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듯 절대성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 후에 떠오른 건 가능성의 시대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를 활용하여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영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 등장인물 조이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이의 엄마 에블린은 그런 조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이를 이해하지 못하던 에블린(기성세대)이 조이(신세대)를 이해하는 과정이 이 영화에 핵심 플롯이다.
영화 속에서는 멀티버스라는 SF 요소를 통해 등장인물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적 요소 밖으로 나가 보면 현실 속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체험하게 해줄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온라인이다.
온라인의 발전으로 신세대(MZ세대)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 인종을 넘어, 성별을 넘어, 경제소득을 넘어 정말이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본 MZ세대는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졌다. 우리가 단순히 믿어왔던 미덕의 배신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성의 힘을 믿었지만,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일어났다. 노동자에게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요구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은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불로소득을 축적했다. 학벌과 노력의 힘을 믿었지만, 명문대 출신 직장인은 고소득 유튜버를 질투하고 있다.
정말이지 믿을 게 하나 없는 세상이다. 가치가 해체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쉽게 ‘허무주의’라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MZ세대의 허무주의에 대항할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었다. 바로 낙관적 허무주의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크리에이터 집단 ‘쿠르츠게자트’가 제시한 개념이다. 수동적 허무주의와 달리 체념하지 않았고,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칭하기에는 훨씬 소박하고 공격성이 없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것을 제시한다.
첫댓글 모든 가능성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선택장애를 경험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현실에서 어떤 한계를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멀티버스와 같은 다양한 가능성이 인정되는 상황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멀티버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멀티버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결과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총합으로 본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보장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유니버스에서는 어떤 선택의 결과들과 마주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만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