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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를 설한 <금강경>이 위경인가?
그 배경과 내용.. 선업과 악업은?..
그리고 '오시교판론'까지..
[질문]
답변을 위해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환상에 빠진 저의 생각으로 말과 논리를 만들어 냈다 하시니 그럼 석가여래님의 말씀으로 질문드리겠습니다
금강경 4분에 보면 석가여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수보리존자께서 말씀하십니다
'若菩薩이 無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은 不可思量하리라'
위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석가 여래께서는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할 것을 강조하시는데요.. 여기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평온하시고 감사합니다
* 질문자 : 고석찬(2013-10-30)
[답변]
문제가 정확해야만 올바른 답이 나오는 것이지
문제가 잘못된 것이라면 답을 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님은 금강경을 인용하여 무주상보시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주상보시가 진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그에 대한 답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약 칠~팔백년 후에 대승경전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경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부처님이 하신 말일까요?
아니면 모든 업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공을 강조하는 후대의 학승이 만든 말일까요?
둘째, 무주상보시는 보시한다는 생각없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보시한다는 말인데
인간이 무생물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자기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이 보시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여기에 대해 먼저 답을 해주시면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3-10-30)
[재질문]
답변 감사드립니다
허해구선생님께서는 금강경이 위경으로 입증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금강경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석가여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는지 그 근거를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금강경이 석가여래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것으로 생각하신다면서
왜 금강경 제14분에 나오는
부처님말씀을 책(p181)에 인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허해구선생님께서 책에 인용하신 금강경의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狂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말을 하는 사람이오 실지로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오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오 속이는 말을 아니하는 사람이며 또 다른
변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위 글귀를 인용하신 이유가 금강경에 나오는 어느 부분은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이고, 또 어느 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어느분의 기준인지요
아니면 그냥 단순히 금강경에 나온 이 글귀가 좋아서 인용하셨는지요
좋아서 인용하셨다면 이 글귀는 누구의 말씀으로 알고 인용하셨는지요
허해구 선생님의 말씀대로 무주상보시는 바라지말고 보시를 행하라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네 중생들이야 보시를 할때 당연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할것입니다만
석가여래 부처님께서도 보시를 하실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석가여래부처님께서는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이 보시를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우리네 중생들도 덕을 쌓고 마음을 닦고 쌓고 닦고 쌓고 닦고 하다보면 어느 생에서는 허해구 선생님께서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무주상보시가 가능하지 않을런지요
주는 마음은 받으려는 마음과 같이 일어나니 이것을 염려하여 석가여래께서 무주상보시를 강조하신건 아닐런지요
받으려는 마음이 곧 번뇌의 원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글을 적으면서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함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해구 선생님의 뜻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단지 진실을 추구하려는 마음 하나 뿐이니, 글에서 따지려고 하는 저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아직 이정도 밖에 할 수 없는 중생이라 그러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 질문자 : 고석찬(2013-10-30)
[댓글] ⇒ 하상현(2013-10-30) ;
새글게시판에 '대승'으로 검색하시면
네이버 백과사전보다 더 자세한 내용들이 나와있습니다
[댓글] ⇒ 고석찬(2013-10-31) ;
A에 대한 평가를 A에게 해달라고 하다니요...
[재답변]
왜 금강경이 위경인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칠~팔백년이 지나자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기 저기서 부처님의 말씀을 차용한
정체불명의 대승경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대승경전들은 부처님의 유법을 계승해오던
상좌부의 사실적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러번 이단으로 단죄를 받은 바가 있는
대중부의 이설을 근거로 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 유행하던 공관을 주된 내용과 논리로
작가도 분명하지 않게 나타난 대승경전을 보고
당시 인도불교의 제도권이었던 정통 상좌부에서는
이러한 경전들은 이야기책에 불과하며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을 파괴하기 위한 말법이라고 엄금한 바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승경전들이 부처님의 숨겨진 비전인 정법이라면
수백년 전통을 가진 기존 상좌부에서 몰랐을 리가 없으며
소설에 불과하다고 배척했을 리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경전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경전을 쓴 당시 학승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불제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부처님 사후 칠~팔백년이 지나 부처님과 관계없이
바로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경으로 쓰면서
마치 직접 들은 것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형식을 빌어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도 대승경전은 진리로서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혀 쓰지 않고,
자신들의 논리만 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극히 일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시아문 형식도 그러하며, 여래의 실체를 설명한 부분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인용한 여래의 실체에 관한 내용은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부처님에 관한 사실인 것입니다.
“여래는 참말을 하는 사람이오 실지로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오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오 속이는 말을 아니하는 사람이며
또 다른 변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그래서 여래는 관념적인 말을 하지 않으며
자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이치 그대로 설명하시는 것이며
그 속에는 사실과 다른 한 점의 거짓이나 환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진실을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전이 진실인 듯이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전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경을 쓴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깨달은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 당시에 깨달은 자가 나왔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공을 주장하는 대중부의 비주류적인 학설이
주류적인 상좌부의 유법에 도전하고 있었고
정통성 있는 상좌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저자불명의 대승경전이
여기저기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당시 나온 대승경전들은 깨달은 자가 쓴 것이 아니라
대중부의 학승들이 당시 유행하던 공이라는 관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썼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진리가 증명되지 않는
깨달은 자가 쓰지도 않은 경전을 진리인 양 따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특징은 논리적 모순에 있습니다.
아는 체 하는 자들은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통해
언설을 떠난 공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 탁월한 인식론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진실은 깨닫지 못한 자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공이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로 함부로 전개한 것일 뿐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라한(阿羅漢)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 도(道)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실로 법이 없음이 아라한이라 하나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하면 곧 아·인·중생·수자상에 집착된 것이옵니다.”
“이 복덕은 곧 복덕성(福德性)이 아닐새
이런 고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설하셨나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며 이름이 불법이다.”
이러한 명제들은 깨닫지 못한 자가
공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 생각으로 모순논리를 만들어
모든 실체와 이치를 부정하고자 만든 말입니다.
얻은 것은 얻은 것이고,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데
얻은 것도 없고, 얻었다는 사실도 집착이라고 하여 실체를 부정하니
이 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정신을 망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과 지혜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 법의 핵심인 인과법을 깨칠 수 없으며 세상을 볼 수 없으며
올바른 공덕을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은 깨달은 자가 깨달은 경지를 직접 쓴 글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에 불과한 학승들이
공이라는 관념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모순논리로 전개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실체도 잡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속에 무슨 깊은 이치가 있는가 하고 빠져들면
평생 그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환상 속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과 형이상학적인 모순논리를 받아들인 나라는 불교가 성하게 되는데
실체와 이치가 없으니 그만큼 허황된 삶을 살게 되어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고 나라는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사실적이고 진실한 실상의 이치보다는
화려하고 기적적인 환상을 좋아합니다.
동대문이 땅에 붙어 있다면 시시해서 믿으려 하지 않지만
하늘에 둥둥 떠서 음악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진다고
뻥을 치면 사람들이 좋아라! 하고
들으러 몰려드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없고
거짓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자기 돈을 바쳐가면서까지 북새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은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화려한 환상에 빠진 자는 결국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마음이 망할수록 세상이 어두울수록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인은 도를 들으면 기뻐하고,
중인은 반신반의하고, 하인은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경전이 나타남으로써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세상을 이치대로 파악하는
과학적이고 진리적인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은 사라지고
세상이 공하다는 관념에 빠진 무기력과 염세적인 불교가 동양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사회는 어둡고 발전이 정체되어 결국 서구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님의 말처럼 무주상보시를 하면,
즉 요즘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시하면 누가 좋아질까요?
요즘 종교인들이 큰 차를 몰고
종교단체들이 큰 건물을 짓는 원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이러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말을 만들어
신도들은 무조건 보시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한 후
중생들의 시주와 헌금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석가여래 부처님의 말처럼
무주상보시를 실천하지 못함이 죄스러울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있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을 관념으로 상정해 놓고 실천하려 하니
실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대는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보시를 하실 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셨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 삼계의 모든 법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는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중생과 세상을 축복해주는 좋은 원인을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덕이 되는 일과
공덕이 되지 않고 어리석음을 더하는 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좋은 결실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좋은 원인을 짓는 것이며 좋은 공덕입니다.
거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남과 자신에게 죄를 짓지 않고 맑은 마음과
신뢰 있는 세상을 만들기에 좋은 가르침이며 좋은 공덕이 됩니다.
사실에 맞게 올바른 원인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가르침이며 좋은 공덕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아보지 않고 환상과 잘못된 관념에 빠져
신이나 악인에게 보시하면 복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함부로 자신의 재산을 퍼주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공덕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은 자기를 만들어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로 인해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공덕이 아니라
죄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양무제가 절을 많이 짓고 스님들을 많이 봉양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달마대사에게 물었을 때 아무 공덕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물질로 세상에 봉사해도
참된 진리를 세상에 전하지 못해 세상과 인간을 밝히지 못했으니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님은 주는 마음은 받으려는 마음과 같이 일어나니
이것을 염려하여 석가여래께서 무주상보시를 강조했다고 하면서
받으려는 마음이 곧 번뇌의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사실 속에 없는 관념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면 돌아오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인간의 정신이 정상이라면 저절로 그런 이치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적 사고를 번뇌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과 해탈의 본질을
공으로 보는 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선업도 업이고 악업도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업을 지우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 베푸는 공덕도 베품없이 지어 선업마저 쌓이지 않아야
선한 윤회의 고리에서도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사실이 아니며 관념으로 만든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모든 업을 버려야 해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악업을 버리고 선업을 지어야 해탈에 이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업은 업이 아니라
업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업은 인간이 지니고 나온 불성을 흐리는 흔적이라 한다면
선업은 불성을 맑게 하는 반대되는 흔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업을 지으면 업이 두터워지지만 선업을 지으면 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업이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은 선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둠이 없어서
모든 일을 당당하고 밝고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아함경 원인경에 잘 나타나 있는데,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고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한다는 이치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습니다.
“탐욕 없음과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이 없게 되면
그로부터 일어난 업은 유익한 것이고,
그 업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며, 그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하고,
그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상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니 관념에 빠진 자들은
인간의 올바른 이성과 선업마저 버리라고 인간을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에서도
“모든 악을 짓지 말고(諸惡莫作)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衆善奉行)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라고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3-10-30)
[의견]
답변 감사드립니다
허해구선생님께서는 불교공부를 많이 하셨나보군요?
연세가 어찌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많이 하셨어도 백성욱박사님만큼은 아니실겁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나오셨다하니 백성욱박사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금강경은 허해구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허무주의하고는 아무 관련이없습니다
허무주의 색안경을 쓰시고 있는것 같습니다
금강경의 내용을 허무주의와 결부시켜서 해석하심은 금강경에 쓰여 있는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이 그리 쉬운 말씀이 아니기 때문일겁니다
백성욱 박사님은 일찌기 금강경을 통해서 도를 이루셨고 이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수많은 덕을 쌓으시고 말년에는 제자들을 위해 힘쓰시다가 열반에 드셨죠
백성욱 박사님은 내무부장관,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사장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시면서 수 많은 덕을 쌓으셨습니다
동국대학교의 기틀도 백성욱 박사님께서 다져놓으셨죠
또한 그분의 수많은 제자분들께서도 지금 사회 이곳저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백성욱박사님이나 그 제자분들은 매일매일 금강경을 독송하시면서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십니다
허해구선생님 말씀대로 금강경에 쓰여 있는 내용이 허무주의라면 백성욱박사님이나 그 제자분들은 전부 산속이나 굴속에 계셔야겠죠
근거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금강경이 부처님 말씀이 아닌 근거를 알려달라 했는데 여전히 허해구선생님 개인의 생각을 말씀해주시니 좀 아쉽습니다
저는 금강경에 쓰여 있는 내용이 허무주의 하고는 아무 관련없음을 백성욱박사님의 행적과 그 제자분들 그리고 제가 지금 왕성히 사회 활동을 하고 있음에서 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무주상보시를 실천하지 못해서 죄스러운 것이 아니고 진리에 대해서 따지는 것을 행하니 그것이 죄스러울 뿐인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치심을 키우는 행동이기 때문이죠
일찌기 석가여래께서 탐,진,치 삼독을 닦으라 하셨습니다
탐,진,치 삼독이 닦이지 않으면 아무리 선을 행해도 덕이 쌓이지 않는다 하셨죠 왜 그러는지 그 이유는 허해구선생님께서도 잘아시리라 믿겠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탐,진,치 삼독이 닦인후에야 차곡차곡 빠짐 없이 쌓이는 것이니 말입니다(플러스, 마이너스를 말하는 겁니다)
그중에 치심은 가장 닦기 힘든 것이니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을 늘 가슴속에 묻고 살아야만 그 치심이 닦인다고 백성욱박사님께서 살아생전 늘 제자분들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남에게 진리를 가르치려하고 책을 쓰고 지도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치심이 더 쌓이니 그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해구선생님께서는 어떠신지 궁금하군요
어찌어찌하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제 더 이상 제가 이곳에 머물필요는 없어진것 같습니다
허해구 선생님께서도 꼭 성불하시길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백성욱 선생님의 말씀을 녹취하여 정리한 책인 '백성욱의 금강경강화'에 나오는 선생님의 금강경에 대한 말씀 적어놓고 가겠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말은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석가여래가 있었고 그 다음에 당신이 말한 이야기 자체가 있었고 또 듣는 대중이 있어서 이렇게 세 가지가 화합했을 때에 비로소 불교라고 하고
그것을 교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술어에는 부다야 다시 말하자면 깨친 이 또 달마 즉 어떤 규칙 그 다음에 승가야 곧 승단이 되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오늘날 불교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금강경'이라는 경운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 석가모니가 언제 이야기했느냐? 첫째로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누구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이 세상은 고생이다 그 고생의 근본을 살펴라. 그 고생의 근본을 살펴서 그것을 없애라. 없애면 네 마음이 밝아지느니라" 했는데 그것인 고제입니다 그 다음에 "뭉쳐서 할 것 안할것 구별해라" 한 것이 집제.그 다음에
"그것을 없애라" 한 것이 곧 멸제 그 다음에 도제 혹 출요제 즉 종요로운 데로 나갈 수 있는 제. 이 네가지 카테고리에 의지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씀하여 주어서 그것을 우리가 일컬어 사제법문이라 합니다
이 사제법문을 가지고 이야기하시기를 대략 열두 해 동안 하셨습니다. 그것을 오늘날 불교에서는 아함부라고 말합니다. 그래 12년을 이야기하다보니 아마 대중도 달라지고 또 풍속도 달라지고 여러가지 포섭할 대상이 달라져서 그랬던지 당신이 순숙해서 그랬던지 듣는 사람들이 익숙해서 그랬던지 그 다음에는 방등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방등부가 무엇이냐 "모든 사람의 마음은 똑같다 그러니까
똑같이 깨칠 수 있다 나도 그 마은 가지고 깨쳤고 너희들도 그 마음 가지고 미했고 모든 사람이 그 마음을 깨칠 것이요 또 장래도 수도할 것이다" 이렇게 똑같다는 데서 방등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대략 여덟 해를 말했지요. 그러니까 아함부에 열두해, 방등부에 여덟해, 그렇게 20년 동안 이야기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번에 가서 반야부라고 하는데 이 '금강경'은 반야부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반야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네 한마음이다. 네 한마음 밝아야 된다" 이 반야부를 혹 영지보물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몸속에 보배를 알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이 곧 부처다 밝으면 부처다 네 마음이 미하면 중생이다" 이런 것을 이야기해서 아마 석가여래의 정신이 어느 말씀 중에 있었는가 할 것 같으면 단적으로 당신의 살림살이를 그냥 내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 이 반야부에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를 스물 한해를 말씀하시게 되는데 스물 한해동안 말씀하신 기록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을 '육백부반야'라고 말합니다
그 반야 경전 중에 이 '금강경'을 통하여 솔직하고 간단하게 당신의 회포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모든 남을 믿으려고 하는데 무서움이 나면 왜 그러냐? 자기 한마음을 알아서 처리하려니까 모두 무서움이 나는 것입니다. 또 이 '금강경'은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종교라는 것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그라파 사람들의 생각에는 최고의 신과 우리 인간을 결부시키는 것을 종교라고 했는데 '금강경' 에서는
절대로 자기 한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지 어떤 최고의 신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신이 있다고 하면 자기를 약체화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약체화하면서 어떻게 밝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래에 이야기하다 보면 '누구든지 불법이라고 하면 불법이 아니다'라고 한다. 왜 그러냐? 불법이라는 관념 하나를 네 마음에 넣어 두면 네 마음이 그만큼 컴컴하다. 그러니까 불법이다.
오직 네 마음이 밝아야 되겠다. 또 심지어 어떤 때에는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은 다 틀린 것이다 그것은 네 마음을 가린 것이다. 오직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줄 알 때에 네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밝은 이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마 이 세상 인류가 창조된 이후에 참 듣기 어려운 말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습니다. 우레가 치고 비가 오면 하늘의 장난 이라고 그랬지. '네 마음의 소산이다'라는 말을 한 이도 없었고 또 그럴려고 들지도 않았고 오늘 이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잘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골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스물 한해 동안 이것을 이야기하신 뒤에는 당신이 곧 작별하게 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갈것이다'그래서
작별하신 이야기 중에는 '법화경'이란 경이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모든 마음 닦는 이가 몸뚱이를 향해서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 것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영생의 길로 가는 중간에 몸뚱이라는 것은 한 여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 여관에 지나지 않는 것은 많은 공적을 쌓으면 공적 쌓은 만큼의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 중략 - 이것이 곧 '열반경'의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석가여래가 당신의
작별을 이야기한 것이요 모든 공부하는 사람들의 작별이나 모든 미한 사람들이 이 세상 떠나는 작별을 이야기한 것을 '열반경'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법화경'과'열반경'을 여덟해르 설하였으므로 석가여래는 마흔 아홉 해 동안 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요새 세상에 소위 '대방광불화엄경''대방광원각경'이란 그런 경 이름들이 있는데 그런 경들은 아슈바고사란 분이 경을 설하면 말이 감촉을 해서 운다 하여
그 이름을 마명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의 제자 나가르주나 라는 이가 있었는데 '나가르'는 인도말로 용이란 뜻이고 주나는 나무라는 뜻으로 용수보살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멀리 구라파까지 명성이 높았던 분입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 그의 부관 메난드로스가 인도에 가서 나가르주나를 만나 이야기를 많이 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요.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구라파 희랍에까지 널리 알려졌던것이며
그 말씀의 전반을 '법구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명과 용수 두분이 아함부를 부연해서 이야기했는데 자기가 이야기했다고 하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였고 누가 묻기를 "이 책은 그럼 그대가 어디서 났느냐
지금까지는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그분들은 "아함부가 오직 인간성의 일개 수도자의 이야기라면 이것은 우주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책은 바닷속 용궁 깊은 곳에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용궁에 잠깐 갔다가 당신 기억으로 외워 가지고 와서 쓴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 용궁에 있는 책은 전부 어떠냐?" "이 우주 전통이더라" 그래 당신은 그 우주 전통에서 조금 초역해서 가지고 왔다고 말해서
그 뒤에 혹 대방광이란 석 자가 붙은 경은 불경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하면 순전히 마명,용수를 주장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원효,의상을 주장하고 원효 스님의 상좌 되는
심상이 원효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내량 법륭사를 짓고 화엄종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파를 하나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그럼 이제 대략 부처님의 내력과 말씀하신 것은 그만하고 경을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셨을 때에는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서 직접 물어보았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든지 가서 물어보면 석가여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런 일은 대략 뒤가 될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 "그래라" 그런 말이 될 것입니다. 처음의 '살생을 말라' 이야기도 또 '생물을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도 성도하신 지 한참만에
말씀하셨고 또 사람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면 그것을 음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도 성도하신 지 여덟 해 후에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정된 것을 비나야 즉 계율 이라고 합니다. 석가여래가 직접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신 것은 수트라라 말하고 또 제자들이 석가여래 말씀을 부연한 것은 사스트라라고 합니다. 경장, 율장, 논장, 이 세가지를 불교에서는 삼장이라고 합니다. 곧 이 세가지를 합해서 트리피타카라고 말합니다
'트리'란 산스크리트에서 3이란 뜻이고 '피타카'는 장 그래서 삼장이라 합니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 경장, 율장, 논장을 다 번역했으면 그 사람을 삼장법사라고 합니다. 삼장법사 칭호를 임금으로 부터 받은 사람으로 중국에 원장 또는 현장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 분들도 '서유기' 를 읽었으면 알겠지만 그 책의 주인공 되는 이가 현장 또는 원장이로고도 하지요. 그 다음에 의정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현장이 인도를 다녀온 뒤 한참 만에 외몽골을 거쳐 산강성으로 해서 아프카니스탄북쪽을 돌아 네팔을 경유하여 인도 대륙을 두루 다녔습니다. 또 그분은 수마트라까지도 가고 말레이 반도를 거쳐 산동성으로해서 돌아왔는데 그분이 다닌 곳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이의 기록을 가지고서 대략 우리가 인도를 추측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다 삼장이라 했던 것입니다
* 작성자 : 고석찬(2013-10-31)
[답글]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왔을 때 중국스님들은
인도의 세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므로
모든 경전을 부처님이 설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불교역사를 알지 못했던 중국 수나라 때
천태지의 대사는 사실적인 아함경을
가장 낮은 수준의 하근기를 위한 경전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으로 순서를 매겨 오시교판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오시교판론은 현대에 들어서
불교 연구의 진전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의심스러우면 오시교판론이나 불교경전의 성립시기를 검색해 보거나
불교대학에 문의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님도 무조건 과거의 논리를 지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맞는 이치가 무엇인가 잘 생각하여
삶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201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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