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습 3
“크악!”
“내팔! 내 팔이!!!”
“어……머……니…….”
사방에서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아수라장.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자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분노에 몸을 맡긴 아미제자들과 살고자 하는 독문도와의 싸움은 성스러운 아미산을 붉게 물들였다.
치열한 싸움의 중앙을 허상죽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우수에 거대한 장도를 들고 있지만 식사를 하고 산보를 하듯 허상죽의 행동에는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빈틈을 발견한 것일까? 독문도중 하나가 허상죽의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동네 할아버지 같던 허상죽의 기도가 변했다. 허리는 낮아지고, 허상죽의 손에 장식품 마냥 매달려 있던 도는 예기를 뿜으며 몸의 뒤쪽으로 감겼다. 허상죽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독문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붕!
도가 대기를 갈랐다.
“커억!”
허상죽의 옆을 스쳐지나간 독문도는 허리가 두 동강 나며 산비탈을 굴러 내려갔다. 어느새 날카로운 예기가 사라지고 동네 할아버지로 돌아온 허상죽은 곽명신을 돌아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떠냐? 봤느냐?”
곽명신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수평 베기다. 도를 손에 잡은 뒤로 수백만, 수천만을 휘둘러왔다. 그러나 허상죽이 보여준 것에 비하면 자신의 도법은 어린애 장난이었다. 완벽한 균형과 허리의 회전, 그리고 자연스러운 힘 전달. 군더더기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단순히 본(本)을 보이기 위한 동작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을 테지만 지금 이곳은 전장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 오는데 아무런 흔들림 없이 자신의 도를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해봐.”
“예?”
느닷없는 허상죽의 말에 곽명신은 반문했다. 해보라니? 뭘? 허상죽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곽명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곽명신은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자 검이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으갹!”
몸을 옆으로 굴린 곽명신은 가까스로 검을 피할 수 있었다. 허상죽은 한숨을 쉬며 다시 한 번 방금 전의 상황을 재현했다.
“자세를 낮춰 몸의 균형을 잡은 뒤 허리 뒤로 도를 빼 힘을 모은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흘리며, 한발을 내딛는다. 다리가 앞으로 한보 전진하는 힘을 통해 자연스럽게 허리를 돌리고 그 힘에 의해 탄력을 받은 도는 강맹한 속도로 적을 벤다.”
“컥!”
이번에도 적은 허리가 동강이 나며 산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허상죽은 몸을 세우며 곽명신을 내려 보았다.
“봐라. 쉽잖나.”
‘어……. 어디가?’
곽명신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수준의 차가 커도 그렇지 적을 상대로 무공강의(武功講義)를 하다니. 독왕과 입씨름을 할 때부터 뭔가 자신이 상상하던 모습과 동떨어져 있다고는 생각을 했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했다. 질려있는 곽명신의 모습에 허상죽은 부연 설명을 했다.
“일격필살의 초식은 무엇이냐? 전설(傳說)적인 도법(刀法)의 십이성 초식?”
“…….”
곽명신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온 길임에도 그 실체조차 생각해 보질 못했다. 허상죽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일격필살이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초식에서 시작된다. 너 베기를 몇 번이나 해봤냐?”
“아마도 수백만 번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는 초식 중에 가장 많이 연습을 하고, 가장 오랜 시간 손에 익혀왔지. 가장 몸에 익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 보물을 썩히고 있었단 말이지.”
“하……. 하지만. 싸움은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단순한 초식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는…….”
곽명신의 말에 허상죽은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좋다 애송이. 말하는 방법을 바꿔주지. 일격필살이란 상대가 알고도 막지 못하는 초식이다. 그런 초식에 상대가 무슨 소용이더냐. 자신의 심, 기, 체 모든 것을 걸고 일격에 상대를 베는 것이다. 상대를 베느냐, 내가 베이느냐. 자신이 쓰지도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허상죽의 말에 곽명신은 머리가 멍해졌다. 뭐라고 딱 집지는 못하겠지만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상념(想念)? 아니다. 흐릿하던 앞이 약간이나마 밝아진 기분.
“크억!”
곽명신은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곳이 전쟁터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허상죽이 곽명신을 향해 달려드는 독문도를 일격에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전투 중에 딴 생각을 하다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곽명신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정신이 그쪽으로 집중이 되었다.
빡!
“끄악!”
해골이 깨지는 소리가 곽명신의 뒤통수에서 울렸다. 곽명신은 양손으로 뒤통수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곽명신은 눈물을 글썽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허상죽이 자신의 주먹에 입김을 불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 그러나 지금 이곳은 생명이 넘나드는 곳이다. 고민은 나중에 여유를 가지고 해라. 나도 그것을 깨달은 것이 예순이 넘어서였다.”
곽명신은 아직 고통이 느껴지는 뒤통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부술 수 있을지 모르는 한마디였다. 허상죽은 곽명신의 예를 받는 둥 마는 둥 헛기침을 하며 뒤로 돌았다.
“험! 뭐 그렇게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다. 그리고 손자의 친구는 손자나 마찬가지니까.”
남궁상욱과 곽명신은 친구가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연적(戀敵)이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있는 싸움이지만 물밑에서의 장외 투쟁은 치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허상죽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가르침은 주었을 것이다. 겉멋에만 치중해서 겉보기에 화려한 검술만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곽명신은 진지하게 도(刀)를 논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허상죽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부족함이 없다. 허상죽은 천천히 도를 휘두르며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 보는 곽명신의 주변을 살펴주며 아쉬움에 그지없는 한숨을 쉬었다.
‘상욱이 녀석이 도를 배웠어야 하는데……. 그 망할 놈의 검황(劍皇)자식만 아니었어도…….’
허상죽은 과거의 아쉬움에 이를 갈며 전황을 살폈다. 거의 다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
생각보다 빨리 정리가 되었다. 분노가 폭발한 아미파와 적절하게 배후를 습격한 당가의 합공은 적의 저항을 빠르게 무력화 시켰다. 더구나 바람은 산 정상에서 아래를 향해 불었다. 독문에서는 자신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독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미 피아가 뒤섞인 상황에서는 독을 사용할 수 없다.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너머에서 당철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당철은 허상죽을 보자 이죽대었다.
“웬일이냐 멧돼지. 네놈이 돌진을 다 안하고? 뭐 주변사람들이야 적진 한가운데로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니 좋기는 하겠다만 서도.”
“그러는 독탱이 네놈이야 말로 왠일로 방구를 뀌지 않냐? 뭐 주변사람들이야 숨통이 트이니 좋기는 하겠다만 서도.”
“카르릉!”
“으릉!”
두 왕은 또다시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며 입씨름을 시작했고, 당세보는 손으로 이마를 쥐며 고개를 저었다.
남궁상욱은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아미파의 일. 아미파가 해결해야 하는 채무. 타 문파의 일에 끼어들어 피의 업보를 뒤집어 써야 할일이 없다. 또한 그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빚을 갚기를 원한다.
남궁상욱은 전황을 살피며 위기에 처한 아미제자들을 돕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눈앞에 위기에 빠진 아미제자 하나. 상욱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크게 튕겨진 자신의 검. 눈앞으로 떨어지는 적의 검. 균형을 잃은 몸. 전투시 눈을 감으면 안 된다는 것은 철칙이지만 아미제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챙!
‘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자신이 어떠한 보호갑주도 착용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볼 때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소리가 자신의 미간 앞에서 울렸다. 그리고 검이 몸을 파고 들어야 함에도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 자신은 금강불괴를 익힌 적도 배운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여 아미제자는 슬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늠름한 등. 머리를 길게 내려 묶은 한 청년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 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상욱.
‘날 지켜줬나?’
독문도의 검을 막아선 남궁상욱은 좌수를 빠르게 놀려 독문도의 손목을 낚아챘다. 남궁세가 독문 금나수인 대연십구식이 펼쳐지며 검을 든 독문도의 손목이 꺾였다. 뒤로 빠르게 빠지는 상욱의 왼발. 손목이 꺾인 독문도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상욱의 움직임에 따라 끌려왔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몸이 끌려온 독문도의 발이 땅을 디디기 직전, 상욱의 왼손이 잡고 있던 독문도의 손목을 놓고 장(掌)으로 변화했다. 천뢰삼장(天雷三掌)의 제(第) 일식(一式). 내기를 머금은 상욱의 일장(一掌)이 독문도의 가슴에 적중했다.
“커억!”
독문도는 내상을 입었는지 입에서 각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상욱은 그런 그를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독문도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방어를 위해 검을 들어 올렸으나 상욱의 검은 그보다 빨랐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빠른 쾌검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의 묘리가 상욱의 검에 의해 발현되었다. 일검에 독문도의 목을 꿰뚫는 남궁상욱의 검. 독문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독문도의 입에서는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욱은 무너지는 독문도의 몸에서 검을 뽑으며 대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 묻어난 독문도의 피가 검을 휘두른 궤도에 따라 바닥으로 뿌려지며 반원을 그렸다.
“아……. 저…… 저기…….”
상욱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연청색의 경장을 입은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아미파의 속가제자이리라. 상욱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주었으면 바로 몸을 추슬러 다음에 대비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남궁상욱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아미파 제자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상욱의 눈길에 얼굴을 붉혔다.
“가……. 감사합니다.”
아미제자는 힘겹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상욱은 그런 아미제자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다시 주변을 살피며 이동을 하는 상욱을 보는 아미제자의 눈은 광적으로 빛났다.
“머…… 멋있어.”
준수한 외모, 뛰어난 무공, 그리고 일면을 흐르는 차가운 모습. 그야말로 영웅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밀히 따지면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눈에 콩깍지가 쓰인 아미제자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까아~~~.”
상욱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설마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 상황에서 적의 기습을 당했나?’
뒤를 돌아본 상욱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아미제자가 몸 앞에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간 상욱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상욱에게 이현진이 다가왔다.
“또 한건 올리셨군요.”
“뭔 소린가?”
이현진의 앞뒤가 빠진 말에 상욱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욱의 반응에 현진은 재미없는 얼굴이 되었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 놀려먹어도 놀려 먹을게 아닌가.
“에구. 관둡시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기는 하군. 아무리 계책이 성공했다 해도 한 문파에 도전해온 전력치고는 너무 적어. 저항도 약하고.”
“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확실히. 복병? 그것도 아니면 유인책?”
“둘 다일 가능성도 있죠. 확실한 것은 뭔가 이상하다는 점입니다. 느낌이라고 해도 좋고, 뭐라 해도 좋고요.”
현진의 의견에 상욱 역시 동의했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온몸의 감각이 은근히 경계를 보내고 있다. 눈앞에 위기에 빠진 아미제자. 상욱은 몸을 날렸다. 상욱이 견제를 들어가자 독문도는 상욱의 공격에 대응을 했다. 순간 검광을 발하는 아미제자. 방금 전에 구해준 여인과는 다르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찾았다.
합격(合格). 남궁상욱에 집중하고 있던 독문도는 측면을 뚫고 들어온 아미제자의 검격(劍擊)을 감지하지 못했다. 토지를 적시는 붉은 선혈. 독문도의 몸에서 검을 뽑아든 아미제자는 상욱에게 포권을 하며 구명지은(救命之恩)에 대한 인사를 했다. 상욱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현진 역시 상욱과 같은 계산을 했는지 궁지에 몰린 아미제자를 구해주고 있었다. 주변을 뒤덮는 매화향기. 현진의 검이 붉은 매화를 그려냈다.
이현진에 의해 주변이 안정되자 상욱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저 아래에서 외조부님과 독왕 당철 어르신이 또다시 입씨름을 하는 것이 보였다.
“또 시작하셨군.”
남궁상욱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저리 만나기만 하시면 싸우시는지. 그러나 비단 두 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검황이신 조부님까지 만나면 세분이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진다. 일황(一皇)과 이왕(二王)의 싸움, 아니 다툼.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련만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다. 그러나 검황, 도왕, 독왕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보유한 이들은 바로 돌이 되어버린다. 그에 비하면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고 있는 것일지도.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상욱이었지만 그래도 입안이 씁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저러시나요?”
이현진이 검에 묻은 피를 헝겊으로 닦아내며 상욱에게 다가왔다. 현진의 얼굴에는 당혹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처럼 돌이 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못 볼 것을 봤다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예의바르게 구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을 보니 수양을 잘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욱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순간 아래쪽에 몰려 있는 당가와 아미제자들을 향해 화살비가 쏟아졌다. 또다시 튀는 선혈. 붉은 술이 달린 화살은 급작스런 기습에 당황하는 당가와 아미제자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검붉은 대지로 다시 붉은 비가 내렸다.
“젠장!”
“피해라!”
도왕과 독왕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내며 퇴각을 지시했다. 이유야 어째든 상대가 의도한 곳에서의 싸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역시 복병이었군.”
그나마 상욱과 현진은 앞으로 나서지 않고 보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지만 무리하게 돌진해 들어간 아미제자들과 측면에서 독문을 공격한 당가는 적의 사정권 내에 몰려 피해를 계속 늘렸다. 또한 궁수들 역시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아미파와 당가의 연합을 궁지로 몰아갔다.
“우리는 퇴각을 도울 수 있도록 가까이 있는 궁병을 처리하세.”
상욱과 현진은 좌우로 갈라져서 궁병들을 향해 달려갔다. 궁수들은 상욱과 현진이 자신들에게 접근해오는 것을 보더니 일제사격을 통해 그들의 발을 묶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궁수들은 뒤로 퇴각을 하여 상욱들과 거리를 벌였다.
“망할.”
조직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움직임.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상욱은 나무를 등지고 기회를 노렸다. 다행히 상욱과 현진에게 공격이 집중된 틈을 이용해 상당수가 지옥에서 빠져나올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
“독문이 이정도의 궁수들을 보유했을 리가 없는데……. 그리고 예상외로 적은 독문도의 수와 저항. 그렇다면 독문의 정예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상욱은 초조해졌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절대 이런 곳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상욱은 급히 허상죽에게 전음을 날렸다.
-……. 어쩌지요?
-그걸 아는 놈이 여기서 뭘 하고 있냐?
-예?
-야 이 자식아. 네 약혼녀하고 처음 만난 동생을 그대로 내버려 둘 거냐? 빨리 도우러 가지 않고 뭐해? 만약에 새아가 하고 빙아한테 털끝만한 상처라도 생기면 그놈들은 물론이거니와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어서 튀어가!
-예? 예!
허상죽의 호통에 대답은 했지만 난감했다. 고개를 내미는 기미만 보여도 십수발의 화살이 주변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그런 상욱을 지켜보던 허상죽과 당철이 혀를 찼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최악이다. 넓게 트인 공터는 아니지만 활을 쏘는 데는 최적이다.
위로 도망치기 위해서는 궁수들에게 등을 보여야 하고, 접근을 위해서는 화살비를 뚫어야 한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궁수들은 화살에 독을 잔뜩 발라 놨다.
해독제를 다량 보유한 당가는 괜찮다 쳐도 아미제자들은 스치기만 해도 주변을 떠돌고 있는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게 된다.
진퇴양난(進退兩難).
그리고 상욱의 생각에 의하면 독문의 정예가 후진을 공격하기 위해 크게 우회하여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후진에는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몇 없다.
기껏해야 유인사태와 위연린, 남궁빙아, 제갈은향. 그 외에는 거의 다 3대 제자 아래로 몇 가지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독문의 정예와 싸우기는 너무도 부족하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곳에서 지원을 보내야 한다. 그것도 가능한 최정예로. 도왕은 자신이 직접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왕의 초조한 모습에 독왕이 몸을 일으켰다.
‘무엇을 하려고?’
허상죽은 도왕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그가 하려는 일을 파악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팔십년 이상을 함께한 사이다.
짜증은 날지언정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는 친우(親友). 허상죽은 도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상욱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 할애비들이 틈을 만들어 주마 알아서 몇 놈 이끌고 후진을 지원해라
뭔지 모르지만 허상죽의 말에 남궁상욱은 주변에 있는 몇몇에게 전음을 날렸다.
독왕 당철은 나무그늘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이내 쏟아지는 화살비. 당철의 몸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피둥피둥한 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런 당철의 행동에 궁수대의 대장(隊長)은 미소를 지었다. 확 터진 시야에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공중으로 몸을 솟구친 것은 궁수들에게 자신을 표적으로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독왕이라 불리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전대(前代) 고수.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가 손안으로 들어왔다.
“전 궁수들은 저 뚱땡이를 노려라!”
궁수대장의 말에 전 궁수는 당철을 노리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공중제비를 넘는 당철이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작게 웅크려졌던 당철의 몸이 곧게 펴졌다.
“만천화우(滿天花雨)!”
휘둘러진 당철의 손을 시점으로 수많은 비침과 비도, 비표, 뇌구(雷球) 등이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며 궁수들을 향해 쏘아졌다.
모습이 드러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상대의 모습역시 관측이 용의한 법. 당철이 쏘아낸 암기는 맹독을 머금고 자신을 노리는 궁수들을 덮쳤다.
암기에 적중된 궁수는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뇌구들은 검은 동체를 뽐내며 궁수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중앙에서 폭발.
하나의 뇌구는 수십 개의 비침을 쏟아내며 희생자를 늘였다. 궁수대장은 당황했다. 독이 발라져 있음은 예상을 했다.
물론 그에 따라 독문에서 제공한 전천후 해약을 복용했다. 모든 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어도 적어도 즉사를 막아주고, 해약을 복용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즉사(卽死)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일반적인 당가의 독이라면 독문의 말대로 되었을 것이다. 허나 상대는 독왕 당철이다. 당가의 상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독과 암기.
그럼에도 당철이 독왕(毒王)이라 불리는 것은 그만큼 독에 대해 정통해 있다는 점과 사용에 있어 능숙함을 뜻하는 것이다. 당철에게는 자신만의 독이 여럿 있다.
이는 가문이나 심지어 다음 후계자인 당세보에게 조차 그 비법과 해약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인 해독제로 독왕 특제 독의 사나운 이빨을 피하고자 한 것은 과한 욕심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아직 죽은 자의 몇 배에 달하는 화살이 당철을 노렸다. 죽은 자는 죽은 자.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당철을 고슴도치로 만들어야 했다. 기백에 달하는 화살이 만천화우를 시전 하느라 공중에서 균형을 잃은 당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밑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솟구쳤다. 도왕 허상죽. 허상죽은 당철의 앞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도왕의 도는 도벽(刀壁)을 이루며 당철과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궁수대장은 이를 갈았다.
순간 아미파와 당가가 숨어있던 곳에서 그림자들이 튀어 나왔다. 일부는 산 정상을 향해 일부는 자신들을 향해 빠르게 근접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궁수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부 뛰어난 궁술을 지닌 몇몇이 속사(速射)를 통해 접근하는 아미, 당가의 연합을 견제했을 뿐이다.
“이런. 빌어먹을!”
자신의 직속상관 백운(白雲)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아미파와 당가 연합의 발목을 잡아두는 것. 그러나 그 임무는 독왕과 아마도 도왕으로 여겨지는 고수에 의해 반쯤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을 끌다 아군의 피해 없이 퇴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부여받은 임무 상 전멸시켜서도 곤란하지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끝나도 곤란하다. 다행이 상당하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꽤 피해를 입혔기에 독왕을 죽이지는 못해도 치명상만 입혔다면 성공적으로 작전을 종료할 수 있었는데. 정말이지 언제나 무리한 주문만을 해대는 골치 아픈 상관 덕에 머리에는 원형탈모증까지 발생했다.
“끙! 그럼 퇴각 시기인데…….”
이미 입은 피해만으로도 시말서는 불가피 하다. 지금껏 이 부하들을 키우는데 든 고생을 생각하면 저 빌어먹을 뚱땡이를 해치우고 싶었지만, 이 이상 피해가 늘어나게 해서는 시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궁수대장은 속으로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이정도 피해는 예상 범위 내다. 그리고 전사(戰死)한 대원들의 시신에 화골산을 뿌리라 지시하며 퇴각 시기를 놓고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