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장 원앙새 수놓은 비단 수건
호젓한 궁궐에 밤기운이 창망하다. 단지흥은 깊은 수심에 잠겨 홀로 섬돌 위를 오락가락했다. 그의 손에는 비단 손수건 하나가 꼭 쥐여 있었다. 이 비단 손수건은 주백통이 왕중양에게 이끌려 왔을 때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알고 본즉슨 영고가 주백통에게 준 은근한 정표였다. 단지흥은 다시금 손수건을 펼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원앙 한 쌍이 호수에서 노닐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시가 한 수 씌어 있었다.
눈물같이 맑고 푸른 호수 위에
원앙새 한 쌍 시름 없이 노니네
어인 일인고 임 만나기도 전에
까만 머리 속절없이 백발이 되네
아, 궁궐 깊은 곳에 밤이 깃들이면
임 그려 옷자락에 방울방울 눈물 짓네.
단지흥은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영고, 영고…….'
실로 영고가 자기를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모든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영고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이상하게도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기우는 것이었다. 더욱이 영고를 냉궁에 보낸 후로는 밤마다 그녀를 안고 정겹게 속삭이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러다가 방그레 웃으며 잠에서 깨어 보면 큰 침실에 자기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그녀가 그리웠던가. 그러기를 벌써 1년 하고도 두 달 남짓이나 되었
다. 일순 그는 갑자기 영고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삼라만상이 다 잠든 이 밤, 영고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 못난 주백통을 그리며 눈물 짓고 있을까, 아니면 이 무정한 사내를 원망하며 눈물 짓고 있을까.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단지흥은 섬돌 위에 서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냉궁 쪽으로 눈길을 던지며 바보같이 서 있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스스로 내 자신을 괴롭힐 건 뭔가? 구중궁궐 안에 내 제일 좋아하는 여인이 영고말고 또 있으랴. 물론 치주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옛일, 이 대궐 안에서 그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여인은 영고밖에 없다.'
그는 영고에게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지흥은 태감이나 궁녀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냉궁으로 다가가 낮은 담장을 타고 냉궁 지붕 위로 살짝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난데없이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단지흥은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일국의 황비로서, 그것도 지엄한 대리국 궁궐에서 버젓이 남의 씨를 낳아 기르고 있다니……. 그는 터질 듯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단지흥은 그대로 멀거니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싸락싸락 서리가 내리고 밤바람은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영고와의 지난 일들을 되새기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영고와의 만남은 실로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일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자니 영고와는 실로 하늘이 맺어 준 기이한 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숙녀동에서 영고를 데리고 나설 때 새 할미가 된 손톱 긴 여자의 목소리마저도 귀에
쟁쟁 울리는 듯했다.
"영고를 부디 살뜰하게 아껴 주고 보살펴 주옵소서!"
뿐더러 두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 숙녀동 동주 할미를 배웅하던 계집애의 모습도 눈물겹게 떠올랐다. 단지흥은 비단 손수건을 힘없이 떨구고는 저물도록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찬바람을 맞은 까닭에 단지흥은 이튿날부터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그가 병이 완쾌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는 어느덧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 있었다. 해가 바뀌었건만 그는 여전히 영고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찻잔 하나, 휘장 하나에도 영고의 손길이 느껴지고 영고의 얼굴이 어리는 것만 같아 마음은 삼검불처럼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단지흥은 국사를 밀어 놓고 일양지공을 연마하
는 시간이 더 잦아졌다.
황궁 가까이 객점이 하나 있다. 어느 날 그 객점으로 웬 낯선 객 하나가 찾아들었다. 복색으로 보아 타관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딱딱하니 표정을 굳힌 채 술상에 앉아 잔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에 슬며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대리국의 황제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적이 놀라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지난번에는 그 요망한 황비에게 우롱을 당하고도 아직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 이번 걸음에 그 황비든, 이 대리국의 단지흥이란 작자든, 아니면 두 연놈 다 없애 버리고 말겠다.'
그는 다시 술꾼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밝혔다. 모두들 단지흥이야말로 성군이며 그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노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들을 하면서 단지흥의 병환을 두고 못내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황궁에 숨어 들어가면 먼저 그 황비를 죽여 단지흥의 기를 꺾어 놓으리라 작심했다. 사내는 건너편 술상에 마주앉은 두 객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이 대리국의 임금님께서 어떻게 덕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다지도 칭송하는 거요?"
두 객은 간판히 사내를 훑어보았다.
"댁은 어느 고장에서 오셨수?"
사내는 빙긋 웃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단지흥의 공덕을 구구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내는 내내 빙긋이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사내는 짐짓 무릎을 쳤다.
"참말로 어질고 현명한 군주로군. 내 한번 꼭 만나 뵈야겠소."
그러자 두 사람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본디 단황을 만나 뵙기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요. 한데 아쉽게도 황제는 요즘 근 며칠 간이나 병환중에 계시답니다. 대관절 무슨 병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척 위중한가 봅니다. 그러니 가까운 시일 안으로는 폐하를 뵙기가 어려울 거요."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천재일우의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일양지로 천하에 이름을 드날린 단지흥이 아직 새파란 나이에 중병에 걸려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미심쩍게 생각되었다. 웬만큼만 무공을 익혀도 스스로 병을 다스리게 되는 법인데……. 아무튼 그것을 보아도 큰 병에 걸렸음에 틀림없으니 오늘 밤을 놓치지 말자고 그는 거듭거듭 다짐했다.
밤이 깃들이기를 기다려 사내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곧장 황궁으로 내달았다. 그는 한 민가의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가 순라병이 지나가자 비호같이 궁성 벽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대궐에 붙은 행랑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저쪽에서 두 사내가 흔들흔들 걸어오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이 음식은 말야, 폐하께서 황비에게 보내는 거야. 하지만 폐하께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황후께서 보내는 것이라고 일러주라지 않겠어. 나 원 무슨 꿍꿍인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뭘, 그래? 그저 시키는 일이나 굽실굽실 하면 되지 그 속은 알아서 뭘 하게?"
두 사람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젊은 태감들이었다. 둘 다 손에 찬합을 받쳐들고 있었다. 순간 숨어 있던 사내는 저 음식을 가지고 재간을 피우면 마침 맞겠구나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행랑 벽에 바짝 붙어 있다가 두 태감이 스쳐 지나갈 찰나에 슬쩍 손을 뻗어 기를 넣었다. 한 줄기 기가 앞서가는 태감의 무릎에 닿았다. 순식간에 무릎 부위의 환조혈(環跳穴)을 맞은 태감은 찍소리도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태감이 키들키
들 웃으며 농을 붙였다.
"이봐, 황비 전에 닿기도 전에 절부터 하는 겐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까!"
앞서가던 태감은 다리를 주물러대며 이내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제야 뒤따라가던 태감이 얼른 찬합을 내려놓고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 순간 땅에 놓인 찬합 옆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 스쳤다가 삽시에 사라졌다.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기랄, 왜 다리에 쥐가 다 나고 야단이야, 야단이! 하마터면 찬합을 깨뜨릴 뻔했잖아?"
두 태감은 투덜거리며 다시 찬합을 받쳐들고 우쭐우쭐 냉궁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그 그림자도 바람처럼 묻혀 들어갔다. 그림자는 헐망한 병풍 뒤로 숨어 들어가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널따란 마루에서 게으른 시녀들 두엇이 암고양이처럼 선하품을 하고 있다가 두 태감이 들어서자 배시시 웃으며 얼른 일어나 반겼다.
"아유, 무슨 바람이 불어 이 야밤중에 다 오셨어요? 또 구실을 붙여 요 새침데기를 보러 왔겠군요?"
두 시녀는 서로 꼬집어 가면서 음탕하게 눈빛을 반짝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다리를 상한 태감이 짐짓 정색을 하고 일렀다.
"이 단설기는 황후께서 황비에게 손수 보내시는 것이다. 고맙게 받아 자시라고 해라."
"아무튼 자꾸만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구요! 이 새침데기는 밤마다 나를 못살게 군다구요!"
시녀들은 찬합을 받아 들며 또 까르르 웃음을 토해냈다. 태감은 넉살좋게 마주선 시녀의 발그레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총총히 문을 나섰다. 두 시녀는 곱게 눈을 흘기며 볼을 매만지고는 찬합을 받쳐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그린 듯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시녀가 찬합을 받쳐든 것을 보고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보내 온 것이더냐?"
"방금 황후께옵서 보내 오셨사옵니다. 황후의 은총을 생각하셔서 어서 드시와요."
병풍 뒤에 숨었던 그림자는 용마루 밑에서 슬쩍 몸을 날려 내실 휘장 뒤로 옮겨 숨었다. 자세히 보니 분명 언젠가 그 누각에서 만났던 그 미인이었다. 괘씸한 것, 오늘은 이 수상표 구천인이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 줄 테다. 휘장 뒤에 숨어 있는 이 텁수룩한 사내, 그는 바로 강남의 철장방 방주 철장 수상표였다. 언젠가 구천인은 한 누각 위에서 영고와 내기를 하다가 그만 영고가 얼렁뚱땅 내놓은 독벌레에게 물려 큰 봉변을 당할 뻔했었다. 구천인은 이를 평생의 수치
로 생각하고 아무때든 꼭 앙갚음을 하리라고 단단히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영고는 찬합 뚜껑을 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이말고 이 세상에 나를 생각해 주는 이가 또 있단 말인가?"
그이란 대체 누구일까, 구천인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곰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데 저 년 얼굴에 왜 저리도 수심이 어려있는 게야? 맞아! 필시 단지흥에게 버림받고 이 곳에 연금당해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저 년을 죽인다 해도 단황이란 놈은 눈 하나 꿈쩍 않겠는 걸…….'
그러나 다음 순간 구천인은 도리질을 쳤다. 저 여자가 단지흥에게 버림받았든 어쨌든 간에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죽여 마땅하다고 마음을 사려 먹었다. 누각에서 망신을 당하고 봉변을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었다.
영고는 찬합에 담긴 단설기 한 조각을 들고 깊은 상념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
"황후가 보내 온 것이라고? 아니야, 어쩌면 황제가 보내온 것일지도 몰라……."
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지는 듯싶더니 금세 다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런 냉혹한 사람이 단설기를 보낼 리 만무야……."
영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후유 한숨을 쉬었다.
"그이는 지금 정녕 어디에 계신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 안다면 그이는……."
영고의 가냘픈 얼굴에 얼핏 홍조가 어렸다.
구천인은 영고가 단설기를 먹지 않고 보고만 있자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고는 여전히 손에 단설기를 든 채 다시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더니 단설기를 내려놓고는 찬합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시녀를 불렀다.
"여봐라, 이왕 황후께서 보내 오신 것이라니 너희들도 좀 맛봐야 할 것 아니냐? 얼른 가져다 맛들이나 보거라."
시녀 둘은 반색을 하며 넙죽 단설기 몇 쪽을 받아 들고 그 마루방을 거쳐 뜨락으로 나갔다. 구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시녀들이 단설기를 먼저 먹는 날에는 그야말로 낭패가 아닌가. 하지만 마음만 조급할 뿐 당장 그 무슨 묘한 수도 없었다.
시녀들이 나가자 영고는 또다시 단설기 한 쪽을 집어 들더니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식성도 좋은 양반이었지. 검술을 익히고 땀을 흘린 다음에 단설기를 권하면 그렇게도 맛있게 잡수셨는데……. 지금은 어느 궁벽한 산속에서 배나 곯고 계시진 않을지……."
구천인은 그만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아, 저 계집이 늑장을 부려도 분수가 있지, 사람 피 말려 죽일 작정을 했나! 아무려면 일국의 황제인데 단지흥이 단설기 하나 맘대로 못 먹을까.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 궁벽한 산골에 있는
놈이라니 그럼 단지흥이 아니라 다른 놈을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 저 계집이 어떤 사내 놈을 그리든 그야 내 상관할 바 아니고, 좌우간 저 단설기를 어서 먹어야 할 텐데……."
한 순간 영고가 선뜻 단설기를 입으로 가져 갔다. 구천인은 두 눈이 확 뜨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바깥에서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고는 적이 놀란 눈빛으로 그저 단설기를 든 채 한참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더니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저런, 저런! 또 야밤에 시녀 애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양이군. 아예 모른 체하자, 내 일만 해도 골치가 쑤셔……."
구천인은 등골에 땀이 확 내뱄다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가 시녀 둘이 중독된 것을 보면 기절초풍할 정도로 야단법석을 떨 것이고 그리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황후께서 보내 온 것이라니 한 조각 맛이나 보자……."
영고는 다시 단설기를 집어 들었다. 한데 이번에는 또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던 갓난애가 방정맞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어이구 내 보배, 왜 우는 게야, 응? 자 뚝! 뚝! 엄마가 안아줄게 울지마……."
영고는 다시 단설기를 내려놓고 갓난애를 안아 올려 등기둥기 어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성스럽고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아이를 꼭 껴안고 볼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아가, 우리 모자는 이 무서운 역경을 꼭 이겨 내야 해. 그래서 기어이 네 아버지를 찾아야 해. 네 아버지가 산속에 있든, 절에 있든, 하늘 끝에 있든, 기어이 찾아내야 해! 그래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꾸나."
구천인은 그 광경을 훔쳐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독한 것이 그래도 제법 어미 구실은 한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속이고 절이고 대관절 누구를 찾아간단 말인가? 그는 일순 그 사내가 누군지 자못 궁금해졌다. 하나 그 사내가 누구고 간에 이제 조만간 이 모자는 소리 한마디 못 지르고 황천객이 될 판국이었다.
영고의 품에 안긴 어린애는 이제 그저 한 돌이 될까말까 해 보였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해죽 웃으며 포동포동한 손을 뻗쳐 단설기를 잡으려 했다.
"안 돼, 안 돼."
영고는 일부러 슬쩍 몸을 뒤채며 장난을 치다가 아이에게 단설기를 한 조각 쥐여 주었다.
단지흥은 오도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슴은 가문 호수처럼 타 들어갔다. 이날 밤은 유독 영고를 찾아가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답답한 가슴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미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종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채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선뜻 방문을 나섰다. 그러나 냉궁 쪽으로 몇 걸음 내딛다가 그는 그만 도리질을 치면서 우뚝 멈춰 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영고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숙비의 처소로 향했다. 마음이 심히 울적하였다. 그는 소리 없이 조용히 숙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숙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데 천만 뜻밖으로 맞은편에 두 태감이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적이 놀라 얼른 걸음을 멈추고 문 어귀로 비켜섰다. 숙비는 마치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속곳만 걸친 채였다. 봉곳한 젖가슴이 다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은잔에 술을 부어 차례로 두 태감에게 권했다.
"가짜배기도 한 잔 했으니 진짜배기야 두 잔을 해야지요. 아무튼 밤마다 독수공방이라 무료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두 분이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어요, 호호호……."
교태가 절절 흘러 넘쳤다. 단지흥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진정하며 숨을 죽이고 가만히 훔쳐보았다. 술을 권하는 걸 보니 가짜배기란 사내는 턱주가리에 수염 하나 없이 민숭민숭한 녀석이고 진짜배기는 뾰족한 쐐기 수염이 나 있었다.
두 태감은 숙비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 두어 잔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자연 숙비를 훔쳐보는 눈들이 게슴츠레해졌다. 가짜배기가 숙비의 얼굴을 자못 음탕하게 쳐다보면서 먼저 말끈을 풀었다.
"저는 본시 미인이 많이 나는 항주부에서 나고 자랐지요. 하나 항주부 미인들도 숙비님만 한번 봤다 하면 울고 가겠습니다. 숙비께서 만약 항주부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필시 큰 부잣집 마님이 되어 종년들을 한 마당 부리며 호강하고 사실 텐데…… 허허, 이게 뭡니까? 허울이 좋아 숙비지 실은 밤마다 독수공방에 애꿎게 한숨만 내쉬고 말입니다."
"흥, 그럼 네 녀석이 큰 부자라면 나를 아내로 데려 가겠느냐?"
숙비는 슬쩍 눈을 흘기며 한마디 던졌다. 가짜배기는 신바람이 나서 농을 받았다.
"아무렴 데려가고말고요! 하지만 예를 갖추고 데려가기 전에 톡톡히 재미는 보여 줘야 해요. 이히히……."
그러자 진짜배기가 바짝 시샘을 하며 핀잔을 주었다.
"네깟 놈이 다 뭐냐? 숙비님의 귀체는 천금과도 같고 저 밤 하늘의 별처럼 높고 귀하신 것이야. 우리같이 비천한 놈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어. 괜히 헛물켜지 말란 말야!"
가짜배기가 한술 더 떴다.
"지금 당장 숙비께선 우리하고 마주앉아 계신데 공연히 까마득한 하늘의 별과 비길 건 뭔가. 옷만 벗으시면 천금 같은 귀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게야. 진시황 때부터 너같이 쓸개 빠진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쳤기 때문에 삼천 궁녀가 독수공방에 피눈물을 쏟은 거라구!"
"이 놈, 네 놈만 사내고 난 뭐 빈털터리 바지저고리라더냐? 존귀하신 숙비님의 체신을 봐서 참고 있다뿐이지."
숙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두 태감이 찧고 까부는 것을 적이 황홀하게 듣고 있다가 돌연 낯을 붉혔다.
"나는 체신이고 뭐고 죄다 하찮게 여기는 여인이야. 왜 남의 아픈 사정은 모르고 입방아만 찧는지 원……. 내 몸뚱어리라도 보고 싶다면 못 보여 줄까, 원!"
그러더니 숙비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고름을 풀었다. 그러자 그나마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속옷마저 하늘하늘 흘러내리고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을 본 순간 단지흥은 그만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당장에 뛰쳐 들어가 세 연놈을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숨을 죽였다.
"차, 참말로 탐스럽군요!"
가짜배기라는 태감은 끌끌 혀를 차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진짜배기는 손뼉까지 치면서 떠들어댔다.
"참말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로구먼. 어이구, 눈부셔라! 서시, 양귀비도 울고 가겠네그려."
숙비는 얄밉다는 듯 두 태감을 흘겨보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둘 다 등신 같은 사내들이라 별수가 없군. 두 눈 뻔히 뜨고 구경들만 하고 있으니……."
두 태감은 일순 영문을 몰라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와락 침대 앞에 꿇어앉으며 하소를 했다.
"숙비님, 이 소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숙비는 피식 웃었다.
"여자인 내가 무슨 수로 너희들을 불쌍하게 여긴단 말이냐?"
"하긴 그렇사옵니다만, 원하신다면 저희 둘은 기꺼이 숙비님을 모실까 하옵니다."
그 말에 숙비는 얼굴이 환해지며 쌩긋 눈웃음을 쳤다.
"정말? 하지만 너희 둘이 함께 달려든다 해도 폐하 한 분의 힘도 못 따라갈걸. 네 녀석들은 다 그저 사내의 허울만 쓰고 있는 것 아니만 말야!"
"천만에! 이제 맛 좀 보시면 아실 거외다!"
두 태감은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에 드리운 휘장을 끌어당겼다.
단지흥은 금세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참담한 심경이었다. 어찌하여 궁중의 법도가 이렇게 문란해졌단 말인가. 황제의 귀비들이 태감들을 꼬여다가 배가 맞아 돌아가고 있다니……. 단지흥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단숨에 뛰쳐 들어가 와락 휘장을 뜯어 버렸다. 달아오른 세 연놈의 시뻘건 몸뚱이가 문어 발처럼 얽혀 있었다.
영고가 아기에게 단설기 한 조각을 쥐여 주니 아기는 해죽해죽 웃으며 금세 단설기를 입으로 가져 갔다. 그때였다. 시녀 하나가 다급히 외치며 달려 들러와 와락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영고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불길한 예감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쳤다. 영고는 아기의 입에 반쯤이나 들어간 단설기를 다짜고짜 빼앗아 힘껏 내동댕이쳤다. 아기는 대번에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시녀는 몸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일어나 앉더니 무섭게 영고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삼검불처럼 헝클어졌고 두 눈엔 벌겋게 핏빛이 어려있었다.
"황비님, 이렇게 지독한 짓이 어디 있나요. 저희들은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지만 철모르는 아기는 왜 죽인단 말예요. 이 천진난만한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어요. 무슨 죄가……."
시녀는 꼭 실성한 사람마냥 어깨를 들까불더니 그대로 넘어가 더는 꼼짝도 안 했다.
구천인은 휘장 뒤에서 내심 손뼉을 치면서 고소를 머금었다.
'잘됐다! 종년이 제 주인 영고를 의심하니 영고는 황후를 의심하겠지. 어디 네 년은 황후란 년과 서로 실컷 물고 뜯으면서 한번 싸워 봐라. 이 구천인은 어부지리나 얻자……."
아닌게아니라 영고는 울음을 그치고 아기를 꼭 껴안은 채 서성이더니 단설기를 홱 집어 들어 창 밖에다 내동댕이를 쳤다.
"황후와 단황 짓임에 틀림없어! 세상에 이렇게 독한 짓을!"
그 순간 구천인은 이때다 싶어 휘익 영고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영고는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 크게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똑바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강파른 몸집에 날카로운 눈매, 필히 어디서 본 듯한 사내였다. 영고는 곰곰 생각을 더듬었다.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이 사내는 바로 몇 해 전에 그 누각에서 만났던 그 사내였다. 영고는 내색을 않고 잔뜩 위엄을 갖춰 물었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여긴 뭣 하러 온 거요?"
구천인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정녕 내가 누군지 모른다? 허, 네 년이 나를 꼬여 내기를 걸어 놓고 몰라?"
영고는 안 그래도 심란하여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여긴 대리국 황궁이다. 그렇게 맘대로 드나들다가는 목숨이 달아난다는 걸 모르느냐? 뭣 하러 온 게냐?"
"나는 시골 장터만한 대리국을 내 집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드는 사람이다! 뭣 하러 왔느냐고? 괜히 능청 떨지 마라!"
그때 아이가 또 불에 덴 듯 울어댔다. 영고는 아이 머리에 볼을 대고 둥기둥기 어르며 구천인을 힐끔힐끔 노려보았다. 구천인은 음충맞게 웃음을 흘리며 불쑥 한마디 내던졌다.
"아마도 당신은 단황의 총애를 잃은 것 같구려. 그렇다고 황후와 짜고 음식에 독약을 넣다니……."
하나 영고는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구천인은 한술 더 떴다.
"황비,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비께서 마음을 사려 먹고 한 가지 일만 하면 그 아이에게 대단히 좋을 거요."
영고는 의아해하며 대뜸 되물었다.
"아이에게 좋다니요? 빙빙 둘러대지 말고 어서 말해 봐요!"
"내 말 좀 들어 보우. 만약 그자들이 또다시 손을 쓸 때까지 기다린다면 조만간 황비는 물론이요, 귀여운 아기마저 죽게 될 거요.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차라리 먼저 손을 써욧! 먼저 손을 써서 그자를 죽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오!"
"그자라니 대관절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영고는 성마르게 다그쳤다.
"스스로 더 잘 아실 텐데."
구천인은 대답을 늦잡으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는 영고의 기색을 살피며 속셈을 퉁기고 있었다. 실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구천인은 대리 환궁의 내막을 잘 모르지 않는가. 단지흥의 처소가 어디에 있으며, 태감 무리들이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지 완전히 까막눈이었다. 그러니 영고의 도움만 받는다면 단지흥 모가지를 따는 것쯤이야 말 그대로 식은죽 먹기요, 여반장이리라.
구천인은 끈질기게 영고를 꼬드겼다.
"황비는 이 황궁에서 분명 단황의 미움을 산 것 같소. 오죽이나 미웠으면 음식에 독약을 넣었겠소?"
영고의 기색은 한결 어두워졌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라고 마음을 놓으면 절대로 안 되오. 본디 지독한 사람들이라 조만간 또 모해하려고 날뛸 것이오!"
영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 사내가 왜 이다지도 달라붙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딱딱 사리에 들어맞지 않는가. 그녀는 혼자소리하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나를 죽인다 해도 무방해요."
그녀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백통과의 그 일에 대해 단지흥에게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그런 걸 어찌할 것인가. 주백통을 향한 사랑이 애절할수록 그녀는 단지흥이 주는 벌을 달게 받자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었다.
그러나 정작 영고가 그렇게 나오자 구천인은 바짝 속이 달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날카롭게 영고를 쏘아보았다.
"황비는 죽는다손 치더라도 이 불쌍한 아기는 왜 죽이려 하는 거요? 이 아기한테야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귀여운 아기까지 죽이고도 그 악귀 같은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야. 그 놈이 좋아하는 꼴을 보자고 아기까지 죽이려나?"
영고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같이 무서운 말이었다. 순간 그녀는 비 오듯 눈물을 쏟아 내며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아 더욱 힘껏 아이를 껴안았다.
'나는 죄를 지은 계집이지만 우리 아기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를 죽일 순 있지만 우리 아기를 죽일 수는 없어. 아아, 지금도 하마터면 이 불쌍한 애한테 독이 든 단설기를 먹일 뻔하지 않았던가? 그랬더라면 내 손으로 내 핏덩이를 죽인 것이나 진배없지 않았을까? 어이구, 천지신명도 무심하시지……."
불현듯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지게 아기를 껴안았다.
"이 아기만은, 이 아기만은 안 돼. 이 아기만은!……."
구천인은 벙싯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참 기가 막힌 일이오. 아까 그 단설기만 먹였더라면……."
"그따위 소리 당장 집어치워요. 우리 아기만은 절대로 죽게 할 수 없어요! 내 절대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영고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황황히 불타고 있었다.
"이봐요, 내게 이 아기를 근심 없이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소. 한번 들어 보겠소?"
영고는 적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구천인을 쏘아보았다.
"아니,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신은 대관절 누군데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나를 위하는 척하는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군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소. 그리고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오. 그저 단황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에서 자고 있는가만 알려 줘요. 좀더 도와줄 요량이면 나와 함께 그리로 가고. 뒷일은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니, 그럼 단황을 죽이려고……. 단황을?"
구천인은 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고는 워낙 총명한 여인이라 평상시라면 이 구천인의 속셈을 능히 꿰뚫어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지금 워낙 경황이 없어 그만 중심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일순 마음이 흔들려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단황을 죽일 수 있겠어요? 무공으로 논할진대 당신은 결코 그 양반의 적수가 못 돼요."
구천인은 잠시 민망스러운 눈길로 영고를 쳐다보더니 불현듯 몸을 홱 돌려 벽에 대고 번개같이 한 장을 내질렀다. 쿵 소리와 함께 큼직한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대번에 창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구천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상에 내 무쇠 같은 장법을 당할 자는 없소."
"과연 무공이 만만치 않군요! 단황을 대거리해서 싸울 만하겠어요. 하지만 무공도 여간이 아닌데 당신은 무슨 심사로 예까지 와서 나를 부추기는 거예요? 그저 무공을 겨루어 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죽이려 드냔 말이에요,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구천인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영고를 노려보았다.
'이 계집한테 도움이나 좀 받을까 해서 살려 두니까 제법 어른을 훈계하고 나서? 쓸개 빠진 년같으니라구! 단지흥 놈에게 빌붙어 그래 끝장이 좋았냐 말이다, 몹쓸 년!'
구천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황비, 난 그 놈을 기어이 죽여야겠어. 지난번 화산 싸움 전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참석을 못했지. 그러니 이제라도 밟으며 동사니, 서독, 남제, 북개 하는 놈들을 하나하나 죽여 버려야겠어. 천하의 제일 고수라는 무림의 왕관은 의당 내가 써야 하니까!"
구천인은 서슴없이 의중을 드러내고는 징글맞게 웃어젖혔다.
영고는 어쩐지 가슴이 섬뜩했다. 이 사내는 정녕 단지흥을 죽일 일념으로 예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비록 단지흥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영고가 단지흥이 이 낮선 사내에게 비명횡사하는 것을 바라겠는가. 영고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단황을 죽일 생각이라면 난 결단코 도울 수 없어요."
구천인은 목구멍으로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입술이 닳도록 한참 동안이나 설복시켜 겨우 마음을 돌려 세우나 했더니 결국 공연히 말품만 판 꼴이 아닌가.
"이 요망스러운 계집! 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변덕을 부리는 게냐? 단황의 거처를 바로 대지 않으면 먼저 너하고 네 년 갓난쟁이부터 죽이고 말 테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쌍장을 펼쳐 들고 바싹 영고에게 다가 들었다. 영고는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아이를 안은 채 슬쩍 몸을 피하며 주먹을 날렸다. 영고의 검술과 점혈법은 모두 주백통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구천인을 상대로 얼마간은 너끈히 지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영고가 삼 년 전의 그 풋내기이리라고 오산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이도 있는데 독벌레고 독사고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작 맞서고 보니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구천인은 세 번이나 장을 날렸지만 세 번 다 헛물만 켜고 말았다. 구천인은 다시 두 장을 가다듬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일찌감치 무릎 꿇지 못할까?"
구천인은 또다시 급급히 쌍장을 내쳤다. 영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번개같이 내리치는 장을 피해 요리조리 밀려 다녔다.
"이 년아 소원대로 죽여 줄 테니 지옥에 가서나 단황 녀석을 만나거라!"
구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크게 소리치며 다가들었다.
"철장개산!"
그러자 장과 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윙윙 칼바람이 일었다. 영고는 번쩍 몸을 날려 자지러지게 울어젖히는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뛰어내렸다. 구천인은 숨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영고를 침대로 밀어붙이며 무섭게 장을 내질렀다. 영고는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두 장으로 구천인의 장을 받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쌍장이 허공에서 서로 엇갈린 채 부르르 떠는 형상이 되었다.
필경 사내는 사내였다. 사내의 천근 같은 내력이 영고의 장을 통해 그녀의 몸으로 밀려왔다. 영고는 더는 지탱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면 침대 위에 울고 있는 아이가 깔릴 판이었다. 아니, 무지막지한 사내의 내력이 아기에게 흘러갈 수도 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로 선지피가 뚝뚝 듣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사내의 장을 막아냈다.
구천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장을 거두면 용서해 줄 테다!"
"네 놈이 나한테 뭘 용서해 준단 말이냐! 어차피 이 냉궁에서 죽을 계집이다."
영고는 날카롭게 오금을 박았다. 순간 사내의 내력은 더 무섭게 뻗쳐 왔다. 영고는 더는 견뎌 낼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선뜩한 피가 흐르는 입술을 윽물었다.
"이젠 순순히 단황의 거처로 안내하시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못해!"
"쳇, 냉궁에 처박힌 주제에 오지랖도 넓구나. 네 년이 뭣 하러 단황 걱정을 하는 게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격이군!"
"좋아! 그럼 네 년이 택한 길이니 나를 탓하지는 마라!"
구천인은 슬쩍 물러섰다가 다시 한 장을 힘껏 내질렀다. 영고는 호되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침대를 훌쩍 넘어 벽으로 밀려가 쾅 부딪혔다. 구천인은 단걸음에 침대로 다가가 아기를 겨누고 똑바로 장을 쳐들었다.
"셋까지 세겠다. 셋을 셀 때까지 대지 않으면 이 앨 박살내 버릴테다!"
영고는 몹시 다급하여 급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영고는 바득바득 기어오면서 악을 썼다.
"아기만은 다치지 못해!"
구천인은 코대답도 않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영고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단지흥의 처소를 알려 줄 수는 없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면서 울먹울먹 부르짖었다.
"잠깐만!…… 내 스스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으니 그 애만은 제발 살려 두어라……."
그러나 구천인은 팍 하고 있는 힘껏 장을 내쳤다. 침대 모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리며 아이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그는 아이를 흘겨보며 씨부렁거렸다.
"어느 놈씨인지 별별 잘도 우는군! 정말 귀찮아 죽겠다. 내 이놈을 당장……."
"저리 비켜! 내 아기만은 절대로 못 다쳐!"
"그러니 빨리 대란 말이야, 이 년아!"
영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아기를 덮쳤다. 그 순간 우악스런 사내의 손이 영고의 어깨를 텁석 거머쥐었다.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이쯤 해 두고 가겠다. 내일 밤 다시 올 테니 잘 생각해둬!".
구천인은 한마디 뱉어 놓더니 징글맞게 웃으며 훌쩍 몸을 날려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영고는 급히 상반신을 들고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하나 아기의 얼굴은 핏빛으로 새빨갛고 이제는 울지도 않았다.
"아가야, 아가야!"
미친 듯 불렀지만 아기는 축 늘어진 채 꿈쩍도 안 했다. 영고는 아기를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뱅뱅 돌았다. 그녀는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눈동자가 뒤로 넘어간 채 흰자위가 다 드러났다.
그때였다.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영고는 아이를 안고 홱 뛰쳐나갔다. 단지흥은 일양지 고수이니 얼마든지 아기를 구해 낼 수 있으리라. 그녀는 아기를 안고 단지흥의 침궁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단지흥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잡아먹을 듯이 두 태감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일순 숙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고로 황중에서 태감과 궁녀들이 배가 맞아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익히 떠돌았지만 이 대리국 황궁에서, 그것도 그가 친히 그 망측한 꼬락서니를 보게 될 줄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한동안 무겁게 정적이 내리눌렀다. 세 남녀는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땅에 납작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단지흥은 일순 장탄
식을 하더니 몸을 홱 돌려 숙비의 침궁을 나와 버렸다. 그러자 숙비는 되는 대로 아무 옷이나 거머쥐고는 알몸으로 단지흥을 쫓아 나가며 소리를 쳤다.
"폐하! 폐하…… 죽일 놈들이 저를 겁탈했사옵니다……."
숙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뭐라고 주워섬기며 뛰쳐나가다가 그만 문턱에 걸려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그땐 이미 단지흥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숙비는 파리하게 질려서는 태감들을 돌아보았다. 두 태감은 낯이 흙빛으로 질려서는 아직까지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어이구, 큰일났군! 이를 어쩐단 말인가?"
진짜배기는 넋 나간 사람마냥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숙비는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녀는 푸르뎅뎅하게 독이 올라 두 태감을 보고 싸늘하게 외쳤다.
"이리 와!"
두 태감은 질겁한 눈길로 숙비를 힐끔 보더니 그녀 앞에 풀썩 꿇어앉았다.
"쉰네는 더는 못하겠수다. 제발 비옵니다, 제발……."
그러자 숙비는 픽 웃으며 난데없이 두 태감의 뺨을 철썩철썩 후려갈겼다.
"이 등신 같은 놈들아, 뭘 못한단 말이냐? 그 말라 비틀어진 건 개한테나 떼어 주란 말야, 이 가짜배기 자식들!"
그러자 가짜배기가 볼멘소리로 힘없이 투덜거렸다.
"둘 다 가짜배기였소? 난 나 하나만 가짜배기고 이 사람은 진짜배긴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