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살행론32 생에 주어진 세 번의 기회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희유하고 소중한 인간 삶에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첫째, 태어남 그 자체가 기회입니다. 둘째, 삶이 이어지는 한 모든 순간이 기회입니다. 셋째, 죽음 직후에 엄청난 기회가 있습니다. 차례로 살펴볼까요?
첫 번째 기회: 태어남
윤회론의 관점에서 중생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무한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윤회의 감옥에 갇혀서 고통과 쾌락을 겪으며 중생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이 육도라는 윤회의 카테고리 속에서 인간 삶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적과도 같은 기회입니다.
“세존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 구멍에 눈먼 거북이가 목을 끼우는 것만큼이나 드물고 어려운 일이라 하셨네.”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 숨을 쉬러 수면 밖으로 목을 내민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평양에 떠 있는 튜브에 목이 우연히 끼는 확률로 인간 삶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삶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담바라보다 더 희유한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인생을 얻기가 힘들까요?
“한순간에 지은 악행으로도 일 겁 동안 무간지옥에 머물게 된다고 하는데, 무시이래로 윤회하면서 악행을 지어온 이들이 어떻게 선취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
삼악도에 한 번 빠지면 중생 삶의 하락곡선이 시작됩니다. 마치 폭풍처럼 존재를 악조건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 시작은 한 순간의 악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악행이 꽃을 피우는 순간 갑자기 지옥에 화생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뿐입니다. 선한 생각?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여유도 없습니다. 선한 생각은커녕 이성이 마비되는 압도적 폭력에 시달릴 뿐입니다. 악으로 버티고 꺾이며 절망하고 스스로의 정신을 죽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과도 같은 삶입니다.
두 번째 기회: 삶의 모든 순간
삼악도의 무서운 점은 ‘수명’입니다. 인생은 다른 육도에 비해 하루살이처럼 짧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면 인생 100년이 하루 정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길고 긴 수명을 누리며 그들은 원하는 모든 쾌락과 영광을 즐깁니다. 좋은 일이죠? 삼악도 그중에서도 지옥은 정반대입니다. 천상만큼의 수명이 주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기약 없는 고통 속에 한 번 빠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처럼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직 악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다른 악업을 계속 짓기 때문이라네.”
지옥에 한 번 빠지면 계속 지옥의 원인을 더합니다. 겁 단위의 수명을 지닌 지옥 중생이 그 속에서 끊임없이 악업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악업의 복리효과는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치명적 함정입니다. 아귀와 축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귀는 ‘허기와 갈증’을 가장 지독하게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아귀의 위는 산만큼 크지만 목의 구멍은 바늘보다 좁아, 거대한 식욕을 채우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도 목구멍으로 넘기기 어렵습니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그 목구멍에 무엇이 걸리는 순간 온몸에 불이 붙어버리는 자연발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축생은 생존을 위해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있지만, 먹을 것을 구하기는 조금 용이하고, 수명이 짧아 지옥 중생처럼 고통을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축생은 이성적인 판단이 쉽지 않아 선한 업을 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얻기 어려운 인간의 몸(有假)을 얻고서도 스스로 선업을 실천하며 길들이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기만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어디 있겠는가.”
태어난 것 그 자체가 인생의 기회였습니다. 인간 삶에서 주어진 소중한 여가와 희유한 기회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인간은 언제든 선업을 지을 수 있고,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삶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배울 수 있고, 마음을 자비롭게 만들 수 있으며,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고득락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바로 인생의 모든 순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가만의 몸이라는 기회입니다.
“만일 이것을 알고서도 어리석어 게으름을 피우며 선업을 짓지 않는다면, 죽음의 징후가 나타날 때에 크나큰 근심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네.”
무상이 곧 고통입니다. 왜 그럴까요? 변화하고 싶지 않은 집착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중생이 아닌 성인에게는 무상함이 곧 열반의 행복으로 경험됩니다. 똑같은 현상에 대한 완벽한 동상이몽입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아라한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대왕이여, 성인은 육체의 죽음을 희망하지도 않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이미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삶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집착의 대상은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육체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육체의 통증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육체의 수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 아라한은 두려울까요? 특별한 감정적 변화는 당연히 없겠지만 굳이 중생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반가울지도 모릅니다. 통증에서 해방되는 것이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
중생의 죽음은 이와 반대입니다. 울고 불고 난리가 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환점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두렵습니다. 두고 가는 모든 것들이 아쉽습니다. 하지 못했던 꿈과 희망 그리고 목표에 대해 절망합니다. 죽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무지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합니다. 죽음의 과정 속에서 통증과 정신적 고통이 가득하니 당황스럽고 무섭습니다. 이것이 중생의 죽음입니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이제 정말 죽어야 하는 그 순간 마음은 어떠할까요? 죽음 직후는 어떠할까요?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 직전에 보는 주마등 속에서 ‘영혼을 울리는 후회’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 심연과도 같은 후회는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윤회 속에서 경험한 모든 죽음 속에서 반복된 후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생의 마무리에서는 이 후회가 증폭됩니다.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기에, 스스로 이 기회를 낭비해버렸기에, 다시는 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주마등을 보여주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후회하라고, 깊이 후회하라고, 울고 또 울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에는 기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얼마나 강렬하게 무의식에 각인을 시켜야 기회를 잡을까요? 태어난 것 그 자체의 기회, 인생의 모든 순간에 주어진 기회 그리고 이제부터 언급할 죽음 직후의 기회까지.
아! 글이 너무 길어지니 죽음 직후의 기회는 다음 글로 미루겠습니다. 부디 수행하세요. 후회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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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후회하지 않도록 수행하겠습니다~^^
태어난 것 순간에 주어진 기회 ~ 이런 기회를 기약할수 없는데 이번 생 후회하지 않도록 행하겠습니다
인생의 세 번 기회에서
두 번째 기회인 소중한 여가와 희유한 기회에 이고득락을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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