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 마을은 군북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신라의 3대 천재로 불리우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맺은 짧은 인연을 엮어본다.
11살 소년은 5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험준한 산길을 걷고 있다. 경주에서 출발하여 물어, 물어 통영으로 가는 길에 이 험준한 산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 마을로 오기 위해 거쳐온 동촌, 사촌 마을은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서 길을 물을 수도 있지만, 이 산골에 접어들어서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무서운 산짐승이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끌었다. 11살 소년이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느 어른 못지않게 깊었다. 키와 몸도 어른보다 든든하게 보였다. 그러나 워낙 먼 길을 걸어서 인지 소년은 온 몸에 땀이 비 오 듯했다. 더구나 때때로 어머니가 피곤해 보이면 부축해야 하니 소년의 몸이 더욱 나른 해 왔다.
“어머님, 통영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
“얘야, 이 험한 고개를 넘으면 바다가 보인단다. 그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머님이 평소 그렇게 받들고 계시는 도사 스님께서 계실까요?”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일생을 살아도 그 스님처럼 인생을 멀리 보는 스님은 일찍이 만나보지 못했다. 내년에 너를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면서 너를 스님에게 인사드리게 하고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다.”
“예, 어머님. 평소에 어머님께서 너무 그 스님의 말씀을 많이 하셔서, 저도 그 스님을 꼭 뵈옵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 피곤하시죠? ”
“나는 괜찮다. 너나 몸 관리를 잘 해라.”
11살 소년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길을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년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고 배가 허기져왔지만 어머니 앞에서 그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얼마나 고되시고 배가 고플 것인가!’
어머니도 아들의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이 애가 어제 저녁을 먹고 아직까지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어 얼마나 배가 고플 것인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스러워 고개 마루에서 넒은 바위에 쉬어가자고 했다.
“얘야, 저기 넓은 바위 위에서 편히 좀 쉬어가자구나. ”
“예, 어머니.”
소년과 어머니는 몸이 피로 하고, 배도 허기져서 넓은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숨을 헐떡이고 얼굴이 파리해져 갔다. 소년은 배가 고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눈이 흐릿해져 오고 정신이 몽롱해 왔다. 그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소년은 바위 위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며 자는 척 했다.
‘아, 여기서 쓰러지면 어머님을 모시고 도사 스님께 가는 것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소년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소년은 누워서 주변의 높은 산들을 둘러보았다.
험준한 산골이 보이는 곳이라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들이 산마다 줄을 서듯 둘러서 있었다.
그 산골 어느 바위 위에 까마귀들이 모여서 놀았다. 5월이라 싱그러운 신록 그늘에 모여 앉아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까마귀 신록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만이 까욱거리는 소리로 산골짜기가 시끄러웠다.
“까욱, 까까욱. 우리 오늘 잔치가 거네.”
“그야 요 아랫마을 사랑목에 남씨 할아버지 팔순 잔치가 푸짐해서 고기를 많이 준비했지.”
“조상에게 바친다고 고기를 조상 무덤가에 뿌려놓아서 우리가 포식했지.”
그때, 대장 까마귀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그래서 그런지 좀체 나타나지 않던 긴장감마저 돌았다. 주변 까마귀들이 까욱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오늘 이 골짜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한 사람이 지나가는데 어쩜 이 골짜기에서 굶어 죽을지 아니면 살아서 간다면 온 세상을 밝힐 횃불같은 영웅이 될 사람이야.”
주변의 까마귀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대장 까마귀의 눈빛을 보았다.
“내가 이 골짜기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니? 나에게는 어느 누구도 감지할 수 있는 운명들이 내 영혼의 더듬이에 잡하는 거야.”
망또 까마귀가 눈망울이 동그래서 대장까마귀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 그 유명한 사람이 죽는다면 우리나라의 손해지.”
“그렇지, 살리자,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사람인데 우리가 살리자. ”
“맞다. 살리자. 우리가 즉시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날아다니며 찾아보자.”
까마귀들이 부산하게 일어서자, 대장 까마귀가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그 장소를 나는 이미 알고 있어. 저기 콩밭골 넘어 가는 고갯마루에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이야.”
“와 ! 우리 대장님 정말 대단하다. ”
“자, 모두 대장 시키는 대로 해라. 우리가 먹던 고기 중에서 닭다리에 살이 많으니 가장 좋은 걸로 하나 물어라.”
까마귀들은 대장 까마귀를 앞세우고 까욱거리며 콩밭골 고갯마루로 날아 내려갔다. 대장 까마귀가 앞에서 까욱거리며 날았다.
콩밭골 마을에 갑자기 까마귀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하늘에 까맣게 떠서 우는 까마귀 소리들이 마음을 섬짓하게 했다.
한편, 바위 위에서 쉬고 있던 소년은 너무 피곤에 지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스러워 자기가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서 소년의 머리 위를 덮어 주었다.
그런 그들 위로 한 떼의 까마귀 떼가 날아오며 요란스럽게 까욱거렸다.
“까욱. 까욱.까까욱 ”
“까욱, 까욱 까까까욱.”
하늘 위에서 까마귀 소리가 무섭게 들리자, 겁이 난 어머니는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얘야, 얘야. 일어나라. 무엇이 좀 이상하다.”
소년은 잠시 잠이 들었다. 잠을 잠시 잤지만 정신이 차려졌다. 어머니가 그런 소년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저게 무슨 일이냐? 까마귀가 울면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는데 !”
“어머니, 괜찮아요. 까마귀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니 조심하라는 거지요.”
소년은 그렇게 어머니를 위로 하고 하늘을 보자, 과연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주변 하늘을 빙빙 돌며 까욱거리고 있었다. 소년도 가슴이 섬짓해오고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어머니, 이미 죽음 앞 선 사람들이게는 구원의 소리일 수도 있어요.”
소년이 어머니에게 위로 하느라 그런 말을 하고 일어나 하늘의 까마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까마귀를 멀리 쫓으려는 행동이다.
바로 그때였다.
소년의 머리 위로 한 마리 까마귀가 날아들더니 입에 물었던 것을 툭 떨어뜨렸다. 까마귀 대여섯 마리 모두가 소년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먼 골짜기로 향해 날아 가버렸다.
소년은 자기 앞에 떨어진 묵직한 고깃덩어리를 보자, 눈이 번쩍 띄었다. 소년 자신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들고 갔다.
“어머니, 살이 도톰하게 붙어 있는 닭다리입니다.”
“그렇구나. 배가 고파 쓰러진 우리들에게 하늘이 도운 것이로구나.”
소년은 닭다리에 붙은 살을 잘게 발라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 드세요.”
“아니다. 나는 평소에 닭을 잘 먹지 않는다.”
“너나 먹고 정신을 차려라.”
소년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안다. 어머니는 먹을 것, 입을 것만 보면 항상 그랬기 때문에 소년은 그런 어머니에게 잘게 찢은 닭고기를 잡숫게 했다. 소년과 어머니는 그 닭고기를 먹고 허기를 면해 정신을 차렸다.
닭고기를 먹고 정신을 차린 소년은 오늘 있었던 일이 아무래도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우신조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야.”
소년은 사방을 둘러보고 한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자기가 지고 있는 바랑 모양의 짐 보퉁이에서 붓과 벼루를 내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지어주고 가고 싶구나. ”
소년은 벼루에다 물을 부어 먹을 갈며 생각했다.
“까마귀를 모두들 요물이라고 천시하지. 까마귀 소리가 나면 침을 퉤퉤 뱉으며 말이야.”
“그런 까마귀가 나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한 거야.”
소년은 먹을 갈아서 붓에다 먹물을 잔뜩 묻혔다. 소년은 그 붓을 들어서 살갗처럼 고운 바위 위에다 글자를 썼다.
烏谷洞
그런 소년을 보고 어머니가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까마귀가 너와 나의 생명을 구한 골짜기란 말이구나. 참 의미 있는 말이다. 좋구나”
소년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 방그레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그 뒤에 이 마을 콩밭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살결처럼 고운 바위에 써 둔 글씨를 보고 그 글씨가 최치원의 글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최치원 선생이 지나 간 것을 알고 당초에는 오실(奧室)이라 불리어져 오다가 그가 지어준 대로 마을 이름을 오곡(烏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년은 어머니와 자신의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통영을 향해 날이 어둡기 전에 다시 길을 걸었다.
5월 푸른 숲에서 지친 피로를 풀어 주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다음날, 소년과 어머니는 통영에 닿았다.
어머니는 통영의 큰절에 있는 스님을 보자. 마치 친정 아버지를 뵈온 듯 눈물을 글썽이었다. 어머니는 스님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스님, 그 곳 좋은 경주에서 이곳 낯선 곳에까지 오셨습니까?”
“이곳 통영은 날씨가 따뜻해서 사철 꽃이 피는 곳이라네. 자네도 아시다시피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이곳 따뜻한 마을로 왔네.”
어머니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연신 볼로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으셨다. 너무도 먼 길을 힘들여 온 아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년에게 스님을 향해 절을 하게 했다.
“얘야, 내가 존경하는 스님이시다.”
소년은 스님의 기품을 보자 그 자애로움, 거룩한 모습에 저절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싶었다.
“스님, 인사드리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소개했다.
“저의 자식입니다. 내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보낼 예정입니다.”
“그래요. 참 영리하게 생겼구나.”
어머니는 스님 앞에서 망설이다가 어제 오곡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
“그것은 천하는 모든 사람들이 최치원을 천재라고 말하고 땅 속의 귀신까지도 최치원을 우러러보는 거라네. 까마귀도 당연히 최치원을 알아보지.”
스님이 한 말은 훗날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쓴 <토황소격문>의 내용을 역으로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최치원은 항상 어머니와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훗날 그가 멀리 있으면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한시 구절이 유명하다.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창밖은 삼경인데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