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목오일장
맛집=황해해물탕{해물볶음국수), 약목식육식당, 즉석도너츠(장날)
약목시장은 1914년에 개설된 시장으로, 해방 이후 1965년 종합 시장형 공설 시장으로 새롭게 개설되었다. 종합 시장으로 각종 생활용품, 농산물을 취급하고 있으며 쇠고기와 참외로 유명하다. 약목면은 인근에 금오산과 비룡산이 위치하고 있어 등산객들이 각종 특산물과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약목시장을 찾고 있다. 약목장의 경우 매달 3, 8일에 열리는 장으로 이른 아침부터 인근 지역에서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가지고 나와 판매하고 있다. 또한 외지 상인들이 가져온 의류, 생활용품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칠곡은 예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많은 산물이 칠곡 땅을 거쳐 육로로는 추풍령, 조령, 죽령을 지날 수 있었고, 수로로는 상주, 안동과 일본까지 무역이 빈번하였던 곳이다. 이렇게 교통의 중심지이다 보니 상업이 발달하게 되고 시장 형성 역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832년(고종 19)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吧誌)』에 따르면 우암장(동명장), 매원장, 상지장, 남창장 등이 존재하였다.
[변천] 조선 시대 우암장은 1920년대 동명장으로 변하여 현재의 동명 시장 기초가 되었다. 매원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왜관에 들어오면서 상권이 왜관으로 옮겨 가 오늘날 왜관 시장의 기틀을 가져오게 되었다.
칠곡군의 시장은 해방 이후인 195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칠곡을 대표하는 왜관 시장은 1950년대 우시장의 개장과 더불어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시장 개발 촉진법에 따라 시장 건물도 현대식으로 바뀌어 상설 시장 형태로 변화였다.
이후 칠곡 이외의 면소재지에도 근대 시장인 신동 시장, 동명 시장, 북삼 시장, 약목 시장(1965)이 형성되어 주민과 상인 간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는 「시장법」, 「부정 경쟁 방지법」, 「상업 시행령」 등이 각각 제정·공포되어 상행위 질서가 형성되어 갔다.
한편 1970년대 본격적인 근대화의 물결은 전통적인 시장의 쇠퇴를 가져왔다. 경북 고속 도로 개통과 더불어 유통 구조의 근대화가 꾸준히 추진되면서 슈퍼마켓이나 소매상점들이 시장을 대신하여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의 공급 기능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근대화는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정기 시장들의 쇠퇴를 가져왔고, 칠곡군의 경우 신동 시장과 북삼 시장이 사라지게 되었다.
[분포 현황] 2014년 6월 현재 칠곡군의 시장은 상설 시장과 정기 시장을 겸하고 있는 왜관 시장과 정기 시장인 약목 시장과 동명 시장 등 총 3개의 시장이 있다. 이들 시장의 총 매장 면적은 3,125㎡, 대지 면적은 1만 2365㎡이다. 상설 시장인 왜관 시장은 약목 시장이나 동명 시장에 비해 규모가 크고 이용 고객이 많다. 또 왜관 시장 번영회가 조직되어 칠곡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설 시장인 동시에 오일장[1일, 6일장]인 왜관 시장의 면적은 4,367㎡이고 점포수는 120여 개이다. 2009년에는 비가림 시설과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하였다. 1921년에 개설된 동명 시장은 4일, 9일장으로 열리고 있다.
1914년 개설된 약목 시장은 3일, 8일장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세 시장 모두 시설이 노후화되고 소방 및 통신 시설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시장 활성화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한편 약목 시장과 동명 시장은 인근에 신유 장군 유적지(申瀏將軍遺蹟地) 등 문화 유적과 도립 공원인 팔공산이 위치하여 많은 관광객이 각종 지역 특산물과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방문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북 칠곡군 약목면(면장 이종구)은 낙동강을 경계로 왜관읍과 석적읍을 마주하고 대구로부터 서북 39.1km,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다. 대구와 구미 사이에 위치한 농경지역이며 두 도시로의 접근성도 좋다.
서부는 구릉성 산지, 동부는 낙동강변의 평야지로 서고동저형(西高東低型)의 지형이다. 금오산에서 발원하는 경호천이 두만천(川)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부근에는 충적평야(沖積平野)를 형성하고 있다. 주곡 외에 한우와 돼지 사육으로 유명하며, 경호천(川) 주변 무림 동안들에는 과채류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특히 동안리는 꿀벌이 수정하는 벌꿀 참외로 유명하다.
약목면은 신라 시대 대목현(大木縣)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인동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칠곡군 약목면이 되었다. 1943년 기산면이 동부출장소로 개편, 1986년 기산면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명실공히 정비된 약목면으로 거듭났다.
약목은 6·25전쟁 당시 융단폭격으로 많은 희생자의 아픔을 안은 낙동강 왜관철교를 접하고 있는 면이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동편이 북삼읍, 서편이 약목면이다.
약목면은 2000년대 중반에 구미공단 번창으로 생산업체 증가와 젊은층 근로자가 유입함으로써 인구가 1만8천여 명으로 증가하여 청년, 문화, 소비도시로 불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녀 학군 문제로 구미, 석적읍 등으로 전출이 늘어 현재 인구는 1만500명 선이다.
◆충절의 고장 약목의 유적지
약목은 유적지가 많은 고장이다. 나선정벌의 영웅 신유장군유적지(경상북도기념물 제38호)가 있다. 1685년(효종 9년)에 2차 나선정벌군을 이끌고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공적을 기리는 남계리 경성 누에 현판 친필과 신유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다. 약목면은 신유장군의 태생지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후삼국 통일전쟁기에는 활과 기백(氣魄)이 출중한 공산 유씨(兪氏) 호족들이 약목면 주민들과 함께, 공산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왕건을 도와 국가공동체 통합에 이바지했다.
배포산성 곡성리에는 신라시대 고분들이 많다. 거의 도굴되어 형체만 겨우 남아 있지만, 여기저기서 뚜렷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곡성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한시대 군미국 시절 무덤이 석적읍과 인동까지 걸쳐 발견되기도 한다.
◆약목면 특산물은 벌꿀참외
참외는 군(郡) 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며 칠곡군 참외발전회장도 약목에서 재배하고 있다. 낙동강 유역의 토질과 일조권이 과채류 재배에 적합하여 참외단지 하우스가 가장 많다. 언덕에서 하우스단지를 내려다보면 탁 트인 전경이 마치 바다 밀물에 잔잔한 파도가 물결치는 듯하다. 곡성리 배포 산성에서는 도굴되고 훼손된 고분 흔적들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한민족백과사전=본래 신라의 대목현(大木縣, 또는 七村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계자현(谿子縣)으로 고쳐 강주(康州) 소관의 성산군(星山郡: 지금의 星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태조 23) 약목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星州)의 임내로 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2) 인동현(仁同縣)에 감무를 둘 때 그 속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산면(岐山面)과 북삼면(北三面)의 2개 동을 합쳐 약목면이라 고치고 칠곡군에 병합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동쪽으로 낙동강에 접하고 있어 칠진(漆津)을 통하여 인동과 연결되었고, 취락은 북쪽의 금오산(金烏山)에서 시작된 약목천이 만드는 하천평야에 자리잡았다. 약목창(若木倉)이 있었고, 남쪽의 불대산(佛臺山) 봉수는 인동의 건대산(件代山) 봉수와 연결되었다. 유적으로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칠곡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제도.
[개설] 신라시대에는 칠촌(七村) 혹은 대목현(大木縣)으로, 남북국시대에는 757년(신라 경덕왕 16) 계자현(谿子縣)으로, 고려시대에는 약목현(若木縣)으로 바뀌면서 존재하였으나,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인동현(仁同縣)에 소속되었다.
1914년에는 칠곡군으로 편입되어 약목면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에서는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군위(軍威)에 이르기 57리, 서쪽으로 상주(尙州) 임내(任內)인 공성(功城)에 이르기 29리, 남쪽으로 인동(仁同) 임내인 약목현(若木縣)에 이르기 35리, 북쪽으로 상주 임내인 장천 부곡(長川部曲)에 이르기 25리이다.···금오산 석성(金烏山石城)은 부(府) 남쪽 45리 거리에 있다. 높고 험한데,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 반이나 된다. 둘레가 1천 4백 40보인데, 안에 작은 못이 3, 시내가 1, 샘 4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는데, 개령(開寧)·약목(若木) 군창의 물건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되어 있다.
[변천] 약목현은 940년( 태조 23) 계자현(谿子縣)에서 약목현(若木縣)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생겨났다. 1018년(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현재의 성주]의 임내로 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인동현(仁同縣)에 감무(監務)를 둘 때 그 속현이 되었다. 1605년(선조 38)에는 인동현이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로 승격되면서, 약목현이 경산부에서 인동도호부의 속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칙령(勅令) 제98호(5월 26일 공포)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칠곡도호부를 칠곡군으로, 인동도호부는 인동군으로 고쳐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칠곡군은 팔거(八筥)·퇴천(退川)·문주(文朱)·노곡(盧谷)·파미(巴彌)·동북(東北)·서북(西北)·하북(下北)·이언(伊彦)·상지(上枝)·도촌(道村) 등의 11개 면을 관장하였다. 인동군은 읍내(邑內)·동면(東面)·북면(北面)·문량(文良)·장곡(長谷)·석적(石赤)·기산(枝山)·약목(若木)·북삼(北三) 등의 9개 면을 관장하였고, 1911년 인동군청이 인동 읍내에서 약목으로 옮겼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산면(岐山面)과 북삼면(北三面)의 2개동을 합쳐 약목면이라 고치고 칠곡군에 병합시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