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3
성경을 삶에 적용할때 주의해야 하는것은,성경으로 내삶을 고쳐나가는지 아니면 내삶에 성경을 끼워맞추는지를 분간해야 하는 것이다.전자는 좁고 협착한 길이나,후자는 넓고 평탄한 길이다.성령께서는 설령 성도가 후자의 길을 가더라도 전자의 길로 바로잡게 인도하신다.거짓교회와 거짓신자들은 전자의 길을 가다가 금세 스스로 후자의 길에 들어선다.한국교회는 대체로 정치경제이념에 대해서 후자의 오류에 빠져있다.
#20220203
#요한계시록 #Revelation 1:9-10
그리스도의 命令
9 나 요한은 너희 兄弟요 예수의 患難과 나라와 참음에 同參하는 者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證言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Ego Joannes frater vester, et particeps in tribulatione, et regno, et patientia in Christo Jesu : fui in insula, quæ appellatur Patmos, propter verbum Dei, et testimonium Jesu :
Ἐγὼ Ἰωάνης, ὁ ἀδελφὸς ὑμῶν καὶ συνκοινωνὸς ἐν τῇ θλίψει καὶ βασιλείᾳ καὶ ὑπομονῇ ἐν Ἰησοῦ, ἐγενόμην ἐν τῇ νήσῳ τῇ καλουμένῃ Πάτμῳ διὰ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Ἰησοῦ.
요한 사도는 당시 유일하게 생존한 사도였고 교회의 최고 연장자이면서 지도자였으면서도 스스로를 모든 성도들의 형제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동참하는 자라고 칭한다. 그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했고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존귀나 영광이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다른 성도들보다 먼저 직접적으로 복음을 받은만큼 솔선수범 하면서도 뒤처지는 사람 없이 함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예수의 환난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이 땅에서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듯이 이제는 그 은혜를 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각자의 십자가와 복음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의미한다. 예수의 나라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영역은 물론이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인류와 나라와 역사와 동식물과 자연환경과 우주의 모든 천체와 시간과 공간과 주님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까지 통칭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만 역사하시지 않으시고 그 지으신 모든 만물에게까지 일일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하시는 일을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의 나라라고 하면 교회와 성도로 이루어진 영역을 의미한다. 예수의 나라라고 해서 어떤 특정한 정부나 국가 등의 통치체제를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고 대개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정부나 국가나 통치체제를 기독교 식으로 억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되고 교회와 성도가 속한 사회가 어떤 정부이건 국가이건 통치체제이건간에 상관없이 성경과 성령의 삶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해야만 한다. 교회와 성도들에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인 정부라면 별다른 어려움없이 복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반대로 교회와 성도들에 적대적인 정부라면 그로 인해 당할 수 밖에 없는 불이익과 어려움들을 통해서 우리가 지은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간구하며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참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핍박과 죽으심을 참으셨듯이 교회와 성도들도 주님을 본받아 복음을 위해서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핍박들을 견고하게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조건인 것이다. 믿는다 하면서 마땅히 동참해야 할 것들에 동참하지 않으면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없고 형식적으로는 동참하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요한 사도가 서신서에서 말씀한 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은 거짓 형제들에 불과하다. 요한 사도는 거의 1백세 가까운 노년의 사도이자 장로이자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손수 증거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는 노익장을 선보였고 그로 인해 밧모 섬에 유배되는 고난과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였다. 요한 사도가 거의 1백세까지 장수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은 자라는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가장 먼저 순교한 그의 형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덜 받은 제자라는 얘기가 되고 만다. 요한 사도를 그 때까지 오래 살도록 하신 것은 그만큼 그에게 맡기신 사역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한 사도는 다른 동료 사도들이 하나둘씩 순교해 감에 따라 점점 홀로 남겨지게 되더라도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더욱 오래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었다. 그는 비록 오래 살았으나 그만큼 고독했고 교회의 수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져야만 했을 것이며 자신보다 어린 교회와 성도들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요한 사도는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충성되게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0 主의 날에 내가 聖靈에 感動되어 내 뒤에서 나는 喇叭 소리 같은 큰 音聲을 들으니
On the Lord's Day I was in the Spirit,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fui in spiritu in dominica die, et audivi post me vocem magnam tamquam tubæ,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καὶ ἤκουσα ὀπίσω μου φωνὴν μεγάλην ὡς σάλπιγγος
요한 사도는 홀로 섬에 유배되어 교회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어도 주님의 날에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평일에도 주일처럼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의 날에는 두배나 더 깊고 충만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신자 각자가 속한 유형교회의 규정된 주일 예배 모임을 준수하는 것이 좋으나 여의치 못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설령 혼자라 하더라도 주일에 예배드리기를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 사도가 성령에 감동된 것은 자신의 예배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계획 덕분이었다. 그가 등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은 것은 육신의 귀로만은 들을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음성이 육신의 귀를 통한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수는 없다. 성령의 감동하심은 이렇게 환상과 이적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으나 통상적으로는 세상의 원리와 기준을 거스르는 성경과 성령의 원리와 기준에 강하게 이끌리어 강압적으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꺼이 지키고 순종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는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런 성도들의 믿음의 행보가 바로 성령의 감동하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감동하심을 체험한다 하면서 이러한 기적과 이사와 환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사실 그것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려 하기보다는 그런 것을 경험한 자기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교만에 빠져 멸망에 이르는 사망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20210203
#민수기 #Numbers 35:9-32
도피성(신 19:1-13; 수 20:1-9)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의 살인자가 아닌 과실치사자를 위한 도피성 여섯 개를 만들라고 명하신다. 이는 살인죄에 대해서도 고의성 여부를 살펴서 형벌 정도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여섯 개의 도피성 중에서 세 개는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두고 나머지 세 개는 요단 강을 건넌 후 가나안 땅에 두도록 하셨는데, 이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절반 지파가 요단 강을 건너지 않은 땅을 차지하게 된 때문인 듯 하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도피성 적용 대상으로 순수 이스라엘 혈통 뿐만 아니라 40년 전 애굽을 나올 때 같이 따라나온 수많은 이방 잡족들과 미디안을 진멸하고 포로로 잡은 3만 2천 명의 처녀들과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될 때 이런저런 이유로 흘러 들어온 이방인들과 타국인들 전부로 차별없이 지정하라고 명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도피성을 비롯한 모든 율법과 규례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지경에 거하는 자들은 자국인이건 타국인이건 동등하게 차별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난 후 지금까지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국적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없이 동등한 복음의 유익과 훈계와 권징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19 피를 보복하는 자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면 죽일 것이요
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21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
아담의 범죄로 나면서부터 패역한 인간의 본성상 여호와께서 아무리 선한 뜻으로 만드신 율법과 규례라도 악용할 틈새를 찾기 마련이므로, 이 도피성 규례를 악용해서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고도 과실치사인 양 도피성으로 도망가려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런 살인자들은 도피성으로 도피했더라도 반드시 색출해서 죽이라 명하신다. 이 때 그 살인자를 처형하는 권리는 피살자의 가족에게 주어졌다. 오늘날 인류 문명과 인권의 발달이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보복법은 미개한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지만 이로 인해서 도리어 살인자가 제대로 된 형벌을 받지 않고 적은 형량이나 보석으로 치루는 반면에 피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은 그런 불편부당한 법 제도로 인해 평생 억울함과 원통함을 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22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27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어떤 살인자가 재판을 받아 과실치사로 판결이 났으면 그는 고의 살인자와는 달리 피살자의 지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지는 권리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생명을 해한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에 대한 책임으로서 그는 자기 터전과 가족과 이웃을 떠나 도피성에서 머물며 살아야 했다. 만약에 그가 임의로 도피성을 나오게 되면 피살자의 지인에 의해 목숨을 잃어도 이는 무죄하고 정당한 보복 살인으로 치부되었다. 과실치사자가 도피성을 나올 수 있는 것은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거나 50년만에 돌아오는 희년에라야 가능하였다. 대제사장이 얼마나 살지, 희년이 얼마나 남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의 섭리이고 사람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이 보기에 과실치사가 우연인 것처럼 그가 도피성에서 나오게 되는 것도 우연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어떤 과실치사자는 대제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희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도피성에서 일찍 나올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떤 과실치사자는 대제사장이 매우 건강하거나 희년이 50년 가까이 남아 있어서 거의 평생을 도피성에서만 지내게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전적인 섭리에 달린 것이어서 과실치사자건 피살자의 지인이건간에 이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공의와 긍휼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모든 살인자에 대해서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려면 증인은 한 명이 아니라 반드시 두 명 이상이어야 했는데, 이것은 사건 재판의 객관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의 악한 본성은 점점 더 범죄 기법을 교묘하게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수사 기법 또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의 살인자에 대해서는 자기 살인죄를 무를 수 있는 그 어떤 속전도 받지 말고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고, 과실치사자에 대해서는 속전을 받고 도피성을 나올 수 있게 해서는 안되었는데, 이는 살인죄는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동일한 기준으로 사형이건 도피성이건 처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범죄자의 인권이라는 개나 줘버릴 주장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교도소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가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유유히 빠져나오게 되기도 한다.
율법서 어디에선가 여호와께서는 과실치사가 당신의 섭리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과실치사로 죽은 자나 과실치사로 사람응 죽여 도피성에 가야되는 자나 어떤 점에서는 일말의 억울함이 있지 않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나 또한 여호와께서 왜 어떤 사람의 우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지성으로 가능한 추측을 해본다면 이런 경우가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어 마땅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데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있어서 앞으로도 그 범죄가 드러나지 않거나 반복 범행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 이는 오로지 여호와께서만이 그를 처벌하실 수 있으시므로 다른 누군가의 손을 통해서 우연히 과실치사를 당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 범죄자는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재판을 받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우연히 누군가를 죽이게 된 과실치사자도 비록 율법에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들보다 더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자신에게나 공동체에 해악이 되는 죄를 저지르고도 율법을 따라 속죄하지도 않고 마음으로도 돌이키려 하지 않을 경우에 아무도 이 자를 판단하지 못하므로 여호와께서 전적인 주권과 섭리로써 과실치사를 하게 하시고 도피성에 갇히게 하는 형벌을 내려주시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과실치사자가 여전히 완악하다면 기한이 되기도 전에 도피성을 빠져 나오다가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기한이 차기만을 기다리면서 잠잠히 자기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도피성 규례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고의로 지은 죄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자기가 어떤 부주의함으로 교회에게나 이웃에게나 사회에 부당한 해악을 끼친 것을 알았다면 피해자가 용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그 피해를 보상하고 배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코로나 시국에 전혀 사회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자기들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발뺌하는 것은 비록 사회로부터 법적인 판결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심판을 받겠다고 스스로 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0200203
#창세기 #Genesis 29장.
야곱이 라반의 집에 이르다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을 만나러 가서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바로 여기서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과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다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종은 많은 일행들을 데리고 리브가와 그녀 가족에게 줄 선물들을 많이 들고 갔지만 야곱은 도망치듯이 홀로 외로운 여행길을 나섰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녀에게서 특별한 섬김을 받았으나 야곱은 도리어 라헬의 가축들을 위해서 우물물을 길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확신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으나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슬프게 울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와 그녀 가족에게 귀한 패물을 주었으나 야곱은 라반의 집에 얹혀 살면서 품삯을 받는 지경에 처했다.
야곱은 목자들에게 라반의 안부를 물을 때 브두엘의 아들 라반을 아느냐고 하지 않고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고 묻는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브두엘은 모종의 이유로 가장의 역할을 못하게 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여성 인권을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라반이 야곱의 품삯으로 자기 딸 라헬을 아내로 주는 것과 야곱이 외모가 떨어지는 레아가 아니라 아리따운 라헬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경악을 금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처럼 여자가 남자들에게 어떤 댓가로 낮은 취급을 받고 외모로 우열이 나뉘는 근본적인 이유는 첫 여성 하와의 범죄 때문인 것이다. 알다시피 하와는 아담보다 먼저 뱀에게 유혹을 당했고 도와야 할 자기 남편 아담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렸으며 그리스도 앞에서 재판 받을 때도 그리스도의 질문에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였기 때문에 남자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비단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에만 해당되지 않고 시대와 지역과 문화와 사회 전반을 걸쳐서 남녀차별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 아들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서 외모 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배우자를 찾는 것임에도 레아와 라헬의 인격과 성품을 살핀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들의 외모로만 판단하여 라헬을 달라고 하였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자기가 한동안 임신하지 못하자 남편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라헬은 야곱의 전적인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임신하지 못하는 원인을 남편 야곱에게 돌려 원망하였고 친언니 레아를 시기하여 그녀와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라헬은 아리따운 외모를 갖추고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어도 단 두 명의 아들을 낳다가 산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만약에 야곱이 에서에게 속임수를 쓰지 않고 라반이 정직한 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라헬 대신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반으로서는 레아가 자기 동생 라헬보다 외모가 뒤처져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겠지만 이 또한 야곱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를 사용하셔서 야곱이 저지른 부당한 속임수에 대한 본격적인 징계를 시작하셨고 라반에게는 향후 영원한 형벌을 위한 그의 불의의 증거를 쌓는 것을 시작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섭리하심은 그것이 좋아보이건 힘들어보이건간에 단편적이지 않고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상급 또는 일시적 징계이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위한 자기 죄를 쌓는 것이 되기도 한다.
야곱은 레아를 아내로 맞은 지 7년 후에 라헬을 아내로 들인 것이 아니라, 레아와의 의무 신혼기간 7일 후에 라헬을 맞아들인 것이다. 야곱으로서는 사랑하는 라헬에게 쓰고 싶었던 남성의 기력을 어처구니 없이 레아에게 쓰게 되어 극도의 자괴감과 허탈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비록 7일 후에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여도 이미 마음에도 없는 레아에게 7일 동안 자기의 기력을 소진한 후였기 때문에 그 감흥은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헬의 여종 빌하는 추후에 레아가 낳은 첫 아들 르우벤과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다.
야곱에게 아이들이 생기다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녀에게 먼저 여러 자식들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레아는 처음 세 아들을 낳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를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넷째 아들인 유다를 낳은 후에야 남편 야곱에 대한 내용이 빠지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제서야 레아의 출산을 멈추셨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레아가 이 땅의 남편, 그것도 아비 라반의 속임수로 얻은 남편 야곱이 아니라 진정한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려고 네 아들을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신다. 혈통으로만 본다면 레아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가 속임수로 얻은 남편 야곱에게서 아내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애정을 요구하고 바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레아는 야곱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동생 라헬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라헬 대신 가장하여 신부로 들어간 것은 라반의 속임수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야곱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에 이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레아는 자기 노력으로 야곱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동생 라헬과 다투며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맏아들 르우벤이 어디선가 구해온 귀한 약용식물을 가지고 남편 야곱을 마치 남창을 사들이듯이 해서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 비참함까지 보이게 된다. 더 나아가서 레아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 라헬보다 앞서고 두 여종 뒤에 위치함으로써 혹시나 에서가 공격할 경우 라헬의 방패막이 역할로 전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맏아들 르우벤은 라헬의 여종이자 야곱의 첩인 빌하와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된다. 이렇게 레아는 야곱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벗어버리지 못한 때문에 평생을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여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야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라반이 그런 속임수를 쓰려 했을 때 강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설령 라반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어 그랬다 하더라도 야곱의 애정을 아예 기대하지 말고 남편을 돕는 배필의 역할에 충실하고 동생 라헬을 챙겨주며 마르다와 같이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가며 지혜롭게 꾸려갔더라면 도리어 야곱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는 비단 레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에 대한 나 혼자만의 집착과 관심을 진정한 사랑이라 착각하여 혼자서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 감상에 빠져서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자기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무리 진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대부분 내 인연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설령 어찌어찌 상대방을 억지로 붙잡아 간신히 인연을 만들었다 해도 그는 레아처럼 오랜 기간 동안 괴로움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시대의 레아가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건 사물이건 무엇이건 간에 이에 대한 불법적인 탐심과 탐욕을 갖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내 안에 가두게 되면 결국 그것이 나를 뚫고 날아가 버려 내 영혼과 육체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