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2 추수감사 및 성당축성 축일
신명 8:1-10 / 1베드 2:1-5, 9-10 / 마태 25:1-13
등(燈)과 기름(油)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잠시 짬이 생겼을 때에나 혹은 아주 불행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에야 잠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요. 오래전 중국의 어느 잡지에 실린 유능하다고 알려진 젊은 신문기자의 자기고백의 글이 인상적이라서 소개해 드립니다:
“요사이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요. 두렵다고 느끼면 형광등, 스탠드, 욕실 등 심지어는 어항 등까지 집안의 불이란 불은 다 켜요. 흐린 날에는 극도로 민감해져서 계속해서 짜증을 내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 놓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쓰기도 해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때려 부수고 싸우는 전자오락게임을 좋아해요. 한번 하는데 2만원이 넘지만, 마지막 판까지 깨고 나면 속이 다 시원해져요. 하지만 지면 짜증이 나죠. 짜증이 나면 우걱우걱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스피디하게 차를 몰아요. 급커브를 돌거나 후진해서 한 번에 주차라인에 들어서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안 그러면 누군가를 잡아서 크게 한판 싸우고 싶거든요. 결국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건 제일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에요. 아내 말이지요.”
- 중국 최대 주간지 <南方週末>2005년 기사에서
위에 소개한 유능하다고 알려진 신문기자의 이야기는 쉼 없이 바쁘게 일하지만 마음은 항상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열 처녀의 비유’이야기를 묵상하며 저는 등(燈)과 기름(油)이라는 두 단어에 눈길이 갖습니다. 예수님 시대 혼인식은 주로 해가 진 이후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늦게 시작하는 혼인식이서 신부의 들러링인 처녀들은 그동안 등잔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풍속을 이해하고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등잔뿐만 아니라 기름을 준비한 5명의 처녀들은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마태복음 24장 43절부터 44절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둑처럼 갑자기 올지 모르니 늘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은 마태복음 13장 36절부터 43절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밀과 가라지의 운명이 갈릴 것이라는 가르침과도 유사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 초반부에 등장하는 열 처녀는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신부를 데리고 올 신랑을 맞으러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곧 오기로 한 신랑이 늦도록 오질 않았습니다. 모두들 기다리다 지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한 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그들은 제각기 등불을 챙깁니다. 여기서 ‘챙기다’는 그리스어 ‘코스메오(κοσμέω)’는 ‘정비하다’, ‘손질하다’라는 뜻으로 예배가 끝난 후 복사들이 제대 초의 심지를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게 정돈하는 행위를 표현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아마도 이때 비로소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기름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그들은 왜 이런 미련한 행동을 했을까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느라 바쁘고, 직장인들은 성과를 내고 표창을 받고 직함을 얻기 위해 바쁩니다. 비즈니스맨은 돈 벌기위해 바쁘고, 관리들은 승진하기 위해 바쁩니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바쁘고, 자식은 앞날 때문에 바쁩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우리는 조급증이라는 마음의 병이 걸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해 날수 있는 사람은 바쁘고 혼란스런 와중에서도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쉴 틈 없이 바쁜 세상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좌절을 겪고 타격을 받았을 때 심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름을 장만한 현명한 처녀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신랑이 왔다, 마중 나가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른 심지를 정리하고 기름에 다시 불을 밝힐 수 있는 영적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름이 떨어진 처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가게에 간 사이에 신랑과 신부 그리고 그들을 영접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하객들은 잔칫집으로 들어갔고 잔칫집 문은 잠겼습니다. 불행하게도 가게에 갔다 돌아온 그들은 그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문 밖에서 원망하면서 오늘 제2독서에 베드로 사도가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들, 즉 “악의와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1베드 2:1)”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나라가 갑자기 도래할 때, 우리는 우리가 현명한지 어리석은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현명함과 어리석임이 갈리는 기준은 당장 눈에 보이는 등불 같은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추어져 있는 기름이라는 내적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교회는 한 해의 수확을 마무리하고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와 한옥성당 축성 12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냅니다. 그리고 곧 있을 대입수험능력시험을 앞두고 그동안 갈고 닦은 수험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우리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바쁘고 조급하게 살아오느라 혹시 우리 내면에 있는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만일 내면에 기름이 여유가 있다면 주님께 감사드리고, 만약 내면에 기름이 다 떨어져 간다면 당황하지 말고, 주님께 영적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 주유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6일간 바쁜 일상을 보내고 7일째 교회에 온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기름을 넣으러 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동차가 신나게 달리다 기름을 채우러 주유소에 와서 멈추어 있듯이, 우리도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하느님 성전에 모여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비추고,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파견됩니다. 그럼으로 멈춘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효율적인 움직임을 위해 기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배만으로는 기름이 온전히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가 공동체적으로 기름을 채우는 것이라면, 기도는 개인맞춤형으로 기름을 채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나는 좀 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집중해서 볼 수 있고, 내 내면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과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바쁜 세상에 그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시간낭비가 아닌가?”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한가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고통스럽게 ‘안으로 힘을 쓰는’ 과정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시류에 휘둘리고 있는 내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신랑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처럼 영적인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 한옥성당은 우리전통의 품격을 느끼면서 공동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개인적으로 기도하기에도 좋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낮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시끄럽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 아침 시간에는 기도할 때 마음이 차분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조용히 기도하시는 순례객들을 볼 때면 “이 분들이야말로 정말로 이 곳의 진정한 가치를 아시는 분들이구나!”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개인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기름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와 한옥성당 축성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도 그러한 주님의 은총으로 내면의 기름을 충만히 채우시길 빛의 근원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