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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龍山)이란 지명(地名)
‘용산’은 지금은 하나의 서울의 구(區) 이름으로 자리를 잡아
광역지명으로 정착돼 있지만 옛날에는 ‘절두산, ’‘남산’,
‘계룡산’등과 같은 하나의 산 이름이었다.
조선의 이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데는 이 곳이 위치, 지리, 교통, 방어 등
여러 면에서 그 입지적 조건이 그 어느 곳 보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수적인 면을 매우 좋게 보았다.
뒤로 백악(白岳)과 삼각산(三角山)이 든든히 울타리를 쳐 주고 있고
주산(主山)인 북악에서 뻗어 나온 맥이 양쪽으로 감싸고 흘러나온 데다가
앞에는 안산(案山) 구실을 해주는 남산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는 땅으로
어느 누가 보아도 길지(吉地) 중의 길지 임에 틀림이 없는 곳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백악은 지금은 대개 백악산(白岳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흘러나온 서쪽의 맥이 우백호(右白虎)이고, 동쪽의 맥이 좌청룡(左靑龍)이다.
좌청룡은 동쪽의 성북동 방면으로 해서 낙산(洛山)까지 길게 뻗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뻗어있다.
북악산 옆 인왕산의 산세를 무악재를 통해 이어받은 길마재(安山)는 그 줄기를
계속 남쪽으로 뻗쳐 ‘둥그재’, ‘애오개’등을 만들어 놓고, 한강 앞으로 다가와
용머리 모양의 등성이를 솟군 후, 강물앞에서 그 기(氣)를 다한다.
이 맥이 바로 한양 고을의 우백호가 된다.
이러한 우백호의 끝부분이 꼭 용의 머리를 닮았는데, 마포강 앞에 서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물을 만나 그것을 마시려고 푹 숙인 모습이다.
지금의 ‘용산(龍山)’이란 이름은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의 산이라해서 붙은 것으로 보인다.
용산은 그 앞으로 한강이 휘어 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다.
시인 묵객들의 좋은 놀이터였다는 이 곳엔 고려시대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고려 명종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 1152년~1220년)가 이곳의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감상하여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꼬리 같고,
세봉우리 산 아득히서서
자라머리에 탔네.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찾아
백구(白鷗)을 벗하리
이 시에 붙인 서문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의 이곳 용산의 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봉우리들이 굽이굽이 서려서 그 형상이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턱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고, 강 건너로 먼 산이 있어
바라보노라면 묏산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 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공화도(供火島)
지금의 여의도와 밤섬)이 보이고 강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날부터 한양 일대에서 잘 알려져 왔다.
용산은 이처럼 한강가에 솟은 하나의 산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용산하면
하나의 지역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도 용산이라고 불렸던 산 근처도 아니고
거리상으로 크게 떨어진, 용산역 앞 한강로 일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강로 일대를 정비하고 자기들의 주거지로 삼고
근처에 기차 정거장과 다리(한강대교)를 만들어 놓고, ‘새용산’이란 뜻의
신용산(新龍山)이라 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용산’은 지금의 원효로4가와 마포로 사아에 솟은 둥그스럼한 산봉우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산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용산이란 땅이름은 대개 그 산모양이 용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용의 옛말은 미르이다. 그러나, 용과 관련이 있는 산이라 해도 미르가 들어간
순우리말 이름의 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용산’이란 산은 지금의 용산성당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이산은 지금은 아파트와 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낮아지고 건물들의 숨에 묻혀
어느 방향에서나 잘 모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한강가로 불쑥 나가 있는
이산의 모습을 근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옛 한양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산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 옆 인왕산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줄기를 이어 영화봉, 효창원,
용마루를 거쳐 한강쪽으로 뻗어온 산줄기는 한양 고을의 우백호(右白虎)이다.
한강가까지 물을 먹으러 달려온 듯이 보이는 이 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아
그 끝쪽 봉우리가 용산(龍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즉, 휘어 도는 강가로 머리를 불쑥 내밀어 마치 용이 물을 찾아 나왔다가
풍족한 물을 만나 입 부분을 물에 푹 잠근 모습이라고 용산이라 하게 된 것이다.
경치가 좋았던 용산이란 산은 이제 우성아파트, 현대아파트, 삼성아파트 등
아파트 군에 묻혀 그 옛날의 정취를 찾아 볼 수는 없다.
다만, 이 지역이 원래의 용산이었음을 용산성당과 그 아래 용산신학교 자리가
용산의 원터 였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용산신학교터는 원효로 4가 1번지에 있는데, 이곳에 1892년에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뒤 1902년에는 이곳에 원효로 성당이 자리를 잡았다.
이 두 건물은 모두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가 설계를 맡아 지은 것으로, 용산방(龍山坊)
와서현(瓦署縣)에서 벽돌을 구워 청국인 인부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와서현은 지금의 용산우체국 뒤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용산식학교는 한국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 건물로, 아치형과 더불어
간결하면서도 장중하게 치장된 내부구조가 특이하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6.25 전쟁에 그 일부가 부숴졌던 것을 수리한 것으로 원형은 잘 보존된 상태이다.
물 가운데로 머리를 쑥 내맨 그 산마루에서 바라다 보는 물가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랴,
예부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중 여덟 가지를 꼽아 용산팔경(龍山八景)이라 했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용산8경에서 ‘사촌(沙村)’은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서
한강 인도교에서 이르는 벌판을 말한다.
그 일부인 한강가 일대를 새남터라 했는데, 이곳에서 천주교사제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지금의 서부이촌동이 된 곳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노른자위가 됐지만, 옛날에는 온통 모래사장으로, 19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한강맨숀이 들어선 자리 근처가 그저 허허벌판이었고, 5~60채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 근처에 새남터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만천(蔓川)은 ‘만초천(蔓草川)’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은
‘덩굴내’의 한자식 표기이다.
일제 때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여기에
용산전자상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
경치가 아름다웠던 용산일대는 예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하여금 한 순간의 시인이 되게 했다.
조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하일용산잡시(夏日龍山雜詩)’
노래에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 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새남터 푸른 수림에 돛단배 다 지났구나.
동작나루에 해는 저물고,
노들 서쪽 언덕엔 풀빛이 그윽한데,
밤섬 너머의 잔잔한 물결이 버들 그늘에 찰랑인다.
‘목동 젓대 한 가락이 서쪽에서 들리는데 / 밤섬이라 물안개가 버들가지에 이어져 /
보드라운 털 짐승 무리 지어 풀 뜯는데 / 어인 일로 조선땅에 양이 없다 일렀던고 /
고깃배 저물녘에 버들 가에 매였다가 / 한강 어귀 밀물 들자 행주로 건너가네 /
이 노인 그물 치는 그곳을 구경하려면 / 황혼 무렵 모름지기 읍청루에 올라야지’
조선시대엔 이 용산 산허리(청암동)에 독서당(讀書堂)을 두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했다.
고려 충숙왕도 찾아와 경치 즐겨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용산은 옛날 고려 때에도 주목해 왔던 곳이다.
강물이 비탈 아래로 잔잔히 휘어 돌고, 그 가운데에 너벌섬(여의도)과 밤섬이 떠 있으며
물 건너 남쪽 멀리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솟아 있어 한 폭의 그림 그대로였다.
고려 숙종 때(1096∼1105) 왕명을 받아 남경(南京)의 새 도읍터를 찾아나섰던
대신 최사추(崔思諏) 등이 서울 부근의 산수 지리를 답사할 때 맨먼저 찾았던 곳도 여기였다.
이러한 용산의 아름다움은 고려 왕실에서도 알려져 고려 25대 충숙왕은 그 12년(1325)
8월에 왕비 조국공주(曹國公主)와 함께 개경에서 한양으로 행차, 푸른 강물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곳 용산의 산마루에 올라 작은 전막(氈幕)을 지어 행궁(行宮)으로 삼고
3개월간 정무를 살피기도 했다.
여기서 충숙왕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 생긴다.
그 해 10월에 원자(元子) 아기를 낳는 경사를 맞는 것이다.
한양에 행차한 지 불과 두 달, 행궁을 이 곳에 정한 지 스무 날만에 얻은 큰 축복이고 경사였다.
이 아기를 '용산원자(龍山元子)'라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아기를 낳은 산모인 왕비가 산후 조리가 좋지 않아서였던지
그 해 10월 20일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만다.
이 때의 왕비 나이는 불과 18세. 이 갑작스러운 일은 왕자를 낳은 기쁨 속에 차 있던
충숙왕을 일시에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충숙왕과 공주는 10리나 되는 긴 호수를 이루고 있던
이 곳 용산강에서 만발한 연꽃도 구경했다고 한다.
이러한 좋은 곳에 행궁을 마련했으나, 왕자를 얻고 왕비를 잃는 희비를 맛본
충숙왕은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지 이 아름다운 용산, 그러나, 왕비를 잃은 슬픔을
안겨 준 한 많은 이 용산을 떠나 11월 4일에 다시 개경으로 훌쩍 돌아가고 만다.
그 달 9일, 왕비의 시신도 운구되었다.
왕비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녀로서 충숙왕 11년(1324)에 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결혼한 여자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속국이나 거의 다름없는 상황이어서 고려의 왕은
원나라 왕녀와 결혼해야 하는 사정에 처해 있었다.
공주의 죽음은 낭설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용산으로 왕을 오게 한 것은
조륜과 왕삼석 등이었는데, 이들이 왕을 유인해서 왕을 용산 한강가 습한 곳에
머물게 하곤, 공주로 하여금 알맞지 않은 환경 속에 아이를 해산케 해서
병에 걸려도 구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외진 용산의 작은 전막에서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으리라.
용산원자는 그나마 그 뒤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7세의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고려 말에서 조선 말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명사들은
용산 산비탈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자주 올라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며, 좋은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덕망 있는 대신인 남공철(南公轍)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 곳 강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고, 미리 귀거휴양(歸去休養)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이 퇴직을 허락하지 않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로 옮겼다.
‘용산의 술집 장막을 꿈에도 잊을 수 없어
강가에 돌아와 살고자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임금의 은택 지극하여 직책을 더디 풀어 주시니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꽃을 심었나 물어 본다.
호수 밖의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책부터 먼저 실어 촌가로 내어 보낸다.
이 해 다시 저물고, 흰 머리털만 늘어 가니,
뜰 앞의 매화나무가 혼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임금도 이해했는지 얼마 후 그를 영의정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라는, 조금은 가벼운 직책으로 옮겨 준다.
그 후로 남정승은 용산의 정자로 나가 휴양할 수 있었고, 자주 이 곳을 찾아와 주는
원로 대신들과 함께 심원정(心遠亭)에 올라 아름다운 용산 풍경을 즐겼다.
용산강 언덕에선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주 출신의 여인 김금원은 타고난 재질로
불과 14세에 국내 명승지들을 찾아 많은 명시를 지었다.
한양에 들어와서는 풍류 문인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경 좋은 용산 언덕에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실인 금원과 함께 나와 거처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읊었다.
여기에 다시 금원의 친구인 여류 시인 김운초, 김경선, 박죽서, 김경춘 등이
자주 금원을 찾아 삼호정에 올라가서 강변 풍경을 명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미녀들의 시 모임. 용산의 멋진 그림은 그들이 만들어 냈다.
‘강 언덕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른 물결 노란 석양을 흘려 낸다.’
‘서호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최고라오.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즐긴다오.’
금원의 이 삼호정 시들을 보면, 용산강의 옛 정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용산 기슭에는 심원정과 삼원정 외에 파청루와 추흥정도 있었는데, 특히, 심원정은
임진왜란 때 화전 조약을 맺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 심원정 앞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白松)이 몇 그루 남아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로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지금의 마포구 염리동까지가 용산 영역에 속했다.
용산은 고려 말 이전에는 과주(果州)에 딸렸었다. ‘과주’는 지금의 ‘과천’에 해당한다.
이 용산 지역은 고려 22대 충렬왕 12년에 ‘부원군(富原郡)’이 되고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의 구역이 되었다가 중기 이후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으로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인 1911년에 용산 일대는 경성부(서울)
‘용산면(龍山面)’이다가 그 3년 후에 이를 고양군으로 돌렸고
1936년에 경성부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다시 편입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2월 13일 경성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1943년에 경성부
용산출장소로 개칭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용산구역소(龍山區役所)로
또 개칭함으로써 처음으로 ‘구(區)’자가 붙은 이름을 달게 되었다.
광복 후에 정식으로 ‘용산구’가 되긴 하였으나, ‘용산’이란 산의 북쪽 일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영역이 많이 바뀌게 됐다.
한때 용산면 관할이었던 도화동과 마포동, 공덕동, 염리동, 토정동까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용산은 지금과 같은 지역을 갖게 된 것이다.
용산 일대는 이태조의 한양 도읍 때부터 수도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가 되어 왔다.
용산의 산기슭 한강물이 휘어도는 곳, 지금의 마포대교 일대의 강 주위를
'용산강(龍山江)' 또는 '용호(龍湖)'라고 했는데, 왕조 초에 이 강에
수로운전소가 설치되고, 수참전운사(水站轉運使)라는 벼슬을 두어
수로 운송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 강원, 충청, 경기의 4도의 조세곡 수운선들이 모이는 등
수운의 중심지로 변해 갔다. 수군을 주둔시키고 군자감(軍資監)을 설치해서
물자의 저장, 출납을 맡아 보게도 했다.
산 아래 한강물이 휘어도는 지금의 산천동 강가에는
‘벼랑창’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땅이름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의 급료를 지급했던 창고인 별영창(別營倉)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용산 일대가 군대 주둔지였음은 그 유적지들로 나타난다.
지금의 원효로3가 원효전신전화국 옆은 군자감에 딸린 강감(江監)터로
옛날에 많은 군수 저장미를 쌓아 두었던 곳이다.
그리고, 원효로4가 성심여고 뒤쪽 언덕 일대는 선혜청(宣惠廳) 관하 구휼(救恤)
양곡을 저장하는 별고(別庫)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 별고를 ‘선창(宣倉)’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이 곳 ‘신창동(新倉洞)’이란
동이름은 이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사(備邊司) 군인들이 이용하던 우물인 '비변사우물'(다른 이름으로는 '응달우물')이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구립 용산주차장 건물 아래층에 그 자리만을 남겨 두었다.
그 앞으로 지나는 길은 지금 '비변사우물길'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용산’은 이제 단순히 산(山)이 아닌 광역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곳 한강가의 산이 용(龍)을 닮아 나온 것이다.
다행히 오래 된 역사를 가진 '용산성당(龍山聖堂)'이 산마루에서 아파트들 사이에서나마
우뚝 서 있어 그 위치를 잘 밝혀 주고 있다.
옛날, 용산의 경치를 즐기며 문인들이 시회를 열었던 삼호정은 지금의 용산성당의 묘지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함벽정은 지금의 성심여고 뒤쪽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 이 근처에 '삼호정길, '함벽정길' 등이 지나고 있다.
역사와 함께 많은 것을 간직해 온 용산.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경치로 널리 알려졌던 용산.
이렇던 용산도 변화의 물결에 밀려 차츰 그 모습이 하나하나 허물어져 갔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용산 산머리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풍경들의 사라짐이다.
용산팔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에 오르면 주위의 모든 자연 모습이 그림 그 자체였다.
휘어도는 한강 물줄기, 거기에 떠 있는 밤섬과 여의도, 북쪽으로 보이는 인왕산과 안산,
그 뒤를 든든히 받쳐 주고 있는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 남쪽으로 보이는 새남터, 그 뒤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과 청계산, …….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용산의 제일 명소였다고 할 수 있는 독서당은 딴 곳으로 옮겨갔고, 그 터엔
조선 말 세관감시소(稅關監視所)가 세워졌다가 그 후엔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으로
일제 때엔 총독부의 정무총감(政務總監) 별장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그 근처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한강에는 밤섬이 없어져 버렸고, 여의도마저 마포 쪽에서 떨어져 나가
영등포 쪽으로 붙어 버린 데다 아파트나 고층 빌딩들이 묵직하게 얹혀 있어
그 옛날의 모습을 전혀 상상치 못하게 한다.
그런 데다가 강가로는 강변 도로가 강을 막아 물가의 경치들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산의 남북으로 아파트나 다른 건물들이 들어차서 이젠 용산 산마루에서 볼 수 있었던
그 멋진 경치들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다.
산 아래 산천동 저지대까지 물이 들어 호수와 같았던 좋은 풍경도 한강 연안에
둑이 생기고 그 안쪽으로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면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정자나 별장들이 있었던 무성한 나무숲의 산비탈까지에도 작은 살림집들이
닥지닥지 들어서 있다가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되어 용산의 본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산허리가 뭉개져 버리고, 건물 숲에 가려져 이젠 마포나 원효로 등
어느 방향에서나 용산의 산머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산등성이에 있는 유서 깊은 용산성당의 종탑(鐘塔)도 산 아래 어느 쪽에서도 잘 보여
전에는 용산 산마루의 위치를 멀리서나마 잘 짐작하게 해 주었는데, 이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파트(삼성리버힐, 삼성래미안 등) 숲에 묻혀
그 모습을 멀리서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용머리를 물에 담근 채 계속 쉬고만 있던 그 말없는 용.
그러나, 철저하게 등을 할퀴어 버린 용. 이젠 그 아픈 상처를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화풀이라도 하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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