 읽을 수 있는 아이의 표정은 어른이 된 우리 마음속에 늘 교차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이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포커페이스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속을 비춰 보이는 거울인지도 모르겠다.
‘직업’으로서 그림 그리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선택했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그림 그리기는 예술의 차원이 아닌 실존의 차원으로 다가온다. 무섭고 괴팍하지만 천진함을 잃지 않는 아이를 분신처럼 껴안고 지구별을 유랑하는 그는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 사는 동안 그렇게 아이처럼 두려움과 슬픔과 기쁨을 가지고 이 세계를 더듬어나갈 것이다.
사진 및 자료 제공·로댕갤러리, <작은 별 통신>(시공사)
첫댓글 흠 ~~ ...... 잘 보고 감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