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장 무엇이 선(善)이오?
①
눈길 닿는 곳은 온통 단풍 일색이었다.
온산이 불붙는 듯 타오르고 있었다. 풍림(楓林)이 우거진 능선을 넘어 아득한 산기슭에 자리한 사찰(寺刹)에서는 한 가닥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찰의 한 선방에서도 작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관운빈과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용모는 출중했다. 이목구비는 곧고 뚜렷했으며,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은 천하를 수용하고도 남을 넉넉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허리 아래가 두터운 모포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적한 산사에서 간혹 내리는 비나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벗삼아 마시는 차 한 잔의 흥취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지."
중년인은 한 모금의 차를 음미한 후 중얼거렸다.
관운빈은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뜨거운 차가 가슴을 적실 때도 역시 쓸쓸함을 느끼곤 하지. 십 년이 넘도록 이 산사에서 난 이 쓸쓸함을 즐기며 살아왔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공백을 차 한 잔이 메꾸어 주었다. 너도 한 모금 마셔보아라."
관운빈은 여전히 찻잔을 들지 않았다.
"네가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구나. 반송장이 되어 왔던 네가 이렇게 빨리 회복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년인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들고 말을 이었다.
"떠나겠단 얘기는 들었다. 어디로 가려느냐? 무엇을 하려느냐?"
"......."
"그렇게 하거라. 언제든 오고 싶을 때 다시 오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관운빈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선방 밖의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는 낙엽 사이를 걸어갔다.
선방 안의 중년인은 다시 한 모금의 차를 마셨다.
그는 누구인가?
어쩐지 관운빈과 닮은 모습을 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멀어져 가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소군(小君)! 잠깐만 멈추십시오."
산비탈을 내려가는 관운빈을 누군가 쫓아왔다. 관운빈은 돌아섰다.
"무슨 일이오?"
현기가 서려있는 듯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관운빈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소군! 이러시면 안됩니다."
"치우시오. 난 가겠소."
차갑게 지나치려는 관운빈을 중년인은 다시 앞을 막으며 말했다.
"정 가시려거든 사대천왕과도 작별인사를 나누시지요."
관운빈의 몸이 굳어졌다.
"그분들도 생존해 계신단 말이오?"
"아, 모르셨군요. 제가 그만 깜박했습니다. 물론 네 분 모두 건재하십니다. 늘 소군 걱정만 하셔서 탈이지만......."
"지금 어디 계시오?"
관운빈은 채근했다.
"얼마 전 급한 일로 자리를 비웠으나 소군의 소식을 듣고 모두 와 계십니다."
"이곳에 있단 말이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중년인의 뒤를 따르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자신이 나왔던 선방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선생,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오?"
"보시다시피 주군(主君)의 거처로 가는 중입니다."
"무슨 소리요? 사대천왕이 계신 곳으로 안내한다 하지 않았소?"
"주군과 함께 계십니다. 이제 막 도착하신지라 먼저 주군께 인사를 여쭙는 중이지요."
관운빈은 걸음을 멈추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겠소."
"굳이 그러실 필요 있습니까?"
관운빈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내가 못 들어갈 이유는 없소. 그런데 용선생께 드릴 말이 있소. 제발 날 소군이라 부르지 마시오. 난 태화천의 후인이 아니오."
차갑게 내뱉은 관운빈은 다시 선방 앞에 섰다. 그는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오! 소군!"
"소군을 뵈옵니다!"
각기 다른 음성과 함께 사 인의 인물이 그를 반겼다.
"아! 숙부님들!"
방안의 사 인이 무릎을 꿇었다. 관운빈은 그들을 보자 격동을 금치 못했다.
사대천왕(四大天王).
그들은 바로 태화천의 천주인 천룡대제 관일청을 도와 파천황교를 격파한 지난 날의 태화천 고수들이었다.
패왕도(覇王刀) 풍뇌(豊雷).
그는 사대천왕의 대형(大兄)으로 검은 수염을 배꼽까지 늘어뜨린 인물로 그가 펼쳐내는 패왕풍뇌도(覇王風雷刀)는 천하제일 도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천수영(千手影) 범통(范通).
그는 사대천왕 중 가장 독특한 인물로 산발한 머리에 늘 남루한 의복만을 걸친 채 기괴한 행각을 일삼아 천룡대제마저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걸물이었다.
그는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경공술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뿐더러 십팔반 병기에 모두 능통하여 상대에 따라 적절한 무공을 사용하는 무공의 천재였다.
뿐만 아니라 암기를 운용하는 솜씨는 사천 당문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금령객(金鈴客) 부엽(夫葉).
그는 모습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인물이다. 깡마른 체구에 백지장처럼 창백한 피부, 시리도록 찬 눈빛의 그는 늘 손목에 방울을 달고 다녀 그 소리를 듣는 마인들은 싸워 보기도 전에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길고 짧은 두 자루의 검을 애병으로 사용하여 수많은 마인들을 저승으로 인도했다.
금갑철마(金甲鐵魔) 우문천(宇文天).
누가 뭐라 해도 사마의 무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바로 우문천이다. 그는 전신에 번쩍이는 금갑을 걸친 장대한 체구의 인물로, 각이 진 얼굴을 뒤덮은 송곳 같은 수염만 봐도 신장처럼 위엄이 넘쳐흘렀다.
그의 별호에 붙어있는 마(魔)자가 증명하듯 마인들은 물론 백도의 인물들에게도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창(槍) 외에도 권장(拳掌)에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마지막 인물은 관운빈을 안내한 중년인으로 사대천왕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태화천에 뒤늦게 합류한 만박서생(萬博書生) 용화문(龍和文)이었다.
그는 살막의 막주인 백야무정객, 마군자 사마을지와 함께 한림삼수로 일컬어지던 유생으로 천룡대제에 설복되어 태화천에 입천한 후 관운빈의 글선생과 태화천의 군사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②
"소군, 꼭 그리하여야겠습니까?"
금갑철마 우문천이 참다못해 언성을 높였다.
"우문숙부, 이미 결심한 일입니다."
관운빈은 시종 담담하기만 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향후의 진로에 있어 그의 마음은 확고하기만 했다.
선방 안의 중년인은 바로 그의 부친이자 지난 날 태화천의 천주인 천룡대제 관일청이었다. 그러나 관운빈은 그와 뜻을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관일청은 여전히 차를 마시며 좌중의 대화에는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천수영 범통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소군, 어찌하여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이유를 말씀해 주시오."
관운빈은 쓴웃음 지었다.
"후후, 범숙부가 공대하니 쑥스럽구려."
"허허! 그러실 테지요. 하지만 소군은 이제 어엿한 장부이십니다. 곧 태화천을 이끌고 무림의 화평을 도모하실 분인데 공대함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관운빈의 안색이 굳어졌다.
"범숙부,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는 태화천의 소군이 아닙니다. 동사군도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태화천과 연계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군, 제발... 소군께서 무엇때문에 거부하시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사대천왕은 모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관운빈은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천왕이 모두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할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입술을 열었다.
"그럼 먼저 용선생께 묻겠소이다. 내가 동사군도에 유배된 것부터가 용선생의 계략이었소?"
"......!"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차를 마시던 관일청은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관운빈은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태화천의 관운빈은 동사군도에서 죽었소. 여기 있는 이 사람은 그곳에서 구사일생한 또 다른 관운빈이오. 용선생은 날 잊으시오. 태화천이 애초부터 수립했던 전략을 그대로 시행하시오. 내가 동사군도에 버려진 순간부터 태화천과의 인연은 끊어진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용화문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관운빈은 딱딱하게 말했다.
"용선생, 동사군도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곳에서 살아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러니 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소. 태화천이 설마하니 내가 살아날 것을 예상하고 전략을 짰단 말이오?"
"그건......."
용화문이 대답하지 못하자 관일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이 애비도 네가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용화문은 크게 놀라 반박하고 나섰다.
"주군! 어찌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주군께서는 지난 세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군의 생환을 기원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소군을 위해 무림에 무영객(無影客)이란 가공인물까지 만들어 두시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용봉칠영의 일원으로 가장 신비한 인물로 알려진 무영객이 바로 관운빈을 위해 태화천이 안배한 가공인물이란 뜻이 아닌가?
관운빈도 이 새로운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부친에 대한 원망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우문천이 돌연 노성을 질렀다.
"이보시오 용선생! 내가 뭐라 했소? 인륜을 저버리는 그런 계략은 훗날 화를 부를 거라 하지 않았소? 당신이 주장한 대로 소군을 희생시켰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오?"
관일청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보게, 입 다물게나. 모든 것은 내가 판단하여 결정한 일이니 공연히 용선생을 윽박지르지 말게."
우문천은 입을 다물었다. 이때 용화문이 비장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소군,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당시의 정황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금령객 부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군, 그리 하시지요. 솔직히 속하도 듣고 싶습니다."
관운빈은 탄식하며 말했다.
"좋소이다. 말씀해 보시오."
이십여 년 전, 천룡대제와 사대천왕이 파천황교를 무너뜨렸을 때였다. 관일청은 파천황교 교주의 처소에서 타다 만 한 권의 책자를 발견했다. 책자의 표지에는 역천지계(逆天之計)라 쓰여져 있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관일청은 그 책자를 잘 갈무리해 두었다.
훗날 태화천이 창건되고 무림에 평화가 정착되어 갈 즈음 관일청은 그 책자를 자세히 읽어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책자의 내용에 의하면 파천황교는 결코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천하의 각처에서 독버섯처럼 잔당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한 그는 즉각 비밀리에 파천황교의 활동을 조사했는 바, 그 결과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파천황교의 조직은 그들이 세워 두었던 역천지계의 한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무림에 관한 계책일 뿐이었다. 음모자들의 천하경략의 뿌리는 무림은 물론이고 온 천하에 방대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관일청은 역천지계를 뿌리 뽑으리라 결심하고 사대천왕과 함께 실행에 들어갔으나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천지계의 책자는 절반 이상이 타버려 내용이 완전치 못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즉, 음모자들은 도마뱀처럼 꼬리만 떼어준 채 어둠 속으로 깊이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관일청은 부득이 그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교활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관일청을 당혹케 한 것은 그들이 계속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관일청은 결심을 굳혔다.
역천지계의 핵심은 바로 황권(皇權)의 찬탈이었다.
음모자들은 무림은 물론이려니와 궁극적으로는 황권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천하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관일청은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황제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실 그는 황실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천룡대제 관일청의 본명은 주일청(朱一靑)이었다.
다시 말해 작금의 황제인 만력제의 아우뻘이었다.
어려서부터 황실의 권모술수가 싫어 강호에 투신한 그는 성조차 관씨로 바꾼 후 황실과 인연을 끊었던 것이다.
다시는 황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의 약속을 깨게 되었다.
그는 만력제를 만나 역천지계에 대해 상의했다.
만력제는 크게 놀랐으며 황실에 이미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반역자(叛逆者)들을 색출하기 위해 모종의 중대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두 사람은 삼 인의 희생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것으로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으니, 그 고육지책이야말로 어둠 속에 깊이 숨어있는 마영(魔影)을 끌어내기 위한 살을 깎고 뼈를 바르는 책략이었다.
먼저 관일청은 스스로를 첫번째 희생양으로 결정했다. 다음 희생양은 명조(明朝)의 두 기둥으로 문무(文武)의 쌍벽을 이루었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와 어림대장군이었다. 그 두 사람을 희생시키게 된 것이었다.
그 일은 극비리에 시행되었다. 어차피 황실에 깊이 숨어있는 마영은 굳이 이 사화(士禍)를 대내외에 공표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력제는 동창과 금의위에 밀명을 내렸다.
내각대학사와 어림대장군이 과거 황실을 등지고 강호로 투신했던 주일청과 손을 잡고 역모(逆謀)를 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모자는 물론 관련자를 모두 색출하여 극형에 처하라는 황명을 내린 것이다.
결국 관일청을 위시하여 내각대학사, 어림대장군은 모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혈족은 관노(官奴)의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져 뿔뿔이 유배되게 되었다.
개중에서 그들의 혈족 중 적자에 해당되는 자들은 은밀히 죽음의 땅 동사군도에 유배되었다.
그 사화로 인해 관운빈과 어림대장군의 아내인 백삼호, 그의 아들 백사호가 동사군도에 갇히게 되었으며, 내각대학사의 딸인 사사영도 처음에는 모친과 함께 관노로 떠돌다가 모친이 죽자 동사군도에 보내진 것이다.
황실에서 암약하고 있는 자들은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음모를 진행시켰다. 그들은 황권을 찬탈하기 위해 건친왕을 포섭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주일청, 즉 관일청의 부활이었다. 내각대학사와 어림대장군은 사약을 마시고 불귀의 객이 되었으나 그는 놀라운 신공의 힘으로 칠 일만에 살아났던 것이다.
그후 관일청은 변방으로 흩어져 은신중인 사대천왕과 재회한 후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예상한 역천자들을 몰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행한 대계(大計)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무궁한 지혜와 병법을 지닌 마군자 사마을지가 역천자와 뜻을 같이 했다는 점을 미리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을지는 황실의 사화가 필히 깊은 뜻이 있음을 알고 역천자의 준동을 막았던 것이다. 그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십여 년이 지나도록 그는 끈질긴 인내를 발휘하여 독아(毒牙)를 드러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관일청과 만력제가 행했던 고육지계는 숭고한 피만 흘린 채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여기까지 얘기한 용화문은 장탄식했다.
"아아! 불과 얼마 전에야 한림삼수 중에서 가장 비범한 인물이었던 사마을지가 그들의 군사(軍師)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화문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기실 십여 년 전 세운 고육지계에는 용화문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판단 잘못으로 애꿎은 내각대학사와 어림대장군을 위시하여 수많은 의인들이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
선방 안에는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창문을 통해서 제법 차가운 밤바람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관운빈은 고개를 번쩍 들며 물었다.
"용선생, 그것으로 얻은 것이 무엇이오? 이 나라의 기둥이었던 두 충신이 어이없이 희생되었고 충신을 부모로 둔 이유만으로 죽음의 섬으로 끌려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단 말이오?"
용화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밖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알기나 아시오? 대답해 보시오. 고육지책을 사용할 때 그들에게 한마디 상의라도 해보았소? 명조에 충성을 다했던 그들에게... 반역자란 누명을 씌우고 그 가족들까지 관노로... 죄수로 만들어버린 그 책략이... 과연 정당하단 말이오?"
관운빈의 분노에 찬 말에 용화문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보다 못한 관일청이 나섰다.
"운빈아, 용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이 애비가 폐하와 함께 숙의하여 결정한 일이다. 그러니 애비에게......."
관운빈은 눈썹을 성큼 치켜세웠다.
"좋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책략을 쓰신 겁니까?"
"천하를 재앙으로부터 구하기 위함이었다."
관일청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운빈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힘있는 자들은 천하만민을 위해, 또는 화평을 위한다고 말들을 하지요.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결국 어르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씨 일족의 영화를 지키기 위한 일일뿐이지요. 그것을 위해 어떤 비극이 일어나도 상관없단 말입니까? 정녕 그렇단 말입니까?"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한이 줄줄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전 어르신께서 운명하신 줄 알고 지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동사군도에서 그 모진 고통과 학대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자식마저 희생시키고... 과연 그것이 그토록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요?"
"소군! 고정하십시오."
우문천이 관운빈을 제지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어르신께서 생존해 계신 것을 보고 제가 기뻐할 줄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비명에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괴롭기만할 뿐입니다."
눈물.
뜨거운 눈물이 관운빈의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분노의 눈물이요, 회한의 눈물이었다.
"어르신의 자식 관운빈, 아니 주운빈은 동사군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아버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갈길을 가겠습니다. 절 상관하지 마십시오."
관일청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가 원하다면... 그리 하거라. 널 억지로 잡지 않으마. 아니 잡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군!"
사대천왕과 용화문이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관운빈은 벌떡 일어나 주저없이 밖으로 나갔다.
"언제든 한 번은 들리거라, 내가 죽기 전에 말이다."
관일청은 밖으로 사라져 가는 아들의 차가운 등을 바라보며 쓸쓸히 중얼거렸다.
③
관운빈은 다섯 개째의 술병을 집어 들었다.
"소군,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마시십시오."
천수영 범통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이곳은 사찰로부터 이십여 리 떨어진 곳의 한 작은 주막이었다. 관운빈을 쫓아나온 사대천왕과 용화문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버려 두십시오, 형님. 제기랄! 나라도 술독에 빠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우문천이 걸직한 음성으로 말하곤 용화문에게 고개를 돌렸다.
"용선생, 다시 말해 보시오. 그래 작금의 상황이 그토록 어렵단 말이오?"
용화문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천외천의 힘은 실로 가공스러운 것입니다. 아마도 태화천과 십정회, 녹림도가 모두 합쳐도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오. 대체 천외천이라 자처하는 놈들의 힘이 어느 정도길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들은 무림군왕성을 괴뢰로 내세워 무림을 지배하려 했고, 건친왕을 통해 황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느리지만 완벽합니다. 저도 겨우 몇 달 전에야 무림군왕성이 그들이 내세운 허수아비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용선생과 주군께서 세운 고육책이야말로 그들의 힘을 더욱 길러준 격밖에 안되오?"
용화문은 고개를 숙였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치른 희생은 결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들이 전면으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느렸을 뿐입니다. 만일 고육책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절대 마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더욱 은밀하고 완벽하게 야욕을 성취했을 겁니다."
"후후훗! 그만 하시오, 용선생. 무고하게 희생당한 원혼들이 저승에서 울고 있소이다."
관운빈의 조소였다. 이번에는 풍뇌가 나섰다.
"용선생, 지난 일은 따져보아야 소용없는 일이오. 중요한 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오. 천외천이란 자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어떨 것 같소. 냉정하게 말해 주시오."
용화문은 잠시 숙고를 한 후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중인들의 안색이 홱 변했다.
"설마... 그간 우리도 피나는 노력으로 적지 않은 결실을 거두었소. 그런데... 용선생은 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오?"
불만인 듯 풍뇌가 따지고 들었다.
"실상이 그러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빈틈없이 진행되어 오던 그들의 역천지계에 작은 누수(漏水)의 흔적이 요즘 들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음지에서 자중해 왔기 때문에 그들 내부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역천지계를 입안했던 마군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실낱 같은 희망의 변수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일곱 병째의 술을 막 비워버린 관운빈이 생각난 듯 말했다.
"용선생의 오랜 벗인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용화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는 날 구해주면서 상당히 착잡한 모습이었소. 그가 한 말은......."
'기존의 모든 것을 뒤엎지 않고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네. 그래서 나는 천외천의 힘을 빌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어보고자 혼신의 힘을 바쳤었네. 그리고 그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네. 하지만 나는 또다른 두려움을 느끼고 있네. 그것은 천외천 또한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대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네. 그래서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자네를 구해주는 걸세. 물론 자네가 천외천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리는 만무하지만 이것으로 난 천외천과의 연을 정리하고자 하네. 내게 남은 생은 내가 저질러 놓은 죄악을 조금이라도 씻는 데 미력을 다할 생각이네. 내 말을 용화문에
게 전해주게.'
"......!"
관운빈의 말이 끝나자 용화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 후 그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예... 그렇군요. 그가... 뒤늦게나마 깨달았군요."
장내는 숙연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용화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상황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최근 들어 그들이 둔 자충수가 마군자에 의한 것임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천외천은 머리가 없이 몸집만 큰 기형아가 되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책을 세운다면 의외로 좋은 승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
중인들은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문제는 천외천의 수괴와 그를 보필하는 팔대봉공을 어떻게 격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무예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뛰어 넘었습니다. 지난 날의 파천황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의 주군께서는 병중(病中)이시고... 사대천왕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관운빈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며 급히 물었다.
"어르신이 병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용화문은 탄식하며 말했다.
"주군께서는 천외천과의 일전을 대비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혹독한 무예수련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사 년 전 그만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진기를 수습하긴 했으나 그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되시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태화천의 계획도 그만 표류하게 되어 이토록 상황이 악화된 것입니다."
"......!"
관운빈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용화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군, 소군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소군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다만 이것만은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천외천을 퇴치하기 위해 수많은 군웅들이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결전의 날은 코앞에 닥쳐 있습니다. 그런데 앞장 서 사자후를 터뜨려야 할 주군께서 저리 되셨으니 의당 그자리는 소군께서 메우심이 마땅합니다. 그것은 부자지간의 사사로운 일을 떠나서 천하 억조창생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사감을 버리시고 대의를 위해 나서주십시오.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
관운빈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술이 떨어지자 멍한 시선을 허공으로 향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④
"이... 이걸 보시오!"
용화문의 경악에 찬 외침이 새벽녘 술에 곯아 떨어져 탁자에 고개를 처박고 잠든 사대천왕을 깨웠다.
"무슨 일이오? 용선생?"
"이... 이것을 남기고 사라지셨습니다."
"아니? 사라지다니? 누가 말이오?"
"소군께서 사라졌습니다."
"아니......?"
사대천왕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었다. 과연 관운빈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자리에는 두 장의 편지만이 달랑 놓여있을 뿐이었다.
"읽어봅시다!"
성격이 급한 풍뇌가 외쳤다.
용화문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지를 뜯었다. 거기에는 장문(長文)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용선생, 말없이 떠나는 것을 용서해주시오. 이렇게 떠나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으나 용선생과 숙부들의 면전에서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이 있어 이렇게 몇 자 적어놓고 떠나오. 내가 태화천의 소군으로서 책무를 다 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오. 하지만 나는 어르신이 이루어놓은 태화천의 대계에 동참할 수가 없소이다. 그것은 결코 사사로운 부자간의 갈등 때문이 아니오.
내 인생의 십 년을 바친 동사군도에서 나는 한 여인과 벗을 만났소. 내게 있어 그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되었소. 생명을 나눌 수도 있는 그들의 원수가 바로 어르신이라는 슬픈 사실을 말이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내각대학사의 여식이고, 벗은 어림대장군의 아들이오. 나는 비통을 금치 못하고 있소. 어찌하여 내가 그들의 원수가 되어야 한단 말이오? 그들의 치뤄야 했던 희생은 어르신의 뜻이 아닌 황제의 결단이라고 위로할 생각은 마시오. 모든 것은 어르신이 중심이 되어 결행한 것이었소.
우여곡절 끝에 중원에 돌아온 후 나는 다시 한 여인을 만났소. 그녀는 용선생도, 숙부들도 모두 알고 있는 황보세가의 여식이었소. 그녀는 태생 이전부터 언약된 정혼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날 기다리며 산 여인이오. 그런데 내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데 그녀의 부친이자 나아가서 어르신의 의제인 황보세가의 가주와 일천여 명에 달하는 문도들이 모두 참살을 당하였소. 물론 큰일을 도모하시느라 어르신께서는 그 일을 방관하셨소.
지난 며칠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소. 결국 결심을 굳혔소. 평생을 관운빈으로 살겠다고 말이오. 어르신의 성씨인 주씨(朱氏)를 버리는 이유는 더 이상 어르신과의 인연을 맺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오.
조만간 나는 천외천으로 갈 것이오. 그러나 어르신이 행하는 대업과는 무관한 일이오. 또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천하를 구하는 일과도 무관하오. 태화천이 승하면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고, 천외천이 승하면 천하가 무너진다는 어르신의 논리에 나는 공감하지 않소. 또한 어르신과 폐하가 행한 살생은 부득이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고 천외천이 저지른 살생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란 주장에도 동조할 수가 없소. 나는 다만 그들에게 받아야 할 부채가 있어 찾아가려는 것뿐이오. 그러니 어르신이 벌이고자 하는 위대한 성전(聖戰)에 날 연관짓지 마시오.
용선생, 나는 모르겠소.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지 말이오. 용선생의 벗인 마군자의 말이 떠오르오. 그는 천외천도 자신이 경멸해 왔던 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하였소. 그 말에 나도 공감하오. 아마도 마군자의 눈에는 태화천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 것이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의인들이라 자처하는 무림인들과 적지 않은 시일을 보낸 적이 있소. 그때 많은 것을 보고 느꼈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흑도인들과 별다를 게 없는 행태를 보여 주었소. 따라서 나는 당시 무림군왕성을 선이라 믿지 않았고 아울러 흑련사를 악이라 단정짓지 않게 되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욕망으로 인해 빚어진 흙탕물에 발을 담궜던 이유는 단지 사랑하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소.
용선생, 긴 말을 하지 않겠소. 향후 나는 사사로운 몇 가지 일들을 해결한 후 이 오염된 땅을 떠날 것이오. 달리 인사를 나누러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숙부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오. 그럼 모두의 행운을 빌어 드리리다.>
용화문이 편지 읽기를 끝내자 장내는 침중해졌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한참 후 범통이 허탈한 듯 헛웃음을 웃었다.
"허허, 이거야 원......!"
우문천도 긴 숨을 토해낸 후 한마디 던졌다.
"정말 너무하시는구려. 주군께는 한마디의 인사도 남기시지 않다니......."
이때 용화문이 빙그레 웃으며 또 한 통의 편지를 들어 보였다.
"비록 인사는 안 남기셨으나 대신 처방전을 남기셨소이다."
"처방전이라니?"
우문천은 눈을 크게 떴다.
"소군의 별호가 괴수신의가 아니오? 아마도 이 처방전대로 약을 쓰면 머지않아 주군께서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실 것이라 믿습니다."
"허! 그래요? 푸하하하......!"
"주군을 위해 처방전을 남기셨다고? 으하하핫......!"
사대천왕은 일제히 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격동을 금치 못한 듯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우문천이 웃음을 뚝 그치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소군께서 혈혈단신으로 천외천에 들어가시겠다는데 가만 있어서야 되겠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풍뇌의 말에 부엽도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노부가 소군의 뒤를 쫓아가 은밀히 보필하도록 하겠소."
그는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곧바로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자 용화문이 급히 제지했다.
"서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소군은 누구 못지 않게 속이 깊으신 분입니다.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생명을 던지는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 심려 마십시오. 편지에도 써놓지 않았습니까? 모든 일을 끝낸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떠나시겠다고."
부엽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무서운 놈들인데다 전 중원에 그물처럼 퍼져 있으니 놈들이 먼저 소군을 해치면 큰일이 아니오? 노부가 소군을 호법해야겠소이다."
용화문은 느긋하기만 했다.
"아무리 일급살수가 나선다 해도 소군의 소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우문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용선생은 무슨 근거로 그리 자신만만하오?"
"제가 지난 한 달 동안 소군을 지켜본 바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최소한 반 년은 침상에서 일어나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보름만에 자리를 털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무슨 무공을 연마하시는데 가히 신비막측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무공이오?"
"제가 여쭈었더니 동사군도에서 만난 한 노인이 창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소군께서 완성하신 추나신공이라 했습니다."
"추나신공?"
사대천왕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림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들로서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무공이었다.
"소군께서도 오래도록 벽에 부딪쳤던 신공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마침내 득의(得意)했다고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뭐라 하시었소?"
사대천왕은 모두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소군께서는 추나신공을 연성한 이상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대천왕은 한결같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우문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추나신공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오?"
"제 식견으로는 뭐라 말씀드리기 힘듭니다만 기존의 무공과는 상이한 신공인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무공이었습니다."
범통이 문득 괴소를 흘렸다.
"클클! 하루 빨리 소군께서 펼치시는 추나신공이란 것을 보고 싶군."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용화문도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소군께서 전면에 서셨으니 저희도 후속절차를 진행시켜야겠습니다. 우선 풍노사께서는 본래의 녹림대종사의 위치로 돌아가셔서 녹림의 전열을 정비해 주십시오. 아울러 십정회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일러주셔야겠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풍노사는 패도 풍뇌를 말한다. 그런데 그가 녹림대종사라니?
"범노사께서는 황궁으로 돌아가셔서......."
용화문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모든 전략을 수립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사대천왕은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