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
2. 이슬람은 왜 테러를 일삼는가? |
3. 이슬람은 어떻게 포교하는가? |
4.무슬림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
1. 이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간단히 답하자면 이슬람은 기독교의 짝퉁, 유사품이며 가장 강력한 이단이다. 이슬람은 그 출발에서부터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와 신자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슬람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성경(권위와 본질), 하나님(본성), 인간(죄와 본성), 구원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부인하고 도전하며 왜곡된 주장을 펼친다. 이슬람이 주장하는 내용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한 사실들의 반복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경계하고 대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성경이 변질 되었다고 주장한다.
무슬림들의 경전인 코란은 그들의 신 알라가 코란 이전에도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의 책들을 주셨지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그 계시를 왜곡시키고 변질시켰다고 주장하며 신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코란이 알라가 최종적으로 인간들에게 내려준 변질이나 회손되지 않는 유일한 책이라고 주장한다. 무슬림 학자들은 코란의 수라 4:14; 5:13, 14 등의 구절들을 근거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의도적으로 변경했다고 주장한다.
무슬림 학자들이 신약의 변질을 증명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구절은 요 14:16이다. 무슬림들은 요14:16의 원래의 의미는 모하메드의 호칭들 중의 하나인 Ahmad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수라 61:6라고 주장한다. 모슬렘들은 요14:16의 보혜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parakletos가 원래는 모하메드의 이름들 중의 하나인 periklytos(praised)였는데 이것을 기독교인들이 parakletos로 변질 시켰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어판 코란의 번역자인 유숩 알리(Yusup Ali)는 수라 61:6을 “우리의 학자들은 parakletos가 periklytos로 올바로 읽혀야 하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원래 거룩한 선지자 Ahmad가 오실 것을 이름으로 말씀하셨다고 받아들인다.” 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성경이 변질된 예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무슬림 학자들 가운데 성경이 언제, 어떻게 변질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의도적으로 성경을 변질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성경의 사본들과 성경 고고학적 발굴들,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은 성경의 진실성을 확증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변질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인간의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코란의 가르침이 성경과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2)하나님의 부성(Fatherhood)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는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99가지 이름을 매일 반복해서 읊조리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기독교의 하나님이 코란에서 말하는 이슬람의 알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임을 드러낸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알라나 기독교의 야웨가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에 대해서 가르치셨으며,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고 믿는다(롬 8장). 기독교인들은 아버지라는 친밀한 용어로 하나님을 호칭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수라 19:35와 112, 그리고 2:116에서 “알라는 아들을 낳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슬렘들은 아들을 낳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따른 물리적인 활동이며, 따라서 알라에게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불경한 것으로서 여긴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견해는 직접적으로 코란에서 기원한다. 수라 6:101은 배우자를 가지지 않는 알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함으로서 아들을 가지는 것이 성적인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성경이나 기독교인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 어떠한 성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를 때 무슬림에게는 이것이 알라에 대한 불경한 소리로 들린다. 코란과 이슬람의 알라에 대한 주된 이미지는 주인(master)의 이미지이다. 사람과 알라의 관계는 주종관계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알라와 사람 사이에 어떠한 친밀한 표현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심으로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신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원래 그의 자녀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하나님과 놀랍고 친밀한 관계를 누린다. 요일 3:1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사도들에게서 조차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3)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을 거부한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리이다. 무슬림들은 기독교가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삼위 하나님을 말하면 무슬림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에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들린다. 코란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수라는 4: 171과 5:73이다.
“오 성서의 백성들아! 너희의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 것이며 하나님께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진실로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사도였을 뿐이며,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을 충족시키심이었으며, 그 분으로부터의 자비였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믿으며 “그분들은 세분이요”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좋으리라. 실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수라 4:171)
“하나님은 셋 중의 세 번째 분이십니다.” 라고 하는 자들은 실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니 하나님은 실로 한 분이심이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들이 취소하지 아니한다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처참한 징벌이 내릴 것이니라.”(수라 5:73)
이러한 구절들은 무함마드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에도 많은 무슬림들은 삼위일체를 성부와 성모(마리아)와 예수와 관련된 것으로 믿고 있다. 무슬림들이 삼위일체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심각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이슬람 신학자 샤비르 악타르(Shabbir Aktar)는 “삼위일체는 복잡하고, 조리가 맞지 않고, 역설적이며 터무니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이 하나 가운데 셋이며 셋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앙은 터무니 없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을 대변한다.
4) 원죄와 은혜를 부정한다.
코란은 인간의 원죄를 부인한다. 코란이 주장하는 대로 원죄를 부인하면 지옥도 변호하기 힘들고 은혜도 호소력을 잃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슬람은 원죄를 부인하기 위하여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를 왜곡 시키고 축소시킨다. 코란에는 표면적으로 볼 때 성경의 창조기사와 유사한 내용들이 있다. 수라 2장은 알라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였다고 말하고, 이어서 2:35-37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오 아담아 너와 너의 아내는 동산에서 살며 그 곳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풍부히 먹으라. 그러나 이 나무에는 가까이하지 말라, 만일 그러할 시에는 네가 죄를 범하게 되리라 하고 일렀느니라. 그러나 사탄이 자신의 수단으로 이 두 사람을 모두 유혹하여 이들이 있었던 나라 밖으로 몰아내었노라. 그리하여 내가 일컬어 앞으로 가거라... 너희를 위한 지상의 거할 곳과 시간이 준비되어 있노라 하였노라. 그 후 아담은 그의 주님으로부터 기도의 말씀을 배웠으며 하나님은 자비로서 그를 돌보시니 하나님께서는 자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아담은 범죄하고 낙원에서 지상으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 코란은 성경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으로 끝난다. 아담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더구나 아담은 첫 번째 선지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신학에 의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므로 죄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저명한 이슬람 신학자인 이스마일 알 파루키(Ismail Al-Faruqi)는 “이슬람은 사람은 죄 없이 태어나며 죄악된 행동을 행함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무죄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슬람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의 불순종을 그 자신의 개인적 실수로 해석한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무슬림들은 기독교가 원죄론을 통하여 인간을 죄에 빠진 연약한 존재이며 절망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허약한 존재로 만들지만 이슬람은 인간을 존엄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의 원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인간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슬람의 죄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초기 기독교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펠라기안주의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펠라기안들은 성경이 계시하는 원죄를 거부하고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4-5세기경 페라기우스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이단적인 가르침이 이슬람의 모습으로 6세기에 재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 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롬 5:12; 고전 15:22).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구속받아야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구원이 필요 없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도 필요가 없게 된다. 원죄를 부정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슬람은 죄를 단지 하나의 잘못된 행위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구원은 선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코란은 가르치기 때문이다. 코란에는 심판과 지옥의 형벌 그리고 천국의 상급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코란은 이러한 상벌이 심판 날에 있게 될 저울질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울눈이 무거운 자, 이들은 번영하리라, 저울눈이 가벼운 자, 이들은 스스로 영혼을 황폐하게 하였으니 이들이 살 곳은 지옥이니라.”(수라 23:102-103) 이 때 저울의 중심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선행이다.
그래서 이스마일 알 파루키는 “이슬람에서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이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사람이 구원의 주체가 되어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야한다면 구원의 소망은 있지만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슬람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에 아주 엄격하게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알 파루키는 “정의의 저울눈은 정해져있지 않고 그 어떠한 무슬림도 마치 호주머니 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노력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무슬림들의 영원한 소망이다.” 라고 말한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러한 가르침에 의해 무슬림들을 항상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의 선행이 낙원에 이르는데 부족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때로 절망감을 느낀다.
5)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신성에 대한 부인
인간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구원의 주체로 선한 행위를 함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 없다. 코란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 신 것과 같은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수라 4:157), “하나님의 말씀”(수라3:45) 그리고 “하나님의 영”(수라4:171)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신성을 부인한다. 수라4:157-158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우리가 하나님의 사도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죽였노라” 하였으니, 실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예수가 못박힌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며, 이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분명, 그것에 대한 의혹의 상태에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다만 추측을 따를 뿐이며 또한 그들은 추측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니,”
이 구절에 대해 무슬림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어놓았다. 어떤 해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가롯 유다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 중의 한 명이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해석은 예수님께서 죽지 않고 다만 기절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신하여 누가 죽었든지, 이슬람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죽을 필요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 무슬림이 기독교인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슬람은 인간은 구속을 받아야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알라는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이슬람의 관점과 맞지 않다.”
그리고 코란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단지 선지자중의 하나로 여긴다.(수라 5:75; 9:30) 예수님의 신성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단순한 논쟁거리가 아니다. 마태복음 16:15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셨다.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왜곡시키고 바꾸어버렸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에 대한 도전이다. 교회는 325년 니케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이라는 진리를 수호하였다. 이슬람은 예수님을 존경한다 하면서도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이다. 요한일서 4장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2. 이슬람은 왜 테러와 폭력을 행사하는가?
우리가 이슬람을 경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이 단지 기독교의 이단 일뿐만 아니라 그 속에 전쟁과 테러, 폭력, 인권의 억압과 같은 것들을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는 어두운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평화”라고 선전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진실을 은폐하고 자기주장을 옹호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슬람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두운 본성이 아리를 틀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본성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그 얼굴을 드러낸다. 선량한 시민들에게 가하는 테러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 그리고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부적 충돌들은 이슬람의 어두운 본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예들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소 그리고 인종차별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고 아일랜드의 경우에서처럼 개신교와 로마교가 충돌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을 토대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정당화 한 경우는 없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코란의 가르침이나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 무함마드와 후계자들의 언행록(하디스)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격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신앙하는 대상을 닳아간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듯이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닮아갈 수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삶과 신앙의 모범과 표준으로 삼는 무함마드의 삶의 일부를 코란과 하디스를 통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슬람이 왜 폭력을 일삼는 종교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1)무함마드의 삶이 보여주는 것
무함마드는 어릴 때 고아가 되어 25세 때 자신을 고용한 40세의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였고 부인이 죽은 후 9-11명의 아내와 6-7명의 첩을 두었다. 세 번째 아내는 자신의 친구이며 추종자였던 아부 바크르의 7살 된 딸 이었다. 일곱 번째의 아내는 자신이 양자로 삼은 자이드의 아내였다. 무함마드는 양자의 아내를 취해도 좋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자 자이드는 아내와 이혼을 했고 무함마드는 그를 아내로 삼았다.
무함마드는 단 하나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았다. 여러 번 전쟁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자신을 선지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자신이 속한 부족의 사람들을 살해했고, 바누 쿠라이자(Banu qurayza)라는 유대인 부족이 자신의 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자 800명 모두를 죽이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2)무함마드의 후계자들이 보여주는 것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제자들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고 혈투를 벌였다. 무슬림들이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 사회로 묘사하고 돌아가야 할 모범으로 삼는 4명의 후계자들 중 두 번째는 여인의 칼에 맞아 죽었고, 세 번째 후계자는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양아들 이었던 알리를 후계자로 추대하려던 사람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 후계자였던 알리는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중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의 두 아들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유혈투쟁과 갈등과 폭력은 지금도 시아파와 순니파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3)코란의 가르침
코란도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에 대한 이슬람의 폭력적인 행위를 명하고, 정당화 시킨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세력이 약했을 때 말한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수라 2:256)라는 코란의 구절을 근거로 이슬람이 폭력을 배격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종교에게 관용을 베푸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그 후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고 상황이 바뀌자 그 구절이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개종하면) 이슬람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 하심이라.”(수라 9:5)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코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믿지 아니하는 무리의 영혼 속에 내가 공포를 던져 넣으리라. 그때 그들의 목을 치고 그들의 손톱을 모조리 쳐라.”(수라 8:12)
“믿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은 너희에게 적이 되노라.”(수라 4:101)
“박해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위한 종교가 자유로이 공언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수라 2:193)
4)하디스의 가르침
얼마 전 아버지 허락 없이 외출을 했다고 코를 잘린 아프간 여인의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남편이 휴대전화로 “이혼”이라는 문자만 보내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자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와 억압은 하디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여자들과 관련된 하디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검정개와 노세 그리고 여자가 기도하는 사람 곁을 지나가면 기도가 무효가 된다.
*여자가 남편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음에 경고하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잠자리를 같이하지 말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때리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이혼하라.
*여자아이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
무함마드와 그의 제자들과 예수님과 제자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무슬림들은 자신이 신봉하고 모범으로 삼는 무함마드와 그의 제자들을 닮아가고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교회는 이슬람을 경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려야 만 한다.
3. 이슬람은 어떻게 포교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려는 것과 같이 무슬림들은 “다와”(da`wa)를 실천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다와는 사람들에게 알라에게 복종하고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르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의무로 규정되어있다.(수라 3:104) 수라 3:104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이슬람을 전하라는 규정이 없다. 무슬림들은 다와를 평화적으로 수행하며, 이슬람의 전파와 확장은 평화적인 제시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지만 이슬람 확장 역사는 그 출발부터 그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슬람 포교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다.
1)전쟁을 통해
무슬림들은 정복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강제적으로 개종시키거나 정치적 경제적 압력을 가해 서서히 개종시켰다. 초기에는 아랍인들이 기독교 지역을 침공했고, 오스만 터키족은 계속적인 전쟁을 통하여 안디옥, 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그 이후에는 발칸반도를 가로질러 비엔나까지 공격하였다. 또한 이슬람 전사들은 10-12세기 까지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정복하였다. 10세기 북인도를 통치했던 마흐무드는 힌두교도를 공격할 때 자신이 이교도 및 우상 숭배자들과 지하드를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하드의 원리에 따라 브라만교 사제들을 죽이도록 지시했는데 그의 그러한 행동은 북인도에 이슬람이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6세기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Ahmad ibn Ibrahim)이 이디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든지 죽음을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방식을 제시하기 보다는 3가지 선택이 주어졌는데 첫째,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는 것, 둘째 개종을 하지 않을 경우는 무슬림 통치자의 보호를 받고 그 대가로 높은 세금을 지불하는 것, 셋째 이 둘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슬람의 통치를 받으며 세금을 납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딤미(dhimmi)”라고 불렸다. 문제는 딤미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의 비율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슬림 통치자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압박하는 강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실제로 세금을 통한 압박은 이슬람이 시리아와 소아시아 기독교인 거주 지역으로 확장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경우에는 기독교적인 비잔틴 제국의 통치 아래 고난을 겪어야했던 곱트족이 무슬림들과 힘을 합해 비잔틴을 쫓아내었다. 이집트나 소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슬람이 성장하는데 기여한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는 교회의 실패였다. 이슬람은 이단, 교리문제로 인한 분열과 갈등. 교회의 부패 등과 같은 불완전한 기독교라는 환경에서 발전했다.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의 성장도 부분적으로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타락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2) 교역과 상업을 통한 이주
12세기 아랍 상인들이 해상 무역로를 따라 인도에 이슬람을 전파했으며, 13-15세기에는 아랍상인들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했다. 그리고 7세기이후 비단길을 따라서 중국으로 들어온 아랍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이슬람이 전파되었는데 현재 중국의 회족이 그 후손들이다. 이처럼 무슬림 상인들이 세계무역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시절에 이슬람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는데 아시아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로 간 무슬림 상인들은 거주한 도시에서 따로 거주 지역을 정하고 무슬림으로서 특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현지인들과의 결혼을 통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무슬림들은 최근 오일머니로 축척된 부와 인구의 증가 그리고 자신들을 식민통치한 기독교 서구에 대한 반감으로 이슬람 포교에 열성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슬람 포교에서 무슬림들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람 포교 단체들은 이슬람의 시작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모슬렘 이주자들의 ‘거룩한 이주’(Hijra)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후의 이슬람 확장도 이슬람 전파를 위해 자국을 떠난 이주자들, 즉 헤지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이슬람 포교단체의 잡지에 실린 기사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동적으로 표현한다:
“이주는 인간역사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다. 이주자들에 의해 건설된 문명은 27개에 달한다. 그 누구도 이러한 역동적인 사람들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안락함이나 편함이 아니라 역경에 익숙하고 세상적인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한 사람들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떠나야 한다면 어떤 곳에라도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문명을 건설하는 것과 함께, 이주는 세계에 빛을 전파한 이슬람 전파자들과도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인류를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땅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서유럽국가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 부족한 산업노동인력의 충원을 위해 이전에 식민통치를 하던 이슬람지역으로부터 대규모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이주 초기에 무슬림 이주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벗어나 점차적으로 새로운 정착지의 문화에 동화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은 본국에 있는 자들보다 더욱 강하게 유지되고 있고, 오히려 유럽이 이들에 의해서 이슬람화 되어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의도하지 않았던 이러한 결과는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고, 세계화의 과정이 만들어낸 무슬림들의 지리적 이동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세계를 이슬람화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수단으로 삼도록 자극했다.
우리가 ‘스쿠크’라는 이슬람 채권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쿠크 채권이 세금 감면을 받게 되면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금융상품으로 많은 자금이 몰리게 된다. 이렇게 모아진 자금은 무슬림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의 투자자금(특별히 터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흥 공업국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으로 공급되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에 이들 기업의 진출을 돕는다. 이슬람 상인과 기업의 진출은 무슬림들의 이주를 촉진시키고 이슬람 전파와 이슬람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3) 포교를 통해
전쟁과 상업적 진출과 함께 포교도 이슬람 전파의 중요한 요소이다. 몽골인들은 이슬람 지역에 정복자로 들어갔지만 이슬람 포교의 영향으로 개종했고 미국의 흑인 무슬림들의 대부분도 지난 몇 십년동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지난 한해만도 런던에서 1400명, 영국 전체에서는 5200명 영국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이 통계에 의하면 제일 많이 개종하는 영국 사람들의 평균나이는 27세이고 여성이 개종자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연령층이 이슬람에 관심을 갖고 개종하는 이유는 영국사회의 부도덕성에 싫증이 났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무슬림 남자들과 결혼한 여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결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백인 교회가 도시의 슬럼가에 있는 흑인들을 회피하고 있는 사이에 무슬림들이 그곳에 들어가 Black Muslim 운동을 일으켜 한때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을 무슬림화 시켰다. 이슬람 포교 단체들은 루이스 패러칸, 제시 잭슨 목사와 같은 흑인 지도자들, 그리고 기독교를 제외한 기타 종교 지도자들을 고용해 기독교는 백인만을 위한 종교이며, 이슬람이야말로 진정한 미국 내 흑인을 위한 종교로 격상시킨다. 그 결과 미국에서 무슬림의 비율이 10%에 육박하고 있다.
4. 무슬림들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나라에 외국 무슬림 노동자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들이 사회와 기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들의 약 1/3이 사회적인 소수로 살아가고 있다. 법과 종교적인 규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슬람 성격상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이슬람의 법과 무슬림들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에서만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수가 증가하면 그 사회를 이슬람화 하려고 시도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들과 예측들이 있지만 무슬림들이 소수인 경우 이들이 취해온 역사인 행동 유형들을 살펴보면 앞으로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에 대한 이해는 교회가 무슬림들을 대하고 전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이슬람 지역으로 이주
역사적으로 보면 스페인에 의해서 정복당한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Endullus)은 중동이나 북 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점령을 당한 카프카스지역의 무슬림들이 터키로 이주하였고, 1947년에는 인도의 모슬렘들이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최근에는 알제리 FIS 지도자 Belhac이 유럽에 살고 있는 알제리 모슬렘들이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Bin Ladin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단체인 El Muhacirun은 영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국가들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고 있다.
2) 비이슬람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회족들과 십자군 전쟁에 의해 점령당한 시실리에 있던 무슬림들에게 그 곳에서 살도록 종교적인 칙령을 내린 이맘 El Mazari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태국과 캄보디아의 모슬렘을 예로 들 수 있다. 현대 이슬람 학자들 중 Tarik Ramazan과 UCLA의 Ebu-Fadal 과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종교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유럽의 무슬림들이 태국이나 캄보디아의 무슬림들과 같은 법적 권한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포교를 통해 그 사회를 이슬람화
서구에 있는 많은 무슬림은 포교를 통해 기독교인들을 이슬람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 바나바 복음서를 내세우거나 유명인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선전한다. 이들 중 과격파들은 유럽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공포하며, Sidikki와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영국 수상 John Major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4)지하드
살고 있는 곳을 전쟁을 통해 이슬람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해 지하드를 벌이는 경우인데, 이들은 오늘날 이슬람 공동체 전체가 이스라엘과 십자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성전을 호소한다. 체첸과 필리핀의 남부지역, 보스니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5)기독교로 개종
스페인의 점령 후 그 곳의 무어 무슬림들이 진심으로 또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몰도바 무슬림들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20세기 초에도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 중에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Menem의 가족도 포함되어있다.
6)명목상 무슬림
종교적으로는 믿지 않지만 인종적 또는 문화적으로 이슬람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알제리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에 일하는 무슬림 남성들의 69%가 라마단 금식기간에 금식을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중 48%-64%가 무신론자이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마치는 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사명과 역할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보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이슬람의 유입과 포교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한다. 국경이 사라져 사람과 재화가 자유로이 왕래하는 시대에 세속국가인 한국에 무슬림들이 유입되는 것과 이슬람이 포교활동을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동일한 문제를 겪은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의 경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교회들은 1960년대부터 무슬림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왔지만 그에 대한 대비와 준비가 전혀 없었다. 교회와 교인들은 이슬람의 성격과 위험성을 몰랐고 그들을 전도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유럽교회들이 처음부터 이슬람에 대비하고 무슬림들을 전도했다면 현재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의 유입과 이슬람의 포교활동은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교회는 신자들을 복음의 진리로 무장시키고 신자들은 진리의 내용을 잘 숙지하여야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에 들어온 무슬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고 적극적으로 전도해야한다. 몰도바와 아르헨티나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된 것처럼 우리의 전도가 적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있는 무슬림들을 복음의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경험에서도 배워야한다. 지난 몇 십년동안 백인교회가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등한시하고 배척하는 사이 이슬람이 그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 이슬람은 흑인들의 종교”라는 표어를 내걸고 흑인 무슬림(Black Muslim) 운동을 일으켜 흑인지역을 무슬림지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비무슬림 외국인 이주자들이나 다문화 가정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한다. 외국인 이주자들이나 다문화 가정 그리고 그들의 2세들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언어습득이나 교육수준으로 인해 소외된 계층을 이루고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형성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한국교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미국 내의 흑인 무슬림의 경우에서처럼 이슬람이나 이단들이 이들을 활동무대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가 지금부터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전도해야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슬람의 실체와 위험성을 알려야한다. 교회는 종교적 대립이나 다른 종교에 대한 험담으로 들리지 않도록 하면서 한국에 이슬람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손실이 된다는 것을 알려야한다. 교회는 유럽 국가들의 경험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정부가 외국 무슬림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제고하도록 하고 스쿠크와 같은 이슬람 자본에 특혜를 주지 않도록 촉구하여야한다. 그리고 이슬람국가들의 대학들이 제시하는 좋은 조건에 현혹되어 유학을 가려는 사람이나 무슬림과 결혼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말려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대비는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신자가 신자답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단, 교리문제로 인한 분열과 갈등. 교회의 부패 등과 같은 불완전한 기독교라는 환경에서 발전했고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보이는 이슬람의 성장도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인” 이상 그 무엇도 교회를 이길 수 없다.
첫댓글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잠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