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盡甘來의 축복은 있다.
월촌 정 상문
고등학교 졸업후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입학학게 된 원인은 4살 때부터 포도막염으로 1 미터 앞의 작은 물체 분간이 어렵고 2살 때 잘 못먹은 양잿물로 혀 놀림이 어눌하여 남이 듣기엔 발음이 불확실할 정도의 약장애를 가지고 있어 교회에 나간지 3년째 되었 을 때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 김제지방에 부흥회차 오셨을 때 그분의 말씀대로 나는 눈과 입 등 부실한 몸에 손을 대고 기도를 받았을 때 그 안수기도를 통해서 내 눈을 뜨고 말도 어느 정도 분별성 있게 해주셨다. 이때 나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했다. 내 눈과 입을 열게해주신다면 목사가 되겠노라고 말이다. 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고 어떤 장애인을 위한 일을 해야할까였다. 신학교 입학 후 기도 중 과거에 나는 맹인에 가깝고 언어조차 어려운 여러 가지 장애자였으니 장애자 목회에 헌신해 보리라 다짐하고 시내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또 서원 기도도 했지만 어느날 버스 안에서 차비가 일어난 사건을 목도헸다. 이 때 단돈 1원이 부족해 버스 안내양과 입씨름 광경이 시야를 집중시켜 준 것이 오늘의 장애자, 그중에 더욱 농아 자들을 위해 선교할 계기가 되었다.
당시는 서울 시내 버스비가 3원인데 단돈 1원이 부족해 입씨름하는 그 안내양을 이해는 하지만 이런 “병신 같은 놈, 돈이 없으면 타지 말지, 병신 주제에 버스는 왜 타고 다녀” 라면 서 욕설을 퍼부을 때, 어느 승객 한 사람 농아인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사태가 내 가슴을 울먹이게 했다. 지금 같으면 장애인에게 표독스런 말을 하면 언어 폭행이지만 당시는 당연한 듯 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는 벙어리를 위하여 입을 열라”(잠언 31:8)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 땅에 수 만교회가 있으나 진정 이들을 위한 교회는 몇 곳이며, 진정 이들을 위한 목회자와 교회가 몇 곳이나 있을 뿐이었다. 마침 학교에 특강으로 마침 신학교에 手語 시간이 있어 수어(손으로 하는 손짓 언어) 배우며 농아교회에 나가는 중 인천 농아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조그만 2층을 얻어 예배 장소를 정하고 마침 인천 농아 극단 책임자인 정주섭 씨와 함께 개척하게 된 것이다. 수화 (手語. 手話)를 가르치며 부지런히 동분서주한 결과 30여 명의 농아 자들이 모였다. 당시 농아선교회 총회장이신 최성만 목사님의 사랑과 배려를 잊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천국에 계시지만 그분은 분명 한국 농아 자들의 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서툰 수화로 특유성격의 소유자인 이들 앞에서의 목회는 용이한 것이 아니였다.
내가 방 한 칸을 빌려 쓰고 있던 정 집사네 부부가 10여일 간 출타를 했었던 어느 수요일 밤에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그 집 대문을 잠그고 교회로 갔다가 평소처럼 밤 11시경 숙소에 돌아왔다. 다음날, 그후 십여일 후에 집주인 정집사가 돌아와 난데없이 도둑놈이라며 신학생인 전도사인 내 멱살을 쥐어 잡고 난리를 쳤다. 어안이 벙벙했으나 내용인즉 언제인지 모르나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간 사이에 도둑이 들어 아무도 없음을 알고는 정 씨네 안방에 들어와 값진 폐물들을 훔쳐 간 것이다.
그러나 집주인인 정 집사로서는 전도사인 내가 자기 집을 지켰으니 내게 책임이 있다는 속셈이겠으나 난생처음 듣는 ‘도둑놈’이란 한마디가 너무나 기막힌 말이었기에 심장이 찢어지고 슬픔을 가눌 길 없었다. 오랜 시간 실랑이를 벌였으나 나의 결백은 관철되지 않았으며 삽시간에 교회에서는 도둑이란 오명이 술렁거렸다. 아니 전국 농아인들 사이에서 도둑 누명을 쓴체 방학도 끝나고 학교 기숙사에 돌아와 그후 오명을 말끔히 씻지 못하고 氣가 차고 억울함을 안은 채 인천 농아교회를 나와 기숙사에서 살면서 신학생 전도사로서 군대에 입대하기까지 상처받은 장애인 목회 중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신학생 몸이지만 호되게 첫 신입 목회 인사를 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후 약시현상과 언어 불편도 해소되는 축복을 받은 나는 1965년 11월 24일 육군에 입대하여 무사히 2년 반의 복무를 마치고 학창시절 장애자들에게 받은 상처를 생각하며 일반 정상인(비장애인) 교회에 부임해 목회에 전념하리라 생각하고 깊은 산속에 허술하게 지어진 교회에 부임했던 그때가 1969년 10월이었다.
첩첩산중인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죽전 마을이다. 조그마한 교회에 부임을 했다. 일백여 호도 안되는 산중마을에 띠엄 띄엄 산재된 부락들 중 한지역에 교회가 우뚝 서 있었다. 성도는 10여명, 그나마 할머니와 병자와 정신이상자 한분과 집사 4명이 있었다. 교회는 건축되어 있으나 내부 수리는 안되었으며 사택 역시 방만 있을 뿐 현관이나 문들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우물은 동네 밖에 있어 전도사인 내가 물을 길어와야 했는데 사찰(절 卍)은 2km까지 아스팔트로 덮혀 있으나 교회는 주민의 안중에도 없는 불필요한 건물로 인식되어 있었다.
부임하니 쌀 1말과 찰조 1말을 趙 집사가 가져오셨다. 처음엔 찰조 까지 갖고 오기에 별미로 주시는구나. 정말 인정 많은 곳이려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시집갈 때까지 쌀 1말 먹고 시집갈 정도로 빈농가로서 쌀밥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 시장에 팔고 거의 산나물 등으로 끼니를 이으며 조밥과 산나물이 주식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한달 지난 후에는 쌀한말 대신 매조(수수) 한말 정도만 갖다 주는 것 아닐까. 우리 젊은 부부는 많이 울었다. 이때 우리 부부는 2살 정도 사내아이 하나를 두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맵 조밥과 쓴 갓김치로 보내야 되는지 솔직히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하루 이틀 계속 푸념만은 할 수 없어서 기도를 했고, 어떻게 해야 동네에서 방치된 교회에 덕을 세울까 하는 생각만 했다.
하나님! 제가 주민들에게 신용을 얻을 길이 무엇이옵니까? 동네에서 화재가 나든지 초상이 나든지 뭔가 동네 속에서 전도사의 활약상을 보여 주어 필요한 사람으로 알게 하소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우스운 기도였다.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실리 없는데 생각 밖에 기적이 일어났으니 동네 한집이 화제가 일어 난 것이다. 부임 한달 만에 동네에 불이 난 것이다. 양동이에 물을 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지붕으로 올라갔다. 서로들 몸조심하며 썩은 석가래 잘못 밟으면 끊어져 부상 당하기 쉬운 일이리 서로 강 건너 불난 집 구경만 하는 처지였다. 심지어 동네 장정들마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불기운이 싸인 지붕에 올라가 불 있는 곳마다 물을 퍼부었다.
얼마 후 불은 꺼지고 내 얼굴은 꼴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눈썹은 타버렸다. 피곤에 지쳐 온몸이 쑤시고 아프며 불에 댄 곳이 화끈 화끈거렸다.
푸념 기도일까? 주여! 제가 이런 험한 일을 해야 합니까? 푸념 섞인 기도를 하면서도 기쁘기도 하고 허전한 맘이 들었다. 얼마쯤 누워있노라니 집주인이 찾아왔다.
전도사님 계셔요? 오늘 참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 전도사님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으면 전소됐을 것인데 참 다행이었어요.
이곳에 전입해 온 지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듣는 ‘전도사님’ 소리였다.
다음날부터 주민들의 인사 태도가 달라졌고 전도의 효과도 크게 나타났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제2차 전도계획을 구상했다. 중학교를 못가는 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시작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없는 마을에 재건 향토 중학을 운영, 청소년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임의적으로 송죽 재건 중학교란 간판을 걸고 주 야간 공부를 시작했다. 송죽이란 죽전리 竹과 송정리 松을 따서 『松竹 재건 중학교』라 불렀다. 물론 법으로는 불법이고 미인가 시설이며 시골 교회당 사택에다 사과 상자를 책상 삼아 공부를 가르쳤다.
처음엔 몇 명 안되었지만 달이 지날수록 10대는 물론 20대 후반까지 49명의 학생들이 야학을 배우러 오는 것은 물론 교회까지 다녀 신자 수도 늘고 이 학생들이 교회의 미화 작업과 사택에까지 관심을 가져 전도사인 내 식생활도 나아져 매조 밥에서 쌀밥을 먹게 되었으며 교회 재정도 부드럽게 되었다. 갑자기 교회가 부자가 된 듯한 인상이었으며 粗밥과 보리밥 대신 쌀밥을 먹게 되는 기적도 잠시 호사다마랄까 49 재건향토 중학생인 신자들이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하건만 나이가 많은 터주대감 집사들은 전도사가 전도는 아니하고 학생들만 감싸고 있다고 힐난했으니 지금 생각 같아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어불성설이 아닐까.
이때 좀 더 참고 잘 설득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나 몇 달 동안 조밥을 먹으며 또한 제직들의 십일조는 고사하고 감사헌금과 성미조차 없는 신앙이었으니 혼신을 다해 봉사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청소년, 학생들에게 정을 쏟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고 대꾸하니 교회가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1961년에 고침을 받은 지 10년 만에 다시 눈이 안보여 혹시나 소경이 되는가 싶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다. 그때 마음속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내가 눈을 고쳐 주고 다른 질병을 고쳐 주면 장애인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마음의 음성을 듣고, 이번 학생들 졸업을 시킨 후에 장애인들을 위한 주님의 사역을 하리라, 힘이 있을 동안 장애인의 진실한 목자가 되리라고 다짐하고 무사히 이들을 1년 단기간이지만 졸업장을 주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몇몇 사람들은 전화도 오고 선물도 보내오고 내 운영하는 평생교육 기관에서 문학사도 취득하고 심지어 대전에서 큰 제과업으로 성공한 박 사장은 스승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빵도 보내오곤 한다.
1971년 여름 전주에 내려가 조그마한 홀을 얻어 1971.9.12. 전주 에바다 농아교회를 개척하고 이어 김제YMCA 농아교회, 익산농아교회를 설립하여 열심히 手語를 통해 농아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다른 선교를 비젼을 주시어 장애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려주신 듯 하다. 후에 비장애인교회와 신학원을 설립하려 1989.10월 경기도 성남에 이사하여 교육사업을 병행한 복시 선교사업의 새장을 여는 축복을 받았다. 물론 개척은 쉬운 것은 아니다. 피눈물의 각고 끝에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일까 서서히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게 하셨다. 성남에 와서 정부로부터 보육교사교육원을 인가 받아 12년간 3000여 명의 보육교사를 배출했고 무인가 신학원이지만 선교신학원을 경영하면서 어린이 선교원 전도자 3000여 명과 목회자를 양성하고 학점은행인 평생교육과정을 인가받아 수천 명에게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전문학사 문학사를 대학교도 아닌 평생교육원으로 학위를 수여하는 축복을 받았고 특히 이제는 2015년에 정부로부터 장애인 활동지원사 교육원을 인가받아 수만명의 장애인 활동 지원사를 배출하면서 비장애인 (일반인) 수만명에게 일차리 창출의 기회를 얻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 감회로운 것은 2021.9.12. 전주 에바다 교회 설립 50주년 희년을 맞아 초청받아 감사패와 手語로 간단한 축사와 축도를 드리는 영광을 얻었다. 물론 50년전 手語를 다 기억은 할 수 없지만 舊官이 名官이 했던가 그래도 手話 기억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을 받았으니 사람이 어렵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마음만 단단히 갖고 믿음을 잃지 않으면 轉禍爲福이 될 수 있는 축복 받을 것은 만고의 진리라 나는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는 그날까지 장애인의 친구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어설픈 글이지만 소박한 글을 쓰면서 어려움 끝에 분명히 즐거움이 있다는 소신으로 이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