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704 (월)
- 6∙25 전쟁 그리고 7∙27 휴전을 뒤돌아보며...
- 역사이야기 (7)
이 이야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잊으면 안 되는 일을, 이제는 점점 잊혀가는
“6∙25 전쟁과 7∙27 휴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올립니다.
저는 그 때 비록 어렸지만,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었기에 아직도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살아서 겪었던 사람들은 이제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올해의 “제61주년 6∙25 기념일”은 비교적 차분하게 이루어졌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신 분들도 이제는 평안을 찾으실 때가 되었지만,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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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가까운 사람이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 보완을 하여 재구성한 것인데, 그는 어느 외국인이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으로서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직접 가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저도 아직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언젠가는 그곳에 들를 계획인데,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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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하자 6∙25, 쳐부수자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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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엔 (U.N. = United Nation = 국제연합-國際聯合)
- 우리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의 사회교과서 맨 앞부분은 유엔에 관한 내용이었다.
- 10/24일을 “UN Day(국제연합일=194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이 조직된 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정했는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공휴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휴일을 폐지하였다.
- 그 때 우리는 시험에 자주 나오는 “미영호캐네프뉴필남...(미국-영국-호주-캐나다-
네덜란드-프랑스-뉴질랜드-필리핀-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열심히 외우며
참전 16개국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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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국
(1) 전투부대를 보내온 나라 : 16개국 - 참전 순서로 나열했음.
미국(육-해-공군), 영국(육-해군), 호주(육-해-공군), 캐나다(육-해-공군),
네덜란드(육-해군), 프랑스(육-해군), 뉴질랜드(육-해군), 필리핀(육군),
남아프리카공화국(공군), 터키(육군), 태국(육-해-공군), 그리스(육-공군),
벨기에(육군), 룩셈부르크(육군), 에티오피아(육군), 콜롬비아(육-해군)
(2) 의료지원단을 보내온 나라 : 5개국
덴마크(병원선), 인도(야전이동병원부대), 이탈리아(적십자병원부대),
노르웨이(이동외과병원부대), 스웨덴(야전병원부대)
(3) 기타 물자지원국 : 19개국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에콰도르, 파라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쿠바,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레바논,
파키스탄, 라이베리아,
(4) 전사자 : 총 17개국의 40,896명
- 전사자가 나온 나라는 위 참전 16개국과 노르웨이의 3명이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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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립국인 스웨덴의 “함마슐드” 제2대 사무총장이 1953년 9월에 콩고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가다가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을 배우고는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무척 훌륭한
나라로 비쳐졌다.
* 함마술드 총장은 당시 냉전시대에 유엔이 권위를 쌓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사람이 했던 다음의 말이 남아있다.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 그리고 또한 1966년 당시 버마(현 미얀마)의 “우 탄트”가 제3대 유엔사무총장으로
재임(1962~1971)하는 것을 보고 버마를 평화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그 후 미얀마는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갑자기 나타났고,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서도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 건국의 아버지의 딸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살고 있는 군사독재국가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 그러나 당시 전쟁으로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서있던 대한민국이 2006년에는
제8대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고 2011년 다시 연임에 성공하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 실제임기는 (2007. 1월 ~ 2011. 12월) + (2012. 1월 ~ 2016. 12월)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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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사무총장은 연임(連任)을 해도 미국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代)가 바뀌지 않습니다.
즉, 반기문 총장은 연임을 해도 그냥 제8대 사무총장입니다.
* 역대 사무총장 배출국은 “제1대 노르웨이”, “제2대 스웨덴”, “제3대 버마(미얀마)”,
“재4대 오스트리아”, “제5대 페루”, “제6대 이집트”, “제7대 가나” 그리고
“제8대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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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남침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25일 즉각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6/27일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하면서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대한민국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 그런데 당시 소련은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 소련은 우연히도 그 때 자리에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사실은 당시 대만이 중공(中共))을 제치고 중국을 대표하는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아예 안전보장이사회의 자리를 오래전부터 비워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소련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는 것을 보고,
그 다음부터는 꼭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 즉, 우리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할 수 밖에.....
- 북한에 무기를 대주고 엄청난 원조를 한 소련으로서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 북한이 무력통일을 이루었다면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공산화는 당시 동서냉전시대의 국제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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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산의 재한유엔기념공원 (UNMCK)
-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는 “재한유엔기념공원(在韓UN紀念公園)”이 있다.
정식명칭은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재한유엔기념공원)"이다.
- "시티투어부산(City Tour Busan)"을 하게 되면 이곳에 들르게 되는데,
그 때 가이드가 꼭 물어보는 것이 있다.
- 즉, “여러분, 모두들 여권은 가지고 계시겠지요?”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여기는 유엔이 소유한 땅이어서 여권이 필요합니다.”라는 농담을 하여
한바탕 웃게 만든다. - 물론 실제로는 여권은 필요 없다.
- 여기에는 또 정주영회장의 유명한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 즉, 유엔군묘지가 개장된 1952년 12월, 제34대 미국대통령 당선자인 아이젠하워장군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아직 유엔군묘지가 정비되지 않은데다가 한겨울이라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유엔군묘지에 녹지대를 설치할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묘안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 그런데 헬기에서 낙동강 주위를 굽어보며 돌아보던 정주영회장이 한겨울이지만
낙동강주변에 자라는 푸르른 겨울보리를 유엔군묘지에 대대적으로 이식해서
마치 잔디를 심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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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유엔기념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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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념공원 내부
< 추모관 >
- 정문으로 들어가서 맞은편에는 1964년 건축가 김중업씨가 설계한, 교회분위기의
추모관이 있는데 기념공원 설립과정을 15분간 필름으로 보여준다.
< 기념관 >
- 기념관 입구에는 이곳에 영면하고 있는 2,300여명의 명단이 새겨진 금속판이 있다.
- 또한 참전 16개국의 사진 앞에는 “Thank you", ”Merci" 등 각 나라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3년 1개월 2일 동안
지속되었고, 175만 4,400여명의 유엔군이 싸우다 40,896명이 사망했다.
- 미군은 160만여 명 중 36,492명, 영국은 56,000여 명 중 1,177명,
캐나다는 27,000여 명 중 516명이 각각 사망했다.
- 미국과 그리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 당시 영연방국가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 전체 참전용사의 90%가 미군이고, 전체 전사자의 90%가 역시 미군이다.
- 전사자들은 대륙별로는 6개 대륙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 종교별로는 카톨릭, 개신교, 성공회, 그리스정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거의 모든
종교를 가진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 이들은 유엔의 이상을 지키려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대한민국을 위해서
의연하게 목숨을 버린 것이다.
* 이는 영연방국가가 세운 무명용사를 위한 다음의 기념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 1950-1953, On this memorial..... They died with men of other countries
fighting to uphold the ideals of the United Nations. "
(이 묘지에는...... 무명용사들은 유엔의 이상을 지지하기 위해서 싸운 다른 나라에서
온 용사들과 함께 죽었다.)
- 미국은 36,492명의 전사자 중에서 36명만이 이곳에 있다.
- 이는 미국 법에 의해서 해외전사자의 시신은 전부 미국으로 송환하게 되어있는데,
이곳의 36명만은 특별한 인연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 따라서 이곳에 있는 2,300여 명 중에는 영국과 영연방국가가 68%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묘지 옆에는 영산홍과 장미를 번갈아 심어놓았는데, 이는 영산홍은 영국에서 묘지에 심는
꽃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 여기에는 36명의 한국군도 있는데, 이들은 카투사 소속의 한국군이었으며,
모두 1950년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 참전국의 병사들은 대부분 지원병이 많아서, 어린나이로 전사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최연소는 17살로 전사한 호주의 Daunt(도은트) 일병인데, 그 사람을 위하여 옆에
“도은트 수로(水路)”를 조성하여 기리고 있다.
- 대리석으로 만든 길에 폭 40cm의 조그마한 수로를 만들었는데,
수로의 의미는 “생사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 이곳에는 영국군병사 “헤론”이 1951년 전사하여 묻혔는데,
50년 후에 사망한 부인 “엘렌”이 남편과 합장되었으며,
* 또 호주의 “허머슨 대위”는 1950년 전사하여 묻혔는데,
60년 후에 부인 “낸시”가 와서 옆에 함께 묻혀서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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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랑스군의 경우 :
- 이 글의 배경이 된 사람이 프랑스와 관계가 있어서 특별히 올리는 내용입니다.
- 프랑스는 어떻게 참전하게 되었을까?
- 프랑스인 “티에보“라는 분이 쓴 ”한국에 존재하는 프랑스의 지취“라는 책을 보면,
“1945년 9월 호치민의 독립선언으로, 프랑스는 1946년에 베트콩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1947년부터 베트남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파병한 프랑스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옵서버 자격으로 열댓 명의 장교만 보낼 예정이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유엔군사령부는 프랑스장교들의 한국행을 금지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프랑스군 수뇌들은 계획을 수정해서 지원병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1950년 10월 1일 ”르망(Le Mans = 옛 대우자동차에서 만든 자동차의 이름이기도
한데, 프랑스 중부에 있으며 24시간 계속 달리는 자동차경주로 유명한 도시)“에서
부대를 소집한 후, 마르세유를 출발하여, 수에즈운하를 거쳐 일본의 요코하마에 들렀다가
드디어 1950년 11월 29일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대구에서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배치된다.
1950년은 유난히도 추운 해였다.
본래 한국 실정을 모르고 급조된 프랑스부대는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에서
퇴각한 이후로 다시 한 번 추위와 싸워야 했다.
1951년 2월 1일 프랑스군은 원주를 사수하기 위하여 중공군을 맞아 용감히 싸워서
32명이 희생되고, 180명이 부상을 당하자, 미국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는다.
그리고 또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양평군 지평리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프랑스군은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의 전투에서 임무를 완수한다,
프랑스군에 대하여 처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맥아더장군은 훗날 원주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연합군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의 존재는 희망이며 침략자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세상의 한줄기 빛이다.“
프랑스군은 전투개시 5주 만에 영웅으로 대접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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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는 외인부대출신과 월남전 참전용사까지 3,760명을 파병해서 270명이 전사하여
7%의 비율을 나타냈는데, 이는 타국에 비해서, 즉 미국의 2% 등에 비하여 가장 높다.
이는 프랑스군이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평리 전투 등의 아주 열악한 조건하에서
중공군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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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 전투
-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圓形)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과 여기에 배속된
프랑스대대가 중공군 4차 공세 때 중공군 제39군과 4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 4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전투단과 프랑스 대대는 포위 4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제1기병사단 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 특히 프랑스대대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미군에 배속되어 참전해 전투를 지휘했다.
- 이 전투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은 당시 9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중공군 5천여 명을 사살했다.
- “지평리 전투”는 “6∙25 전쟁” 중 “10대 전투”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지평리 전투”는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서부유럽전선에서 있었던 “벌지 전투”와 함께
대표적인 “사주방어(四周防禦 = All Around Defence)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 또한 1951년의 “1∙4 후퇴” 이후에 계속 밀리던 유엔군이 “지평리 전투” 이후에
반격의 기회를 잡았던 중요한 전투이었다.
# “벌지 전투”
- 이 전투는 서부유럽의 벨기에 남부에서 있었던 전투로 “Bulge"는 장소의 이름이 아니라
“돌출된”이라는 영어단어의 뜻을 작전의 내용으로 하여 만들어진 말 임.
-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지금까지 6편 이상이 나왔으며, 또 TV Series로도
방영되었음.
-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는 1965년에 개봉되었던 “켄 아나킨” 감독의
“Battle of the Bulge"인데, 여기에는 당시 세계적 스타들인 ”헨리 폰다“, ”로버트 쇼“,
“로버트 라이언”, “다나 앤드루스”, “찰스 브론손”, “텔리 사바라스” 등의 호화배역으로
인기를 끌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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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 전투 >
< 리지웨이 장군 >
< 맥아더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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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우야 잘 자라 ”
- 우리나라 군가에는 “전우야 잘 자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 이는 세계군가대회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군가”로 뽑혔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 전우야 잘 자라 ] - (유호 작사 / 박시춘 작곡 / 현인 노래)
1.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 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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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사진들 >
- 이들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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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을 마치며 --- 이 글의 배경이 된 사람의 느낌을 기준으로 함.
- “추모관”에서 보여주는 필름은 전쟁의 참혹함에 가슴을 아프게 만들며,
- 가까운 사람인 이탈리아 기자가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즉, 그 기자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늘 듣던 이야기라고 한다.
“이 빵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한국에서는 빵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굶고 있단다.”
- 61년 전 시체가 즐비했던 논밭을 맨발로 피난 갔던 모습의 나라는 이제 세계의 강국이
되었고, 얼마 전 파리에서는 젊은이들이 한국가수들의 노래와 춤에 열광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는 날이 되었다.
-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의 정부에서는“6∙25 기념일”을 소홀히 하여,
참전국에서 멀리 날아온 노병들을 슬프게 하기도 하였다.
- 또한 일부세력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인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고 하고,
아직도 사람의 목숨을 벌레로 아는 정권, 밀수와 위조화폐와 마약까지도 정부가 주도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정권을 추앙하는 패거리가 있는 지경이다.
- 그런데 최근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수원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철거한다고
하여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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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유엔기념공원”은 “UN"이 인정한 세계 유일의 ”UN 묘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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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으니,
우리는 참으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순간의 이권(利權)을 위해 막판으로 가는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지
어느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참으로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우리나라에 와서 젊은 생애를 마친 유엔 참전용사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고마움을 모르는자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후대 사람들을 위해 한국전쟁의 실상을 꼭 교육시켜야 하겠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과학분야 등 여러분야에서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 한편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인류를 더욱 어렵고 아프게 만드는 소수의 나라가 있으며 점점 더 극성을 부리는 면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세계가 모두 한마음으로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어가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전쟁에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그리고 고마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