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동안 못본 초중고 동창을 만났네요
2024. 6. 28.
어제(6/27) 초, 중, 고교를 같이 다닌 학연이나 고교 졸업 후 한번도 못본 친구를 최근 3주 사이 연락이 닿아 마침내 만나 봤기에 독자 여러분께 그 회동기를 전합니다.
유년과 청소년기의 추억
<종성이와 수학한 1960년대의 부산 토성교 전경>
김종성 소장(L전자 중국연구소 퇴임)은 저와 60년대 부산 토성교, 경남중, 70년대부터는 경남고를 같이 다닌 막역한 지우였네요. 유소년 시절 살아온 주거 공간도 토성동-부평동 지역이라 학교 수업 파하고도 자주 어울렸던 말 그대로 부x 친구이기도 했심다.
<같이 합격해 다닌 경남중 전경(2000년 중반)>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는 같은 반이 아니라서 그 조우 빈도가 제법 옅어졌지만, 그래도 오며가며 볼 때마다 나와 중학입시를 앞둔 치열했던 5~6학년 초등생활을 같이 보냈다는 전우같은 동질감은 항상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았네요. 초등 시절 진회라는 또 하나의 인생 친구와 삼총사를 이루어 과외도 같이 다니고 투닥거림도 심심찮게 하면서 유년 시절의 마지막을 지근거리에서 헤쳐온 특별한 동창이라는 유대감은 중학 내내 유지되었심다.
<종성이와 다시 만난 경남고 1-4반(3층 좌편 끝쪽)이 있는 3층 건물>
고교에 입학하고 1학년을 종성이와 같은 반에서 보내게 되자 초등시절 매일 보던 관계가 드디어 다시 부활되었네요. 하지만 서로가 머리 굵어지며 다른 친구들과도 각자의 교우관계를 맺다보니 초등 때의 한 집안 쌍둥이 형제 같았던 뿌리적 마음가짐의 관계는 더 이상 지탱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심다.
<종성이와 따로 호연지기를 키웠던 고 2, 3 시절의 경남고 전경(2015년 사진)>
거기다 다시 반이 달라졌던 2, 3학년부터는 각자의 자아성장 단련과 대입준비에 바쁜 데다 같은 교내 운동이나 취미 동아리 멤버로도 엮여지지 않았기에 서로가 이제는 제법 많이 소원해졌네요. 그후 대학 시절에서라도 만났으면 어릴 적 유대감이 바로 복원되었을 테지만 들어간 대학도 시기도 다르다 보니 만날 기회가 더욱 옅어져 우리는 결국 마음도 멀어지는 관계가 되어버렸심다.
대학이나 직장에 가 있던 시절에도 동창 모임 같은 데서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희안하게 이 친구와는 그런 기회가 포착되지 않았네요. 학창 시절부터 다가오는 친구들은 잘 받아주지만 남에게 먼저 다가가 집적거리지는 않는 유순하면서도 소극적인 심성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는 성격을 알기에 어디선가 주어진 임무 잘 수행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일거라 짐작만 했심다.
우연히 알게 된 그의 근황과 해후 만남
그런 세월이 어어 하는 사이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며, 드디어 50년도 넘어갔네요. 내 주위의 동창들에게 어쩌다 종성이의 근황을 물으면 만났다는 친구는 별로 없고 자기도 전해 들은 얘기라며 Y대 전자공학과 나와 L전자에 입사해 임원으로 근무하며 안양 근교에 산다는 소식만 풍문처럼 들려왔심다.
폰번호 아는 친구도 없어 그저 이 친구가 자기 성격대로 은자의 생활을 제대로 하는 모양이라 여기는 수 밖에 없었네요. 그런데 이제야 만날 타임 기회가 참으로 우연히도 찾아왔었심다. 몇 주 전 강화 쪽에 사는 고교동기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장성효라는 친구가 종성이 얘기를 꺼내기에 어잉 하고 되물었더니 그의 폰번호도 알고 얼마 전에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심다.
알고보니 종성이와 같은 대학에서 수학하며 이 친구의 오랜 하숙 메이트 차동민군과의 연결고리로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네요. 성효군이 바로 폰으로 종성이에게 통화를 하며 자기 앞에 꼬치 친구를 자처한다는 김모가 있으니 얘기해보라고 폰을 건네주었심다. 마음의 준비가 채 안되었지만 오래 못봤던 학창시절 용모만 그린 채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니 순간 만감이 교차했네요.
내가 좀 감회어린 음성으로 내 목소리를 전했지만 리액션이라고는 원래 모르는 친구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재미이 반갑다. 어째 지냈나?’ 하고 단답형으로 되받으니 이 친구 심성은 예전 그대로이네 하고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심다. 자기는 오래 지내던 안양에서 옮겨와 퇴임한 지금은 일산에 산다고 하니 우리 김포집에서 멀지 않다는 생각에 곧 한번 볼 수 있겠다는 궁리가 세워져 좋았네요.
<같이 만나기로 한 운양동 행정복지센터>
일주일 전 이 친구에게 내가 한번 일산 킨텍스까지 97번 버스로 찾아갈테니 나올 수 있냐고 묻자 얼마후 카톡 문자로 내가 버스로 어렵게 올 바에야 자신이 승용차로 20여분 거리인 운양동 행정센터로 갈테니 거기서 보자는 전갈이 왔심다. 내가 아는 청소년 시절 종성이의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이런 역제안을 해주다니 많이 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드디어 만나 맛집 담소 타임을 갖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우리의 만남은 이런 급물살을 타며 6/27(목)일 12시 경 김포 운양동에서 이루어졌심다. 내가 집에서 한 10여분 쯤 걸리는 행정센터에 걸어가 한 1, 2분 기다리니 차 한 대가 도착해 백발이지만 몸은 가벼워 보이는 이 친구가 내리는 것이었네요. 딱 보니 얼굴에 나이 주름은 패었지만 기억하고 있는 학창 시절 용모와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심다.
<'엄마의 봄날' 전경>
우리는 짧은 해후의 정을 나누고 와이프에게 문의해 알아낸 이 동네 맛집이라는 ‘엄마의 봄날’을 찾아갔네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갔는데 벌써 사람들로 가득 차 접수하고 바깥에서 한 20여분 기다려야 했심다. 이 타임이 그간 오래 못봐 궁금했던 두 사람의 살아온 요약 역정을 교환하기에 딱 맞는 시간이었네요.
<둘이서 대기시간 기다리며>
종성이는 재수도 안하고 들어간 대학에서 ROTC를 신청해 학사 장교로 군대생활을 마친 뒤 L전자에 입사해 연구요원으로 근무했고, 중국연구소 소장까지 베이징에서 역임하다 퇴임했다는 소식을 전해줍디다. 자식은 딸, 아들 한 명씩을 두어 모두 결혼시킨 뒤 손자손녀들 가끔씩 돌봐주는 전형적인 모범 노후 생활을 영위하는 팔자라 하데요.
<식사 테이블 잡고>
그러다 우리 입장 차례가 되어 테이블에 앉으니 북적거리는 식당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아 둘이서 담소 나누며 식사하기 딱 좋은 공간이 펼쳐졌네요. 나오는 음식들은 가격(13,900원) 대비 가성비가 상당히 괜찮았심다. 특히 녹두죽 속에 버무려져 나온 닭다리 백숙이 제게는 최고 별미였네요.
<녹두죽 닭다리 백숙>
분위기가 푸근해지자 종성이가 옛 초등시절 에피소드 중 내가 기억도 못하던 이야기도 펼쳤고,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을 호명하며 그 시절 추억을 서로 환기시켜 주었심다. 아무래도 궁금증과 성미가 급한 내가 질문을 많이 했고, 이 친구는 자신에게 저장된 기억회로를 최대한 가동하여 성심껏 답해 줬네요.
커피점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마누라가 알려준 동네 명소 ‘슬로 김포점’이라는 커피와 베이커리를 팔며 담소 공간을 마련해 주는 곳을 다시 찾아나섰심다. 종성이가 끌고 온 차가 외견상 디자인이 무슨 전기차 같아서 그렇냐고 물었더니 전기차가 아닌 그랜저 신형이라 했네요. 그런데 안은 신차라서 그런지 일전에 지인 서교수의 테슬라 전기차 내부와 비슷한 디자인처럼 여겨져 저 혼자 그냥 확증오류에 빠졌던 모양이었심다.
<'슬로 김포집' 내부>
우리 동네로 찾아와 주었기에 오늘은 내가 밥값 뿐 아니라 커피값도 일체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커피값은 기어이 자기가 내는 게 맞다며 내게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주었네요. 널다란 공간에 자리잡아 커피 한잔 느긋이 하며 식당에서 미처 못나눴던 얘기 보따리들을 다시 풀기 시작했심다. 내가 인터뷰어이고 이 친구가 대담 파트너가 된 포지션을 자연스레 유지하면서요.
<카라멜 마키아토 한잔 잡고 인터뷰에 응하는 김소장>
내가 니는 대학시절과 직장생활 할 때 우리 동기 중 누구와 자주 어울렸냐고 묻자, 서강대 근처에서 하숙생활 같이 한 차동민이가 가장 가까웠고, 대학 같이 다닌 장성효와 이해룡 등이 그 뒤를 잇는다고 말해 주었심다. 이들은 지금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은 채 정기적으로 모여 국내 여행도 함께 다니며 노후의 친목을 다지고 있다 합디다.
멤버들이 모두 술은 하지 않고, 당구 쫌 열심히 치는 공통분모를 가져 모임이 유지되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 여겨졌네요. 무색무취한 종성이도 알당구는 300 실력이라 합디다. 대학 1년 때 한 6개월 당구장에 살다시피 하다보니 바로 200까지 올라가 지금 당구 친구들과도 꿀리지 않는 실력을 쌓았다 하네요.
<자리 파하기 전 김모와 같이 찍은 셀카 컷>
자리를 파할 무렵 무슨 얘기를 하다 자기는 지금의 한국 부모들이 어찌어찌 일본에서 머물 때 오사카에서 태어나 거기서 4살 때까지 살았다는 스토리를 밝힙디다. 단편적인 기억들은 언뜻언뜻 나지만 한국 와서 본격 성장할 때와의 기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명료한 그림들 뿐이었다고 회상했네요. 초등 시절 전혀 몰랐던 이 친구의 출생 비밀을 어쩌다 전해 들은 것 같아 나의 일본과 관련된 얘기도 답례로 전해줬심다.
<사세보와 오사카의 위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 부친이 모친과 결혼하기 전 해군 중사로 복무하며 한국에서 일본 쿠슈 사세보 항을 오가는 군수송선 승무원이었는데 거기서 만난 일본인 여인과 연애하다 딸을 낳았다는 스토리를 말이네요. 십오년 전 부친 별세 후 모친에게 전해 들은 이 얘기를 기반으로 내가 남은 여생 동안 반쪽 일본인 이복 누나를 찾아가는 꿈을 품고 있다 했더니 이 친구가 자못 흥미롭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들어주었심다.
어린 시절 반쪽바리라는 놀림감이 될까 결코 발설하지 못했을 자신의 일본 출생 사실을 70이 되어 만난 친구에게 커밍아웃하듯 밝히니 우리 세대에 그런 건 쎄고 쎈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서 혹시라도 괘념하지 말아라는 내 뜻을 제대로 알아채 준 듯 하데요.
아무튼 우리는 이 날 3시간에 걸친 첫 만남이 꽤 괜찮았다는 느낌을 서로 공유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심다. 이제 한번 물꼬를 텄으니 더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길 것이라 서로 예상하면서요. 고교 졸업 후 50년 만에 만난 친구와는 이렇게 첫 해후를 나누었심다.
첫댓글 ㅎㅎ
김박사
'고교 졸업 후 50년 만에 친구와 첫 해후'를 축하함미다
고교졸업 50주년이라,
'이산가족찾기' 같은 감동스토리네요
'이산동기찾기'라는 운동은 없나 불현듯 생각이 떠오르네요
옥자, 축하해주니 고맙네요.. 종성이가 중고교 시절부터 별로 외향적이지 않는 성격이라 우리 동기들과도 광범위하게 교우하지는 못했을거라 짐작됩디다. 내가 아는 친구들의 이름을 대봐도 한 4, 50%만 기억난다 하니 말이지요.
학창시절은 그렇다 치고, 사회생활에서 연구직으로만 근무하다 보니 더 사람 만나는 폭이 고만고만 했을거라 여겨지데요. 아무튼 초등시절 깊이 알았던 친구를 아주 늦게라도 만났으니 뿌듯했심다. 눈매가 항상 선한 사슴 눈알처럼 기억되었는데 그 흔적도 많아 남아 있데요.
고교 1-4반이라면 나와도 같은 반인데 종성이란 이름은 귀에 익히 들은듯한데 얼굴은 기억이 안나네요.
인생 느지막하게 옛 인연이 있는 친구와 만나 담소하는 장면이 참 보기 좋네요.
어린 시절의 인연이란 언제 만나도 다시 복원되는 묘한 접점인가봐요.
당시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박상훈이 급장을 했었지요.
상훈이와 나는 오랜 접점을 유지했었고요.^^
이 친구가 나보다 쪼끔 더 큰 30번대 중후반이었을거니 장신급의 강호 교수 눈에는 자주 안 띄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출석 부를 때는 어떻게든 들어봤을테니 귀에는 익었을낌미다.
말 그대로 어릴 적 깊은 인연은 언젠가 연결된다는 영화 비스무리한 스토리가 내게도 이번에 한편 나타난 것 같네요. 김교수에게는 타계한 박상훈 군이 같은 인생 친구의 역할을 한 모양이구료.. 이번에 책 출간했다는 소식 축하드림다.
@김재민 이번에 낸 책에도 토빗이란 이름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와 대담한 글이 바로 친구 상훈과의 대화였지요.
상훈이는 질문을 항상하는 탐구적인 성격으로 참 순수한 친구였지요^^
@김강호 와따, 톨스의 대장편 '전쟁과평화'에 대한 얘기도 나옴미까?.. 박상훈군은 1-4반 급장하며, 매사에 희생과 봉사정신이 몸에 배였던 친구라 너무 빠른 타계에 안타까움이 그냥 그득해지네요.
박상훈을 동광동 화국반점에서 우연히 만난 후 얼마 안 있어서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반장은 철각 박치호 원장이...
김종성, 학교 다닐때 말 한마디 안 나눈 친군데 사진을 유심히 보니 눈에 익네요.
차동민은 연대 아닌 서강대 출신...
글고 연락이 닿는다면 일본 이복 누나 꼭 찾아보셔...만나면 얼마나 훈훈한 스토리일까 ㅎㅎ 조선일보에 대서특필해줄게요...
종성이가 사회 나와서 너무 교교하게 살았는지 알거나 기억하는 우리 동기들 폭이 예상 외로 적은 듯 함다. 하기사 나와도 접점 계기가 거의 없어 50년 만에 만난 판이니.. 지금이라도 동기들 모임에 연락해 얼굴 좀 더 비추게 해야겠심다.
일본 이복누나 찾았으면 한다는 소생의 바람을 응원해줘 고맙소이다. 뭐 실현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어떤 인물로 성장하고 노년으로 가있을까 하는 호기심은 여전하네요.. 우리 파피 소생이라면 용모는 평균 이상 되었을거라 기대되지만..
김박, 글고 제발 허세 부리지 마시게...종성이는 대기업 임원지내 재산이 김박보다 10배 가까이 많을건데 차값만 내면 되지...ㅎㅎ
허세는 무슨.. 정상적인 사람 도리를 한거지요.. 50년 만에 보는 친구가 먼저 나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온다면 수인공도 분명히 쌈지돈이라도 털어 대접했을거외다.
@김재민 난 누굴 만나면 대충 상호 재산 가늠해 식대와 차값 내는거 조정하는데 이 기준을 김박에게 디밀어 쏘리...내 계산법이 합리적일듯 ㅎㅎ
처음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종성이의 옛날 얼굴이 남아있네요.
아, 길영공도 1-4반 같이 했으니 이 친구 옛 얼굴이 기억날거외다. 그건 그렇고 두드러기로 고생한다는데 좀 많이 괜찮아졌능교?
@김재민 두드러기는 김 수인 공이 두드러기로
돌팔이 고약장수 이모씨에게 묻은 바람에
이모씨가 두드러기로 고생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두 사람의 오랜만의 만남, 좋았겠습니다.
김종성, 나하고도 한 반 한 적이 있고(2학년 때?) 앉은 자리도 나와 그리 멀지 않아서 이름만 들어도 금방 생각이 났네요. 내 기억에는 나보다는 외향적이었던지 경북 촌놈인 내게 몇 번 말을 먼저 걸어 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옆으로 싱긋이 웃으면서 입을 크게 안 벌리고 좀 우물거리는 말투로 말이지요.
나도 고교 졸업 직후 종성이를 서울 경복궁에선가 처음으로 동창회 모임 같은 것 했을 때 잠깐 스쳐 봤든가 아니면 아마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사진 보니 반갑네요. 얼굴도 좋아 보이네요. 차동민이는 1학년 때 우리 반이고 반장을 했는데 오래 못 봤네요.
아, 법사도 종성이와 2학년 때 같은 반 한 적이 있은 모양이구료.. 내향적인 종성이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니 법사도 코르시카에서 사관생도로 파리 유학온 나폴레옹만큼이나 그 당시는 외로움 속 고고한 포즈로 경남고 생활을 한 듯 하외다.
고교 졸업 후 재경 동창회에서 이 친구를 스쳐라도 봤다니 동창모임에 전혀 안나온 것은 아니었네요. 저그 연구소가 안양에 있다보니 한번씩 서울 오기도 불편해 발길을 끊은 모양임다.
차동민군은 소생과 경중시절 3학년 때 급장 맡으며 같은 반 한 걸로 기억되네요. 얼굴 많이 가리는 종성이를 하숙집에서부터 잘 챙겨주고 자주 봐주는 친구 역할을 해왔다니 내가 형빨처럼 만나면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듬미다. 무슨 오지라퍼처럼..
연결한 장성효 동기도 이름과 얼굴이 그런대로 상상이 되는 동기인데..김종성은 사진을 보니
희미하나마 학창시절 눈에 많이 익은 얼굴이라..
교류는 없었으나..아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사람이..나이가 들어도.. 옛 얼굴의 바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디다.
늦은 나이까지 계속 고생을 하는 탓인지..급작히 근육이 빠지며 얼굴마저
바싹 말라 비틀어지는 바람에
심지어는 근래까지 만나오던 지인조차 잘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해버린
서토같은 이들도 있는 반면에 말이지요.
아, 장성효 사장이 학창시절이나 사회 나와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최근에야 강화-김포 동기모임에서 처음 수인사를 나눈 사이였심다. 종성이를 연결시켜 준 인물이라 앞으로 나와도 더 가깝게 지내자고 제안했심다. 강화에서는 김건국이 사장과 당구를 비롯해 여러면에서 니내도리하는 단짝이데요.
종성이가 초등 때도 유복한 집 아들로 커서 궁상끼가 없었는데 그 후로도 큰 고생은 별로 해보지 않은 듯 어릴 적 그 얼굴이 많이 남아있습디다. 서토도 귀인 자제같은 풍모를 지녔는데 쪼끔 세파를 겪었다고 그 원판이 어데 갔겠소?.. 너무 동정표 의식한 자조적 자기비하 표현은 자중하소. 정상적인 노화를 갖고 말임다.
사실 옛날과는 달리.. 다양한 사유로 인하여..어릴적 부랄친구를 나이들어 만나는 일이
그리 쉽지않은 세상인 바..
굳이 만남의 기회를 기어이 만들어낸 김박사의 부지런함이 돋보입니다.
물론 같은 지역에서 근 10여년 이상의 동문수학을 계속하게 된 인연이 무엇보다
큰 바탕이 되었겠습니다만-
그리고, 이를 글로써 올려볼만한 훈훈한 내용으로 여겨..분주한 가운데도 이처럼 옛 사진들과
자료들까지 찾아내어 성의껏 본문 글로 창의,
동기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김박사의 따듯한 마음이 크게 가슴에 닿는군요.
그러고 보면, 옛 부랄친구들과만(?) 자주 만나며 지내고 잇는.. 소위 원조(?) 은둔동문인
옥자의 말슴대로..
자칫 김박사의 본문 창의가.. '이산가족 찾기' 아닌 '이산동기 찾기' 운동으로..
경남고 총동문회 차원에서 새롭게 발화 진행되게 될 지도 모르겟군요.^^
종성이를 만날 때부터 아, 이 만남은 글로 기록해 놓고 싶구나 하는 내적 욕망이 일어납디다. 그냥 만나고 헤어지면 잠깐 기억에 남았다가 바로 사라지지만 글로 남기면 어떤 관계의 지속성을 확인시켜주고 보장해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네요.
예전에 법사가 말했듯 역사적 큰 사건을 기록하는 거시사와는 달리 사람이 숨쉬는 미시사를 써며 어느 시대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도 나름 의의가 있겠다 싶어 필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요런 글을 작성해보려 애쓰는 것임다.
자꾸 쓰다보니 요령도 늘어 관련 사진이나 이미지 사진들도 저절로 챙겨넣게 되고, 사람을 만났을 때 나 자신의 심리상태와 상대의 생각을 포착해 스토리를 엮어내는 통찰력도 생깁디다. 하지만 만남 파트너가 '오프 더 레코드'를 원하면 글쓰기를 멈춰야하고, 쓴다 해도 스토리 라인까지 짜면서 작성하는게 무슨 창작물 생산하듯 장애요인과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임다.
하지만 서토, 법사, 길영공, 옥자, 수인공, 박국장, 지박사 등등의 열렬 독자들이 풍성한 댓글보시로 소생 글에 우쭈쭈하며 격려사를 보내주니 그 맛에 새 글 쓰는 동력이 다시 생깁디다. 특히 서토의 심혈 가득한 댓글에 항상 고마움을 표하외다.
댓글王은 서토!^^(자타 공인)
오늘 새삼 느낀건데 김박을 만난 제자들은
매우 행복한 교습을 받을걸로 짐작됩니다
우째 옛 학우라지만 인자 에고 허리야 수준의
할배들끼리 만나서도 이다지도 시시콜콜 오밀조밀
가려운데 없나 살펴가며 얘기를 풀어나가는지
그 자상함에 상당히 놀랐기 때문이라오
훌륭한 스승의 덕목중 하나가 이 자상함인데
김박한테 배우는 학생들이야말로 이 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 생각키 때문이라오
중간중간 사진까지 알뜰히 박아가면서리~^^
이글을 보면서 나 또한 옛 친구가 그리워지는데
요샌 그저 안부 묻기도 겁이나 덜렁 전화하기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나이라니 참~
박국장이 또 출몰하여 기운나는 댓글 비타민을 한웅큼 앵겨주는구료.. 옛친구를 만나 이리 글로 한번 엮어보는 것은 말로 할 때 오랜 만에 만난 어색함으로 의사교환이 왜곡되거나 불명료했을 경우를 보완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 믿기 때문임다.
글로 쓸 경우 그냥 내뱉는 말과 달리 독자들이 명확하게 글쓴이의 의도를 알도록 문장 하나하나 퇴고하며 의미전달이 제대로 되는가를 확인하다 보니 박국장이 느낀 오밀조밀한 자상함 또는 꼼꼼함 같은게 엿보였을 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문장력있는 문호들이라면 일필휘지로 한 방에 내갈겨 써내겠지만 우리 같은 잔챙이들은 초고를 읽고 또 읽으며 문장을 다듬어야 하기에 그 꼼지락거리는 품이 장난이 아님다.
글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진들이나 도표, 때로는 동영상 등 시각적 자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소생 글에는 이들 자료가 꼭 삽입되어짐미다. 이러다보니 A4 4~5페이지 글 하나 작성하는데 요즘은 최소 이틀 이상은 걸립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