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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삼국시대 불상(1)-여래상
무진당 추천 0 조회 733 10.05.03 15:5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미술을 찾아서 7 / 조정육 / 『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

 

부처님의 상징(3)-불상

 

<삼국시대의 불상(1)-여래상>

 

1. 삼국시대 불교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에서 온 순도에 의해서였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는데 그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東晋)에서 온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에 불교가 전해졌다.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이 왕실에 의해 큰 마찰없이 순조롭게 받아들여졌지만 신라는 법흥왕22년(535)에 불교가 공인되기까지 큰 진통을 거쳐야 했다. 눌지마립간(417-458) 때 고구려를 거쳐 온 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전해졌지만 큰 박해 속에 개인적인 전도로 끝나고, 이차돈이 순교(527)하기까지 귀족들의 반대와 반발은 격렬했다.

세 나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주도세력은 왕실이었다. 이들은 불교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사상체계로써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성읍국가나 연맹왕국의 형태에서 숭배하던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같은 원시 종교만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거대 국가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고도로 발달된 철학체계를 갖춘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의 유지에 아주 적합한 사상체계이자 신념이었을 것이다. 또한 지배자인 국왕에서 피지배자인 백성까지 한 종교를 믿는 같은 신도라는 공통분모는 국가의 통일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윤회전생에 의해 신분적인 특권을 인정해주는 불교 교리는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제 역할도 했다. 이렇게 국가 발전과 체제유지를 위해 전략적으로 수용된 삼국 불교는, 개인적인 기복 종교보다는 국가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하는 호국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팔관회와 백좌강회 등의 의식이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호국적인 행사였고 백제의 미륵사와 신라의 황룡사 같은 절이 모두 호국사찰이었다. 주변 9개국을 정복하여 조공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긴 황룡사9층목탑이나 미륵불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화랑이 되었다는 화랑도 정신은 모두 호국불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런 삼국 불교의 사상과 이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불상과 탑과 범종 등의 불교예술품이다. 불상은 금, 은, 금동, 옥, 쇠, 소조, 건칠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돌로 만든 석불과 마애불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화강암이 풍부한 지역적인 특성과 함께 돌이 가지는 영원성이 불상의 재료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중국에서 372년에 순도가 오고 374년에 아도가 오자 이듬해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워 각각 순도와 아도를 머무르게 했다. 절이 세워진 만큼 당연히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6세기 전반이 되기까지 고구려 지역에서는 몇 구의 금동불이 전할 뿐 석불이나 마애불은 한 구도 알려진 것이 없다. 삼국의 불상은 석불보다 금동불이 먼저 제작되는데 중국에서 전래된 초기 불상이 대부분 금속제였기 때문에 청동기와 철기를 제작하던 금속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우수한 금속제 불상을 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삼국시대의 불상 중 황룡사 금당에 모셨던 5m 높이의 장륙존상같은 대불은 전하는 것이 없고 금동불과 석불 등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만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 미술의 결정체인 불상을 여래상과 보살상으로 나눠 살펴보기로 하겠다. 

 

 

(도1)황룡사지 가람 배치 모습

(도2)금당지의 장륙존상이 놓였던 자리. 불상이 놓였던 대좌의 모습과 멀리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대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2. 여래상

1) 선정인을 한 여래상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공식적인 기록은 소수림왕 2년(372)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미천왕(또는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안악3호분(357년)의 묘 주인공을 보면 주인공이 마치 부처가 협시보살에 둘러 싸여 설법하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도3). 주인공 몸집이 크고 시종이 작게 그려지는 이런 형태는 뒤에서 살펴보게 될 일광삼존불의 양식과 거의 흡사하여 불교가 공인되는 372년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이 시기의 명문이 새겨진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도3)<주인공초상>, 안악3호분, 전실 서벽, 고구려, 357년경

 

고구려에서는 4세기 말부터 중국 불상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좌상>(도4)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이 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선정인(禪定印)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긴 수행 자세를 보여주는 수인(手印:손갖춤)을 의미한다. 선정인은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손바닥을 펴서 왼손을 배꼽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두 엄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맞대는 수인이다. 그런데 이 상은 338년에 제작된 중국의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도5)과 양식상 유사함을 찾을 수 있어 제작 년대를 가늠할 수 있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를 착용한 채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자세는 물론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배에 대고 있는 듯한 수인이 두 작품간의 친연성을 느끼게 한다. 두 상이 양식상 매우 유사하여 뚝섬 출토 상을 중국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상은 속을 비우고 주조하는 반면 뚝섬 출토 상은 속이 꽉 차게 통째로 주조하여 주조기법상의 차이로 국적이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도4)<금동여래좌상>, 뚝섬 출토, 5세기 후반, 높이 5cm, 국립중앙박물관

(도5)<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 중국 하북성 석가장 부근 출토, 338년, 39.7cm, 미국 샌프란시스코 애이시안아트박물관

 

이런 특징은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납석제여래좌상>(6)과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는 <금동여래좌상>(7)에서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다. 선정인을 하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은 뚝섬출토 상과 비슷한데 상현좌를 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상현좌(裳縣座)는 물결모양으로 드리워진 여래의 옷자락이 다리 아래로 흘러 내려 대좌를 덮고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여래좌상에서 삼국시대 초기 불상의 경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6)<납석제여래좌상>, 군수리사지출토, 백제, 6세기, 높이 13.5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329호

(도7)<금동여래좌상>, 6세기 중엽, 8.8cm, 국립중앙박물관

 

2) 시무외인, 여원인의 여래상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으로 오른손을 위로 올려 밖으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내린 자세를 말한다. 이 수인은 석가모니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비롯하여 미륵보살과 관음보살까지 공통적으로 취하는 수인이기 때문에 통인(通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불상까지 오랜 시간동안 유행하였다.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을 취한 이른 시기의 여래상으로는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도8)을 들 수 있다. 광배 뒷면에 ‘연가7년’이란 고구려 연호가 담긴 명문이 있어 제작 년대가 479년 혹은 539년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년명 불상이다. 뿐만 아니라 대좌와 광배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고구려 불상의 기준이 되고 있다. 신체에 비해 얼굴과 손, 발이 유난히 큰 여래는 파도처럼 양 옆으로 뻗친 두터운 옷 속에 싸여 신체의 볼륨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이 고구려 미감을 대표한다면 충남 서산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도9)은 백제미감을 보여준다. 시무외인, 여원인에 옷자락을 왼쪽 팔뚝 위로 걸친 착의법은 비슷하지만 물결치듯 양옆으로 펴진 옷자락이 훨씬 차분하고 부드러워 백제의 온화한 미감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10)과 강원도 횡성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도11)도 시무외인, 여원인의 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두 상은 원통형의 몸체에 옷주름이 U자형으로 표현되어 있어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양감이 느껴진다. 지역별로 약간의 미감의 차이는 느껴지지만 이들 모두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어 당시 이 수인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웅변적으로 시사해주는 듯하다.

 

     

 8)<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539년경, 높이 17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19호

9)<금동여래입상>. 서산 보원사지 출토, 백제, 6세기 중반, 높이 9.3cm, 국립부여박물관

  

10)<양평금동여래입상>, 양평동 출토, 7세기 전반, 높이 30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86호

11)<금동여래입상>, 강원도 횡성 출토, 7세기 중반, 높이 29.7cm, 국립춘천박물관

 

3) 일광삼존불

삼국시대 금동불 중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걸쳐 널리 유행한 불상 양식이 일광삼존불이다. 대형광배 하나를 배경으로 여래와 협시보살을 함께 배치한 일광삼존불은, 원래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일본의 호류지 <석가삼존상>(도17)과 같은 초기 불상의 원류가 되었다. 현존하는 일광삼존불은 모두 20여구인데 모두 20cm 미만의 소형금동불이다. 제작 방법은, 광배와 본존불을 따로 주조한 뒤 본존불을 광배에 끼워 넣는 형식과 광배와 본존불을 한 몸으로 주조한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금동신묘명삼존불>(도12)과 <금동계미명삼존불>(도13)이 첫 번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면 <‘정지원’이 새겨진 삼존불>(도15)은 한 몸으로 주조된 불상이다.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금동보살삼존상>(도16)은 여래와 보살 대신 특이하게 본존을 보살로 삼고 좌우에 스님상이 협시하는 보살삼존상이다. 그러나 형식은 본존과 광배가 하나로 결합된 두 번째 방식을 따르고 있다.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도14)를 보면 본존불과 광배가 어떻게 분리되고 결합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존이 놓여질 자리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 자리에 본존불의 몸 뒤에서 나온 걸쇠를 끼워 넣는다. 머리가 닿을 부분에는 세 가닥 동심원 속에 연화 두광이 새겨져 있고, 좌우협시보살 위에는 화염문 속에 세 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다.

 

 

12)<금동신묘명삼존불>, 571년, 높이 18.0cm, 폭 10.1cm, 리움미술관, 국보 제85호

13)<금동계미명삼존불>, 563년, 높이 17.5cm, 간송미술관, 국보 제72호

 

14)<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 높이 12.4cm, 고구려6세기, 국립부여박물관

15)<‘정지원’이 새겨진 삼존불>, 부여 부소산, 백제, 높이 8.5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196호

 16)<금동보살삼존상>, 6세기 후반, 높이 8.8cm, 리움미술관, 국보 제134호

17)<석가삼존상>, 아스카시대, 본존 87.5cm, 일본 호류지

 

4)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백제의 뛰어난 조각기술은 7세기에 <태안마애삼존불>(도18)과 <서산마애삼존불>(도19)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중앙에 보주를 든 보살상을 중심으로 여래상이 좌우에서 협시하는 특이한 형식으로, 중앙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배치되는 기존의 삼존상과는 전혀 다른 창의적인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여래상은 높이가 2m가 넘는 거불인데, 왼쪽 상은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고 오른쪽 상은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중앙의 보살상은 삼면관을 쓰고 두 손에 보주를 감싸 쥔 봉보주보살상인데 백제 지역에서 유행한 봉보주보살상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삼존불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중앙의 보살상을 미래불인 미륵으로 보고, 왼쪽의 석가불을 현재불, 오른쪽의 다보불을 과거불로 보아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표현하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서산마애삼존불>(도19)은 흔히 ‘백제의 미소’라고 불릴 정도로 넉넉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역시 삼존불 형식인데 <태안마애삼존불>처럼 기존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본존불 좌우에 반가사유상과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새겨진 파격적인 구성이다. 중앙의 석가불이 현재불이라면 반가사유상은 미래불인 미륵보살이고 봉보주보살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연등불의 화신)이다. 삼세불을 조형화한 것이다. 삼세불을 조형화한 과정에서 <태안마애삼존불>과 <서산마애삼존불>이 보여 주는 독창성은 이 시기 백제 불상의 제작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8)<태안마애삼존불>, 백제, 7세기, 높이 왼쪽 2.55m, 가운데 1.33m, 오른쪽 2.42m, 충남 서산군 태안면 소재.

19)<서산마애삼존불>, 백제, 7세기, 높이 2.8m, 서산 소재, 국보 제84호

 

5) 신라의 아기부처

7세기에 들어와 신라조각에서도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양식이 출현한다. <배리석조삼존불입상>(도20)과 <삼화령미륵삼존석불>(도21)이 그것인데 기존의 엄숙하고 근엄한 불상 양식에서 탈피하여 어린아이같은 얼굴에 4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를 하고 있다. 본존불의 높이가 2.75m나 될 정도로 큰 <배리석조삼존불>은 당시 유행하던 시무외인에 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포동포동한 얼굴에 넉넉한 미소 때문인지 크기에 비해 그다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쪽에 선 보살상은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의 목걸이를 빌려온 듯 투박하면서도 무거운 영락을 목에 걸고 있다.

<배리석조삼존불입상>과 유사한 조형성이 느껴지는 <삼화령미륵삼존석불>(21)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의좌상(倚坐像)이다. 의좌상이란 본존불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데 중국에서는 흔히 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불상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법주사마애불>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배리 삼존불보다 더욱 단순화되고 세련된 아기부처와 보살은 삼국시대 불상이 처음 이 땅에 유입되어 막 새롭게 피어나는 듯한 싱싱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곱고 예쁘고 부드러운 불상의 표정은 통일 신라가 되면 근엄하고 엄숙하면서 원숙미가 느껴지는 미감으로 변모된다. 대신 삼화령 아기 부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투명하고 순수한 감동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어떤 두려움이라도 <서산마애불>의 미소를 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져버릴 것 같은 편안함도 그것으로 끝난다.

 

  

20)<배리석조삼존불입상>, 신라, 7세기 중엽, 본존 높이 2.77m, 경주 남산 배리 소재, 보물63호

21)<삼화령미륵삼존석불>, 신라, 선덕왕대(632-646), 높이 본존1.62m, 좌협시 1.03m, 우협시, 0.98m, 국립경주박물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고 어른은 어른만이 줄 수 있는 듬직함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위대한 지는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다. 그러나 가끔은 웅혼한 위엄과 권위가 느껴져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는 불상보다 언제든지 달려가면 환한 미소로 맞아줄 수 있는 <서산마애불>같은 불상이 사람의 마음을 더 정화시킬 때가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속세에서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고 싶은 아기 부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것은 속세에 전혀 때 묻지 않고 순수함 그 자체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는 진여불성을 찾고자 하는 열망 때문일 지도 모른다. 진여불성의 세계야말로 모든 인간들이 되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훈계하고 야단치기보다는 어린아이같은 맑은 미소를 통해 불법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순수함의 세계일 것이다. 다음에는 진여불성의 세계가 보살상에서 어떻게 화현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계속)

 

-이 글은 『붓다의 나들이 』5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정신을 맑게 일깨워주는 김영동의 '법고'소리 감상해보시지요.

 

김영동 - 법고 - THE DRUM OF THE LAW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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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5.03 18:49

    첫댓글 산국시대는 오늘날처럼 예쁜 모습의 상호보다는 투박하지만 우리네 시골 어른들을 연상케하는 상호가 더 많으신듯 하여 한결 친숙합니다 고맙습니다

  • 10.05.03 19:55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국사시간에 공부한것을 다시 학생신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들었습니다.....항상 새롭게 다가옵니다......_()_()_()_

  • 10.05.03 23:14

    ()()()

  • 10.05.06 23:46

    스크랩이 막혀있어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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