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한별의 못다 한 이야기
지난 5월 17일, 여성경제신문에 실린 ‘[기자수첩] 탈시설, 왜 장애인 주거선택권을 박탈하나’ 기사 캡처
얼마 전, 한 기사를 접했습니다(〈[기자수첩] 탈시설, 왜 장애인 주거선택권을 박탈하나〉, 김현우 기자, 여성경제신문, 2023년 5월 17일).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느라 직장도 그만두고 삶이 피폐해진 어머니의 사례로 시작하더군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시설이 꼭 필요한데 정부의 ‘무분별한’ 탈시설 정책 때문에 장애인과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에 처해 있다며,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에겐 장애인 전문가가 상주하는 거주시설이 ‘유일한 생존 대안’이므로 ‘장애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아이고 또…’싶다가, 읽을수록 조금은 화가 났다가 지금은 슬픈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장애인을 위해서도 시설은 필요하다’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누군가의 거취, 어쩌면 전 생에 걸친 삶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의견을 묻지 않고 시설에 가야 할 사람으로 쉽게 분리해 버린 ‘장애를 가진 자녀’, 바로 그분 때문에요.
기사에는 잘못된 주장이나 불분명한 인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대표적으로 기사 초반에 지역사회에서 장애인 학대 사건이 증가 추세라며 장애인에게 지역사회가 위험하다는 듯한 통계 인용이 있는데, 그렇게 치면 가정폭력이나 성범죄도 매해 증가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는 가정을 해체하고 (성범죄의 주된 피해자인)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격리해야 하나요?) 이걸 다 바로잡자니 분량도 분량이고, 이미 수많은 기사와 연구가 있기 때문에 굳이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기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시설에서 지역사회 기반으로의 전환에 대한 전문가 보고서(Report of the Ad Hoc Expert Group on the Transition from Institutional to Community-based Care)〉에 대한 왜곡은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보고서 내용 중 “적절한 대안 없는 시설 폐쇄”라는 표현을 인용하며 유럽도 탈시설에 비판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는 보고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왜곡을 위해 일부러 일부만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전자라면 태만이고, 후자라면 악의입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그의 옆에 “UN 탈시설가이드라인 준수하라”라고 적힌 피켓이 있다. 사진 하민지
- 당신이 인용한 보고서의 진짜 내용
보고서 작성을 의뢰한 블라디미르 슈피들라 당시 유럽고용‧사회‧평등위원회(Commission for Employment, Social Affairs and Equal Opportunities) 위원은 보고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시설 형태 돌봄 기관들은 사회가 취약한 사람들을 지원 없이 남겨두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음식, 주거, 의복,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회적 돌봄의 증거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21세기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발전된 유럽 사회에서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모델입니까? (…) 모든 사람은(Everyone) 자기의 완전한 잠재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보고서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고 다른 회원국들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과 과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이 보고서에서 “대안 없는 시설 폐쇄”는 ‘대안이 없다면 시설이 존재해야 한다’가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대안(장애인 지원 서비스)을 풍부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지요.
보고서는 시설을 물리적 요건이 아닌 ‘시설적 문화(Institutional Culture)’에 기반해 정의합니다. 여기에는 ①비인간화(depersonalisation) ②일상의 경직성 ③집단 관리(block treatment) ④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등이 있습니다. 보고서는 시설의 물리적 요건이 지역사회보다 열악하기 때문에 당연히 장애인 당사자의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면서도, 물리적 요건이 나아진다고 해서 시설에서의 삶의 질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시설적 문화 때문이지요. “아무리 많은 돈이 시설에 쓰인들, 시설 내 돌봄의 성격으로 인해 사용자에게 적절한 삶의 질을 제공하기는 극도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11쪽)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설 거주인이 사회로부터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될수록 이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강화된다는 점 역시 보고서는 우려합니다. “저런 사람(중증장애인, 노인, 부모와 떨어진 아동 등)은 시설에서 살아야지” 같은 낙인이 강화될수록, 지역사회 내 대안(시설 서비스에 대한 대안)은 개발되지 못하고, 결국 이들은 시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보고서는 이러한 문제는 “시설적 돌봄이 가진 본질적 문제이자, 시설에 대한 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시설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이 곧 시설이 가진 본질적 문제의 산물이자, 시설이 사라져야 한다는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보고서는 이미 탈시설, 즉, 모든 사람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수많은 연구로 강력히 지지받고 있다고 전합니다. 73개에 달하는 탈시설 관련 연구를 종합한 결과, 대형 시설, 소규모 시설, 지역사회 중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단연 가장 좋은 삶의 형태임이 명확하다’는 것이 이미 1990년대에 입증되었습니다(Emerson and Hatton, 1994). 이미 수십 년도 전에 ‘최선의 선택일 수 없음’이 결론 내려진 시설에서의 삶을, 우리는 왜 동료 시민에게 제시해야 합니까?
‘탈시설 장애인’ 이수미 권익옹호활동가가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 ‘지역사회 대안 부족’은 시설 유지의 근거가 아닌 관성의 결과물
그럼 이제 기사에 인용된 부분으로 돌아가 봅시다.
“탈시설 법안을 주장하는 측에선 복지사회라는 유럽 각국의 사례를 금과옥조처럼 들이민다. 그러나 유럽연합도 2010년 ‘시설에서 지역사회 기반으로의 전환에 대한 전문가 보고서'를 발표해 적절한 대안 없는 시설 폐쇄를 경고하고 있다.”
짧지만, 짧은 만큼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인용된 부분은 보고서 “IV.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전환 과정에서의 주요 과제” 파트에 담긴 내용 중 일부입니다. 즉, 탈시설 정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유의할 점을 담고 있습니다. 애초에 목표 자체가 탈시설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급적 사회 혼란을 줄이며 효과적으로 ‘모두를 위한 탈시설’을 완료할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입니다.
이 파트에서 제시되는 주요 과제는 ①시설에 대한 과도한 투자 ②동일 서비스 유지의 위험 ③너무 ‘시설적인’ 대안 마련 ④적절한 대안 없는 시설 폐쇄 등 총 네 가지입니다. 보고서는 특히 재난 상황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시설의 물리적 요건 개선에 많은 투자가 발생하는데, 이미 투자된 많은 돈이 시설 폐쇄를 주저하게(reluctant) 되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며 “이러한 투자는 사회 체계를 더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합니다.
또 한 가지 주요 과제로 제시된 것은 새로운 시스템, 즉 지역사회 자립생활 체계 구축이 반드시 시설 폐쇄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지역사회 구축이 진행되면서도 동시에 시설이 계속 유지된다면, 복합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최중증장애인)일수록 마지막까지 시설에 남아있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시설 유지 주장에 더욱 힘을 싣습니다. ‘시설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요.
보고서는 또한 ‘쉬운 대상 먼저 탈시설(“do the easy thing first)’하는 방식은 사실상 시설 내에서 직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오던 이들이 시설에서 빠져나가 남은 이들의 삶의 질이 하락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최중증장애인을 초기 단계에서부터 탈시설 정책에 포함하는 것이 성공적인 탈시설 정책 완성의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시설 폐쇄가 결정되고 자립생활 정책을 명확히 구축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에 대한 탈시설이 정부 정책 방향으로 결정된다면 최중증장애인이라고 해서 먼저 탈시설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 내 대안들이 너무 ‘시설적인’, 즉, 앞서 살펴본 시설적 문화가 내재된 형태로 구성되는 것도 유의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내에 적절한 대안 없이 시설이 폐쇄되는 것은 당연히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탈시설을 촉구하는 이들이 더욱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활동지원 24시간, 접근가능한 주거, 안정적 소득을 위한 일자리, 유의미한 사회참여 등 지역사회 내의 다양하고 충분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안이 부족한 것은 시설 유지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시설을 유지하려는 정부와 민간의 관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기존 사회의 인식체계에 굴복하고 맙니다. 당연시 여겨왔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내 안의 인식체계를 바꾸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머무르는 편한 방식만 택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기존 사회 인식에 문제를 느끼고 비판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다면, 인류사에는 아마 기자라는 직업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되물어야 합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장애만을 이유로 이들을 집단생활시설로 분리한 채 다른 시민들이 누리는 일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진정 최선입니까?
□ 참고문헌
Emerson, E., & Hatton, C. (1994). Moving out: The impact of relocation from hospital to community on the quality of life of people with learning disabilities.
European Commission. (2009). Report of the Ad Hoc Expert Group on the Transition from Institutional to Community-based 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