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윤리 인간동물학자 - 여운 이준호
도덕은 자발적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적 동물과 인간 동물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동물 사회에도 도덕과 윤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이고, 윤리란 또 무엇인가? 사실 이 문제는 우리를 머리 아프게 한 철학과 종교의 주제였고 해답 또한 철학과 종교 안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 문제를 과학에게 그 주도권을 내주고 있다.
내가 도덕경을 기존의 철학적 종교적 해석이 아닌 과학적 해설을 해야겠다 맘먹은 이유 중 하나다. 내가 바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이러한 문제를 철학과 종교 안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만 아프고 복잡하고 어렵고 점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사실 답도 없다. 그게 노자가 말한 인문학이 자연 속의 무위(無爲)가 아닌 인간 중심의 유위적(有爲的)이고 작위적(作爲的)인 결과라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철학과 종교 안에서의 사고가 감춤이 아닌 드러냄 즉, 과시적 학문 추구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특히 정치학과 경제학을 다시 공부할 때는 내 생각이 옳았다는 굳건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무위(無爲)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의미한다. 유위(有爲)는 찰스 다윈의 인위적 선택(Artficial Selection)이다. 작위(作爲)는 인간의 경제학의 탐욕적 선택(꼴값)으로 지구 생명체를 대멸종의 길로 몰고 가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도서관에 앉아 이 문제를 자연과학에서 찾았다. 우연히 인간 본성에 관한 책이 철학 관련 도서 분류 100이 아닌 자연과학 분류 400에 꽂혀 있어 우연히 읽은 계기가 나를 자연과학의 세계로 인도한 계기가 되었다. 하버드대학 생물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를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갔고, 인간의 모든 문제가 철학과 종교가 아닌 생물학임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개체 중심이 아닌 유전자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루는 사회는 거대한 사회생물학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하버드 대학교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제자,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께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를 읽고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는 글을 읽고 아마 그때 내 기분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나 커다란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 중 이기적 유전자를 완독한 이가 얼마나 되는지 묻고싶다. 하물며 생물학자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이라는 이유로 전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이 책을 비판한다. 윌슨 교수는 평생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통섭(統攝, consilience)’해야 함을 강조한 까닭을 이제는 비로소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지금은 어떤 문제든 통섭적 사고를 훈련하고 시행하고 있다. 그러니 인문학적 사고 역시 자연과학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지구가 품은 생명의 역사에서 인문학이라 해야 고작 20만 년 아닌가!
도덕과 이타성 - 친사회성
도덕은 인간 진화 과정에서 뇌의 엄청난 확장을 획득하여 지니게 된 사피엔스만이 지닌 사회적 지능이자 사피엔스란 고등 포유류가 지닌 고유의 이타성이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라는 저서에서 “나는 인간과 하등 동물의 모든 차이 가운데 도덕 감각, 곧 양심이 단연코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저자들의 판단에 당연히 동의한다.”고 밝혔다.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명이 생긴 이유는 단 하나, 도덕이라는 고등 차원의 지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롭고 현명한 인간인 것이다. 도덕이 없는 인간은 하등 동물 즉 인면수심, 인간의 탈을 쓴 침팬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는 결국 친사회성의 진화이기도 하다.
소수의 인간만이 익명성(匿名性, anonymity)으로 타인을 돕는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남을 돕는 행위는 도덕적 행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지성적 행위이다. 노자, 공자, 맹자 같은 선인들이 칭하는 성인, 군자, 스스로 하느님이 아니고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거나 평생 모은 수십억의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그것도 익명성으로 행할 수 있는가? 이 주제가 그동안 내가 연구하고 공부해 온 핵심 내용이다. 그러다 결국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야말로 인류를 멸종에서 구원하고 전염병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에서 인류를 지켜줄 유일한 희망이자 사람의 길(道)임을 깨달았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가 신(神)에 매달려 자연과 도덕을 외면할 때 2,500년 전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도와 덕성을 갖춘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다. 자기 길들이기는 자기 절제이자 자기 통제이며 공격성을 억누르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남이 강압적 타발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닌 자사의 중용에 나오는 대로 신독(愼獨-홀로 있어도 언행을 삼가한다)하는 자만이 사람이자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협력적, 평화적, 도덕적, 평등적, 이타적 인간인 것이다.
700만 년 전 침팬지와 보노보,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의 공통 조상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에서부터 지금의 현생 인류가 어떻게 도덕심을 획득했고, 그러나 어떤 인간은 도덕심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인면수심의 털 없는 원숭이(영국의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 자신의 저서 털 없는 원숭이)가 된 이유인가?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철학과 종교가 아닌 현대 과학으로서 진화생물학, 진화인류학, 진화심리학, 유전학, 신경과학, 뇌과학을 통해서이다.
도덕과 유전자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스웨덴 출신의 진화유전학자 스반테 페보(Svante Erick Pääbo, 1955년 4월 20일~) 박사가 수상자로 단독 선정되었다.
1997년 독일의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공동 소장을 역임하면서 고유전학을 창시한 권위 있는 과학자이다. 그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고인류의 게놈을 분석 해독해 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유럽인의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1~4%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함께 살았던 몇 만 년 전에는 이종교배가 가능했다는 것을 페보 박사가 밝혀냈다. 또한 페보와 그의 팀은 침팬지, 보노보가 현생 인류와 98.7%의 DNA 염기서열이 같음을 밝혀냈는데, 이는 현생 인류가 98.7%의 공통 유전자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다른 한 종의 침팬지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총, 균, 쇠』의 저자로 유명한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를 『제3의 침팬지』라 명했다. 그러한 연유로 영장류학(靈長類學, Primatology)을 전공한 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심리학 특히 영장류와 공통된 마음의 기원과 행동 양태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심리학을 비교 심리학(比較心理學), 그리고 진화심리학(進化心理學)이라 한다. 동물들과 인간의 마음을 비교 연구하고 진화 과정에서 어떤 마음을 얻게 되었는지 연구하는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신학문이다.
유전자와 도덕심의 관계를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도덕적 본능의 기본적 기원을 “협동과 배신 간의 역동적 관계”에서 찾는다. 그는 수천 세대를 거쳐 협동을 가능케 하는 유전자들이 전체 인류에게 우세하게 되면서 도덕 감정이라는 본능이 발생했다고 본다. 그런 본능이 각 개인들에게 양심, 자존심, 자책감, 공감, 수치심, 겸손, 도덕적 분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경험되고 나아가 명예심, 애국심, 이타성, 정의감, 동정심, 자비심, 구원 등의 보편적 도덕적 코드들을 표현하는 관습의 형성을 통해 문화적 진화를 몰고 간다고 한다. (E. O Wilson, 2005)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은 그처럼 특정한 방식으로 편향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의 도덕적 본성, 즉 이타성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의 편향이 기본적으로 유전자가 인지 발달의 신경회로를 만들고, 그 속에 인간 특유의 종적인 행동을 위한 어림법을 새겨 놓음으로써 가능해졌으며 그 어림법을 ‘후성 규칙(epigenetic rule)’이라 부른다. (E.O Wilson, 2005, Ruse, 1998)
인간이 갖는 도덕 감정과 인지 능력도 후성 규칙의 산물이다. 도덕은 바로 그런 능력들이 만들어 낸 문화인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를 문화적 유전자라는 의미로 밈(Meme)이라 명하였다. 유전자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 즉 후성 규칙을 통해 도덕 문화의 산출과 전달로 연결된다고 한다.
도덕과 공감 능력
우리가 대형 유인원인 침팬지와 보노보와 다른 점은 바로 도덕적 유전자의 유무라고 나는 단정한다. 인면수심의 사람 얼굴을 한 침팬지를 우리는 사이코패스 즉 반사회성(反社會性)을 가진 인간을 의미한다. 반사회성이란 공감 능력이 제로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사이먼 배런-코헨(Simon Baron-Cohen 1958 ~)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심리학 및 실험심리학과 교수이며 자폐 연구 센터 소장이다. 그의 저서 『공감 제로 - 분노와 폭력, 사이코패스의 뇌 과학』에서 사이코패스 유형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반사회적 인격 결여 또는 극단적 자기애성 인격 결여라고 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유형을 영국의 저명한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 1929 ~ )의 유명한 저서 『털 없는 원숭이』에 빗대어 ‘털 없는 침팬지’ 또는 ‘말하는 침팬지’라 명명했다. 이들은 사회의 규범이나 규칙을 무시하고 사회 질서를 깨부순다. 공감 제로의 사이코패스는 분노 조절을 못하며 공격성과 폭력성을 지녔다. 이는 법적으로 위배 되는 행동은 물론, 도덕적으로 위배 되는 행동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정치인, 경제인, 권력을 자기 맘대로 휘두르는 직업 종에 많이 분포해 있다.
도덕의 기원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 1950 ~)는 미국의 발달 및 비교 심리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그는 듀크 대학의 심리학 석좌교수이자 성균관대학의 석좌교수이기도 하다. 독일의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스반테 페보와 공동 소장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이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영장류의 인지 능력과 문화가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연구 및 아이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인지과학과 심리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한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장 니코드 상 Jean Nicod Prize’ 외에 다수의 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다 학제적 연구자로 인정받는다. 사회성과 협력에 초점을 두고 인간의 사회적 인지 능력의 기원을 연구했으며, 영장류의 인지 과정의 이해에 큰 공헌을 했다. 구겐하임 재단, 영국 아카데미, 네덜란드 왕립아카데미, 독일 국립과학아카데미 등에서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은 영향력 있는 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이다.
지은 책으로
『생각의 기원 A Natural History of Human Thinking』,
『도덕의 기원 A Natural History of Human Morality』,
『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 Why We Cooperate』,
『인간의 의사소통 기원 Origins of Human Communications』,
『인간 인지의 문화적 기원 The Cultural Origins of Human Cognition』
등이 있다. (yes24 작가소개)
2018년, 출간된 그의 저서 『영장류학자가 밝히는 도덕의 탄생과 진화 – 도덕의 기원 A Natural History of Human Morality』에서 700만 ~ 600만 년 전 침팬지와 보노보의 공통 조상에서 분화되면서 개인 지향성에서 집단지향성 공동지향성으로 진화한 것이 도덕의 기원이며 이타적 본성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간이 가진 본능과 본성을 구분해야 한다. 본능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200만 년전 불의 사용으로 단백질을 효율적으로 소화시킴으로서 완벽한 직립보행이 가능해졌고, 정교한 언어의 구사가 가능해졌다. 집단 안에서 평판 기능이 강화 되었고, 주로 동굴과 같은 비교적 안전한 집단 거주 공간은 자기 통제 기능(자기 기 길들이기)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것이 진화인류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아래는 마이클 토마셀로의 상호의존 가설이다.
(자료제공 이데아)
도덕과 평판 – 사형 가설
크리스토퍼 보헴(Christopher Boehm, 1931 – 2021)의 저서 『도덕의 탄생』은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어떻게 도덕을 진화시켰는지를 연구한 책이다. 제인 구달 연구 센터의 소장이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인류학 및 생물 과학 분야의 교수다. 『숲속의 평등』을 포함한 여러 책을 저술한 바 있다.
보엠은 도덕의 기원이 수천 세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생한 인류에게 성적 수치심과 도덕적 수치심의 감각을 포함한 양심을 선사한 자연선택의 결과물로 본다. 보엠의 가설은 이렇다.
“수치심에 따른 양심을 직접 만들어 낸 행위자는 처벌에 의한 사회적인 선택이고, 따라서 사실상 두 종류의 환경이 도덕의 기원을 모양 지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이때 조금 더 먼 곳에는 변화가 심한 자연환경이 있었는데, 이 환경 덕분에 사람들은 풍부한 영양을 제공하는 맛 좋고 덩치 큰 유제류를 사냥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냥용 무기를 제작할 재료, 채집할 식물성 식량, 마실 물, 머물 곳을 주었다. 어쩌면 약초를 얻기도 하고 가끔은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선택의 힘을 제공했던 것은 사회적인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인 적소는 부분적으로 인류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벌에 기초한 본래의 사회적인 선택은 우리에게 양심을 주었지만, 효율적인 무임승차 억압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나중에 지금처럼 강력한 이타주의적 형질이 진화하도록 했다. (중략)
나는 도덕의 기원이 위계적으로 살아가던 생물종에서 열렬한 평등주의자로 변모했던 초기 인류의 주된 정치적 이행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내가 제안했던 이론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진술될 수 있다. 이런 무척 단호한 평등주의를 단단히 자라 잡게 한 것은 원망을 사는 알파 수컷의 행동을 처벌하고 그를 추방했던 정치적으로 통합된 집단의 힘이었다. 그 이유는 막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 방식을 통해 자기 통제 능력은 진화적으로 가치 있게 되었고 인류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무임승차자(이기주의자, 소인배)들을 억누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장류학자이자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 심리학과 C.H 캔들러 석좌교수이며 미국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여키스 국립 영장류센터 산하 리빙 링크스 센터의 책임자이기도 한 ‘프란스 드 발(Frans De Wall, 1948 ~)’은 1982년 그의 첫 번째 저작인 『침팬지 폴리틱스 Chimpanzee Politics』에서 보엠의 가설에 힘을 실어줄 관찰기록을 남겼다. 아무리 강력한 수컷이라도 동료와 암컷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권력자(알파 수컷)는 그 자리를 오래 지탱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를 ‘평판본능(評判本能)’이라 명하였다. 본능이란 선천적인 것이다. 자유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집단본능의 하나로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이 유전자에 각인된 프로그래밍이다. 이것이 도덕의 기초단계이자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평판과 여론은 무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통제 수단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하버드대학 인간진화생물학과의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1948 ~)은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 인간 본성의 역설 The Goodness Paradox』 이 책에서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 등 흥미로운 개념과 풍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폭력과 이타주의, 전쟁과 협력, 사형과 도덕 등의 중요한 주제들에 다가간다. 특히 인간은 사형가설을 통해 자기 길들이기가 강화되었다.
윤리는 강압적 사회 규범(Social norms)이다.
사회 계약으로서의 윤리 - 강제성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는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우리를 사회체social body로 결합시키는 약속은 오직 그것이 상호 간에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강제성을 띤다. 그리고 약속의 성질상 우리가 그것을 이행함으로써 남을 위해 일하면, 반드시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결과가 된다.”
사회윤리 – 법과 사형
하버드대학 인간진화생물학과의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1948 ~)은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 인간 본성의 역설 The Goodness Paradox』 이 책에서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 등 흥미로운 주장을 전개한다. 그는 1970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베 국립 공원에서 제인 구달 지도하에 침팬지의 행동학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1975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폭력과 이타주의, 전쟁과 협력, 사형과 도덕 등의 중요한 주제들에 다가간다. 특히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성 동물이기에 무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격성과 폭력성을 줄여야 하는 자기 길들이기 또는 자기 가축화 행위를 통해 선해졌다고 주장한다. 만약 무리 안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경우 무리에서 내쫓거나 사형을 시켜 무리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했다는 사형 가설을 제기한다. 자발적 자기 길들이기와 동시에 강력한 처벌을 통해 강압적인 사회규범인 사회윤리가 동시에 작동했다는 주장이다. 결국 사회가 복잡 다양해지면서 현재 사회는 인간성마저 양극화 진화했다고 리처드 랭엄은 주장한다. 성인,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던 공자처럼 현대 과학은 인간이 사이코패스와 같은 공감 제로의 인면수심의 털 없는 침팬지들(예 :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스탈린, 피노체트, 윤덕영, 이완용, 이승만, 전두환, 윤석열, 아베, 트럼프, 부시 등등)과 노자, 공자, 예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들을 구분한다. 열 길 물속은 알면서 왜 한 길 사람 속은 모를까? 인간을 과학의 대상으로 연구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다. 에드워드 윌슨의 말대로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이 이룬 사회는 사회생물학 체계 안에서 거시적 관점으로 인간과 인간 사회를 연구해야 한다. 난 인간을 동물학의 연장선에서 ‘인간 동물학(Human Animalogy)’이라는 학문을 만들고 있다. 기존 인문, 사회과학과 사회생물학을 통섭하는 학문이다. 노자는 에드워드 윌슨보다 2천 년을 넘어선 사회생물학자이기도 하다.
Power is Justice!
“정의란,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철학자.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 B.C459~B.C400)
사피엔스가 농업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수렵채집을 위한 이동 문화에서 정착 문화로 바뀌었다. 진화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헴은 1999년 출간한 『숲속의 평등 Hierarchy in the Forest』에서 수렵채집 사회의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도덕심을 진화시킨 이타적인 인간은 서로 배려하며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눠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숲속이나 초원에서 늘 약한 존재였다. 살기 위해서는 협력해야만 했다.
평판과 여론 – 루소의 딜레마
루소의 딜레마라 불리는 수렵채집인 이야기를 살펴보자. 수렵채집인 7명이 사슴 사냥에 나섰다. 7명의 수렵채집이 열심히 소통하고 협력해서 사슴 한 마리를 잡으면 사냥에 나선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사냥에 실패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굶어야 한다. 조심성 많은 사슴은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여 바시락 소리에도 놀라 도망친다. 7명의 사냥꾼은 어렵게 획득한 언어능력으로 사전에 사슴을 어떻게 사냥할 것인가 논의한다. 너는 여기를 포위하고 너는 창을 던지고 너는 돌을 던저라. 그러나 단 한 번의 기회에 사슴을 사냥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허탕을 치는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7명의 사냥꾼 중 한 명이 오늘도 사냥에 실패할 예감이 들자 자신의 식구만 먹기 위해 눈앞에 지나가는 토끼를 잡았다고 하자. 한 명의 사낭꾼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토끼 잡는 소리에 놀라 예민한 사슴은 벌써 도망가고 말았다. 나머지 6명은 굶주려야만 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것인가? 나머지 6명과 그의 가족은 굶주려도 되는 것인가? 나머지 6명은 토끼를 잡은 배신자 사냥꾼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일명 무임승차자의 딜레마이다. 무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무임승차자가 적다. 그게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서술한 뒷담화의 진화다. 말과 소문은 그 무엇보다 빠르다. 토끼를 잡은 배신자 사냥꾼의 소식은 온 부족에게 퍼지게 되고 죽음은 모면했지만 무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무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배신자는 하이에나들의 맛있는 저녁 식사가 되었다.
농업은 필연적으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게 된다. 자연선택에서 사피엔스는 인위적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야생의 동물들을 가축화하고 가축을 이용해 농업에 활용하니 더욱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계급(Class)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많은 잉여 생산물을 소수가 독점하자 이걸 전문적으로 지킬 무장된 군인들이 필요하기 시작했다. 잉여 생산물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얻기 위해 땅이 필요했다.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와 전쟁을 통해 강제로 땅을 빼앗았다. 합법적으로 대량 살인이 시작된 것이다. 땅이 늘어나니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줄 국가를 섬기는 조건으로 세금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대규모 사회,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인구는 점차 늘어나 도시화가 진행된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모일수록 평판 기능이 사라진다. 악성 루머와 사실의 왜곡이 일어나지만 옳고 그름은 힘 있는 자들의 입맛에 따라 판가름 난다. 힘 있는 자에게 아첨하는 간신배들이 생기고 힘없는 자들을 착취한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갖길 원하지만 소수의 기득권을 가진 권력 엘리트들이 그 자리를 쉽게 내줄리 없다. 인간 세상은 도덕심을 획득하여 동료와 협력하면서 전 지구에 퍼졌지만 무리가 커지고 사회가 커지면 힘 있고, 잔인하고 사악한 소수에 의해서 지배와 착취당하는 법이다. 계급사회란 차별이 정당화되는 시스템이고 법과 정의는 통치자의 권력유지에 유리한 법이 만들어지고 규범이 생기며, 거기에 따른 처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계급사회는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 B.C459~B.C400)의 말대로 “정의란,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 기후 조건상 농업이 어려운 지역을 제외하고서는 농업을 통해 정착 생활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농업은 천지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굶주림과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법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도 소수의 엘리트들은 백성들의 피 터지는 통곡 소리를 외면하고 제 놈들 배를 채우고자 백성들을 더욱 착취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그러한 일들이 수천 년간 사피엔스 사회를 지배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신흥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들이 무리하게 참전한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에 의한 대불황과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까지 겹쳐 폭발 직전의 백성들에게 기름을 부었다.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엄청난 세금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은 피의 혁명을 일으킨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서막이 꿈틀대고 신분 계급제의 불평등에 맞선 최초의 혁명이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인 루이 16세(1754~1793)는 1793년 1월 12일 단두대(guillotine)에 목이 잘려 나가는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바다 건너 영국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를 심각히 여겨 한 권의 책을 서술한다. 1790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이라는 글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맹목적 이성이 신의 목소리를 가장한 악마의 행위라 규정한 것이다. 그가 바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라는 사람이다. 버크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영국의 정치인이자 연설가이다. 이후로 수구꼴통의 보수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사람이다. 그나마 그의 주장은 보수의 생명은 품격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극우 꼴통보수(극우 친일세력과 친미세력)와 일본의 극우 보수에 무슨 품격이 있나? 침팬지의 공격성과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뻔뻔함, 안하무인(眼下無人)한 극악 무도함과 적반하장(賊反荷杖)식의 도적놈들이 판치고 있지 않은가! 나라를 팔아 처먹고도 천수를 누리는 나라. 이완용과 윤덕영 같은 친일 매국노들이 처벌은커녕 떵떵거리면서 사는 나라. 지금도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마녀사냥식의 민주인사들을 깜방에 못 보내서 난리치는 나라.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제발로 찾아가 “저희나라(제발! 저희나라라고 낮춰 말하지 마라! 친일 잔재가 아직도 언어적 습관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라 말하는 것이다)를 맛있게 잡수세요. 저희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이게 과연 사람 새끼이고 진정한 보수란 말인가!
난, 분명히 밝힌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보수는 민족주의에 기원한다. 난 주역과 도덕경을 쓴 사람은 (고)조선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가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보수는 내 나라를 지키고 내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고 내 나라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고 내 나라의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새끼들이 어찌 보수의 탈을 쓰고 스스로 보수라 자칭하는가! 털 없는 침팬지들이!!
보수의 탈을 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침팬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시험만 잘 보는 침팬지 검사와 판사 새끼들, 나쁜 놈들 감방에 못 가도록 천문학적 돈을 받아 처먹고 전관예우를 이용해 정의를 땅바닥 내 처박는 법꾸라지 침팬지들! 평판과 여론을 국민에게 제대로 작동하게 하여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야 놈들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적폐가 되어가는 기자 침팬지 새끼들, 친일 매국의 쓰레기 언론들이 이름 없는 의병들이 피 흘려 가며 지킨 나라를 소인배 새끼들이 활개 치도록 같이 북치고 장고치고 있으니 과연 도덕이 뭔지나 아는 물건들이냐!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털 없는 침팬지들이 모럴 헤저드에 젖어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몰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 노자의 권위를 이용해 세상에 호통치고 싶은 게 내가 이 글을 쓰는 진정한 이유이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이완용과 윤덕영을 못 이겨 먹어서 안달이니! 침팬지가 지배하는 세상! 끔찍하도다!
또 흥분했다. 침팬지 사회가 이루고 있는 서열 중심의 위계 구조는 왕이나 귀족이 지배하고 노예가 존재하는 인간 역사의 오랜 정치사와 아주 흡사하다. 동물 사회는 위계와 강압에 위한 서열(계급)이 힘이자 정의가 되는 사회이다. 또한 알파 수컷이 힘이 약해지면 크 틈을 파고타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구조를 바꾼다. (프란스 드 발, 침팬지 폴리틱스) 강압에 의한 서열 중심의 위계 구조하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전통적인 정치 형태인 무력으로 때려잡는 공포정치와 독재자가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그게 공산주의 새끼들이 스스로 자멸한 이유이고 세상에서 가장 악질 국가인 북한이 증명해 줬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이타심과 자비심, 배려와 양보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다. 우리는 서양의 제도 없이 수 천 년을 이 땅에 뿌리 박고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온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자 나라다. 우리가 스스로 침팬지의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한 인면수심의 침팬지 본능을 가진 사이코패스를 구분해서 차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단언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또다시 털 없는 침팬지들에게 지배받는 노예제 세상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미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
침팬지와 보노보, 사피엔스의 DNA(염기서열) 1.3%의 차이는 두뇌의 크기와 언어 소통 능력 이상으로 ‘우리 감정(We feeling)’을 인지하였기에 사피엔스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침팬지와 보노보’를 관찰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하였다. 신뢰하고 협력하고 공동의 목표와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게 만든 초 사회적 능력 덕분이다. 어찌 보면 협력하는 사피엔스는 서로 돕고 배려하는 것이 집단에서 유리한 평판을 쌓는 것이고 그러한 행위는 행위의 주체인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똑똑한 극단적 이기적 존재들은 이러한 사실을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DNA와 뇌에 각인시킨 결과인지도 모른다.
결국 자연선택과 집단선택은 매 순간 이기적인 선택과 결정을 하는 털 없는 원숭이들을 도태시키고 오래된 조상들이 체득한 똑똑한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 1943~ )의 예언이 맞았다.
'미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
본 내용은 제가 서술하고 있는 노자 도덕경 본문 중 도입부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