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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1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2010 남아공월드컵 개막
남아공월드컵 개막
지구촌의 축구대제전 2010 남아공월드컵이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에서 열린 개막식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개막식에는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아프리카 첫 월드컵을 축하했고, 뮤지컬 '라이언킹'의 작곡가 레보 엠이 총연출을 맡아 개막식 행사를 지휘했습니다.
이번 대회는 조금 뒤 밤 11시, 개최국 남아공과 멕시코의 A 조 첫 경기로 한 달간 열전에 들어갑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대회는 2006년 우승팀 이탈리아를 비롯해 32팀이 8개 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치른 뒤 16강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립니다.
우리 대표팀은 개막 다음날인 내일 저녁 8시 반 그리스를 상대로 16강 진출의 분수령이 될 조별리그 첫 경기를 치릅니다.
김재형 [jhkim03@ytn.co.kr] /YTN 2010-06-11 21:07
http://www.ytn.co.kr/_ln/0107_201006112107052783
2009 - 김대중 전 대통령,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연설
DJ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6·15 선언 9돌’ 강연…“국정기조 안 바뀌면 정부도 국민도 불행”
김대중 전 대통령은 11일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매우 걱정”이라며 “방관하면 악의 편”이고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연설에서 “지금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이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준비된 원고 없이 한 즉석 연설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예로 들며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려면 (국민들이) 정의롭게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며 “독재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는 것은 용서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를 오래한 제 경험과 감각으로 볼 때 만약 이명박 정부가 현재와 같은 길로 나간다면 이명박 정부도 국민도 모두 불행해진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을 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의롭게 살아온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는다”며 “노 전 대통령이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문상객의 10분의 1이라도 나서서 ‘전직 대통령을 모욕 주고 이렇게 수사하면 안 된다’고 서명했다면 노 전 대통령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와 관련해 “전직 대통령들이 합의한 6·15와 10·4 선언을 이명박 대통령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충고한다”며 “(지난해 7월)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것을 다시 복구하고, 개성공단에 노동자 기숙사를 지어주기로 한 약속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북한에서 매일같이 남한에 무력대응하겠다고 한다. 전세계에 60년씩이나 이러고 있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핵무기 반대는 6자회담에서 해야지 절대 전쟁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일어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날 행사에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고위관리, 주한 외교사절, 정세균 민주당 대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등 각계 인사 1000여명이 참석했다.
권혁철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한겨레 2009-06-11 오후 08:18:30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59979.html
2009 - 한진중공업, 한국 첫 쇄빙선 ‘아라온호’ 진수
2009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순수 국내 기술로 건조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소 ‘아라온호’ 진수식이 열렸다.
아라온호는 남극 대륙 주변이나 북극해처럼 얼어있는 바다에서 단독으로 항해할 수 있는 쇄빙선(6,950t급)으로 길이 110m, 폭 19m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아라온’이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로 바다를 의미하는 ‘아라’에, 전부나 모두라는 뜻인 관형사 ‘온’을 붙여지었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10 11:19:52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2009 - 안네 프랑크 자필 일기, 일반에 공개
전쟁문서연구원에서 박물관 이전..영구 전시
안네 프랑크의 자필 일기가 일반에 공개된다.
11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원래 명칭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따르면 그동안 전쟁문서연구원에 보존돼 온 안네의 자필 문서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 전시된다.
안네 프랑크의 자필 문서들은 그녀의 80회 생일인 12일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자필 문서들 가운데는 안네가 1942년 7월 은거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6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과 역시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2권의 학교 학습공책 등이 있다.
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종전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안네 스스로 해방 이후 일기를 책으로 엮을 생각에 퇴고한 360매 분량의 원고도 함께 전시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안네 가족은 1944년 8월 나치에 발각돼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안네는 수용소에 끌려간 지 6개월 만에 발진 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뒀고 가족 중 아버지 오토 프랑크만 생존해 1947년 안네의 일기를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책으로 펴냈다.
한편, 지난 1960년 5월 개관한 안네 프랑크 박물관은 안네가 가족과 함께 2년간 나치의 감시를 피해 은거했던 건물에 만들어졌으며 안네 가족의 은신처였던 이른바 '비밀 부속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브뤼셀=연합뉴스) 김영묵 특파원 economan@yna.co.kr /연합뉴스 2009/06/12 03:34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6/12/0200000000AKR20090612005100098.HTML?did=1179m
2008 - ‘전설의 체조요정’ 코마네치 방한
현대캐피탈 갈라쇼 총연출
‘체조 요정’ 나디아 엘레나 코마네치(47·루마니아 출신으로 1989년 미국 망명·사진). 체조를 잘 모르더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현역 시절 코마네치는 ‘아름다움’을 채점하기 때문에, 완벽한 점수란 있을 수 없다던 체조에서 7차례나 10점 만점을 받았다. 그래서 <타임>으로부터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몬트리올(1976년)과 모스크바(1980년) 두차례 올림픽에서 9개의 메달을 따냈는데, 이 가운데 5개가 금메달이었다.
선수 시절 경기장에서 거의 웃지 않아 ‘작은 바위 덩어리’로 불렸던 그가 온화한 미소를 가득 품고 한국에 왔다. 그는 13일부터 사흘간 올림픽공원 한얼광장 특설경기장에서 열리는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세계 체조 갈라쇼’에 총연출과 선수단 단장을 맡았다.
코마네치는 갈라쇼를 이틀 앞둔 11일 기자회견에서 “아주 특별하고 완벽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이는 이번 체조 갈라쇼에는 아테네올림픽 3관왕 카탈리나 포노르(루마니아), 세계선수권과 유럽선수권을 각각 두 차례 제패한 이반 이반코프(벨로루시) 등 세계최고 기량의 전·현직 선수 10여명이 출연한다. 마루, 평균대, 링, 리본, 훌라후프 등 기계·리듬체조 외에도 화려한 의상과 스포츠 아크로바틱, 듀엣 평균대, 단체 평행봉 등 일반 대회에서 볼 수 없는 연기가 펼쳐진다.
국내에선 지난해 9월 세계 리듬체조선수권대회에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 화제를 모았던 신수지(17·세종고 2) 등 남녀 국가대표 8명이 출연한다. 신수지는 “체조계의 전설적인 인물과 함께 굉장한 쇼에 출연하게 돼 영광이다”고 말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리스트(도마) 여홍철 경희대 교수(37·스포츠지도학과)도 은퇴 5년만에 다시 마루에 나서 특별 공연을 펼친다.
홍석재 기자 /한겨레 2008-06-11 오후 06:50:50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292707.html
2004 - 미국 LA 고속도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표지판 헌정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110번 프리웨이와 샌타모니카 쪽 10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인터체인지 이름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을 선거구로 하는 캘리포니아주(州)의 민주당 상원의원인 케빈 머레이(Kevin Murray)가 도산기념사업회·밝은미래재단과 공동으로 발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2003년 1월 북미 이민 100주년에 즈음해 한인 밀집지역을 통과하는 10번 프리웨이 일부 구간에 한국인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발의해 캘리포니아주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8월 26일 캘리포니아주 하원은 찬성 39, 반대 0으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교통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같은 달 30일 본회의에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하는 안을 확정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생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남쪽을 가로지르는 10번 프리웨이는 안창호의 주 활동무대였던 리버사이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조선
2003 - 미국 프로 테니스선수 앤드리 애거시, 1000번째 경기 수립
애거시 ‘1000경기 달성’ 자축
퀸스클럽테니스…러책 꺾고 통산 766승
앤드리 애거시(33·미국)가 프로 데뷔 17년만에 프로 통산 1000 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세웠다.
애거시는 11일(한국시각) 영국 런던 잔디코트에서 열린 퀸스클럽테니스대회(총상금 93만6천달러) 2회전에서 피터 러책(오스트레일리아)과 통산 1000번째 경기를 가졌다. 경기는 애거시가 2-0(7:6〈5〉/6:4)으로 이겨 1000회 출장을 자축했다.
1986년 2월 미국 라퀸타 투어대회에 와일드카드로 처음 투어 경기에 출전해 프로 세계에 뛰어든 애거시는, 이로써 통산 766승(234패)을 거두면서 남자테니스사상 8번째로 1000경기에 나선 선수가 됐다. 최다경기 1위는 70년부터 44살인 96년까지 현역으로 뛰어 1425경기(1155승)를 기록한 지미 코너스(51·미국). 애거시의 1000경기에는 국가대표로 출전한 데이비스컵 35경기도 포함되어 있다.
애거시는 “경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이기는게 훨씬 중요하다”며 “윔블던에서 좋은 성적을 내 올시즌을 세계 1위로 마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92년 윔블던 우승으로 세계 1위에 오른 애거시는 94년 유에스오픈, 95년 오스트레일리아오픈 우승으로 세계 정상권을 꾸준히 유지하다 97년 여배우 브룩 쉴즈와 결혼한 이후 122위까지 떨어지는 등 라켓을 놓을 위기에 빠졌다. 애거시는 이후 쉴즈와 헤어진 뒤 99년 프랑스오픈과 유에스오픈 우승으로 재기에 성공했으며, ‘테니스 여제’ 슈테피 그라프와 재혼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총 상금수입 2703만 달러, 57회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박원식 기자 pwseek@hani.co.kr /한겨레 2003.06.11(수) 18:26
http://www.hani.co.kr/section-006006000/2003/06/006006000200306111826213.html
1993 - 영화 <쥬라기 공원> 뉴욕서 개봉
93년을 '공룡의 해(The year of Dinosaur)'로 만든 <쥬라기 공원>은 6개월 만에 8억 달러라는 영화사상 최대의 수익을 기록하였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실제 살아있는 공룡을 보는듯한 사실감을 전해주는 특수촬영으로 갈채를 받았다.
제작팀은 공룡을 재생시키기 위해 근 1년 동안 생물학자와 유전공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티라노사우르스'라는 약 6m 길이의 공룡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시켰다.
섬유질 유리로 된 공룡 틀에다 140kg 정도의 진흙을 입혔고 표피는 라텍스 광택제를 발라 진짜 공룡같이 보이게 하였다.
가장 작은 공룡인 T-렉스(일명 왈도)는 머리, 팔, 꼬리 등에 컴퓨터 칩을 설치하여 이를 리모콘으로 작동시켰다. 다양한 공룡 제작을 위해 60명 이상의 미술가, 엔지니어, 인형모형제작자가 동원되었고 1억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일본인의 재원을 밑바탕으로 제작되어, 미국은 멍석만 마련해 주고 막대한 수익은 일본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는 비판도 있었다.
정반합 (오늘의 역사) /사색의 자유 2007/06/10 20:10
http://simfe.egloos.com/1313062
- 영암 월출산 (공중전화 카드)
1988 - 변산반도, 월출산 국립공원 지정
변산반도 국립공원: 1988년6월 11일 지정
월출산 국립공원: 1988년6월 11일 지정
(국립공원) /위키백과
- Venera-Halley Project
1985 - 소련의 금성탐사위성 베가1호의 착륙선이 금성에 도달
<베가 1호> 소련의 금성과 핼리 혜성 탐사선, 4,000 kg
발사 ; 1984년 12월 15일
베가 1호는 1985년 6월 11일에 핼리 혜성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금성을 지나갔다. 베가 1호는 금성의 대기의 가운데 층의 구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탐사봉을 낙한산으로 금성 대기 중에 투하하였다. 이 탐사봉의 토양 실험은 실패했지만 탐사봉이 낙하하는 동안에 고도 54 km 지점에서 약 48시간 동안 떠 있었다. 베가 1호가 핼리 혜성을 만난 것은 1986년 3월 6일 이었다.
민경기 2008-05-28 18:57:13 /항공우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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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한국은행, 천원권과 5천원권 새 지폐를 발행
한국은행 나 1,000원권
제조 : 한국조폐공사
도안 : 퇴계 이황 초상, 도산서원
크기 : 151x76mm
발행개시 : 1983년 6월 11일
기타 : 기계 감응요소 채택, 위 변조 방지요소 강화, 맹인용 점자표시, 유색용지 사용
한국은행 다 5,000원권
제조 : 한국조폐공사
도안 : 율곡 이이 초상, 오죽헌
크기 : 156x76mm
발행개시 : 1963년 6월 11일
기타 : 기계 감응요소 채택, 위 변조 방지요소 강화, 맹인용 점자표시, 유색용지 사용
1982 - 영화 <E.T.> 미국에서 최초로 개봉
E.T. 가 탄생하기까지
1982년 탄생된 E.T.는 대단한 문화 현상을 일으킨, 영화사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다.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장면을 재생하였음은 물론 아카데미 수상자인 작곡가 존 윌리암스가 주제음악을 디지털로 재생하여 새로운 음향을 제공하게 되었다.
E.T.는 1982년 6월 11일 미국에서 최초 개봉하여 4억 달러의 흥행 기록을 올려 당시 유니버셜사 역사상 가장 높은 미국내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전세계적으로 7억 2천만 달러라는 놀라운 수익을 올렸다. 역대 미국 흥행기록을 보면 E.T.는 1997년 재개봉한 [스타워즈]가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15년간 미국 최고 흥행기록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역대 4위의 흥행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81년 1월 모델 제작자인 람발디는 E.T.의 머리를 찰흙으로 제작하고 스크린 테스트를 하였는데 E.T.의 눈은 말년 아인슈타인과 헤밍웨이 사진의 그것을 닮게 만들었으며 스필버그의 요청에 따라 입술은 윤기와 습기를 머금어 인간 입술과 닮게 만들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할로겐 램프를 붙인 가슴판이 장치되었으며 평소 121cm인 E.T.의 신장은 목이 늘어났을 땐 142cm까지 되도록 디자인 되었다. E.T.의 머리둘레는 50cm, 눈동자는 7cm 이며 E.T.는 영화에서 87번의 동작을 거쳤고 얼굴 표정을 위해 열번의 동작을 만들었다. 이 수치는 80년대 기술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E.T.는 아카데미에서도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그 중 4개 부문인 최우수 음악상, 최우수 시각효과상, 최우수 음향효과상, 최우수 사운드믹싱상을 받았다. 골든 글로브와 일본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에서도 수상했으며 The National Film Registry of The Library of Congress의 보관 필름으로 지정되었다.
컨텐츠 기획팀 /무비스트 2002년 3월 26일 화요일
http://www.movist.com/article/read.asp?type=14&id=2915
1979 - 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1972년 7월 주(駐)쿠웨이트 대한민국통상대표부가 설치되었으며, 한국은 1979년 6월 11일 쿠웨이트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7월 17일 주쿠웨이트 대한민국대사관을 개설하였다. 1992년 11일에는 주한 쿠웨이트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0년 8월 걸프전쟁 때 한국은 쿠웨이트에 5억 달러를 지원하고 군의료진 200명과 수송장비, 장병 150명을 파견하였다.
북한은 1968년 3월 주쿠웨이트 북한무역사무소를 설치하고 1970년 11월 무역대표부로 승격시켰다. 쿠웨이트에 걸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 교민이 약 2,000명 거주하였으나 1998년 12월 현재 400명 정도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순수교민은 145명(70세대) 정도이고 나머지는 건설업체 관계자가 대부분이다. 교민단체로 재(在)쿠웨이트 한인회가 있다. ... (쿠웨이트 대한민국대사관) /네이버
1979 - 미국의 영화배우 존 웨인(Wayne, John) 사망
웨인 [Wayne, John, 1907.5.26~1979.6.11]
[어제의 오늘]1979년 美 배우 ‘존 웨인’ 사망
ㆍ‘남자다움’이란 이런 것
1979년 오늘 미국 서부영화의 ‘아이콘’ 존 웨인이 10여년간의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72세였다.
웨인은 강한 남성의 상징이다. 영화 <다이 하드>에서 홀로 좌충우돌하는 브루스 윌리스에게 상대편이 비꼬듯하는 대사가 “네가 무슨 존 웨인이냐”이다. ‘남자다운 남자’인 척하려는 증상을 ‘존 웨인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매리언 마이클 모리슨. 1907년 5월26일 미국 아이오와주 윈터셋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 미식축구 스타이기도 했던 그는 20세기폭스사 소품담당자로 일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때 거장 존 포드 감독을 만난 것이 훗날 대스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1928년 포드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데뷔한 웨인은 라울 월시 감독의 <빅 트레일>(1930)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그는 10년간 수십편의 2류 서부영화에 출연했다.
그렇고 그런 배우로 끝나버릴 뻔했던 웨인을 살린 건 존 포드였다. 포드는 고전 서부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역마차>(1939)의 링고 키드 역을 웨인에게 맡겼고, 웨인은 이 영화로 영화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수십 편의 영화에서 무뚝뚝하면서도 강한 미국적인 영웅을 연기하면서 ‘아메리카니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정의와 질서를 회복시키고 말없이 황야로 떠나는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였다. <아파치 요새>(1948), <황색 리본>(1949), <리오 그란데>(1950), <조용한 사나이>(1952) 등 포드 감독의 영화에서 계속 주연을 맡았다.
웨인은 스크린 밖에서도 강경 보수주의자로 유명했다. 그가 제작·감독·주연한 영화 <알라모>(1960)와 <그린 베레>(1968)는 이 같은 경향을 대변한다. <그린 베레>에서 그는 미국이 싸우는 것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부영화의 퇴조와 함께 웨인도 변해간다. 후기 영화들에선 주로 삶에 지친 영웅을 연기했다. 마지막 영화인 <마지막 총잡이>(1976)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전설적인 총잡이 역을 맡았다. 실제 그는 암 투병 중이었다. <존 웨인은 누가 죽였나>라는 책에 따르면 1954년 핵실험장이 가까운 곳에서 영화 <정복자>를 찍은 게 암 발병의 이유였다.
1970년 <진정한 용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던 웨인은 40년간 2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잘생긴 외모와 함께 느릿느릿한 말투였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10 17:37:3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6101737375&code=100100&s_code=ap005
1937 - 소련의 육군 원수(元帥)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 Mikhail) 처형
투하체프스키 [Tukhachevskii, Mikhail Nikolaevich, 1893.2.16~1937.6.11]
소련의 군부 지도자.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적군(赤軍)의 현대화 책임을 맡았다. 투하체프스키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14년 알렉산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제정 러시아의 육군 소속으로 싸우다 1915년에 생포되었지만 탈출했다. 1918년부터 제정 러시아 육군장교로 모스크바 지구 방위를 지휘했고(1918),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으며(1918), 제5군 사령관으로서 A. V. 콜차크 제독으로부터 시베리아를 탈환하고 카자크 군대를 이끌고 A. I. 데니킨 장군과 싸웠다(1920). 그는 러시아 전쟁과 폴란드 전쟁(1920~21) 및 크론슈타트 반란(1921)의 진압에도 참가했다. 내란이 끝난 후 투하체프스키는 군부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31년부터 소련의 재무장을 지휘했다. 그는 적군의 대대적인 조직개편 및 기술혁신과 일련의 현대적인 군사학교 설립 책임을 맡았다. 또한 현대전에서의 전략적 고려사항들에 관한 많은 책과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참모장(1925~28)과 국방위원회 부위원(1931~)을 역임하고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1935년 소련의 육군원수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1937년 6월 스탈린이 숙청작업을 벌일 때, 다른 7명의 적군 고위사령관과 함께 독일과의 공모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혐의가 벗겨져 공무원령에 의해 복권되었다. /브리태니커
1935 - 미국의 에드윈 암스트롱, FM 공개 시연
[책갈피 속의 오늘]1935년 美서 FM 공개 시연
그가 송신기의 전원을 켰다. 멀리서 전해 온 선명한 소리가 큰 회의실을 한달음에 가로질렀다. 연주자가 곁에 있는 듯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물 붓는 소리와 종이 찢는 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울렸다.
1935년 6월 11일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발명가인 에드윈 암스트롱이 무선학회 세미나장에서 FM 방식을 처음으로 공개 시연했다. 직직대는 잡음, 희미한 신호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 기울여야 하는 AM 방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명징한 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소년 암스트롱은 혼자 노는 시간이 많은 수줍은 아이였다. 모스부호 장치를 만지작거리거나 위대한 과학자와 발명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1909년 컬럼비아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한 암스트롱에게 ‘당연한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무섭도록 몰두했고 확신에 찬 단언에도 질문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괘씸한’ 청년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무선기술을 연구한 암스트롱은 오늘날 전기회로 기술에서 폭넓게 응용되는 중요한 발명들을 해냈다. 특허권 판매로 컬럼비아대 조교수였던 30대 초반에 이미 그는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부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었다. 당시 암스트롱은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행정 업무와 수업 대신 오로지 연구에만 에너지를 쏟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순진하고 완고한 성품이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그를 몰락하게 만든 면도 있다고 후세인들은 평가한다. 시대를 앞서 FM을 발명했지만 그는 홍보를 할 줄 몰랐고 기업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다만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다.
FM의 고감도에도 불구하고 미국 굴지의 무선장치 제조회사였던 RCA는 암스트롱의 발명에 시큰둥했다. 이 회사는 이미 AM 방식으로 많은 투자를 한 터였다. 그러나 암스트롱이 발로 뛴 덕에 군소 방송사들이 FM 방송을 시작했고 서서히 청취자를 확보해 갔다.
좀 더 많은 주파수대를 차지하려는 승부는 암스트롱과 RCA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는 TV 방송에 주력하는 RCA의 손을 들어줬고, 암스트롱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간 사용해 온 FM 방송장비와 시설이 고철이 되고 만 것이다.
패배한 암스트롱은 1948년 RCA와 이 회사 소유의 방송사인 NBC가 FM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그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병마저 얻었다. 1954년 1월 31일 밤, 지친 암스트롱은 코트와 머플러, 장갑, 모자를 모두 갖춘 채 아파트 창문을 열고 10층 아래로 뛰어내렸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동아닷컴 2008-06-11 02: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611/8588630/1
1910 -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쿠스토(Cousteau, Jacques-Yves) 출생
쿠스토 [Cousteau, Jacques-Yves, 1910.6.11~1997.6.25]
[역사 속의 인물] 진정한 '바다의 사나이' 자크 쿠스토
소년은 저 깊은 바닷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당시 바닷속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소년은 물고기처럼 바닷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스쿠버 장비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자크 쿠스토(1910~1997)는 인간의 활동 영역을 바닷속까지로 넓혀 놓은 해저 탐험가다. 1910년 오늘, 프랑스에서 태어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해군 조종사가 되려 했으나 자동차 사고로 양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바닷속 탐험으로 눈을 돌렸다. 1943년 친구 에밀 가낭과 함께 개발한 수중호흡기와 공기통을 결합한 장비를 착용하고 마네강에서 수중탐험을 했다. 최초의 스쿠버 다이빙이다.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해양 연구, 해양탐사선 개발, 해양영화 제작에 평생을 바쳤다. 삶을 바다와 함께한 진정한 '바다의 사나이'였다. 바닷속 생명의 신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두 차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해양 오염을 막기 위한 환경운동에 열중했다. "지구가 두꺼운 책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얇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요. 나머지 수백, 수천 장의 공간은 바로 바닷속입니다."
박병선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6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972&yy=2011
- 1960.8.3.발행 (1885년 배재학당 설립 75주년)
1902 -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사망
아펜젤러 [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6.11]
[오늘의 역사]‘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 사망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수더톤의 독실한 루터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웨스트체스터 주립사범학교와 프랭클린 & 마샬 대학을 마치고, 1885년 드류 신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이어 신학교 졸업 후 곧 한국교회의 부감리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거쳐 그 해 4월 5일 인천에 도착했으나, 한국 정정이 불안하여 4월 13일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6월 21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8월 3일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으로 영어학교를 열어 배재학당의 전신을 세웠다.
1887년 2월 21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고, 3월 14일 현판식을 가졌다. 이후 한국에 체재하면서 배재학당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성서 번역과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 모임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가던 중 목포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그의 나이 44세였다.
서울 정동 배재학당 옛터에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설립되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 배재대학교에 아펜젤러관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묘가 모셔져 있다.
/충청투데이 2010.06.11 00:07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4811
44세의 안타까운 최후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이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인천에서 배로 출발했다. 오사가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그날 밤 10시쯤에 어청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짙은 안개로 지척이 구분되지 않아 같은 회사의 키소가와 마루와 충돌하여 파선, 침몰했다. 당시 생존자 보울비의 설명에 따르면, 배가 충돌하자 그 충격으로 보울비 자신은 바닥에 쓰러졌고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방 맞은편 선실에서 독서를 하던 아펜젤러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치면서 계단을 향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갑판 앞부분의 반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물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는 계속 가라앉고 아펜젤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와 동행했던 그의 조수이며 비서인 조한규(조성규)씨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목포 집으로 가는 한 어린 여학생을 구하려는 듯 했다. 배는 거의 45도로 기울며 가라앉았고 다음 순간 보일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집어진 구명정을 붙들고 45분동안 물위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결국 아펜젤러 목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영원히 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사고로 아펜젤러를 비롯한 일본인 승객 4명, 한국인 승객 14명, 선원 8명이 사망하였다. 선교를 위해 삶을 바친 아펜젤러 목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바치는 큰 사랑을 이루고 떠난 것이다.
/선교타임즈 200007/ 0047
http://bbs.kcm.co.kr/NetBBS/Bbs.dll/missiontime1/qry/zka/B2-kBIBs
/qqschfld/007/qqschtxt/%B1%E2%C8%B9/qqatt/%5E
1900 - 아르헨티나의 작가, 평론가 마레찰(Marechal, Leopoldo) 출생
마레찰 [Marechal, Leopoldo, 1900.6.10~1970.6.26]
아르헨티나의 작가·평론가. 철학소설로 유명하다.
1920년대초 아르헨티나 문학에 대변혁을 일으킨 급진적 잡지 〈마르틴 피에로 Martín Fierro〉와 〈프로아 Proa〉를 발간하던 문학단체에 속해 있었다. 첫 시집 〈새끼 독수리 Aguiluchos〉(1922)에서는 전원적인 주제를 모더니즘 기법으로 다루었으며, 〈화살같이 흐르는 세월 Días como flechas〉(1926)·〈남자와 여자에게 부치는 송시 Odas para el hombre y la mujer〉(1929)에서는 은유와 시상(詩想)을 좀더 과감히 사용 하여 급진주의적 미학을 표현했다. 시 가운데 〈5편의 남부지방 시 Cinco poemas australes〉(1937)·〈소피아에게 바치는 시 Sonetos a Sophia〉(1940)·〈켄타우로스 El centauro〉(1940) 등은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혼돈의 세계 속에서 균형과 질서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순진무구한 여인 엘비아모르에게 바치는 연가 〈엘비아모르에게 바치는 노래 Canciones Elbitences〉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시들은 〈명시선 Antología poética〉(1969)에 실려 있다.
마레찰의 걸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단 Adán Buenosayres〉(1948)은 기술적 복잡성, 문체의 혁신, 고도의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라틴아메리카 신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주인공 아단의 신화적 여행, 지옥 하강, 끊임없는 이상 추구 등은 자전적인 주제 소설(roman à clef)인 동시에 지질연대 이후의 아르헨티나에 역사성을 부여한 소설이기도 하다.
젊은시절 사회주의자였던 마레찰은 뒤에 열렬한 페론주의자가 되어 후안 페론의 통치기간 동안 문화부의 요직을 맡았다. 페론의 실각과 함께 사실상 은둔생활로 들어갔지만, 소설 〈세베로 아르칸헬로의 향연 El banquete de Severo Arcángelo〉(1965)·〈메가 폰 : 전쟁 Megafón o la guerra〉(1970)으로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소설 속에서도 신화와 이상주의를 계속 탐구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99 -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출생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 1899.6.11~1972.4.16]
1899년 6월 11일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사별한 것과 병약한 체질은 그의 문학에 강한 그늘을 던졌다. 제1고등학교와 도쿄대학을 졸업하였다. 1924년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 등과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으며, 《이즈[伊豆]의 무희(舞姬)》(1926) 등으로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 《이즈의 무희》는 사춘기의 청순한 연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초기의 대표작이다. 그후, 《수정환상(水晶幻想)》(1931), 《서정가(抒情歌)》(1932), 인생을 비정(非情)의 눈으로 응시한 《금수(禽獸)》(1933) 등 문제작을 발표했으며, 《설국(雪國)》(1935∼1947)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설국》은 비현실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순일(純一)한 미(美)의 구축에 성공했으며, 가와바타 문학의 최고봉으로 지목되는 작품이다. 《설국》은 《센바즈루[千羽鶴]》(1951) 《고도(古都)》(1962) 등 전후의 작품과 함께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는 격변하는 쇼와[昭和] 시대에서 갖가지 전위문학적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의 감성(感性)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하였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결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자살하였다. 그는 1934년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용발표회를 보고 당대의 일본 신진 여류무용가로서 그녀를 제1인자로 꼽았으며, 전후 발표한 장편 《무희(舞姬)》에서 그녀의 예술을 다루었다. /naver
1894 - 갑오농민전쟁 중 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
1894년 6월 11일 갑오농민전쟁 중 농민군과 정부간에 휴전화약이 성립되었다. 그해 4월 전라도 무장면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5월 31일 전주성 점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 지휘하의 정부군과 농민군 간의 공방전 속에 희생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했고, 이를 구실 삼아 일본군까지 상륙했다. 청·일의 개입으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하자 당황한 정부는 농민군을 회유했다. 농민군의 지휘자인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하겠다고 했다. 결국 농민군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전주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시행했다. /브리태니커
- 'Rosencavalier' - 50th Death Anniv.
1864 -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Strauss, Richard) 출생
슈트라우스 [Strauss, Richard (Georg), 1864.6.11~1949.9.8]
슈트라우스는 20세기초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수업을 받았고,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21세 때부터 마이닝겐·뮌헨·바이마르·베를린 등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25세 때에는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으로 작곡가로서도 호평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로베르트 슈만, 뒤이어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니체의 작품에서 따옴)를 비롯한 교향시들은 현대 오케스트라의 표현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작업한 <살로메 Salome>(1905)·<엘렉트라 Elektra>(1909) 등의 오페라들은 발표 당시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작품들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나치와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한 고초를 겪으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브리태니커
"나는 일류 작곡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급의 이류 작곡가이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47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Fantasy, Pianist' - 'Idyll, Piper and Sheer' - 'The Print Collector'
- 'Old Man in the Sun' - 'Lady with Fan' - 'Battle of Tetuan, 1860'
1838 - 스페인의 화가 포르투니(Fortuny, Mariano) 출생
포르투니 [Fortuny y Marsal, Mariano (José María Bernardo), 1838.6.11~1874.11.21]
스페인의 화가. 19세기 중반에 힘찬 기법과 일화적인 주제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바르셀로나 아카데미에서 4년을 공부한 뒤 1858년 로마 상을 받아 로마에 가서 공부했다. 1860년 정부 당국에서 그를 모로코로 보내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의 전쟁 장면들을 그리도록 했다. 그는 곧 스페인으로 돌아갔지만 파리에서 1년(1869~70)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 로마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파리에서 유명한 미술 상인인 구필과 사업 관계를 맺기 시작했는데, 구필을 통해 그림들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포르투니는 때때로 대형 작품을 그렸는데, 예를 들면 모로코 전쟁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초로 한 대작 〈테투앙 전투 Battle of Tetuan〉는 현장감 있는 회화적 보고 형식의 훌륭한 본보기로서 활기가 넘쳤다. 이런 작품보다 더욱 독특한 것은 섬세한 세부 묘사로 가득 찬 작은 풍속화들인데, 그는 이 작품들에서 18세기의 환상적인 장면이 주는 우아함과 매력을 되찾으려 했다. /브리태니커
(포르투니의 아들 마리아노 포르투니도 화가인데, 이름이 같아 혼돈하기 쉽습니다.)
1811 - 러시아의 문예평론가 벨린스키(Belinsky, Vissarion) 출생
벨린스키 [Belinsky, Vissarion Grigoryevich, 1811.6.11~1848.6.7]
러시아의 문예평론가. 펜자주(州) 벨린스키 출생.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의 문학부에 다녔으나, 1832년에 반농노제적(反農奴制的) 희곡 《드미트리 칼리닌 Dmitrii Kalinin》을 써서 퇴학당하였다.
1833년부터 잡지 《텔레스코프》에 기고하기 시작하여, 1834년에 그의 초기의 대표논문 《문학적 공상 Literaturnye mechtaniya》을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잡지 《조국잡기(祖國雜記)》, 그 밖의 잡지에서 집필을 계속하였으며, 1847년에 시인 네크라소프가 주재(主宰)하는 잡지 《동시대인》에 참가하여, 사상적 지도자로서 러시아 비평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다.
초기 작품에는 독일 고전철학, 특히 헤겔의 영향이 두드러져,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테제(정립)를 일면적(一面的)으로 포착하여, 이른바 ‘현실과의 화해’에 빠졌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 등을 알게 되고, 또 헤겔의 변증법(辨證法)의 영향을 받아, 차차 러시아의 현실에 입각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사상을 구축해나갔다.
그의 문학론은 예민한 감성(感性)에 입각하면서 예술을 진정으로 민중의 것으로 만들려는 열의와 설득력이 넘치고 있으며, 후일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육성하려는 뜻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고골리의 재능을 최초로 인정하였으며, 《러시아의 소설과 고골리의 소설》(1835) 《치코프의 편력과 죽은 영혼》 등을 통하여 그의 민중성(民衆性)과 사실주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네르몬토프의 시》(1841)에서는 그의 현대성과 전인간적(全人間的)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후기의 대표작인 《푸슈킨론 Sochineniya Aleksandra Pushkina》(1843∼1846)에서는 처음으로 푸슈킨의 저작에 전면적인 분석을 가하여, 그 국민성과 사실주의를 명확히 하였다.
그 밖에 게르첸,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콜리초프, 곤차로프, 네크라소프 등의 작품에 있어서의 사실주의를 분석 평가함으로써 그들의 문학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47년에 결핵치료를 위하여 국외로 나가, 유명한 《고골리에의 편지》를 썼으며, 가을에 귀국해서는 《1847년의 러시아 문학관(文學觀)》을 비롯한 논문들을 썼으나, 병이 악화되어 이듬해에 페테르부르크에서 3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naver
1808 - 스위스의 법률가 케른(Kern, Johann Konrad) 출생
케른 [Kern, Johann Konrad, 1808.6.11~1888.4.14]
스위스의 법률가. 오랫동안 프랑스 주재 스위스 공사를 지냈으며 1848년의 스위스 연방헌법을 기초했다. 변호사이자 법학박사로 1837년 이후 투르가우 주정부에서 특히 사법행정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했다. 전국의회 의원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프랑스 정부를 정복하려 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인도를 반대했다(1838). 그는 7개의 가톨릭 주로 구성된 존더분트 연맹의 교권주의 정책에 맞서 싸웠고 결국에는 무력진압을 제안했다(1847. 11). 뒤이어 발생한 존더분트 전쟁 이후 보드의 앙리 드뤼이와 함께 새로운 연방헌법을 기초했고(1848) 새 헌법이 승인된 후에는 연방대법원 원장으로 복무했다. 1857년 뇌샤텔 분쟁을 중재해주도록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는 사명을 띠고 파리로 파견되었다. 결국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뇌샤텔 주에 대한 자신의 권리주장을 포기했다. 1883년까지 프랑스 주재 스위스 공사로 근무했다. /브리태니커
- 'The Hay Wain' - 'Salisbury Cathedral'
- 'Malvern Hall'
1776 - 영국의 풍경화가 컨스터블(Constable, John) 출생
컨스터블 [Constable, John, 1776.6.11~1837.3.31]
영국 화가. 이스트 버그홀트 출생. 자연주의적 풍경화를 그려 낭만주의적 업적을 남겼다. J.W.M. 터너의 작품과 함께 프랑스 인상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99년 런던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하여 R. 윌슨과 네덜란드파를 모방하였으며, T. 거틴의 기법에 관심을 가졌다. 1802년 로열아카데미 전람회에 입선하였으나 화단(畵壇)과 자신의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귀향하여 풍경화에 몰두하였다. C. 로랑·N. 루생·J.I. 로이스달·T. 게인즈버러 등의 예술을 찬미하였으며 풍경화에 초록색을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갈색계통 색조에서 벗어나 크게 주목받았다. 또한 기존 개념에 얽매인 풍경화를 신선한 감각으로 재구성, 자연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야외에서 햇빛 처리문제를 해결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낭만파의 색채나 외광파의 빛 묘사에 영향을 주었고 놓치기 쉬운 미세한 부분에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풍경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건초를 실은 수레(1924)》 《옥수수밭의 풍경(1826)》 《솔즈베리사원(1831)》 등이 있으며, 1833년 화집 《영국의 풍경화》를 출간하였다. /yahoo
1727 - 영국의 국왕 조지 1세(George I) 사망
조지 1세 [George I, 1660.5.28~1727.6.11]
영국의 왕(재위 1714∼1727).
독일의 하노버 선거후의 아들로 태어나, 1698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외가(外家) 계통으로는 영국의 제임스 1세의 증손에 해당되기 때문에, 1714년 앤 여왕의 사망과 함께 왕위계승법(1701년 제정)의 규정에 따라 영국 왕위에 올라, 하노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성장하여 영어를 모르는데다가, 고향 하노버에 칩거하는 일이 많아 국정이 내각과 의회에 맡겨짐로써,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이 확립되고, 내각책임제가 발달하였다. /naver
- 고산 윤선도 탄신 400주년 기념 (1987.6.22. 발행)
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고산 윤선도(尹善道) 사망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고산은 해남 윤씨의 16대손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윤의중에게 유심.유기.유순 세아들이 있었는데 고산은 유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1587년 6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입양돼 대를 잇고 있던 작은아버지 유기 역시 아들이 없자 고산은 여덟살 때부터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 연동에서 자랐다. ...
고산은 유배에서 풀려난 2년 뒤인 1671년 6월 11일 완도군 보길도 낙서제(樂書齊)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5세였다. /naver 지식iN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naver
1644 - 토리첼리의 기압계 발견이 알려짐
토리첼리 [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
이탈리아의 수학자, 물리학자. 파엔차에서 출생, 로마에서 수학자 카스텔리에게 배운 후 G.갈릴레이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피렌체에서 그의 지도 아래 갈릴레이의 저서 《신과학대화(新科學對話)》의 속편을 집필하던 중 갈릴레이가 사망하였다. 이후 갈릴레이의 계통을 이어받은 학자로서 갈릴레이의 역학(力學)을 전개하였다.
즉 유체동역학(流體動力學)을 개척, 1644년 발표한 유속(流速)과 가압(加壓)의 크기에 관한 법칙이 ‘토리첼리의 정리’이다. 분출하는 물이 그리는 곡선의 연구와 포물체의 운동에 대한 연구도 있다.
1643년 V.비비아니와 함께 수은을 채운 폐관(閉管)을 수은용기 속에 거꾸로 세워, 폐관 상부에 진공이 생기는 것(토리첼리의 진공)을 발견하고, 이것이 대기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여 수은기압계(水銀氣壓計)를 발명, 진공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피렌체 아카데미 수학 교수를 지냈다. 주요저서로 《Trattato del Moto》(1641 이전) 《Opera Geometrica》(7부, 1644) 등이 있다. /naver
- '단종 영정' 김기창 그림 (영월 진문규 님 자료제공)
1455 -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로 즉위
1455년 윤6월11일, 왕위에 올라 갓 3년을 보낸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이 2년 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뒤부터 명목상의 임금으로 근근히 왕권을 유지해왔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들을 유배시키며 압력을 조여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단종은 태어난지 3일 만에 어머니가 숨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8세 때 세손, 10세 때 세자로 책봉돼 나름대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병약한 아버지 문종마저 즉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은 1452년 5월,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기구한 운명 속으로 내몰렸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위해 사육신 등이 한때 복위를 시도했지만 그들의 목숨은 물론 단종의 수명까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단종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당해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로 유배됐다. 그해 12월 사약을 받고 영월 장릉에 묻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경기도 밖에 묻힌 왕이 됐다. /조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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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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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