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0574C5E362F1108)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C0E4C5E362F1104)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CB34C5E362F113B)
우리가 통상 부르는 『하멜 표류기』의 원제는 『야하트 선 데 스파르베르(Sparwer)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그리고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이다. 하멜(Hendrick Hamel)이 이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은 그가 소속했던 동인도회사에 대해 조선에 표류해 억류되었던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하멜 표류기』는 지금까지 여러 권 출간되었는데 하멜이 쓴 원본 외의 나머지 책들은 모두 하멜의 글을 자기 나름대로 다양하게 각색한 이본(異本)들이다.
보고서 제목 그대로 『하멜 표류기』는 헨드릭 하멜이라는 선원이 1653년 7월30일 대만을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중 폭풍우에 휩쓸려 8월 16일 제주도에 표류,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그를 포함하여 36명이 생존했고 그때부터 1666년 9월 14일 다른 7명의 선원과 함께 일본으로 탈주할 때까지 13년 20일 동안 제주와 서울을 비롯하여 조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겪은 경험담을 쓴 기록문이며 보고서다.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과 그 일행은 그곳 제주에 감금되었다가 10개월여 뒤인 이듬해에 서울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조선에 당도한 청나라 사신을 찾아가 구출해 줄 것을 호소하려던 시도가 발각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유배 중 조선에 대 기근이 발생하자 하멜 일행은 강진을 포함 여수 남원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하멜은 비밀리에 배를 구입한 뒤 남원으로 이송됐던 항해사 얀 브리스(Jan Pieter de Vries)를 여수로 몰래 불러 1666년 9월 일본으로 탈주했다. 항해사 브리스가 탈주 항해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한 하멜 일행 8명은 긴 고난의 세월 끝에 1668년 7월 본국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하멜 표류기』는 8장의 삽화와 함께 하멜 자신의 경험담을 내용으로 한 「하멜일지」(제1부 제주도 표착 일기)와 그가 조선에 대해 관찰하여 알았던 정보를 담은 「조선국에 관한 기술」(제2부 조선의 풍물) 두 부분으로 구성 되었다. 담담하고 꾸밈 없는 문체로 기록한 『하멜 표류기』는 잘못 알고 있는 내용도 많지만 우리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의 진기하고 재미있는 일상의 삶과 함께 그가 몸소 겪은 당시 조선의 사람들과 조선 사회에 대한 꽤 객관적인 기술이 담겨 있다. 당시 조선사회의 실상과 생활, 풍속, 관습 등에 관한 유용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1668년 네덜란드어 본판이 발간 되면서 곧 이어 영어본, 프랑스어본, 독일어본이 발간 되었다. 『하멜 표류기』의 발간으로 ‘미지의 나라 조선’, ‘신비의 왕국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유럽 사회에 선풍적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당시에 『하멜 표류기』의 많은 유사 이본(異本)들이 발간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하멜 일행에 대한 우리조정의 아쉬운 대응
첫째, 네덜란드에서 대만을 거쳐 일본(나가사키)까지 원거리 해상무역을 하고 있던 하멜 일행은 당시 조선에서 갖지 못한 과학기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는데 아무런 성과도 걷우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멜 표류기』만 보아도 그들은 우리 것 보다 훨씬 진화된 조총을 가지고 있었고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하멜의 배는 총 30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음). 망원경과 함께 정밀한 천체관측술(天體觀測術; 그들은 배의 좌초지점을 북위 33도 32분으로 간단히 알아냈을 정도였음)과 측량기구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하는 해상강국이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를 감당할 선박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좌초로 파손되었지만 그런 기술로 건조된 그들의 선박도 조선 당국이 의사만 있었더라면 충분히 살펴 보고 상당한 기술정보를 알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멜 배의 잔해를 보는 족족 도끼로 조각을 내어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항해술만 보더라도 통일신라 후기 장보고(張保皐)가 한 때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 고려나 조선조에서의 우리 항해술은 내해에 국한 되어 있었다. 항해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당시의 첨단과학기술이 망라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조선 조정이나 지방관 누구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조정에서 의사만 있었더라면 하멜 일행을 통해 서구열강의 식민(植民)현황과 국제정세 등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을 주로 강제노역과 잡역에만 동원했던 우를 범했을 정도로 무심했다. 유교와 성리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던 조선은 중화(中華)인 중국에 대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스스로를 종속적 위치에 얽어 매어 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모든 외방(外邦)은 오랑캐이고 중국문명 이외의 모든 문영은 하찮은 오랑캐 문명으로 얕봤다. 심지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까지도 오랑캐로 보았을 정도다. 이런 대외 자세에서 유럽제국의 선진문명과 첨단 과학기술을 알아보고 배우려 했을 리 만무하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셋째, 둘째에서 지적한 내용이지만 조선 조정에는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전담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멜의 시대에도 이미 세계는 좁아져 있었고 각박하리만치 국익추구 우선의 냉정하고 살벌한 제국주의적 국제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대중국(對中國) 사대(事大)에만 매몰되어 있던 우리는 구미선진국들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데에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지구상 문명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뒤쳐졌고 훗날 우리가 일본에 병탄(倂呑)되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은 그 당시 우리 조정 누구도 예견 하지 못했다.
강진 하멜기념관
남도의 섬을 상징하는 타원형 건물과 표류선박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전시관이 설계 되었다. 복제 하멜표류기,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생활문화를 알아볼 수 있는 전시물 등 200여 점을 주제별로 전시해 놓았다. 하멜의 동상과 풍차건물도 기념관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곳 풍차는 여수기념관의 풍차보다 규모가 크다.
성동리 은행나무
수령 88년으로 추정되는 32m 높이 7.2m 둘레의 은행나무는 하멜의 표류보고서에서도 ‘그 은행나무 아래에서 향수에 젖곤 했다’고 썼다. 나무 밑에 고인돌5기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지금은 고인돌 형태가 아닌 거석 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하멜 일행 33명은 1656년부터 억류되어 약 7년 동안 병영성 내에서 그리고 성동마을에서 병영의 노역과 생계를 위한 마을 잡역 그리고 마을 잔치에서 여흥을 위한 공연(?)에 동원 되다가 대기근으로 조선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 자체가 곤궁에 빠지자 1663년 2월 여수, 순천, 남원 지역으로 분산해서 수용했다.
빗살무늬 돌담과 관계수로
원래는 ‘한골목’이라 명명되었을 만큼 상당히 긴 돌담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긴 골목 길이라 할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돌 담길 끝엔 수로가 있는데 물길 양쪽의 인공축대로 보아 관개용 인공수로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로 축조에 하멜 일행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근거 사료가 없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전라병영성은 조선 태종17년(1417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던 조선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고 한다. 병영성은 폐영되기 전해인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란)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탐방단이 갔을 때는 성은 복원공사 중이었고 성안 공간은 문화재 발굴 중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폐허를 방불할 정도다.
홍교와 석장승
배진천(背津川)의 홍교는 일명 ‘무지개다리’라고도 하는데 정승반열에 올라 금의환향한 유한계(劉漢啓)를 기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한다. 유한계는 이곳 양반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쇠락한 양반의 아들로서 주인(양반)의 딸과의 사랑으로 짝을 맺은 후 과거에 급제했고 정승반열에까지 오른 사람이라 한다.
이 홍교 옆에는 무인상 무신상 두 석장승이 있는데 본래 것은 도둑 맏고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라 한다. 재미있는 것은 툭 불거진 두 눈과 짧은 모가지 그리고 한 석장승의 두 손 모양은 영락없는 제주 돌하르방이라는 점이다. 강진 병영성 밖에 세워진 두 석장승의 모양이 제주 돌하르방을 닮은 연유가 궁금하다.
여수 하멜기념관과 하멜등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규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진의 하멜기념관 보다는 투입된 예산규모가 크게 달라 보인다. 여수와 한국을 사랑한다는 일본 여성이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고 여수 하멜기념관의 대략을 안내한 다음 정식 해설사의 해설로 연결해 주었다.
하멜 일행이 비밀리에 구입한 배를 탓 던 바로 그 자리라고 하는 자리에 세운 등대를 하멜등대라 명명했다. 하멜 기념관과 해멜등대 사이에는 역시 네덜란드 풍차를 세웠는데 풍차는 강진 것보다 작았고 구조도 어색했다.
진남관(鎭南舘)
진남관은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세운 전라좌수영의 한 건물이다. 조선 후기 기록에 의하면 전라좌수영 안에는 수영 건물 80여동과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곽조차 일부만 남고 진남관 만이 유일한 건축물로 남아 원래 모습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과거 전라좌수영 성내에는 무수한 매화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매화가 만개할 때는 매영성(梅營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진남관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임란 당시이던 1593년(선조 26년) 수군통제영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鎭海樓)가 불탄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진남관은 1959년 보물로 지정 되었다가 그 중요성과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국보 제304호로 지정 되었다.
<4행시 백일장>
이번 탐방에서도 시(詩) 짓기 백일장이 섰었다. 시제는 ‘새벽바다’였다, ‘새벽바다’를 두운(頭韻)으로 하는 4행시다. 아래의 4행시로 필자는 한형조 교수의 저서인 『금강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해설서 『허접한 꽃들의 축제』를 받았다.
새벽하늘 빨갛게 아침 해 떠 오를 때 수평선 가까이 고깃배 한 척
벽해 창창한 먼 바다 보노라니 불현듯 생각나는 하멜 이야기
바다 한 가운데서 몇 날 몇 밤 폭풍우에 휩쓸리다 겨우 살아남은 그와 그 일행
다행히도 죽임 면해 인고의 13년 견디다가 저 고깃배 떠 있는 쪽으로 탈주했다지
하멜표류기는 우리나라를 유럽에 알린 최초의 기록물이고 서양인의 눈으로 본 적나라한 우리 자신에 관한 공식문서다. 유럽인들이 조선이라는 동양의 끝에 있는 미지의 나라에 관해 접하게 된 최초의 정보였고 우리 입장에서는 외국인의 안목으로 우리자신을 보여준 역시 최초의 정보였다.
국내의 하멜 유적·유물이 우선은 외견상 초라하지만 우리 탐방단과 마찬가지로 두고두고 이들 유적·유물을 찾는 한국인들 모두가 좀더 개방된 사고방식을 갖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는 열린 자세로 지구촌에 중심세력으로 진출하는 학습기회가 되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의 하멜 연고기관을 포함하여 그리고 네덜란드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이들 기념관에 보다 많은 관련 정보가 쌓이고 축적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자라는 세대에 필요한 그리고 그들의 지적 욕구에 부응하는 교육의 장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BF1224A73B9F37D)
자료 더보기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6A3444F114C0D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