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天魔龍鳳 血文
황궁(皇宮).
이 대륙의 오직 한 사람 절대자(絶代者)인 천자(天子)가 있는 이곳은 광활하고 웅장하다.
또한 황궁의 분위기는 엄숙한 위엄과 무거운 중압감이 감돌고 있으며 모든 것이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넓고 광활한 황궁. 그러나 황궁보다 더 넓고 광활한 대륙의 주인인 황제라는 운명을 지닌 한 사람은 황궁의 고요함만큼이나 절대자의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인간이기에 어찌 고뇌와 갈등이 없겠는가만, 황제라는 위치는 때때로 인간적인 갈등마저 숨겨야 하는 고통을 주기도 하는 법이었다.
......
밤(夜). 어디선가 피를 토하는 듯 밤새의 울부짖음이 밤의 장막을 갈가리 찢어놓는 시간.
황궁의 심처에 위치한 다락원(多樂院)이란 이름의 전각 안에서는 조용히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락원은 유일하게 황제가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졌고, 불빛이 흐르고 있음은 이 깊은 밤에 황제가 다락원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기도 했다.
황제를 모시는 제독태감이 수십 명의 환관을 거느리고 밤을 잊은 채 다락원의 앞뜰을 지키는 이 시간, 다락원 안에서는 조용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시절은 겨울도 깊은 때. 밤바람은 뼈를 에이고 살을 발라낼 듯 차가왔으나 노구의 제독태감은 황제를 기다리며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있었다.
황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누구일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현명하고 덕이 많다는 황제 홍치제로 하여금 밤이 늦도록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사람은......
한 쌍의 용봉황촉(龍鳳黃燭)이 쏟아내는 불빛 아래, 반쯤 음영진 얼굴로 굳어 있는 젊은 황제 홍치제는 눈 앞의 노인을 암울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치제와 대좌해 있는 노인은 바로 한송, 한선생이라 불리는 그였다. 한송은 이제껏 심각한 대화를 나눈 듯 황제 못지 않게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폐하, 지금 중원은 엄청난 혈전의 연속으로 피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상황입니다. 천마교의 악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막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폐하 뿐이옵니다."
홍치제는 길게 한숨을 흘려내었다.
"......"
"폐하, 백만금군을 동원하여 무림의 분쟁을 종식시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의 운명은 악(惡)으로 바뀌고 맙니다."
홍치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하오, 한사부. 짐은 결코 천마교를 막을 수 없소."
"!"
홍치제는 어두운 얼굴로 한선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앞에는 간단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으나, 음식은 모두 식은 지 오래였고, 채워진 술잔 역시 한 잔도 비워지지 않고 있었다.
"천마교주 당소완과의 약속 때문에 천마교는 막을 수 없소. 한사부도 아시겠지만...... 그녀는 한때 황후가 될 뻔도 한 여인이었소.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황후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한 가지 원하는 일을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소."
"음!"
한선생은 조용히 턱을 쓸어내렸다.
"그 조건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폐하."
"한사부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바로 천마교를 황제의 칙령을 내려 인가해 주는 것이오. 또한 천마교가 어떠한 행동을 취해도 황궁에서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이오."
"폐, 폐하 그건......"
"그것 뿐만 아니오. 그녀는 짐이 직접 내린 신패를 지니고 있기에 지방관리들은 오히려 그녀를 도와 주어야 하는 입장이오."
한선생은 아찔한 느낌이었다. 황궁에서 천마교를 막기는 커녕 오히려 황제의 힘을 등에 업고 지방관리마저 쥐고 흔들 수 있는 천마교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홍치제는 연신 한숨을 흘려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소완의 술책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오. 이미 천마교에 힘을 쓰기에는 늦어 버렸소. 더욱이 그녀가 없었다면 짐은 이미 만귀비에게 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텐데...... 짐이 어떻게 그녀를 막을 수가 있겠소?"
"음!"
한선생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제 천하의 정(正)은 몰락해야 하는 것인가? 끝이다. 중원의 운명은 끝이야.)
젊은 황제는 한선생의 고뇌 서린 표정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사부, 짐은 손을 쓸 수 없으나, 당소완을 저지시킬 수 있는 인물이 꼭 한 사람 있소이다."
한선생은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누구이옵니까?"
"냉검상이라고 아시오?"
순간적으로 한송의 표정에는 실망의 기색이 스쳐가고 있었다.
"흑, 흑의사신?"
"그렇소. 중원에서 그를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한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그는 안되옵니다. 그는 당소완보다 더욱 더 잔인하고 냉혈의 인물이옵니다. 그가 실력이 있는 것은 인정하나, 그는 어쩌면 당소완보다 더 문제거리가 될 수 있는 인물이옵니다."
홍치제는 위엄있게 말했다.
"그를 욕하지 마시오. 그는 짐의 오랜 벗이오. 이 절대자란 고독한 사람의 가슴 속에 유일하게 훈훈한 우정을 느끼게 하는 짐의 오랜 벗이오."
"!"
한선생은 언뜻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직 냉검상만이 당소완을 저지할 수 있소. 냉검상은 취옥성의 성주이자 신룡왕(神龍王)이란 신분이 있기 때문에 중원의 그 어떤 관리들도 움직일 자격이 있소. 더욱이 그의 가문이 지니고 있는 단서철권은 태조께서 과거 냉염 대장군께 직접 하사하신 것이라 황제인 짐조차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소이다. 냉검상이라면 능히 백만금군을 동원할 수 있고...... 또한 취옥성 자체에도 많은 가신과 군사가 있으니 당소완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오."
"음......"
홍치제는 한송을 향해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짐은 당소완이나 냉검상쪽에 어느쪽도 약속을 어기지 않게 되는 법이오."
한선생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냉검상이라......)
* * *
"남궁백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여자의 음성이다. 놀란 듯 고함을 지르는 그 음성도 귀에 황홀하게 들릴 정도로 맑고 영롱한 음성이었다.
음성을 터뜨린 주인공은 화려한 궁장으로 일신을 감싼 고고한 멋이 풍기는 미인이었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는 여인의 모든 것을 더욱 완숙하게 느끼게 해 주는데, 고혹적으로 뜬 눈 하며 시원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까지 어느 하나도 매력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여인.
바로 당소완이었다.
북경제일의 미녀로 알려졌었고, 안락원의 신비 주인으로 북경의 정계와 재계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르며, 황제까지 쥐고 흔들었던 여인.
뜻하지 않게 북경까지 흘러온 냉검상에게 당하듯이 정사(情事)까지 맺었던 여인 당소완.
당소완이 서 있는 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였고, 당소완의 앞에는 은은한 회색빛의 안광이 안개처럼 감도는 가운데, 피부색마저 죽음의 잿빛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조금은 깡마른 체구에 섬뜩할 정도로 냉정함이 엿보이는 이 인물은 천마교의 부교주인 사존(邪尊) 무일평이었다.
무일평은 엄숙하게 말했다.
"교주의 명령대로 그 자의 시체를 수거하여 이곳으로 옮겨 오던 중에 감쪽같이 사라졌소이다."
"?"
"아마도 누군가 남궁백의 시체를 훔쳐간 것 같소이다."
당소완의 예쁜 눈썹이 휘어졌다.
"부교주!"
"말씀 하십시오."
"내가 그렇게도 신신당부 하지 않았소? 시체는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고."
남궁백이 살아 있을 때는 천마교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시체로 변한 이상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시체를 잃어 버렸다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당소완의 태도가 무일평은 당연히 의아했다.
"교주, 죽은 자의 시신이 그리도 중요하단 말이오?"
"물론이오!"
"이해할 수 없소. 이미 천하는 우리 천마교가 장악했소. 그런데 그까짓 시체 한 구 때문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 때였다. 무일평의 뒤에서 한 소리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무일평, 남궁백은 죽지 않았어."
"!"
무일평은 흠칫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자신의 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백의복면인 하나가 유령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눈(雪)처럼 흰 백의장삼의 가슴 부위에는 선명한 흑룡(黑龍)이 새겨져 있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바로 황금수 두립이 십이비천신마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나타났던 그 인물이었다.
백의복면인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러나 무일평은 이 순간 백의복면인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보통 인물이 아니다.)
"넌 누구냐?"
순간적으로 백의복면인의 웃음이 그치고 눈빛이 유현하게 빛났다.
"천사굴의 신비대형 무일평의 안목은 마치 송곳처럼 날카롭다고 들었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분명히 무일평보다 나이가 아래인 것 같았는데 대뜸 하대를 하며 나오는 것이었다.
"거, 건방진......"
무일평의 안면이 찡그러지더니 그대로 오른손을 뻗었다.
슈우우!
무일평이 오른손을 뻗었는가 싶은 순간, 그의 손은 갈쿠리처럼 오므려진 채 백의복면인의 목젖을 찔러가고 있었다. 그 공격은 너무도 빠르고 의외성이 있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의복면인은 그저 고개를 가볍게 움직이는 것으로 무일평의 공격을 젖혀냈고, 부드럽게 손을 뻗어 무일평의 오른손 완맥을 그대로 잡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이런!"
무일평의 얼굴이 당황과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백의복면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무일평! 네가 천마교의 부교주만 아니었다면 벌써 차가운 시체로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
무일평이 놀랄 때 당소완이 다가오며 말했다.
"부교주 무례하지 말아요. 그 분은 본교의 태상교주세요. 바로 내 위에 존재하시는!"
무일평은 흠칫했다.
(태, 태상교주!)
백의복면인은 무일평의 놀란 눈을 바라보면서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졸지에 서열 이위에서 삼위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어 씁쓸한 모양이군."
"이......"
상대가 아무리 태상교주라 해도 무일평은 순간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한 무일평은 잡힌 손목을 통해 공력을 주입시켜 빼내려 했다.
그러나 손목을 잡고 있는 백의복면인의 손은 마치 강철고리와 같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갑자기 손이 달군 쇠처럼 뜨거워지면서 압박을 가해 왔다.
(으윽!)
또한 무일평을 무섭게 노려보는 복면인의 눈에 흑룡(黑龍)의 모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무일평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흐...... 흑룡겁!"
백의복면인은 냉엄하게 말했다.
"흑룡겁은 삼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다. 그대는 겨우 정사제일령 여덟 후예 중에 하나를 이어왔음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그대 위에 내가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으으......"
무일평의 낯은 그만 회분을 칠한 듯이 허옇게 뜬 채 극도의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흑, 흑룡겁이 나타나다니......)
백의복면인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남궁백은 흑룡겁의 무공을 익혔다. 흑룡겁의 무공은 전신이 가루가 되어 죽지 않는 한 다시 살아난다. 남궁백이 비록 흑룡겁의 무공을 일부만 터득했다고는 하나 심장이 관통된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
"그래서 남궁백의 시체를 가져오라 했던 것이다."
무일평은 놀란 눈을 부릅뜬 채 백의복면인의 강렬한 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침상 위에 엎드려 있는 여인의 등은 활대처럼 매끄럽다.
머리칼은 수초처럼 한쪽으로 쏠려 늘어져 있고, 가슴은 침상에 눌려 조금 삐져나온 모습은 너무도 육감적이다.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여인은 바로 당소완.
당소완의 등에는 한 쌍의 용봉(龍鳳)이 서로를 희롱하는 듯한 문신이 너무도 생생하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침상 앞에는 여러 개의 침과 문신을 놓는 도구를 갖춘 채 잿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노인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문신을 뜨고 있었다.
문신은 완벽한 상태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용봉의 눈만은 미완성의 상태였다. 노인은 지금 바로 용의 두 눈 부위의 문신을 뜨고 있었다.
당소완의 몸은 완전히 알몸이었고, 용의 꼬리는 풍만한 엉덩이까지 꼬리치듯 내려와 있었다.
벗은 엉덩이는 복숭아쪽 같기도 하고 구슬을 두 개 합해 놓은 것처럼 미묘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바늘이 살을 찌르고...... 선명한 피꽃이 피어나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당소완은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백의복면인이 우뚝 선 채 문신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당소완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그리며 입술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선 아직도 남궁백이 걱정되세요?"
오라버니라니? 그렇다면 당소완과 이 신비의 백의인은 남매간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강한 자다. 내가 어릴 적부터 그는 내게 있어 하나의 경이적인 존재였다. 비록 지금은 무공이 나보다 약하다고 하나 그는 항상 나를 어렵고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그의 시체가 갈가리 찢어진 모습을 확인하지 않는 한 나는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
당소완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백의복면인은 그녀의 등에서 번지는 피꽃을 보며 말했다.
"흑룡겁의 무공은 가히 천하무적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더욱이 남궁백은 그것을 잘 알고 있지."
"그 약점이 무엇이예요?"
"......"
백의복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호호...... 여동생에게도 말 못할 정도인가요?"
백의복면인은 잠시 당소완의 매혹적인 눈을 응시하다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상체를 구부려 손으로 당소완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문신을 놓던 노인은 움찔했고, 당소완은 젖가슴이 반쯤 보일 정도로 상체가 일어났다.
"너는 내 여동생이긴 하지만...... 핏줄 이상으로 두려운 일면을 간직하고 있어."
"후훗!"
당소완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너의 등 뒤에 천마용봉혈문(天魔龍鳳血文)의 문신이 다 완성되면 너는 일천혼의 무공과...... 단옥청의 무공을 완벽하게 합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나 이상으로도 강해질 수 있어."
당소완은 가파르게 턱을 치며들면서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호호!"
"!"
"좋아요. 말씀하지 마세요. 그러나 내가 단옥청의 무공과 일천혼의 무공을 합한다 해도 흑룡겁의 무공 이상은 될 수 없을 거예요."
"나도 그러길 바란다."
"오라버니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지만...... 그 솔직함이 어떤 때는 두렵게 느껴져요."
"후후후후!"
당소완은 다시 얼굴을 침상에 묻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일평과 천사굴의 세 고수, 게다가 십이비천신마 중에 살아 있는 다섯 명이 모두 남궁백을 찾아 떠났으니...... 남궁백이 살아있다 해도 상처를 입은 몸이라 곧 잡힐 거예요. 그때 오빠께서 직접 처치하면 되잖아요."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여인의 입가에 웃음이 매혹적이고, 또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순간 당소완의 전신에 흐르고 있는 탕기와 같은 아름다움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소완은 코를 찡긋거렸다.
새롭게 바늘이 등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참! 오라버니의 얼굴...... 한 번 보고 싶군요."
"그래?"
"정말이예요."
"......"
"한 남매지간이면서도 벌써 오랫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잖아요."
"보여 주지."
백의복면인은 담담하게 말을 하고는 복면으로 손을 뻗었다. 문신을 뜨던 노인도 문득 호기심을 느꼈는지 잠시 손을 놓고 백의복면인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백의복면인은 손을 목 뒤로 뻗어 복면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복면인의 얼굴이 미묘한 흥분을 느끼게 하며 드러났다.
"!"
"!"
한데 저것이 사람의 얼굴인가? 복면인의 얼굴은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여 뼈와 실핏줄, 근육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채 차갑게 웃고 있었다. 문신을 뜨던 노인은 깜짝 놀래 들고 있던 바늘을 놓칠 뻔했다.
그러나 당소완은 생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얼굴은 변했지만...... 그 준수한 형태는 여전하군요."
백의인은 다시 복면을 뒤집어썼다.
"사흘 후면 원래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사흘? 오라버니가 장담하신 그 날 말인가요?"
백의복면인은 복면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그날...... 우리 둘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천하의 주인!"
"호호호!"
문득 백의복면인의 두 눈이 심유한 광채를 번뜩였다.
"지루한 이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 왔던 보람을 한꺼번에 찾는 것이다. 너는 안락원에서...... 나는 남궁세가에서 자라면서...... 서로의 야망을 키워온 세월을 보상받는 것이다."
"으음!"
"내가 남궁세가의 성를 따르면서 삼뇌천기란 별호까지 얻으면서 은인자중했지만...... 이제 우리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아! 하면 이 백의복면인이 바로 삼뇌천기 남궁천자란 말인가?
더욱이 삼뇌천기 남궁천자가 남궁세가의 혈족이 아니란 말이 아닌가?
"이제 우리 둘은 천하무적이다. 아무도 우리를 당해낼 수는 없다."
그 때였다.
잠자코 백의인, 즉 남궁천자의 말을 듣던 당소완의 두 눈에 녹색의 불꽃이 무섭게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당소완은 몸을 비틀면서 묘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으음!"
그리고 그 순간 문신을 뜨는 노인은 마지막 한 바늘로 용의 눈을 완성시켜 문신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당소완의 눈에 녹색의 광망은 더욱 강해졌고, 등 뒤의 문신은 살아나는 듯 꿈틀거렸고, 용봉의 두 눈은 붉은 빛의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남궁천자는 흠칫했다.
"!"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마치 환성처럼...... 당소완의 등에 새견진 용봉이 춤추듯 튀어나와 그대로 문신을 뜨던 노인의 목을 물어 버리는 것을. 그리고 노인은 신음성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정기(精氣)를 흡수당한 채 해골처럼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남궁천자의 두 눈이 굳어졌다.
이때 당소완은 발딱 일어나 풍만한 유방이 출렁거리는 것도 관계치 않고 깔깔거리며 요소(妖笑)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호...... 단옥청이 만든 무공에 일천혼의 힘이 깃들었으니 열 명의 단옥청이 부활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설사 과거의 삼천이라도...... 호호호호......"
당소완의 요소(妖笑)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 * *
휘이이이잉!
야차의 숨결처럼 음습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계곡이었다.
뾰족한 암반들이 더욱 살벌한 느낌을 주는 계곡을 질주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담사우였다. 담사우의 등에는 남궁백이 업혀져 있었다. 남궁백은 창백한 표정에 힘없이 눈을 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음이 분명했다.
하늘에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고, 어디선가 구슬픈 밤짐승의 울음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지고 있었다.
담사우의 등에 업힌 남궁백은 초승달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자...... 자네가 담자개의 후예라니......"
말을 하기가 몹시 힘이 드는 듯 헐떡이며 뱉아내는 음성은 듣기가 안타까울 정도였다.
담사우는 바람처럼 달리며 말했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진기가 고갈되면 더욱 위중한 상태로 빠져듭니다."
남궁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 노부는 이미 틀렸어. 흑룡겁의 무공이 불사의 무공이긴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했다. 몇 시간을 못 가 노부의 숨은 완전히 끊어...... 져......"
담사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만 벗어나면 살 수 있습니다. 제 의술을 믿어 주십시오."
그 때였다. 돌연히 담사우의 앞을 막으며 아홉 명의 인물이 떨어져 내렸다.
"꿈꾸지 말아라! 남궁백은 물론...... 담사우 너의 생명도 이 계곡에서 끝이다!"
"!"
담사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인물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사굴의 대형이며 천마교의 부교주인 사존 무일평과 환상야묘, 무영당랑과 혈편복이었고, 만독사후 태우진을 필두로 한 십이비천신마의 다섯 명이라는 것을.
만독사후 태우진이 음산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크흐흐...... 남궁백, 네놈이 살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교의 태상교주께서 네놈의 생존을 짐작하셨고...... 그리고 적중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끝장을 내주마."
남궁백은 이미 죽음을 초월했는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는 희미한 시선으로 만독사후 태우진을 보며 물었다.
"태우진...... 물어볼 것이 있다."
"!"
"너희들...... 내가 흑곡에 가두어 놓은 너희들을...... 풀어 준 것이 남궁천자가 맞느냐?"
태우진은 흠칫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궁금한 것을 마음에 품고 저승에 가면 답답할 테니 알려 주지. 바로 그가 우리를 탈출시켜 주었다. 구절연환진의 완벽함을 파괴하고 우리를 저주 속에서 탈출시켜 준 것이다."
남궁천자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랬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자 남궁백의 가슴은 더욱 허탈해졌다.
"허허허...... 결국은 모든 게 그렇게 된 것이로구나. 허허허......"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리던 남궁백은 심중의 충격을 이길 수 없는지 왈칵 핏물을 토해내었다.
사존 무일평은 음침하게 외쳤다.
"태우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자. 저 놈들의 수급만 잘라 가지고 가면 되니까."
말과 함께 무일평은 그대로 몸을 날려가며 담사우를 공격해 갔다.
슈왓!
벼락처럼 덮쳐가면서 손바닥을 뒤집었다 펼쳐내는 데 싸늘한 음기(陰氣)가 느껴지는 장세였다.
담사우는 급히 우장을 뻗어내며 막았다.
퍼펑!
요란한 폭음성과 함께 담사우는 휘청이며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일 대 일로 상대해도 벅찬 상대들인데, 남궁백까지 업고 있는 상황이라 모든 것이 그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담사우,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무일평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끝내겠다는 듯이 연속 칠장(七掌)을 후려갈기며 공격해 왔다.
"우훗!"
담사우는 비룡번신의 신법을 펼치면서 숨가쁘게 무일평의 공격을 피해내다가 느닷없이 옆으로 덮쳐온 혈편복의 날개에 어깨를 맞고 튕겨져 올랐다.
퍼퍽!
"으윽!"
어깨가 옆으로 쭈욱 찢어지면서 피보라가 자욱하게 일었다. 담사우가 제법 무공이 강하지만 이 순간을 모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그에게 어느 새 무영당랑이 덮쳐오며 사마귀 발처럼 생긴 은빛의 쇠팔을 휘둘러 왔다.
슈왕!
"크으으...... 마지막은 내가 장식하겠다!"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담사우에게 무영당랑의 공격은 그야말로 피할 도리라곤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을 정도였다. 평소에 그토록 침착하고 냉정하던 담사우의 얼굴에 언뜻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끄...... 끝인가?)
눈 앞으로 짓쳐오는 무서운 무영당랑의 쇠팔을 보면서 담사우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이었다.
카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담사우를 공격하던 무영당랑은 두 개의 쇠팔을 잘린 채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담사우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앞을 막고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그와 겹쳐서 무영당랑의 공포에 젖은 모습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담사우는 자신을 막고 나선 인물이 냉검상이란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냉...... 냉대협!"
무영당랑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경악성을 발했다.
"미...... 미라파샤!"
순간 담사우는 냉검상의 몸에서 흰빛이 번쩍 하고 허공을 가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은제의 사마귀 가면을 쓰고 있던 무영당랑의 머리가 그대로 쪼개지면서 핏둥지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크악!"
무영당랑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성과 함께 그대로 나뒹굴었다.
갑자기 장내는 정적이 찾아왔다. 냉검상은 손에 미인혈을 쥔 채 푸르스름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환상야묘를 바라보았다.
"천사굴의 쥐새끼들!"
환상야묘는 언뜻 두려움을 떠올리며 주춤주춤 사존 무일평쪽으로 움직였다.
이때 담사우는 남궁백을 나무에 기대게 해서 내려 놓고 자신의 어깨를 지혈시키고 있었다.
남궁백은 흐릿한 시선으로 냉검상을 보다가 담사우에게 놀란 듯이 물었다.
"담...... 담소협, 저 청년이...... 흑의사신......?"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담사우는 장삼을 찢어 상처 부위를 동여매었다.
그 때 남궁백은 갑자기 탄식을 터뜨렸다.
"내...... 예상이 틀렸구나. 잔인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원래의 심성이 악(惡)에 물든 거야."
"?"
담사우는 의아한 눈빛을 빛냈다.
"원래의 심성이 악에 물들었어. 무서운 마성이 저주처럼 전신을 감돌고 있어."
그 말을 들으면서 담사우는 왠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냉검상이 나타나 위기를 모면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 때 냉검상이 다가오자 무일평은 회색의 눈을 기이하게 일렁거리며 음산하게 물었다.
"네가 흑의사신이냐?"
"그렇다."
순간적으로 무일평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냉검상의 뒤쪽으로 처참하게 갈라져 있는 무영당랑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무일평은 씹어 뱉아내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혈편복은 환상야묘가 양쪽에서 합세할 듯 자세를 취했고,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 있던 만독사후 태우진도 말했다.
"크으으...... 우리도 돕겠다, 무일평!"
태우진이 나머지 넷과 함께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막으며 떨어져 내렸다.
"너희들은 우리가 맡는다!"
담사우가 흠칫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해연과 한송이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내려서고 있었다.
태우진의 안색이 굳어 버리고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