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차 비타포엠 시낭송회 자료

[김완]

제 19차 비타포엠 시낭송회

이달의 시인 김완, 안오일, 이지담, 조진태시인

때 2011년 12월 15일(목요일) 오후 7시 곳 드맹아트홀

초대의 글

시인은 어렵게 살아야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올 한해도 우리 시인들은 참 어렵게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이성복 시인이 물었다./ ‘시인은 끈질기게 어렵게 살아야 시인이 아닐까요?/ 보들레르, 랭보, 두보를 보세요.’/ 어려운 삶!/ 일찍이 호머는 눈이 멀어/ 지중해를 온통 붉은 포도주로 채웠고,/ 굴원은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양자강을 온통 흑백으로 칠했다,/ 어려운 색깔들!”

황동규 시인의「시인은 어렵게 살아야」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여기서 ‘어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물질적 가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들은 삶과 진실과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어떠한 고통과 고독이라도 감수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시집을 내신 김완, 안오일, 염창권, 이지담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인들이 올해도 시 하나 때문에 웃고, 시 하나 때문에 울며, 세속의 허화(虛華)에 자기의 시혼을 팔아버리는 일을 차마 못해서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괴로움은 내년에도 우리 모든 시인들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어 다녀야 합니다.

2011. 12. 15.

비타-포엠 회장 고재종

제19회 비타포엠 시낭송회

- 초청시인 김 완, 안오일, 이지담, 조진태시인.

진행 조기붕

초청시인의 시낭송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김 완 시/ 김혜숙 회원 낭송

「티티새의 전설 」안오일 시/ 김애숙 회원 낭송

「바다 의자 」이지담 시/ 김선옥 회원 낭송

「도끼날처럼 아주 짧게」조진태 시/ 김정순 회원 낭송

광주지역 시인과 고재종시인의 대담 << >>

노래 공연 : 정용주 (가수)

곡명 : 「지리산」「 세월이 갈수록」

회원 시낭송 : 이인범「유배지에서」

: 임미리「운산암에 들다」

동화낭송 : 김선옥「아빠의 낡은 자전거」중에서

회원 시낭송 : 김황흠「등잔」

: 임여자「고전적인 저녁」이지담 시

성악 공연 : 김선희 (이태리 베르디국립음대졸업, 18회 독창회 및 베르디, 라보엠 오페라 다수 출연, 현재 조선대학교 음대 겸임 교수)

곡명 : 「내마음의 강물」이수인 작곡, 「Mattinata」Leoncavallo 작곡

마무리 인사 : 회장

뒤풀이(식당, )

초청 시인들의 약력

김 완 (金 完)

1957년 광주에서 태어나 2009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이 있다.

현재 광주보훈병원 심장혈관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mail: kvhwkim@chol.com

안오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2009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 2010년 제18회 대교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 (동화), 2010년 한국안데르센상(동화)을 수상했다. 시집『화려한 반란』, 청소년 시집『그래도 괜찮아』, 동화집『올챙이 아빠』, 동시집『사랑하니까』등이 있다.

이지담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3년『시와사람』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2010년 『서정시학』신인상을 수상했다.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과 비타포엠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고전적인 저녁』이 있다.

조진태

1984년 시 무크지 『민중시』1집에 「어머니」,「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시 새벽길』과『희망은 왔다』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이며,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5․18기념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초청 시인들의 자선 대표시

<김 완 자선 대표시 2편>

일어서는 강

 강물이 깊어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지자 잔치는 시작

되었다 소주잔으로 안부를 건네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해 생긴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돌아가면서 짧은 소

회를 나누는 사이 한 쪽에서는 어느새 취기가 돌았다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시를 낭랑하게 읽자 죽었

던 시인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서로들 ‘안 죽고 살아만

있으면 고것이 제일이제’ 라고 말했다 들뜬 목소리들

과 바람이 잠잠해지자 천막 밖 자갈밭이 우리를 불렀

다 달빛을 모닥불 삼아 별빛을 가슴에 품고 섬진강의

자갈만큼이나 수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강은 제 스스로

도달할 곳을 알고 있었고, 아무리 걸어도 도달할 수 없

는 생의 밑바닥처럼 무엇이 두려운지 밤 낚싯대의 야

윈 바늘 끝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갈

증은 더 심해졌다

 새벽녘, 누군가 강을 흔들어 깨웠다 밤새워 숨죽이며

흐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섬진강, 새벽마다

아우성치며 그렇게 일어섰다 흐르는 강물 한복판에 서

서 목말라 외치는 자 누구인가 수면 위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벽에 그녀를 걸자, 방이 환해진다

봄 들녘의 바람, 햇살, 상기된

나무들의 숨소리 가득하다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둥근 하늘 아래 등불을 든 

사람들이 마을을 오간다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

하늘거리는 꽃잎들, 방안에는 

봄의 선, 색, 향기가 넘실댄다

색(色)은 세상으로 향할 때

비로소 제 안으로 익어가는 것

그녀가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춥고 힘든 오늘, 웅크린 사람들의 

외로운 섬에도 봄은 오는가

상한 시간의 기억 다독이며

새해 첫 새벽, 앞산도 지우며

가난한 마음들과 들끓은 소리도 지우며 

오는 마른 눈(雪)이여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안오일 자선 대표시 2편>

빛무덤

빛이 무덤이다

들어간 길로 나오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

전등갓을 벗겨보니

메뚜기 한 마리 벌러덩 누워 있다

아무리 봐도 들어갈 틈이 없는데

이 좁은 문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빛사래의 유혹에 앞만 보고 달려들었을

몸부림의 흔적이 적나라하다

검게 그을려 바삭거리는 날개,

풀잎에서 풀잎으로 건너 뛰어다녔을

긴 뒷다리 바싹 웅크린 채

잘 마른 미이라가 되어 있다

몰랐겠지, 먹기 좋게 차려진 그 환한 먹이가

무덤이 될 줄은,

죽음의 공포조차 몰아냈던

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부서진 날개

눈부시다

티티새의 전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구하려고

가시면류관의 가시를 뽑아내다가 그 가시에 찔려 죽었다던

티티새,

하지만 아무도 모를 거야

불새나 가시나무새처럼

전설적인 새로 불리는

나만의 진짜 이유를

참 쉬웠지

백 개의 혀를 놀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어

내 혀가 핥고 간 자리마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나곤 했지

보다 못한 신이

형벌을 내린 거야

백 개의 혀에

백 개의 가시를 박아야만

겨우 죽을 수 있는,

난 벗어나려 발버둥쳤지

울음을 멈추고

아침이 오면 숨었고 밤이 되면 도망쳤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는 것은

결국 백 개의 혀를 뽑아버리는 것

나를 부정하는 것

그제야 알게 되었지

내게 내린 형벌의 의미는

형벌을 형벌로, 나를 나로 다 살아낼 때

비로소 내가 됨을

아, 운명은 내가 날아오르는 것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어느 날

나는 날아가 예수의 면류관에 박힌 가시를 찍어내기 시작했고

온몸에 피가 물들기 시작했고

가시마다 나를 깨는 아픔이 열리기 시작했고

내 죽음에서

붉은 열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티티새가 태어났지

<이지담 자선 대표시 2편>

바짓가랑이를 접듯

반반한 수면을 믿고 건너려다 강물에 온몸이 젖은 후 알지요

젖지도 않고 건너는 구름을 좀 봐요

햇살이 젖지 않고 강을 건너는 것은

귀를 갖지 않아서라는데

엷은 귀를 열어 말의 물살에 휩쓸리다 보면

온몸은 깊이도 모른 채 빠져들지요

배를 띄우기에는 낮고

건너기에는 바지를 접어야 하는

강 앞에 서 보면 알게 되지요

어떤 비는 강물 되어 흘러가고

어떤 비는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는데

쏜살같이 수면의 맥을 짚고 날아가는 물새 한 마리

바짓가랑이 끝까지 걷어 올리고 건너려 해도

허연 다리가 굴절되어 보이는 것처럼

상처는 한 번 꺾이면 더 크게 부풀려질 수밖에요

백만 대군을 끌고 오는 물살과 일전을 치러 본

사람은

움푹 파인 한 시절이 기다릴지도 모르니

바짓가랑이를 접듯 뱉어야 할 말들 몇 번 접어 올려주세요

바다 의자

마을 바람벽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는 나무의자

밤마다 남몰래 걸어 나온 바다가 앉았다 간 양

결마다 물결이 내려앉은 흔적 또렷하다

온몸이 가슴인 바다도 제 수평선을 바라보기 위해

저리 작은 의자에 기대기로 한 것일까

큰 품일수록 공허의 빈자리도 넓은 것이어서

깊은 水心을 얻었을까

물고기들에게 지느러미를 빌려 하늘 끝까지 헤엄치고

돌아온 듯 바다는 흡족한 얼굴이다

부레를 단 구름을 풀어놓고 낱장의 가슴 넘기며

심해의 살 냄새를 확 풍기는 빈 바다 의자, 한 번쯤

제 속을 뒤집어보고 싶던 태풍마저 팔베개하고 눕게 하였으니

바다 속 기도로 짜 맞춘 저 자리엔

어떤 외로움이 앉아도 엄살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조진태 자선 대표시 2편>

도끼날처럼 아주 짧게

희망은 그렇게 왔다, 유쾌한 잡담처럼

시장 골목 국밥집 텁텁한 막걸리 잔처럼

반질반질한 만년필의 촉감으로

다 닳아진 뒷주머니 속 갈색 지갑의 일상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별일 아니라는 듯

눈부신 것은 햇살이 아니라 조팝나무 하얀 꽃잎이라는 듯

누군가 먼저 가지 않았던 길이라 할지라도

숲을 쳐서 나무를 울게 하고 새가 푸른 창공을 날게 하는

섬섬옥수로도

그렇게 희망은 오는 것이라는 듯

낯익은 비겁과 굴종과 아주 익숙한 배반을 가르는

날카로운 도끼날의 씩씩함으로

희망은 그렇게 왔다

시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 신랄한 추위를 견딘 다음 노곤한 봄 햇살에

일순간 자신을 다 바쳐버리는 꽃들을 본다

그리고는 남은 이파리가

은빛으로 붉은 독기를 내뿜는 것을

멀리 선운사에서 보았다

5월에는 모든 꽃들이

자취도 없이 떨어지거나 찢기거나

사라져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 무슨 꽃들이랴,

아름다우랴, 붉디붉은 것이랴 생각한 것이다

신록의 나무들이 지겨운 무더위를 다 견디면서

깊은 여름을 지나

꽃 한 송이 피우지 않고서도 마음껏 출렁이는 것을 본다

저것들, 소슬바람 불면 앞다퉈 자신을 말끔히 태워

차디찬 겨울을 준비할 것이다

모두를 다 내줘버리는 것들을 생각하는 동안에

문득

아무런 까닭없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아무런 자취없이 다른 것들의 씨앗이 되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랬으면 되었다, 생각하였다

시인의 시와 삶의 이야기

<시작노트: 풍경과 시>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김완

그리운 것들이 많은 삶은 아름답다고 한다. 그리움의 근원에 닿으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는 동안 사람의 심성은 늘 열려 있게 마련이다. 감성의 촉수가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고 상상력의 파장도 끊이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원래 모습이 그런 것 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것들은 먼 곳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사에 바쁜 우리들은 지나치며 살 뿐 우리 삶 주변 여기저기서 그리움의 근원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흐린 오늘, 세상에 부는 바람 어지러운 건/그리운 이름들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졸시 ⌈심장, 그 가슴 따뜻한 사랑⌋부분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벽에 걸면서 내 시는 시작된다. 걸린 그림을 오래 바라보는데, 그림이 내 마음에 말을 걸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 시를 쓰게 되었다. ‘그리다’는 ‘묘사하다’와 ‘갈망하다’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 단어이다.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갈망하면 그리움이 된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다”라는 멋진 말도 있다.

색(色)은 색과 색 사이

군집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터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

그리움은 다른 그리움을 부르는 것

그대 무리지어 출렁이니

은빛 파도, 은빛 바다가 되고

―졸시「삐비꽃에 대한 思惟」부분

시 속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상이 아닌 본질적인 것이었다. 모든 진실은 본질에서 나오고 본질은 어느 시대나 벅찬 감동으로 닫힌 문을 열어젖힌다. 본질을 알면 그리움이란 멀고 가까운 것의 의미가 없고, 과거와 현재의 구별도 없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미술시간에서 보았던 덕지덕지 칠해진 세잔이 그린 사과, 그 사과는 미감을 자극하기위해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밝고 둥근 물체의 본질인 것이다’고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이다. 대상에서 발산되는 빛 보다는 대상에 내재되어있는 구조를 강조했는데, 단지 눈에 보이는 모습보다는 보이지 않은 내면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시로 그려내고 싶었다. 예로부터 시는 모양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가 없는 시라는 말도 있다. 한 사물을 두고 계속해서 생각을 깊게 하다보면 깨달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시가 태어난다. 색채의 밝음과 깊이를 장악하는 일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버려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일도 그러하리라.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곳, 까마득히 먼 곳 어딘가에서 파동 치는 것, 그리운 풍경들은 모두 먼 곳에만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은 신뢰와 사랑을 영원히 지켜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기차여행을 할 때 기차는 느려서 풍경은 천천히 흘러갔고, 급할 게 없는 사람들에게 풍경은 더 정겹고 더 많은 말들을 하기 마련이다. 느리게 달리는 기차 창밖의 풍경을 통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다른 自我를 만나게 되고 나를 생각하게 되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림이지만 그림 속 자연의 소리와 풍경에 귀 기울려 깊이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색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세상으로 향할 때 비로소 제 안에서 익어가는 것 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진한 슬픔은 색이 하얗게 바래어 오히려 색이 옅다는 생각,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은 절절하고 아찔한 진실이었다.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다만 빠르게 받아 적었을 뿐이다.”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말처럼, 시란 풍경과 사람사이에 교감이 일어날 때 태어난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풍경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풍경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세상이 어우러져 공명共鳴을 불려 일으킬 때, 좋은 詩는 태어난다. 色이나 말(言)이 세상을 향해 和而不同 할 때 비로소 그림이나 詩가 안으로 곰삭아가면서 우리에게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그림이 되고 詩가 될 수 있다. 풍경 속에는 사람과 교감하는 들숨과 날숨이 있고 길이 있다. 시는 세상의 질문에 대한 풍경이다.

<시작 노트>

시의 숲에서 길을 잃다

안오일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김남주의 <낫>이라는 이 짧은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직 시가 뭔지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던 때이다. 나도 이런 전율이 일어나는, 온몸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시를 쓰겠다고 달려들었다.

천재들이 많아 평론가들을 분주히 움직이게 하는 시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나는 그때 받은 전율을 다시 받지는 못하고 있다. 세상이 좋아하는 시와 상관없이 내가 좋은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내가 쓴 시는 먼저 내 자신이 감동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 저 첫사랑의 시처럼 감동 받은 작품을 쓰질 못했다. 쓰다가 그대로 잠들기도 하고 꿈속에서 철필로 시를 쓰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헤매고 있다.

이렇게 시쓰기가 힘들다. 그런데 시는 참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 거대한 시의 숲에서 헤매고 있는 나는 과연 길을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다. 내 갇힌 의식의 틀을 깰 수 있는 단칼 같은 몇 줄의 시를 위해!

<시작노트>

결핍과 욕망 사이에서 존재론적 기원 찾기

이지담

내가 시를 만나게 된 계기는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비타포엠 시낭송회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물질적으로 많은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정신의 결핍을 무엇에선가 찾아야 하는 시점이 내게 있었다. 가족의 굴레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난 후 밀려오는 고독과 마주치는 일은 내 안에 또다른 욕망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정신의 깊이에 빠져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화려함과 외설과 가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만의 방법으로 정신을 가다듬어보고자 했던 시도가 시쓰기였다. 한번도 시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시인이면 한 번쯤 받았음직한 백일장대회에 참가한 적도 없다. 우연한 기회에 문학 아카데미에 접수한 계기가 뒤늦게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굴레(bondage)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이들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적용해 변형시키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결핍이 결국 내 삶의 방향키가 되고,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끊임없이 시를 욕망하게된 것이다.

비타포엠 회원들의 일부는 등단한 작가들도 있지만 내가 처음 시를 접하게 된 동기처럼 우연하게 시와 접한 분도 계시리라 본다. 수다를 떨며 노는 일이나 골프 치며 운동 다니는 것도 재미가 없어 정신의 깊이를 얻고자 하여 오신 분이라면 저처럼 시와 함께 놀다 보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시와 함께 노는 건 나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의 시쓰기는 구체적 일회성의 아우라(Aura)로 찾아온 경험과 기억을 철저한 실감의 순간으로 재현하고 탈환함으로써 귀납적 속성을 일관되게 표현한다. 다양한 제재와 경험을 근간으로 하되 그것들을 다채로운 어법이나 형식으로 확장해가지 않는다. 다만 충분히 가라앉은 고백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이고 개별화된 경험과 기억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안아들인다

첫 시집『고전적인 저녁』의 시인의 말에서 “내 피를 이루고 있는/들풀과 바람과 노을”을 다해 “조금 더 가벼워져/뿌리에까지 가 볼 작정”(｢시인의 말｣)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의 피를 구성해왔던 사물과 상황을 유추적으로 호출하여 나는 ‘시(詩)’를 통해 나 자신의 존재론적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또한 존재론적 기원을 찾는 것은 우주 공간에 잠시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이 삶의 의미이기도 되기 때문이다. 조금더 넓게 생각하면 내 시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미를 찾는 시간들로 이끌 수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시와 한판 승부를 해볼 작정이다.

나의 시는 삶의 위안이자 현실에 개입하고 발언하는 실천의 매개

조진태

나에게 있어서 시는 삶의 상처에 대한 위로와 위안이자 존재에서 오는 허무감이나 위기감, 그리고 이와 함께 양립해 있는 ‘나’라는 존재의 실존감의 형상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매우 복잡합니다. 사회적 변화와 진보를 향한 적극적 실천을 감행해온 소심한 한 사람이면서 시를 통해서 소심함의 감성적 결들을 아우르고 가다듬고 교양을 갖춘 진보적 지식인의 외양을 갈무리하고자 애를 썼던, 예전에는 그나마 늘상 내면의 혁명과 사회적 실천 때문에 몸부림쳤음을 봐줄만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변화한 사회계급적 구조에서 어느 정도는 진보적 소양을 놓치지 않으려하지만 대체로는 일상의 안락에 빠져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소시민일 따름입니다. 복잡한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여튼 나의 시집, [희망은 왔다]는 대체로 위의 복잡한 내면과 존재감의 산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읽어보셨으면 다 아시겠지만 허무하며 쓸쓸한 감성의 결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며 현실에 개입하고 발언하며 실천하고자 치열하게 몸부림 친 목청들은 사회적 실존에서 오는 저항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내가 쓰고자 하는 시는 이 두가지 내면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노래해도 고통과 슬픔을 내장하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어도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오는 빗나감과 불일치를 외면하고 있다면 언어유희에 불과합니다. 나의 인간적 존재에서 오는 슬픔이 나의 사회적 존재(노동)로부터 기인하는 소외(분노)와 상호 긴장되거나 순응하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소외받으며 미미한 존재(미물)들과 눈에 펼쳐지는 자연풍광들을 눈여겨보았던 것도 이런 문제의식을 구현하고자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자면 시는 곧 사회적 발언이자 정치에 개입하기입니다. 시의 주제와 이미지와 그것을 조합하는 언어들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 작품이 갖는 사회적 발언의 수위와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담지하면서도 하나의 시 작품으로서 미적 성취와 스타일의 성취 여부가 관건이라는 것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나의 시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하는 것의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내가 시쓰기를 계속한다면 삶의 위안은 위안대로 성취가 있기를 노력할 테고 현실에 개입하기는 개입하기대로 그 정치성을 획득하여 동일하게 미적 성취와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해 나가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느끼는 일상이 지극히 단순해져버린 까닭도 있겠습니다. 혹은 스스로의 정신적 지향이 ‘물’에 가 있고 ‘물’이 담기는 ‘계영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일탈도 고작 지극히 비정치적인 생활 영역에 안주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별것 아닌 작품과 작품을 스스로 말하라는 이 자리가 나에게는 진지한 문학적 일탈을 자극하는 정치하기였음을 기대해 봅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그만두지 않고 저 청년 시절의 열망을 다시 불러일키는 좋은 계기와 기억으로 자리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회원 낭송시

유배지에서

이 인 범

눈송이처럼 날리는 빗방울처럼

아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요

유배지에 서면 거기

어렴풋한 생의 한국화들이 있고

(그땐 그런 그림 같은 죄도 있었네요

멀리서 보면 섬들 집들이 그림 같아요)

하늘에서 내린 아이들이(아이는 보이지 않고)

강물 되어 바다로 흐르고 하늘로 이어져

그 길이 유배길 같아요

(아이들은 우주의 한 역할뿐이라네)

유배는 아이들 몸속 한 조각 뼈로 걸려 있고

갈대에 걸린 비닐조각이 초분에 누운 아해처럼

갯바람 붙잡고 다 끝난 생을 애원하고 있어요

깊은 계곡에서부터 나선 꽃잎을 싣고

아직 남아 있는 꽃들의 향기를 싣고

강물은 수평으로 흐르고

아이들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요

서로 만나는 한순간 반짝 빛나요

2002년 [시와시람]으로 등단. 2008년 시집<달빛자국>, 한국작가회의 회원

운산암에 들다

임미리

눈부신 설원에 현혹되어 나선 길 암자를 찾아들었다.

누군가 지나갔던 발자국 위에 나를 올려놓는다.

대웅전으로 향하고 있는데 차나 한잔하고 가라는

비구승의 조용한 목소리에 응답하는 내 마음 알았을까.

대나무 가지위에 앉은 눈꽃이 뽀드득 미소 짓는다.

오랜만에 부처님전에 삼배를 하고 내려와

토담집 마루 위의 눈이 부신 햇살을 밀치고 안으로 들자

궁금한 햇살이 내 옷자락 붙잡고 따라 들어선다.

암자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연꽃형상이라고

던지시는 스님의 흡족해하는 말씀이 아니더라도

은은하게 퍼진 연꽃향기에 취한 마음 들키게 될까 봐

나는 행간에 마음자락 꼭꼭 숨긴다.

스님이 주시는 차를 입안에 머금자 온몸으로 향기 스며든다.

창 넓은 토담집으로 쏟아지는 맑은 기운에 휩싸여

세속에 오염된 나를 내려놓고 경계를 푼다.

그림이 좋아 그림이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

아무도 없는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하시는데……

벽에 표구되어 걸린 액자 속의 홍시가 곧 떨어질 것 같다.

나는 떨리는 미간을 눈치 채지 못하게 붙들어 맨다.

운산암에 내려놓은 마음 거두지 않고

모른 척 돌아서 나오는데 댓잎자락 나를 불러 세운다.

언제든 다시 오라고 언제든 쉬어가라고…….

운산암 : 화순군 남면 운산리에 있는 암자

․ 2008년《열린시학》등단. 시집『물고기 자리』

「아빠의 낡은 자전거」 중에서

낭송 : 김선옥

“야, 그 고물 자전거 누구거냐?”

“그거 구르기는 하는 거야? 박물관 진열품 감이다.”

친구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서 혁이의 주위를 빙빙 돌며 놀려댔습니다. 어찌나 빨리 도는지 눈이 다 핑핑 돌았습니다.

“이래 봐도 시골 고향에서는 우리 아빠와 나를 태우고 얼마나 신나게 달렸다고…….”

혁이는 창피하고 화도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래, 한번 타 봐라. 어디 타고서 우리를 따라와 봐.”

그러더니 경우랑 민식이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습니다. 혁이도 얼른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친구들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체인이 벗겨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혁이는 땅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혁이는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이제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혁이는 자전거 체인을 다시 걸기 위해 손에 기름을 묻히며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느림보 거북이구나,”

“어쨌든 구르기는 하는데, 기네스북에 올라야겠다.”

어느새 친구들은 혁이의 뒤로 돌아와 약을 올리며 지나쳐 갑니다. 그 바람에 혁이는 자전거를 놓아버렸습니다. 자전거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너 때문이야.”

혁이는 화가 나서 자전거를 발로 툭툭차며 화풀이를 해댔습니다. 여지껏 참았던 속상한 마음이 눈물로 흘러내렸습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 혁이와 자전거는 일어날 줄 모르고 누워 있습니다. 고향 시골길이 눈앞에 환히 떠오릅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던 옛날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어느새 혁이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시골집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지나던 아빠가 놀이터에 누워 있는 혁이와 자전거를 보았습니다.

아빠는 잠들어 있는 혁이의 야윈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서울에 온 뒤로 혁이에게 너무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밤늦게서야 돌아오면 혁이는 곤하게 잠에 빠져 있고, 아침에는 혁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도무지 같이 보낼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가만히 혁이의 볼을 쓰다듬는 아빠의 거친 손길이 떨렸습니다.

“미안하다. 혁아, 미안하다.”

꿈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던 혁이는 아빠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빠.”

잠에서 깨어난 혁이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혁아, 이제는 아빠가 많이 놀아 줄 수 있어. 내일부터는 가까운 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니까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이런 데서 혼자 있는 거야?”

“이 자전거 때문이에요.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했는데, 그만 체인이 벗겨져 버리잖아요.”

혁이는 자전거를 쳐다보며 눈을 흘겼습니다. 아빠도 자전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되겠구나. 내일부터는 이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낡은 걸요?”

“아니다, 녹이 슬어 그렇지, 이걸 잘 닦아주고 체인만 갈아주면 아직은 새 거나 마찬가지야. 가자 혁아, 아빠랑 깨끗하게 닦아주러 가자구나.”

혁이와 아빠, 그리고 자전거가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골목길을 걸어 갑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혁이는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 보았습니다. 햇빛에 바퀴살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손으로 자전거 바퀴를 돌려 보았습니다. 체인이 부드럽게 돌자 바퀴도 부드럽게 잘 돌아갔습니다.

“이거였어, 야호! 어서 공원으로 가야지”

자전거는 어젯밤 아빠가 손보고 닦아 놓아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혁이는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민식이랑 경우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공원에 나타나기 전에 먼저 가고 싶었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리는 자전거를 꼭 보여 주고 말겠어.”

자전거는 어제처럼 덜덜거리지 않았습니다. 좁은 길을 벗어난 혁이는 공원을 향해 힘껏 페달을 밟았습니다.

“야! 고물 자전거 오늘은 웬일이야? 용케 잘 돌아가네.”

혁이는 말없이 한바퀴를 더 돌았습니다. 그러자 민식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쫓아왔습니다. 경우도 뒤이어 달려왔습니다. 아무리 인라인 스케이트가 빨리 달려도 자전거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혁이는 우쭐대는 마음으로 더욱 힘껏 달렸습니다. 달려오다 지친 민식이가 소리쳤습니다.

“혁아, 한 번만 타보자 인라인 스케이트와 바꿔서.”

200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광주대학교 대학원 졸, 저서『아빠의 낡은 자전거』

등잔

김황흠

산길을 걷다 장마 비에 허물어진 언덕,

나무뿌리가 패인 자리에서 등잔을 주웠다.

뚜껑도 없이 드러난,

몸통은 그슬림이 남아있다.

불빛 아래서 무명옷을 꿰매던 어머니가 가물거리고

옆에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한글을 깨우치던 까까머리 아이가 초롱거린다.

아이 옆에서 하루 벌이 소작농 아비,

술에 절인 코고는 소리가 날아다닌다,

심지에 몸을 버린 소리들이 쌓이던 자리,

아래는 어둡고 까마득한 세월이 질척거렸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아이도 아비의 나이가 되고,

그 자리엔 줄줄이 빈틈없이 메인 바람 소리만 들리던,

뚜껑도 잃고 흙 속으로 숨어 살아온 세월만큼

다 잃어도 잃은 것 없는 텅 빈 속,

새살 돋치듯 흙을 채워 다시 묻는다.

2008년 광주전남 『작가』신인상으로 등단.

고전적인 저녁

이지담 시, 임여자 회원 낭송

하루의 옷고름을 푸는데

서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떨이로 산 한무더기 사과를 안고 남자가 들어온다

길가에 쪼그려 앉은 노점상 할머니의 그림자가

깎을수록 물기 없이 퍼석거린다

접시 가득 가슴 한쪽을 뚝 뚝 잘라놓는다

바람에 가까운 남자는

여자의 말에 베어도 피가 나지 않는다

헛기침이 넘나드는 밤이다

결린 어깨를 아이들은 보리밭 밟듯

소주 생각까지 꾹꾹 밟는다

창문을 갉아먹는 달빛으로

들국화 같은 아이들의 잠투정을 덮는다

야근을 시작한 밤 곁에서

백지 위에 한 줄의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코고는 소리를 베고

아득한 미명 쪽으로 돌아눕는다

시집 『마음이 걸어나와』『그 빛에 나 잠기네』『오동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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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까지 입금된 내역. 착오가 있을 경우 알려주시면 정정하겠습니다.)

※ 이 자료집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을 보조받아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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