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시청 http://www.osan.go.kr/
서울특별시와 대전광역시의 연결선상에 있으며, 1989년 1월 시로 승격, 화성군(지금의 화성시)에서 분리되었다. 중앙동·대원동·남촌동·신장동·세마동·초평동 등 6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24개). 시청소재지는 성호대로이다. 면적 42.76㎢, 인구 131,377(2006), 인구밀도 3072.4명/㎢(2006).
오산시는 20세기초까지 수원의 초평면·청호면·산성면·문시면 지역이었다. 수원은 삼국시대의 매홀군(買忽郡)인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하고, 995년(성종 14)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했다. 1018년(현종 9)에 수주군(水州郡)이 되어 진위(振威) 등 8현을 속현으로 포함했다.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수주목(水州牧)으로, 1310년(충선왕 2)에 수원부로, 1362년(공민왕 11)에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부로 복구되었다. 조선초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으나, 1526(중종 21)~35년에 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1789년(정조 13)에 팔달산 동쪽으로 수원의 읍치가 이전되고, 1793년(정조 17)에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으며, 1796년에 수원성 축성이 완료되어 수원은 신도시로 변모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수원군, 1896년에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이때 경기도 관찰부가 수원에 위치했으나, 1910년에 서울로 옮겨갔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남양군이 폐지되어 합속되고, 광주군(지금의 광주시)·안산군(지금의 안산시)의 일부가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졌는데, 초평면·청호면·산성면·문시면을 통합한 성호면이 지금의 오산시에 해당한다. 1949년에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성호면도 오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에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에 시로 승격되어 화성군에서 분리되었다
자연환경
시의 서부와 동부에는 높이 200m 이하의 낮은 산지가 있고, 중부는 높이 50m 내외의 구릉지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동부산지는 서부산지보다 낮다. 양산봉(陽山峰:181m)·노적봉(露積峰:160m)·여계산(如鷄山:161m)·필봉(筆峰:145m) 등이 솟아 있으며, 노적봉과 필봉은 화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시의 남동부를 오산천(烏山川)이 장지천(長芝川)과 가장천(佳長川)을 합치면서 남쪽으로 흘러 진위천으로 유입된다. 수원 방면에서 흘러나오는 황구지천(黃口池川)은 북서부에서 화성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오산천과 나란히 남류한다. 이들 하천 양안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연평균기온 12.4℃ 내외, 1월평균기온 -3.2℃ 내외, 8월평균기온 26℃ 내외, 연평균강수량은 1,616.4㎜ 정도로 비가 많다. 구릉지 일부와 산지는 소나무·떡갈나무·참나무 등의 숲으로 덮여 있다.
인구
서울-대전을 잇는 교통축에 해당하는 수도권 주변 도시로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1980년에 4만 4,835명이었던 인구가 시로 승격된 이후 1990년 5만 9,492명, 1999년에는 8만 5,234명으로 늘어나면서 1990~99년에 43.27%의 인구증가율을 기록했다. 가구수도 같은 기간에 1만 5,183가구에서 2만 7,712가구로 82.5%가 늘었다. 2006년 현재 인구는 13만 1,377명, 가구수는 4만 7,265가구로 대폭 증가했다. 인구의 약 70%가 동남부 시가지에 모여 있으며, 아직도 농촌경관이 뚜렷한 서북부의 서랑동·지곶동 및 금암동 등은 상주인구가 적다. 시가지는 오산천 동쪽의 시 동남부에 경부선과 서울-목포를 잇는 국도를 끼고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남쪽 평택시 진위면 방면으로 확대되고 있다. 원동 일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산업과교통
농업과 제조업이 중심 산업이다. 총경지면적 14.84㎢ 가운데 논이 9.23㎢, 밭이 5.61㎢로, 경지율은 34.7%이다(2006). 쌀과 각종 채소류가 주요농산물이며, 특용작물인 인삼이 생산된다. 축산업은 소규모로 행해지나 한우·젖소·닭·산양·토끼·오리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임야는 시 면적의 32.5%를 차지하며, 대추·밤·은행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2006년 현재 204개의 제조업체에 9,117명의 종업원이 있으며, 기계공업·화학공업·제지공업·1차금속공업이 발달했다. 전기·전자공장으로는 LG전자·(주)경성 등이 있으며, 화학공장으로는 P&G·계성제지·피어리스화장품 등이 있다. 그밖에 대성모방·미원모방 등의 큰 공장이 있으며, 제조업체의 대부분이 오산천 주변과 서울-목포를 잇는 국도변에 입지해 있다.
서울-목포 잇는 국도와 경부선이 시의 중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교통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시가지 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오산 인터체인지를 통한 교통량이 많다. 그밖에 남부와 북부에 지방도가 동·서로 가로놓여 인접한 용인시·화성시와의 교통이 편리하다. 서울·수원·천안·대전과는 1시간 이내의 거리로 시외 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고 있으며, 평택과는 하나의 도시 교통권으로 묶여 있다. 도로총길이 231.25km, 도로포장률은 58.6%이다(2006).
유적 유물 관광
국가지정문화재(사적 1)·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1, 기념물 2)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금암동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밖에 수청동·외삼미동에서 고인돌로 추정되는 거석이 발견되었다. 불교문화재로 지곶동의
보적사(寶積寺:또는 洗馬寺)가 있다. 이 사찰은 삼국시대에
독산성(禿山城)을 쌓은 다음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서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산성은 권율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쳤던 전승지로 독산성 및 세마대지(洗馬臺址)가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궐동에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공서린(孔瑞麟)을 기리기 위해 1792년에 세운
궐리사(闕里祠)가 있다. 궐리사에는 1904년 조병식(趙秉式) 등이 그린 〈궐리사성적도 闕里祠聖蹟圖〉(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가 소장되어 있다. 내삼미동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국제연합(UN)군 최초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UN군 초전기념비가 있다.
관광지로는 사적지이기도 한 독산성 및 세마대지가 대표적이며, 원동에서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에 이르는 만기사자연경관로도 전국순례자연보도로서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도로변에는 주말 어린이농장이 있다.
교육과 문화
전통교육기관으로 궐리사가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은 1913년에 오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호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뒤이어 삼미의숙(三美義塾)·광성학원 등이 문을 열었다. 2006년 현재 유치원 25개소,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으며, 1979년 청학동에 세워진 오산대학과 양산동의 한신대학교가 있다.
오산동에 있는
화성문화원은 1964년 개원한 이래 오산시와 화성시의 향토사 연구와 향토사료 발굴·정리에 노력하면서 매년 오산시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후원해 향토문화의 계승·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윷놀이·두레놀이 등이 있는데, 윷놀이는 매년 음력 정월에 오산시장 광장에서 1주일간 계속된다. 내삼미동의 필봉산신제는 부락제를 재현한 민속으로 매년 음력 9월 30일에 행해진다. 주요설화로는 〈독산성과 세마대설화〉·〈방아못과 부처전설〉·〈억억다리와 만리굴전설〉 등이 전해지며, 민요 중에서는 노동요인 〈논매기소리〉와 신앙요인
〈목살경〉이 독특하다. 〈목살경〉은 집안에 환자가 있을 때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잘라다 3명이 마루에 앉아서 베짤 때 쓰는 도투마리를 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2006년 현재 의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 1개소, 병원 1개소, 의원 70개소, 특수병원 1개소, 요양병원 1개소, 치과의원 31개소, 한의원 27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1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노인복지시설 2개소, 여성복지시설 1개소, 정신질환자 요양시설 1개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