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아들의 친구 -
권다품(영철)
어릴 때였다.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동네와 이웃 동네에서 싸움이란 싸움은 다 하며 온갖 말썽을 다 부리고 살았다.
또,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도 '이대로 살다가는 틀림없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군대를 지원했다.
상상이상으로 힘든 부대로 배치되었다.
오전 일과 중에 10km 구보를 해야 했고, 오후에도 10km를 뛰어야 하고, 아침 점호 때도 8km를 뛰어야 했고, 오후 훈련이 끝나고 저녁을 먹기전에 또 8km를 또 뛰고, 틈만 나면 그 몸서리나는 총검술과 태권도를 해야 하는 전군 교육부대로 배치가 되었다.
종합훈련들어갈 때는 12kg이나 되는 완전 군장에, 그 군장 위에 또 10kg이 넘는 M60 기관총까지 얹어서, 새벽부터 하루 종일 행군을 해야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이 필요한 부대였다.
그보다 더 힘든 훈련도 있었다.
전쟁 대비 훈련인 사단 CPX 훈련은 5박 6일동안을 잠을 30분이상 자본 적이 없고, 포탄이 나르고, 머리위로 기관총이 콩볶듯이 날아가는 밑을 각개전투로 기어서 통과해서 적을 제압하라는, 훈련이라 어쩌면 진짜 전쟁보다 더 힘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작적을 수행하고 텐트를 치고 10분이나 20분 정도 눈을 붙이면, 또 갑자기 비상을 걸란다.
어느 고지에 게릴라가 출현했으니 게릴라를 사살하고 고지를 점령하라는 지령이 떨어지면, 또 전쟁이 난 것처럼 급하게 텐트를 걷고 군장을 꾸려서 출동을 해야만 했다.
그런 힘든 군생활 동안에도 불침번 시간이나, 별밖에 안 보이는 야간 외곽 경계 근무 때는 잘못 살아온 나를 조금씩 돌아볼 수가 있었다.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제대를 하고 부모님께 멀씀드렸더니 이젠 안 속는다며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홧김에 술을 마시고도 싸우고 맨정신으로도 싸웠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와서 싸우고는 이튿날 부산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때 그렇게 힘든 군대생활을 같이 견뎌내고 나보다 한 달 늦게 제대를 한 후배가, 이 부끄러운 인간도 고참이라고, 서울에서 그 깡촌까지 밤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찾아왔다.
그때 마침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버린 틈을 타서 내가 자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지를 다 뜯은 흙벽 상태였고, 장판마져 다 벗겨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 먼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면, 집안 아재들의 사랑방이라도 빌려서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겠다.
그런데, 장판도 없는 방바닥에다가 천막 조각을 깔고 이불을 깔아준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 올라오고,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상처로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 친구와는 끝이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솔직히 내 혈육들에게 정이 안 간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이다.
더구나 혈육들의 친구라면 더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다.
혈육의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혈육의 앞날이 달라지는 일도 있을 것 같다.
친구의 도움 때문에 훨씬 나은 인생을 사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가 하면, 잘 살아가던 인생이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곤두박질 치는 경우도 있단다.
내 친구 중에 세련되고 멋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참 어질고 바른 친구가 있었다.
힘든 군생활 중에도 순박함을 잃지 않고 살다보니, 서울이 집이라는 친구와 참 친하게 지냈단다.
그렇게 군생활을 하다가 전역을 했는데, 그 서울의 군 동기가 서울로 한 번 놀러오라는 편지가 와서 올라갔더니,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의 아버지가 어느 건설회사에 신입 사원 채용 시험이 있으니 시험을 쳐보라더란다.
문제는 풀지말고 그냥 수험번호와 이름만 쓰라더란다.
어떤 기대도 않았고, 친구의 입장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며칠후에 그 건설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구의 아버지가 그 건설회사의 사장이더란다.
요즘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던가 보다.
나는 내 친구가 참 부러웠다.
2023년 8월 15일 오전 10시 21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