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설(李基卨) 1558 ~ 1622 –묘갈 –용주 조경
[생졸년] 1558년(명종 13) ~ 1622년(광해군 14) / 향년 64세
조선 중기에, 비변사낭청, 청풍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참봉 이계장(李繼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이언침(李彦忱)이다. 아버지는 이지남(李至男)이며, 어머니는 정원(鄭源)의 딸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정세규(鄭世䂓)·목낙선(睦樂善)과 교유하였다.
1586년(선조 19)에 효행과 순덕(純德: 도덕을 빠짐없이 행함. 또는 순수한 덕)으로 남부주부에 특별 임명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그 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 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공조정랑으로 정릉(靖陵)의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을 겸했으며, 해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 비변사낭청까지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군(郡)이 고향 가까이 있어서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아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1599년 이산해(李山海)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군자감부정·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임명도 거절하였다.
그 뒤 승지 등의 직책을 내렸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해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해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편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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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이 선생 묘갈명(蓮峯李先生墓碣銘) - 용주 조경 찬(龍洲 趙絅 撰)
선생의 휘는 기설(基卨), 자는 공조(公造)이고, 성은 이(李)씨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안 이씨는 휘 습홍(襲洪)으로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다. 그 뒤로 유학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누대에 걸쳐 나왔다.
휘 인충(仁忠)은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문무를 겸비하였다. 건이(建夷=여진족)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승지는 증 이조참의 휘 필(弼)을 낳았다. 참의는 증 이조참판 휘 계장(繼長)을 낳았는데,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참판은 비가 새는 집에 살면서도 변함없이 도를 지켰다. 참판은 휘 언침(彦忱)을 낳았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세 간신이 화(禍)를 선동할 때, 공이 장령으로서 세 간신을 탄핵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서천(舒川)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장령은 휘 지남(至男)을 낳았는데, 공의 부친이다. 젊어서 김하서(金河西=김인후(金麟厚)에게 수학하였는데, 행실이 독실하고 문장에 뛰어나 배우는 자들이 영응 선생(永膺先生)이라 칭하였다. 을사년의 명신인 승지 정원(鄭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선대의 공덕을 받고 태어나 젖니가 빠지기도 전에 의젓함이 드러났으니, 부모가 수고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예법과 행동이 은연중에 《소학(小學)》의 가르침에 부합하였다. 14세에 개연히 도(道)를 구하려는 뜻을 품고서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에게 수학하였는데, 수암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때부터 선생은 이학(理學)에 전념하였는데, 어렵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문답하면서 그 오묘한 이치를 꿰뚫었다.
선생은 타고난 효성과 우애로 유순하고 공경스럽게 부모를 모시며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추운지 더운지를 살펴서 반드시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드렸다. 음식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올렸으며, 손님에게 대접하는 술과 음식은 반드시 풍성하고 정갈하게 하였다.
한결같이 부모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고 그 밖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전후로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7일 동안이나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으니, 형님 수재공(秀才公) 이기직(李基稷)과 효행이 막상 막하여서 사람들이 대련(大連)과 소련(小連)이라 칭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애통해하여 처음 돌아가셨을 때처럼 슬퍼하였으니, 길 가던 사람들이 듣고서 콧마루가 시큰해졌다고 한다.
만력(萬曆) 을유년(1585, 선조 18)에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宣祖)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효렴(孝廉)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예조에서 선생을 아뢰어 1년 동안에 세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이조에서 또 선생이 순수한 덕과 지극한 효성을 지녔다고 천거하여 특별히 주부에 제수하고 얼마 뒤에 또 청산현감(靑山縣監)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사양하고 물러남으로써 감히 천거를 감당하지 못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겨울에 무주(茂朱)에 부임하고, 기축년(1589)에 송화(松禾)에 부임하였는데, 이는 어버이를 위해 뜻을 굽힌 것이었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서남(西南)의 산골 마을인데, 선생이 이곳에 부임해서는 백성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먼저 향교를 찾아가 유생들에게 읍(揖)하고 나아갔다.
거칠고 좋지 못한 제기(祭器)는 정결하고 좋은 그릇으로 바꾸었고, 좀이 슨 제복(祭服)은 새로 마련하였으며, 불결하고 품식에 맞지 않는 술잔과 국자는 모두 정결하고 올바른 것으로 바꾸었다. 또 향교의 유생 중에서 조금 총명한 자를 뽑아 석채례(釋菜禮)의 예법을 가르치고 이들과 함께 강독하면서 효제(孝悌)의 도를 가르치고, 또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니 보고 들은 온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심지어 백성들의 혼인과 장례를 자신의 일보다 더 급하게 여겼다.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옥사를 처리하는 것이 간략하면서도 명확하였으니, 군자들이 “태구(太丘)의 정사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경인년(1590)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에 한성부 판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도성이 막 병란에 휩싸이자 도민(都民)들이 피난하여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갔는데, 굶주림으로 울부짖는 백성들을 선생이 다방면으로 진휼하여 살린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계사년(1593)에 정랑으로 승진하고, 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능의 도감 낭청(都監郎廳)을 겸하였다. 일을 끝마치고 해주(海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문안하였다.
겨울에 어가를 따라 환도하여 호조 정랑으로 개차되어 군향(軍餉)을 겸하여 관장하고 또 비변사 낭관을 겸하니, 호조판서 권징(權徵) 공이 선생을 큰 그릇으로 여겨 모든 일을 반드시 자문하였다. 이때 군문(軍門)이 우리나라에 이르고 군량을 운반하는 요동의 선박이 용산(龍山)에 도착하였는데, 군문이 군량을 내줄 것을 재촉하였다.
호조에선 선생이 아니면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선생이 곧바로 군문을 만나 거느리고 온 대오의 수를 먼저 알아낸 다음 셈대를 쓰지 않고 암산으로 3만 섬을 마당에 내어놓고 대오를 호명하여 차례대로 나누어주었는데, 잠깐 사이에 일을 끝냈다. 이로부터 비변사의 중요한 일은 선생을 거치지 않고는 시행되지 않았다. 12월에 덕천군수(德川郡守)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594)에 정부인(鄭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병신년(1596)에 탈상하고 청풍군수(淸風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이 이미 모의(毛義)의 기쁨은 없었으나 어려운 시국이라 감히 물러나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 9월에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청풍(淸風)과 제천(堤川)에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들로 하여금 양식을 싸고 갑옷을 입은 채로 대기하게 하였고, 관찰사는 또 격문을 띄워 두 고을의 군대를 멈추도록 하였는데, 실제로는 허위 경보였다.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찬획사가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성을 내어 군영에 격문을 띄워 선생을 욕보였는데, 선생은 노한 기색을 조금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난이 그치기를 천천히 기다렸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서호(西湖)로 돌아가 집을 짓고 살면서 성내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벼슬을 제수하여 부른 적이 세 번에 이르고 일곱 번에 이르러도 응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체 높은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용퇴(勇退)를 찬양하여 전담성(錢淡成)에 비유하니, 그때 선생의 나이 40세였다.
신축년(1601)과 을사년(1605) 사이에 선조(宣祖)께서 유사에게 청렴하고 신중하며 덕과 행실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도록 명하자 의정부에서 선생을 천거하니, 특별히 자급을 올려주고 사도시 정(司導寺正)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여 장령으로 세 번 불렀으나 선생이 네 번 간절히 사양하고 선유봉(仙遊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경술년(1610)에 선생의 굳은 절개를 성상께 말한 조정의 신하가 있었는데, 당상관에 선발된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선생은 더욱 나아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사년(1617)에 소인배가 광해군의 뜻을 좇아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였다. 무오년(1618) 겨울에 선유봉에서 식솔을 모두 데리고 나와 김포(金浦)에 들어가 살며 ‘삼강(三綱)이 무너졌다’는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장남 돈오(惇五)도 벼슬을 그만두었으니, 선생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선생은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 강호(江湖)에 깊이 은거한 뒤로 더욱 입을 다물어 친구를 만나도 문안하는 말 외에는 한 마디도 시사(時事)를 언급하지 않았고 밤이면 천문과 지리를 살피며 탄식할 뿐이었다. 이웃 사람들도 선생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으나, 마을의 사나운 젊은이 중에 선생에게 감화되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임술년(1622) 봄에 선생께서 병드셨는데, 위독해지기 전에 아들들에게 글을 써서 보이셨다. “형님이 임종하실 때에 중용의 도를 지키도록 간절하게 말씀하셨으니, 내가 일생 동안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비록 내 힘이 위육(位育)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심신(心身)에 징험해 보면 돌아가신 형님의 당부를 저버린 것이 거의 없다. 내가 이제 백옥(伯玉)의 지비지년(知非之年)이 지났으니,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 자연의 구물(舊物)로 돌아갈 뿐이다.”
마침내 한식(寒食)에 선영에 가서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서호(西湖=오늘날 서울 마포구 절두산) 옛집으로 돌아가 사당에 배알하고 선영에서처럼 하직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니, 천계(天啓) 2년(1622) 9월 24일이었다.
선생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13)에 태어나 천계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5세였다. 그해 10월 28일 모갑(某甲)에 적성현(積城縣) 서쪽 수정산(水晶山) 술향(戌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생이 직접 잡은 묏자리였다.
처음 초상 치를 때부터 반궤(返机)할 때까지 사방에서 선생의 죽음을 듣고서 처사들은 집에서 조문하였고, 알고 지내던 어진 사대부들은 의복과 물품을 보내고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하였다.
아! 선생의 도는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었으니,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려 안팎으로 각기 그 도리를 지극히 다하며 한순간도 변치 않았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 형제가 서로 전해가며 권면한 것이 다름 아닌 중용의 도였으니, 부지런히 덕을 닦아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은 것이 어떠하겠는가.
선생께서는 예학(禮學)에 더욱 신중하여 관혼상제에는 반드시 《의례(儀禮)》를 따르고 사마씨(司馬氏 사마광(司馬光))의 《가례(家禮)》를 참고하였다. 재산을 나눌 때에는 한결같이 설맹상(薛孟嘗)처럼 하였으니, 평소에 항상 외물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을 두렵게 여겼기에 지키는 바가 그러했던 것이다.
선생은 상투 틀 나이 때부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틈틈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력(律曆). 병기(兵機)를 익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선생이 이 세상 백성들에게 뜻을 두지 않은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선생처럼 재주와 학식을 지닌 분이 끝내 그 뜻을 접고서 오직 제 몸을 선하게 하는데 그쳤으니, 어찌 시대를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선생이 삼청동(三淸洞)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살면서 이로 인해 연봉(蓮峯)이라 자호(自號)하였으니, 속세 밖으로 벗어나려는 뜻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만년에는 그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책에 마음을 노닐고 / 游心黃卷
문밖을 보지 않으며 / 不看戶外
담담하게 하는 일 없이 / 澹泊無爲
속세를 벗어났네 / 脫略埃塵
끼니 자주 떨어져도 / 簞瓢屢空
즐거워 근심을 잊으며 / 樂而忘憂
자연의 조화에 따라 죽어서 / 乘化歸盡
맑은 기풍 만고에 전하리라 / 淸風萬古
이것은 선생이 스스로 진심을 표현한 것이다.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이 일찍이 선생에 대해 논하기를, “이모(李某)는 명도(明道정호(程顥)를 잘 배운 자이다.”하였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도, “공조(公造)는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고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을 이루었다.”하였으니, 선생을 아는 이들은 제대로 알고서 한 말이라 여겼다.
그런데 선생은 일찍이 스스로 서유자(徐孺子)와 도원량(陶元亮)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약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철인(哲人)이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서 한 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말을 바꿀 수 없을 듯하다. 천계(天啓) 3년 계해년(1623, 인조 1)에 연신(筵臣) 정경세(鄭經世)의 청으로 선생을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하였다.
계유년(1633)에 향교동(鄕校洞)의 선비들이 선생의 지극한 행실을 기록하여 예조에 올리자, 임금이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리고 ‘효자삼세(孝子三世)’라 사액(賜額)하였으니, 아! 옛날에 없던 일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지평 시(時)의 손녀이자 참봉 진(禛)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지낸 돈오(惇五)이다. 후취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철(鐵)의 따님인데,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명신(名臣) 증 참판 목(穆)의 증손녀이다.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돈서(惇敍). 감찰 돈실(惇實). 병조정랑 돈림(惇臨)이고, 딸은 대군사부(大君師傅) 조수항(趙壽恒)에게 출가하였다.
돈오는 군수 김태국(金泰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 때 부부가 함께 죽었는데, 좌승지에 추증되고 부역을 면제받고 열녀문을 하사받았다. 슬하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후수(后洙)ㆍ현감 후백(后白)ㆍ후면(后勉)ㆍ진사 후성(后晟)이고, 딸은 나후삼(羅后三)에게 출가하였다.
돈서는 승지 이정혐(李廷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후강(后絳). 후방(后昉). 진사 후항(后沆). 후잠(后潛)이고, 딸은 이지오(李枝梧)에게 출가하였다. 돈실은 사인(士人) 이수인(李秀寅)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는데, 아들은 후번(后藩)이고, 딸 둘은 허시(許翨)와 박명원(朴明遠)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돈림은 처음에 판부사 조경(趙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생원 후정(后定), 후평(后平), 후창(后昌)이며, 딸은 이사성(李師聖)에게 출가하였다. 다시 증 참의 이역(李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조수항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람으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양(瀁). 항(沆). 황(況)이며, 딸은 구봉양(具鳳陽)에게 출가하였다. 사손(嗣孫) 후수(后洙)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후면의 아들 상하(相夏)를 후사로 삼아 선생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내외의 증ㆍ현손이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성스런 성품에 / 惟孝性也
학문으로 더욱 창성하였고 / 而學以愈昌
심오한 학문에 / 惟學靜也
그 강직함 한결같았네 / 而其剛有常
벼슬할 때나 은거할 때나 / 爲吏爲隱兮
깨끗이 나아가고 물러났으니 / 潔以行藏
굳이 깊은 산림에 들어가야 / 何必入深林兮
마음속이 시원하리오 / 肝肺乃涼
백련봉 홀로 빼어나고 / 白蓮峯兮獨秀
서호는 길이 흐른다네 / 西湖水兮流長
선생이 시종 그 사이에서 소요하였으니 / 先生始終婆娑其間兮
한나라 유도에 짝하여 역사에 남으리라 / 可以配漢之有道汗靑之香
[주해]
[주01] 연봉 …… 묘갈 : 이 글은 이기설(李基卨, 1556~1622)에 대한 묘갈이다. 이기설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
봉(蓮峰)이다.
[주02] 건이(建夷) : 남만주(南滿洲) 지역의 건주(建州)에 살던 여진족을 말한다.
[주03] 영응선생(永膺先生) : 영응은 연안(延安)으로 이지남(李至男)의 본관이다.
[주04] 한결같이 …… 봉양하고 : 어버이의 뜻을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그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
를 밥상에 올렸으며, 상을 치울 때 증석에게 “누구에게 주시겠습니까?”라고 여쭈고, 증석이 “남은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반드
시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대해 맹자가 뜻을 봉양한 것이라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05] 대련(大連)과 소련(小連) :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은 거상(居喪)을 잘하였으니, 3일 동안 태만하지 않았으며,
3개월 동안 해이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근심하였다.”라고 하였다.
[주06] 석채례(釋菜禮) : 매년 2월과 8월의 첫 번째 정일(丁日)에 성균관은 문묘(文廟)에서, 각 지방의 향교는 대성전(大成殿)에서 공자
와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된 선현들에게 올리는 제향이다.
[주07] 태구(太丘) : 후한(後漢)의 진식(陳寔, 104~187)을 말한다. 환제(桓帝) 때에 태구의 장에 제수되었는데, 송사를 공정히 판정하였
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주08] 모의(毛義)의 기쁨 : 부모를 위해 벼슬하는 기쁨을 말한다, 후한(後漢) 사람 모의는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였는데, 수령으
로 삼는다는 격서가 오자 매우 기뻐하며 벼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효렴(孝廉)
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제야 사람들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 어머니를 위해서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39 劉平列傳》
[주09] 전담성(錢淡成) : 담성(淡成)은 전약수(錢若水, 960~1003)의 자인데, 담성(澹成)이라고도 한다. 전약수는 송대(宋代)의 명신으
로 40대 초반에 요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고 칭송을 받았다.
《宋名臣言行錄 前集 卷2 錢若水》
[주10] 위육(位育)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
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주11] 백옥(伯玉)의 지비지년(知非之年) : 나이 50세를 일컫는 말이다. 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거원(蘧瑗)의 자이다. “백옥
은 나이 50세에 49년의 잘못을 알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集注 憲問》
[주12] 재산을 …… 하였으니 : 맹상(孟嘗)은 후한(後漢) 설포(薛包)의 자이다.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은 못쓰게 된 것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형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주13] 서유자(徐孺子) : 유자는 서치(徐穉)의 자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먹고 살면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
나 나아가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주14] 도원량(陶元亮) : 원량은 도잠(陶潛)의 자이다.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벼슬을 떠
나 전원 생활을 즐겼다.
[주15] 한나라 유도(有道) : 유도는 후한(後漢) 때의 곽태(郭泰)의 호이다. 영제(靈帝制)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외척과 환관들이 득세하
였는데, 곽태는 언행을 신중히 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면했으며 향리에 은거하여 천여 명의 제자들을 길렀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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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蓮峯李先生墓碣。
先生諱基卨, 字公造, 姓李, 延安人。延之李, 有諱襲洪始大著, 仕麗官太子詹事, 其后用儒術隆顯者累世。有諱仁忠, 秉直潔淸, 文武隨用, 征建夷有功, 官卒通政大夫, 承政院左副承旨。生諱弼, 贈吏曹參議。生諱繼長, 贈吏曹參判, 於公爲曾祖。居漏屋, 守道不移。生諱彥忱, 當乙巳元衡, 芑, 順朋三奸煽禍, 公以掌令擊奸不勝, 謫死舒川。是生諱至男, 公之考也。少從金河西學, 篤實而辨於文, 學者稱永膺先生。聘乙巳名臣承旨鄭源女, 嘉靖戊午生先生。先生胚胎前光, 未毀齔, 莊重卽見, 不勞父母敎, 防表暗合《小學》。年十四, 慨然有求道志, 聞朴守庵枝華得花潭學, 執雉造焉, 守庵吃吃稱之。先生自是委己理窟, 難疑答問, 洞見穾奧。孝友天得也, 愉愉翼翼, 不忍去親側一日。朝暮寒暑, 必謹溫淸: 匙箸進養, 必極滫瀡: 賓客酒食, 必豐必潔。一以養志, 不顧其它。居前後艱, 水漿不入口者七日, 與伯秀才公, 至行相上下, 人稱大, 小連。及其亡人琴之痛, 久若初歿, 行路聞而酸鼻云。歲萬曆乙酉, 昭敬大王命有司擧孝廉, 儀曹以先生聞, 一歲除齋郞者三, 不就。明年, 天官又薦先生以純德, 至孝, 特除注簿, 蛾又除靑山縣監, 不就。蓋示執退讓不敢當薦目也。冬赴茂朱, 己丑赴松禾, 爲親屈也。俱西南嵒邑也, 先生涖之, 不鄙夷其民, 首謁鄕校, 揖校儒而進之。籩豆簠簋之觕樸窊陋者, 治使靜嘉: 祭服之矯蠹者新之: 尊杓之不潔而不中品式者, 一使端正。又選校中生稍慧者, 敎之釋菜禮禮數, 又與之講讀, 告之以孝悌之道。又行鄕飮酒, 養老禮, 一境觀聽悅喜。至如民之嫁娶葬送, 周急甚己之私。勸農桑聽獄訟, 約而且明。君子以爲 :“大丘之政, 蔑以加矣”。 庚寅, 除水曹員外。壬辰, 拜漢城判官。時京都新刳於兵, 都民離鋒鏑者擧入江都, 枵腹嗷嗷。先生賑之有方, 賴以起死者以千計。癸巳, 陞正郞, 又兼宣, 靖兩陵都監郞廳。事訖,奔問行在于海州。冬, 隨駕還都, 改版曹正郞,兼管軍餉, 又兼備局郞。判度支權公徵大器先生, 事必咨焉。時軍門臨我,遼船運餉到龍山, 軍門趣放軍餉, 度支謂“非先生莫之治也”。先生卽見軍門, 先得將領隊伍數, 不用吏鼓算用心計, 出三萬石列諸庭, 呼隊伍號名, 次第分之, 不淹刻事畢。由是備局事之肯綮者, 不經先生不行。十二月, 拜德川守。甲午, 丁鄭夫人憂。丙申, 制除, 拜淸風郡守, 先生旣無毛義之喜, 而特以時艱, 不敢奉身退也。丁酉九月, 贊畫使李時發檄淸, 堤, 裹糧坐甲, 臬臣又檄止兩邑兵, 其實虛警也。依違間, 贊畫恚不從令, 檄致和門以僇之, 先生無幾微慍色見顏面。徐待難已, 謝病歸西湖,卜築居焉, 不迹城市, 不與人往還, 雖有徵辟至三至七, 不應。一時薦紳先生咸高先生勇退, 譬之錢淡成, 先生時年四十也。辛丑, 乙巳間, 宣廟荐命有司, 選廉謹, 德行, 政府以先生應旨, 特命超資拜司導正, 不就。戊申, 光海嗣位, 三以掌令徵, 先生四陳危懇, 退居仙遊峯下。庚戌, 廷臣有以苦節言于上者, 擢緋由是云, 先生尤不屑就焉。丁巳, 群小從臾光海, 倡廢母論。戊午冬, 先生自仙遊峯擧家入金浦, 三綱滅矣之歎, 自不能止也。家督惇五亦解官, 從先生敎也。先生旣祛亂邦, 沈冥湖海, 益務括囊, 雖逢親舊, 寒暄外無一言及時事, 夜則仰觀俯察, 喑嗚而已。隣人亦罕見其面, 然里中暴桀子弟薰爲孝悌者非一二云。壬戌春, 先生疾, 未病, 書示諸子曰:“伯氏臨歿, 言中庸之道, 勤懇不已。吾一生服膺, 縱吾力不及位育地位, 驗之身心, 庶幾母負亡兄之託。吾今過伯玉知非之年, 吾可盡吾事親之道, 而還造化舊物耳”。 乃於冷節, 往辭先墓, 乘舟溯還西湖舊廬, 謁廟如墓禮。居無何易簀, 卽天啓二年九月二十四日也。距其生嘉靖戊午, 至天啓壬戌, 享年六十五。用其年十月二十八日某甲, 葬于積城縣西水晶山向戌原, 先生所自卜也。自始喪至返机也, 四方聞者, 處士則相弔於家, 所相識賢士大夫則歸衣服貨財, 作輓誄哭弔。於乎! 先生之道, 本於孝悌。故入而事親友兄, 出而事君治民, 理事各臻其極, 無頃刻變節。至如死生之際, 弟兄相傳相勖者, 舍中庸無適, 則其澡德灼勤至死不解者, 何如也先生於禮學, 尤兢兢焉, 冠昏喪祭, 必用《儀禮》, 參以司馬氏家禮。及其析產, 壹如薛孟嘗之爲, 蓋平居恒恐一物之汚人也, 所守然也。先生自結髮, 淹貫經史, 以其暇肆力於天文, 地理、律曆, 兵機, 靡不嚌其胾, 是果無意於斯世生民者耶, 以先生之才之學, 終卷而懷, 唯獨善其身, 安得不歸譏於時, 初先生居三淸洞白蓮峯下, 仍自號蓮峯, 亭亭物表之志, 始於是矣。晩年題其壁曰: “游心黃卷, 不看戶外。澹泊無爲, 脫略埃塵。簞瓢屢空, 樂而忘憂。乘化歸盡, 淸風萬古。” 此則先生自寫其眞語也。韓久庵鳴吉嘗論先生曰: “李某, 善學明道者”。 旅軒張先生亦曰: “公造, 良金美玉之質, 堅苦刻厲之學”。 識者以爲知言。乃先生則嘗以徐孺子,陶元亮自期云,庸非喆人自知明之語也, 吾恐不可改也已。天啓三年癸亥, 筵臣鄭經世建請, 贈先生嘉善大夫, 吏曹參判。癸酉,鄕校洞諸賢表白先生至行, 狀禮曹, 上特命旌閭, 額曰“孝子三世”。嗚呼!古未嘗有也。前夫人陽川許氏, 持平時之孫, 參奉禛之女, 有一男曰惇五, 廣興守。後夫人全州李氏, 承旨鐵之女, 戊午名臣贈參判穆之曾孫。有三男, 一女, 曰惇敍, 曰惇實監察, 曰惇臨兵曹正郞, 女適大君師傅趙壽恒。惇五娶郡守金泰國女, 丁丑難, 夫妻俱死之, 贈左承旨, 家復戶, 烈女旌門。生四男, 一女, 后洙, 后白縣監, 后勉, 后晟進士, 女羅后三。惇敍娶承旨李廷馦女, 生四男, 一女, 后絳, 后昉, 后沆進士, 后潛, 女李枝梧。惇實娶士人李秀寅女, 生一男, 四女, 后藩, 女許翅, 朴明遠, 餘幼。惇臨前娶判府事趙絅女, 生三男, 一女, 后定生員, 后平, 后昌, 女李師聖, 後娶贈參議李㴒女, 生男二, 女一, 幼。趙壽恒有文行, 生三男, 一女, 瀁, 沅, 況, 女具鳳陽。承孫后洙無子, 子后勉子相夏, 主先生祀。內外曾玄多不載。銘曰:
惟孝性也, 而學以愈昌。惟學靜也, 而其剛有常。爲吏爲隱兮, 潔以行藏。何必入深林兮肝肺乃涼。白蓮峯兮獨秀, 西湖水兮流長。
先生始終婆娑其間兮, 可以配漢之有道汗靑之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