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내 공주말 디딜방아 뱅이놀이 - 일시 : 2019.7.6 17:00 장소 : 목척교 수변공원 행사주관 : 동구문화원 연출책임 : 김인승 위원장 공주말은 대전 중심가에서 약8~9㎞ 정도 떨어진 금산방면의 국사봉 아래에 위치한 변두리 마을로,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에 속한다. 공주말이란 지명은 머언 옛날에 삼괴동을 이루던 마을 중 대전천을 경계로 건너편은 공주부에 속했다고 하며 공주의 끝에 있는 마을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한다. 공주부는 조선 말기인 1895년 5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지방행정구역.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을 계기로 지방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1895년 5월 26일에 반포된 칙령 제98호에 따라 기존의 8도(八道)가 폐지되고 23부(府)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충청도는 공주부와 홍주부(洪州府)·충주부(忠州府)의 3부로 분할되었다. 공주부는 공주군을 부청 소재지로 하여 연기군·은진군·연산군·석성군·부여군·노성군·옥천군·문의군·회덕군·진잠군·평택군·보은군·회인군·영동군·청산군·황간군·청주군·전의군·목천군·천안군·직산군·안성군·진위군·양성군·진산군·금산군 등 총 27개 군을 관할하였고, 부의 장관으로는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이는 종전의 8도제가 지나치게 광역화한 것을 보완하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이어온 전통을 무시한 인위적 분할이었던 탓에 운영상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 결과 이듬해 8월에 칙령 제36호에 따라 1년여 만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었고, 공주부는 홍주부와 통합하여 충청남도 관할이 되었다. 대전지역은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쳤으며,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목(公州牧)에 편입되었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회덕현(懷德縣)과 진잠현(鎭岑縣)으로 분리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회덕현 ·진잠현 및 공주군 일부를 편입하여 회덕군이라 하였으나, 국권피탈 뒤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전군(大田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2년 충남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진 후부터 급속도로 발전, 1935년 대전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이 창설되었다. 1963년 유천면(柳川面) 일원과 회덕면의 3개리(대화리 ·오정리 ·용전리), 산내면(山內面)의 4개리(옥계리 ·삼정리 ·호동리 ·가오리)가 대전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북면(北面)과 유성면(儒城面)이 신탄진읍과 유성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그러나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유성읍 일원과 탄동면(炭洞面)의 8개리(신성리 ·아정리 ·도룡리 ·장동리 ·내동리 ·화암리 ·덕진리 ·하기리), 구즉면(九則面)의 4개리(원촌리 ·문지리 ·전민리 및 용산리 일부), 진잠면의 5개리(내동리 ·교촌리 ·대정리 ·용계리 ·학하리), 기성면(杞城面)의 3개리(관유리 ·도안리 ·가수원리) 등지가 대전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회덕면 일원이 동구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광역시에 편입되었다. 공주말 디딜방아 뱅이놀이는 대전 동구 삼괴동에 속한 마을인 공주말에서 행해지던 디딜방아 뱅이는 돌림병을 물리치는 고유의 민속 의식놀이로 1946년을 끝으로 중단됐던 것을 1996년 처음 발굴하여 몇 차례 시연을 거쳐 1999년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대전시 대표로 출전 고장의 명예를 드높인 바 있다.
이후 산내동 지역에서는 산내공주말 디딜방아 뱅이 전승을 위해 발족한 보존회와 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2000년부터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목신제와 거리제를 지내며 재연행사를 갖고 있으며 산내공주말 디딜방아 뱅이는 ▲목신제 ▲디딜방아 찧기 ▲역질 창궐 ▲디딜방아 훔치기 ▲디딜방아 뱅이 ▲대동 마을굿 등 6개의 마당으로 구성됐다. 공연의 핵심인 디딜방아 뱅이는 지난날 돌림병이 창궐했을 때 이웃마을의 디딜방아를 몰래 훔쳐와서 거꾸로 세워놓고 질병이 들어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액막이 의식이다.
디딜방아뱅이의 과정은 방아를 훔치고자 하는 마을에 도착하면 미리 보아 둔 디딜방아간에 몰래 들어가서 방아를 떼고 일부는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훔친다. 훔친 방아는 일단 동구 밖으로 벗어나면 그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도 무방하며, 방아를 멘 아낙네들은 한바탕 빗장을 질러대며 큰 소리로 떠들어 댄다. 훔친 방아를 메고 돌아오는 길에는 선소리꾼이 앞장서서 상여소리를 구성지게 매기고 방아를 멘 아낙네들은 소리를 받아 넘긴다.
동구 밖 거리에 이르면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이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워 Y자로 벌려 방아다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세워 미리 꼬아둔 왼새끼로 금줄을 친다. 방아다리에는 달거리를 한 여인의 속곳을 입힌다. 방아 밑에는 집집마다 가져온 부엌칼을 촘촘하게 꽂아두고 주위에는 황토나 팥죽을 뿌린다.
이렇게 디딜방아를 훔쳐와 한바탕 뱅이를 하고 나면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역질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들어온 돌림병도 곧장 물러간다고 믿었다. 괴질이 물러갈 즈음에는 훔쳐온 디딜방아와 솥뚜껑은 잃어버린 마을에서 찾아갔다. 본 행사전에 놀이마당이 벌어지며 흥겹게 어우러지며 의식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동구 문화원장님의 정성이 가득담긴 소지로 “산내공주말디딜방아뱅이” 향토문화 재현행사는 성대하게 끝을 맺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행사전체의 여섯 마당이 구분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관객이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하고 알게 해 주었으면 했다. 또 하나의 옥에 티라고 생각 한다면 연출에 참여하는 모든 연출자들이 흰 장갑을 쓰지 않았으면 훨씬 더 옛 문화의 재현에 근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향토문화의 귀중함을 알게 되어 행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