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교육기관에 대해서 최익한은 중앙에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관립고등학교에 상당한 4부학당(이조 초에는 오부학당)이 있고 지방에는 군현공립학교인 향교와 촌락 사설의 서당과 사림士林 사설의 서원 및 그 유문儒門 등으로 분류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균관인데 먼저 설치과정을 살펴보자. 태조 즉위 6년(1397)에 한성 동북쪽 귀퉁이 숭교방崇敎坊(현재 명륜동)에 태학을 세우고 다음해 준공하였다. 문묘(곧 대성전)와 명륜당과 양현고가 모두 정비되었으며 악기樂器와 학전學田을 두고 왕은 문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예조 직속인 것과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모두 고려의 것을 답습한 것이다.
성종대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을 증설하고 서적을 다수 하사하였으며, 현종은 성균관 서쪽에 비천각丕闡閣을, 숙종은 서북쪽에 계성사啓聖祠를, 영조는 동쪽에 사현사四賢祠를 각각 증건하였으니 이로써 문묘의 제도가 일층 확장되었다.
교육기관이므로 시설의 근본은 학사學舍에 있지만 유학 교육기관인 이상에 유학의 선성先聖, 선사先師를 관내에 존사尊祀하였다. 이는 지방의 향교 또한 동일하다. 곧 공자를 존봉한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전의 전면에 동서 대설對設한 전우殿宇는 무廡라 하여 공자의 제자와 후래 유교에 유공한 자를 종사하나니 이상은 문묘의 조직이요 이 문묘의 전면에 명륜당이 별설되어 있으니 이것이 강학의 장소요 이 부근에 설치한 학생객사는 재齋라 하는 것이다.
최익한은 성균관 구내에 문묘를 설정한 것은 본디 당제가 일찍부터 전래된 것으로 봤다. 신라 김춘추가 당의 국학에 가서 석전의 예를 보았고 또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신문왕 때 당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72제자 화상을 가지고 왔고 왕은 태학에 봉치하게 하였다고 한 점에서 문묘제文廟制는 신라에 이미 행해지고 고려에도 이어졌지만 지방의 향교에 보급되기는 조선시대부터로 보았다.
한편 우리나라 유현儒賢을 문묘에 종사한 것은 언제 부터일까? 고려 국자감이 창립된지 29년 즉 현종11년(1020)에 최치원을 동13년에 설총을 대성전 내에 종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충숙왕 시에 종사된 안향 이외에 정몽주 이하 15현은 모두 조선조에서 종사되었다. 신라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을 제하면 그 외 종향자從享者 128인은 모두 중국의 유현이며 공자 이하 문묘향사자가 합계 147인이다.
이처럼 성균관은 선성선유先聖先儒를 존사尊祀하는 학궁이므로 유교국인 조선에서는 그것을 수호 유지하기에 매우 노력하였다. 역대 왕은 학전, 노비를 줄곧 급여했을 뿐 아니라 전남 연해 도서, 어장과 경기도 제도諸島의 수입은 성균관에 소속시켜 제료祭料 및 그 양사비養士費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런데 성균관은 누가 관장하며 누가 가르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직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관장은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인데 정2품이며, 홍문관 또 예문관 대제학이 겸하고 있다. 성균관의 격을 높이기 위한 방법인가? 부관장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도 또한 정2품이며 겸관이다. 전임으로는 대사성大司成 정3품이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그 아래 제주祭酒 2인, 사성司成 1인, 사예司藝 2인, 직강直講 4인, 전적典籍 13인, 박사博士 3인, 학정學正 3인, 학록學錄 3인, 학유學諭 3인 등 생각보다 다양한 직책들이 있었다.
제사는 봄가을 2기로 나누어 행사하는데 이를 석전釋奠 또는 석다례釋茶禮라고 한다. 본관 학생의 정원은 본래 2백 명이고 생원 또는 진사로 입학하되 부족한 경우에는 사학생도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뒷날 경비부족으로 정원이 줄어들었는데 영조 시에는 126명이요 고종 시에는 100명 그 중 20명은 생원, 진사 이외 자를 특별 수용하였다. 관의 입학자격은 고려의 태학에 비하면 문벌의 규정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은 듯 하니 진사, 생원의 대부분이 원래 사대부의 자제인즉 문벌의 보장은 의연히 엄격하였다.
그렇다고 성균관을 나와야 관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관은 최고학부요 최고성전의 소재처인 만큼 역대 군왕이 종종 찾고, 알성謁聖, 친사親祀의 예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더러 세종 이후 세자 8세 입학례入學禮는 반드시 본관에서 행하였다. 그런만큼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구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중심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성균관의 관원으로 대사성 1명 이외에는 문신 가운데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자로 충원했기 때문에, 성균관의 직책은 벼슬길로 나가는 요로가 못 되어 점점 세력이 없고 한산한 자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명색이 조선왕조 유일한 국립대학이지만 그에 걸맞는 역할을 했는지는 평가가 필요한데 최익한은 이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