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숙의 ‘몸짓’을 읽다.
멀리 양산에서 신작수필집을 보내주신 김응숙 작가의 휴대폰에 문자를 보냈다. “도서관에 오면서 우편함에 들어있던 수필집‘몸짓’을 가져왔습니다. 표제작 ‘몸짓’을 읽었습니다. 참 대단하다는 탄성이 전부입니다. 깊고 섬세하고 이제 너그러워졌습니다. 수필을 성찰의 문학이라고 하는 까닭을 증거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수필집을 선물 받으면 맨 먼저 표제작을 읽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문장이 빼곡한 긴 글(작품)을 두 세편 읽고 짧은 글 한편정도를 읽는다. 작가의 서사와 문장을 쉽게 엿볼 수 있고 문학적 기율성도 가늠하기 쉬워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와 감동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첫째다.
깊고 섬세하다는 언명이 주제를 다루는 작가의 역능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깊다는 말은 예컨대 가을이 깊어진다거나 마음 씀이 깊다거나 우물이 깊다는 등의 사물의 형상과 무형의 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 그러니 글을 두고 깊다고 하는 것은 작가의 정신이 사물의 순수성을 마중하는 정도를 뜻하기도 할 것이다. 섬세하다는 표현도 엇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다만 깊다는 말이 드러내지 못한 심연의 파장을 더한 표현을 두고 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정교하다는 뜻은 당연하다. 너그러워지는 것은 사물의 이치와 현실들의 사태를 깜냥하게 되고 그것들을 연민하는 마음이 생긴 후에야 가능해진다. 비로소 돌아본다는 것의 의미를 깨득하는 것이다. 순수한 사물 그 자체를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는 것을 품고 보듬는 일이다.
글이 다가오는 풍미 혹은 감동과 재미, 신비스러운 어떤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감상일 것이다. 주제가 주는 거룩함이나 열정과 활기, 여운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열뜸이 가라앉고 사그라진 후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표현 수단이나 글의 구조 그리고 주제와 문장의 미학적 조화들을 말하는 것은 평문에 가까울 것이다. 문학이 미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미학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 사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조건을 연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말이야말로 지리멸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심층의 개별적인 것일진대 무엇으로 미의 기준을 잡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그 느낌은 동행한다. 언어는 실은 아름다움을 도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작가정신인 주제와 선택된 단어의 힘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적확한 구조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글은 스스로 빛나며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글을 통해 만난다. 내가 발견한 것을 당신이 알아보아 주기를 기도하면서. 작가 김응숙의 고통과 상처의 언어가 위로의 염원을 담고 이 가을 우리에게 왔다. 왜인지는 모르나 수필집을 선물 받으면 괜히 안쓰럽고 미안해진다. 슬픔도 섞였을 것이다. 근거를 모르지만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 중에 슬픔이 가장 순수한 지경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참 오래전부터다.
당시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낮이면 낮잠을 자고 밤이면 밤잠을 자며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좁은 단칸방을 청소하고, 동생들을 챙기고, 정리할 것도 없는 부엌세간을 정리했다. 나름 할 일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낮은 늘 공허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후로는 밖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종종 벽을 향해 웅크리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고된 노동으로 하루를 마친 어머니의 앓는 소리와 그 소리를 숨죽이며 듣고 있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밤잠을 잤다. 자면서도 어금니를 앙다물거나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벽을 밀어댔다. 마치 고치 속 애벌레 같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식구 중 아무도 내가 고치 속에서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찬 기운이 얼굴을 엄습했다. 두 볼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밤하늘에는 한쪽이 이지러진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소박한 사람들이 이마를 맞대고 사는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비추었다. 마당 구석에 쌓인 눈 더미가 푸른 달빛을 되쏘고 있었다. 달빛은 깨진 유리창에 붙여놓은 비닐에도, 늘여진 빨랫줄에도, 문도 없는 대문 기둥 옆에 있는 녹슨 드럼통에도, 아마도 밥알과 김치 찌꺼기가 얼어붙어 있을 수채에조차도 푸른 물감을 뿌렸다. 누추하고 초라한 마당에 푸른 물감이 스미자. 마당은 마치 조명을 받은 무대 같아 보였다. 내 눈앞에 푸른 무대가 둥실 떠올랐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한 발을 뗐다.
달밤의 체조란 이런 곳을 보고 하는 말이리라. 달력 속 발레라라나 화면 안 스케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춤을 췄다. 저 멀리 아득한 은하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가득했다. 두 발로 허공을 딛고 손끝으로 달빛을 감치며 너울거렸다. 순간순간 황홀하고 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목적하지 않은 그 행위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요즘도 가끔 김연아선수의 피겨스케이팅 장면을 동영상으로 찾아보곤 한다. 전성기시절 모습도 좋지만 검은 머리를 뒤로 묶고 입에는 치아교정기를 낀 열댓 살쯤의 김연아모습을 더 좋아한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뒷모습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몸짓을 본다. 몸부림치며 고치를 뚫고 나와 비상하기 전까지의, 아직은 위태하고 설익은, 춤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 몸짓을 사랑한다. (‘몸짓’)
지문이 긴 것은 일상과 사물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를 말하고 싶어서다. 그의 작품 모두를 관통하고 지배하고 있는 언어 조탁, 그러니까 그 특장이, 어쩐지 한 소녀 아이의 간절한 꿈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암울했던 시대와 그 질곡의 밑바닥을 몸으로 통과해야 했던 소녀 아이를 견디게 만들었던 희망의 모습이 언어 조탁으로 현실화 한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흐릿했으나 어느새 몸에 새겨져 버린 소망의 좌표가 현실태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 소녀 아이를 통한 가족사와 그 아이가 성장을 향해 감당해야 했을 서사가 서늘하다. 글이 주는 정조, 예컨대 삶의 조건의 열악함이나 헐거움이 제빛을 숨죽인 동지 긴 겨울밤의 푸른 달빛처럼 명멸한다. 이윽고 노여움이 삭아 너그러워진 모습으로 스스로 일으켜 세운다.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를 묵묵하게 순응 속에 살아낸다. 이상할 정도로 기묘한 일이지만 실제의 내용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시공간의 격리되고 난 후에 좀 더 명료하게 분별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 과정을 좀 더 깊게 그리고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너그러워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말하자면 정화를 거쳐 스스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전성기의 김연아보다 치아교정기를 낀 열댓 살 무렵의 꽁지머리 김연아를 더 좋아한다는 선언이 스스로 너그러워졌음을 대변한다. 문학은 외연을 빌려 자신의 심사를 나타내는 수법을 상찬한다. 아이러니를 빌리든 역설에 의지하든 희화화한 알레고리를 구성하든 표현방식을 말할 것이다. 말하자면 완성된 절정기의 김연아보다 도약을 위한 수련기의 김연아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말이 의미를 일으켜 그의 삶의 지평을 드러내는, 생의 태도를 보여주는 수법 같은 것이다.
단칸방의 녹슨 쇠못에 걸린 긴 달력을 빌려 과거를 추체험으로 이끌고 있다. 기껏해야 국회의원 얼굴이 동그랗게 실린 한 장짜리거나 한복 입은 여인네가 그네를 타거나 절을 하는 달력이 걸리는,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열두 장짜리 긴 달력(발레리나의 율동을 담은 사진)이 걸렸었던 기억이 비집고 나와 작가의 삶을 마치 생전 처음 본 것처럼 멈추고 서 있도록 만들고 있다. 기어코 생의 여울을 발견하고 삶 하나를 고요하게 남기게 한다. 그것이 아마도 수필문학이 주는 미덕일 것이다.
전등을 끄자 집은 삽시간에 그림자로 가득 찬다. 화선지가 된 식탁 옆 벽 위로 날렵한 가지 몇 개가 난을 친다. 갓 싹을 틔운 작은 잎사귀가 가지 끝에 돋아나 있다. 흰 벽면에 간결하게 그려진 수묵화는 간간이 바람에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한 마리 새가 날아와 가지에 앉고 잎사귀 옆에 매화를 닮은 꽃이라도 피어 화조도를 완성할 것처럼 보인다.
안방 문들과 문으로 굴곡을 이루며 그림은 이어진다. 더 많은 가지와 잎들이 더 큰 그림을 만든다. 창밖 산사나무들뿐만 아니라 생강나무도 섬세한 필치를 더한다. 거실 소파 뒤 벽면은 배롱나무 가지로 출렁인다. 마치 집 전체가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 속에서 수초들이 일렁이는 것 같다. 액자 하나 걸지 않고 하얗게 비워둔 벽면이 진가를 발휘하는 시간이다.
사실 나는 그림자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다. 그림자는 한낮보다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에 짙어지고 길어진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야간학교를 다니던 나는 친구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곤 했다. 큰길을 피해 되도록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산자락에 있는 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은 이미 교사의 짙은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하는 백열등 아래 계단에 앉아 운동장이 완전히 어둠에 잠길 때까지 바라보았다. (…) 그즈음 나는 인생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그림자는 그냥 어둠일 뿐이다. 밖으로 나와 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나를 밖으로 끌어내어 준 것은 글이었다. (…) 실체를 가진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게 그림자다. 햇살 아래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반드시 따라붙는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기는 하지만 분명 그것은 햇살을 받는 앞면이 투영된 뒷면이다. 어찌 보면 그림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음영을 그려 넣는 것처럼 존재를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내기 위한 일환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자 집)
문학은 서사(외부행동묘사이든 그것을 내재화시키든)를 통한 이야기 세계다. 사물과 관계를 해체하고 다시 자리매김시켜 순수한 사물성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림자의 집’을 읽으며 작가의 관찰과 집중이 새삼스러웠다. 문득 비추는 나무들이 외등의 불빛에 투영되어 움직이는 그림자 형상을 빌려 이윽고 내면에 고여 있는 생의 그림자를 불러오고 삶의 자태로 재현한다. 외부의 사물과 사태에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그 투사를 빌려 다시 서사구조를 일으키고 내재화된 심연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도 자연스러워 마치 본래인 양 싶은 것이다.
하나의 순간과 하나의 정동이 영감을 불러오고 그것이 작은 파동이 되고 통찰로 이끌 때, 늘 대하던 평범한 것들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엇을 홀연히 자각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동질의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왜 아니겠는가. 통찰은 자기애에 그치는 협소한 자아를 세계에 비추어 자유로운 정신을 도모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세상에 외지고 어둔 것들을 그림자로 은유한다. 김응숙은 모든 것은 그림자가 따르고 그림자는 오히려 그림의 입체감을 살리는 음영의 역할과 존재를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내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항상 깨어있고자 하는 자에게 보이는 세상 모습일 것이다.
김응숙 작가는 이야기꾼이다. 수록된 작품을 읽으며 불현듯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려 유려한 문체(서사를 부축하는 감칠맛 나는 언어의 조탁이 능숙하다.)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는 누구보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모든 수록 작품이 그러하지만, 작품 ‘치마’는 그 말이 그냥 하는 공치사가 아님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얇은 갑사 두 겹이 서로를 얼비치는 금빛 다홍치마를 놓고 여인 3대의 삶이 영문 모르고 당해야 했던 한국전쟁 속에서 부침한다. 백 년이 지난 치마를 놓고 전개시키는 서사를 따라가노라면 그가 이야기꾼임이 저절로 다가온다. 전쟁으로 네 딸을 데리고 피난한 외할머니의 삶이 있고, 그 시대가 놓여있고, 파편화된 딸들의 삶이 있고, 종래 외손녀인 화자의 시선이 놓여있다. 바람과 꽃을 통해 여인 삼대의 생을 마치 피부로 감각하듯 그려낸다.
수록된 작품 모두가 그러하다. 작품 ‘귀’ ‘신’ ‘새’ ‘신의 한 수’ ‘미싱과 타자기’ ‘노란 구두’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게 한다. 특히나 ‘신의 한 수’는 작가가 바둑을 두지 않는 초로의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국자들의 심리와 결기, 그 치열함의 육체성과 사변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형상화한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누군가는 양날의 검을 휘두르듯 화려한 기풍을 가졌는데 그 검은 상대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베기도 했다. 또 다른 이는 도끼처럼 선이 굵고 힘 있는 기풍을 가졌는데 섬세한 마무리가 되지 못하다 보니 다 이겨놓은 판이 뒤집어지기 일쑤였다. 더 오랜 후에 기풍이란 것이 결국 기질에서 오는 것을 알게 되자 왜 바둑판이 인생 축소판인지 (…) 결국 기풍이란 상황에 대응하는 감정 패턴인 모양이다. 사람이 감정을 뜻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바둑을 둔다는 것 또한 승勝이라는 정처 없는 부표에 가닿는 게 아니라 복기를 통해 자신을 살피고 되돌아보는 과정…
바둑을 두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시선이다.
‘노란 구두’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야기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표현력 더불어 지식욕이 아우러진 다층적이고 정교한 서사 전개를 보여준다. 4번 척추골절로 입원 치료받은 체험을, 텃밭과 장다리꽃, 노랑나비의 군무, 이윽고 배추벌레의 생물학적 특징(무척추)을 비고하고 인간의 직립성의 의미를 추론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척추는 큰 대가를 치렀다. 일자이던 척추는 에스자로 휘었고 (…) 4번을 포함한 요추는 인간으로의 탈피라는 아주 오래된 서사를 지닌 척추’라는 지경에 도착한다. 그의 글에 대한 천착의 밀도가 과히 이렇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일상을 굽다’ ‘4391’ ‘잡곡밥’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지나치기 어렵게 하며 수필이 성찰의 문학이라는 언명을 충분하게 감당한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응숙의 글 세계는 일변 사변적인 인상도 풍긴다. 경험의 세계가 사유의 질료로서 거듭 곱씹어가며 오늘을 반추하고 있어서다. 체험의 구체성과 마찰을 이루는 느낌도 주는 것 같아서다. 누군가 강력하게 논거 했던 문학의 정치성(‘플라톤의 정치는 도덕이다.’를 염두에 둔 본성을 다루는 도덕률로서의..)과 윤리, 그리고 미학이 반성적 사유로 흐르고, 문장의 유려함이 그것을 더욱 어필시킨다는 점은 조심스럽기도 한 것이다. 반성적 사유 공간에는 자칫 현재가 부재하기 쉽다. 말하자면 속물 세계의 냄새와 육체성이 휘발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을 통과하는 무한경쟁과 개인과 개인, 사회 간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것 같은 간극은 떠올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수필의 한계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천형(?)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수필 장르의 짧은 지면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다만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김응숙의 작품집 ‘몸짓’은 그간의 수필이 분명하게 천착해온 성찰의 서사화에 누구보다 성공하고 있는 것은 뚜렷하다. 논리거나 서술을 벗어나 사물과 관계들에 형상화를 끊임없이 탐색해내고 그것을 구조로 탄탄하게 엮는 때문이다. 어느 한 순간 시공간에서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과정의 서사가 구조 근간을 이루고 그것이 오늘의 현실에 투사된 구조로 이끈다. 짧은 지면을 빌려야 하는 수필에서 이처럼 성찰을 서사구조로 확립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는 것이다.
작품집‘ 몸짓’은 이야기의 화수분 같다. 서사의 연결고리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체험의 창의적 발상이 모여 하나의 일관된 서사 체계를 이룬다. 샘물처럼 솟는 서사 능력과 묘사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나의 사물이 기억을 소환하면 이야기가 이야기의 가지를 뻗치고 또 가지를 친다. 단순하게 경험과 체험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상상력과 지적 열정, 그리고 헤아림을 동반한다. 자아에 대한 성찰을 여기까지 일구고 그것을 서사로 성공시킨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다섯 해전의 인연을 잊지 않고 귀한 수필집을 보내주신 고마움을 미욱한 감상문으로 대신한다. 그의 더한 문운을 기원하면서 작품 ‘언어술사’의 마지막 문장으로 글을 닫는다. 자신의 문학에 대한 심회인 듯싶어서다.
나는 어설픈 언어술사의 길을 가고 있다. 나의 단어와 문장에는 눈물이 번진다. 이 눈물을 진주로 만들고 싶다. 내 글에서 파도치는 슬픔이 문장 사이를 드나들며 상처를 위로하고, 아물게 하고, 마침내 영롱한 진주를 품게 되면 내 슬픔은 완성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술법의 완성은 금이 아니라 납에서 금으로의 여정에 있음을, 그저 한 발을 떼고, 진심 어린 글 한 편을 쓰는 일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혼자서 되뇌어 본다. (‘언어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