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쯤 후면
이곳 아산을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러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떠나기 전에 할 일들을 생각해 봤다.
이곳에 오고나서 1년이 넘도록 한 번 찾아 보지 못한 집안 할아버지시며, 해방을 맞기 다섯 해 전에 돌아 가셔서 살아서 귀국하셨던 김구선생이나 이승만박사, 신익희선생등 여러 독립운동가 보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어른으로 큰 발자취를 남기신 석오 이동녕 할아버님의 기념관을 찾아 보기로 했다.
석오 할아버님은 1869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군(현재는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 나셔서 청년기에 만민공동회에 참여 이승만, 이준 선생 등과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고, 을사늑약 폐기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되시기도 했으며, 블라디보스톸으로 망명하셔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셨으며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동포들의 교육에 힘쓰시고, 안창호 김구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하기도 하셨으며,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 초대 소장을 맡아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양성하셨으며, 임시정부에 참여 김구 선생 등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지도 하시기도 하셨고, 임시의정원 의장, 대통령 대리, 국무총리 세 번, 국무령 두 번, 주석 다섯 번 등 주요한 직책을 역임하신 임시정부의 큰 어른이셨고, 김구선생이 제일 존경하는 분으로 꼽는다고 하셨다는 분이시기도 하다.
광복을 다섯 해 앞둔 1940년 3월 13일 일흔을 넘긴 노구에도 광복군 창설을 주도하시다가 쓰촨성(사천성) 치쟝(기강)이란 곳에서 안타깝게도 병사하셨다고 하는데,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1948년 9월 22일에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해 오셔서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셨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셨다고 하는데, 서울에 있을 때 효창공원 근방에서 일을 한 적도 있는데, 묘소를 참배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후손으로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선조님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마을의 근방에 살면서도 한 번 찾아 보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 떠나기 전에 찾아 뵙기로 했다.
아울러 먹고 살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냈던 선열들의 자취를 찾아 보기로 한 것이다.
언제나 처럼 나의 친구 깜돌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화창한 가을 날 오곡백과가 익어 가고 있어 올려다 본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아 보이지만, 어떤 그리움과 아픔을 말하는 듯 슬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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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할아버님의 사진과 주요 역임 직책
온양온천과 천안시내를 관통하여 목천으로 향했다.
20여년 전에 지금은 30대 중반이 된 남매를 데리고 갔었던 독립기념관 앞에서 우회전을 하여 한참을 가니 기념관을 알려 주는 표지와 동리교라는 조그만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마을회관을 지나 좌회전을 하여 300 여 미터 쯤 더 들어가니 생가와 기념관이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광장의 바위에 할아버님께서 쓰신 휘호인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열심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임."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관은 생각 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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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과 생가, 조형물 등
할아버님의 기념관을 참관하고 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시민 장군님의 유허를 찾아 보기로 했다.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님의 한산도대첩, 권율 장군님의 행주대첩과 아울러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끄신 김시민 장군님의 유허는 내가 살고 있는 아산 영인의 고균 김옥균 선생의 유허 보다 훨씬 초라하고 규모가 작아 보였다.
장군님이 아홉 살 때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던 큰 뱀(이무기)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사사처, 사사처라고 새긴 바위, 근래에 세운 유허비와 안동김씨가 세거했다는 <김씨세거>라는 음각이 있는 바위 정도가 고작이었고, 적막만이 감도는 것이 영웅의 침묵이 무겁게 내려 앉은 것 같은 쓸쓸함이 느껴졌다.
참고로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님 만 충무공인 줄 알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고려조에 세 분이시고 조선조에 조영무, 남이, 정충신, 이순신, 김시민 등, 아홉 분이시라고 한다.
아산과, 가까운 천안 땅에서 충무공 두분을 배출한 것이다. 충청도라는 이름이 시사하듯이 유독 독립운동가와 충신이 많이 태어 난 땅이 충청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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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유허비와 바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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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홍대용 선생의 생가지를 찾아 가는 길목의 코스모스
기왕에 나선 길이기에 주위의 충신열사 선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하고 북학파인 박제가, 박지원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고,중국기행록인 "을병연행록"을 쓰셨고 "의산문답"이란 소설에서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피력하기도 하셨던 담헌 홍대용선생의 생가지와 묘소를 찾아 보러 갔었는데 묘소는 보이지 않고 홍대용과학관이 나를 반겨 주었다.
과학관을 밖에서 둘러 보고 생가지를 찾아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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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과학관과 생가지
다시 길을 잡아 유관순 열사기념관을 참배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시절 3.1절 노래를 부를 때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나 보다 50년 가까이 먼저 태어나신 유관순 열사는 나이로 따지면 할머니 뻘인 셈인데 아직도 그 옛날의 누나로, 곱던 아가씨의 모습으로 영정속에 엄숙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그 때 휘두르시던 태극기를 꼭 쥐고 계셨다.
숙연한 마음으로 절을 두 번 올리고 물러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순국자추모각에 가서 역시 절을 두 번 올라고 경내를 둘러 보고 유해가 없어 혼을 불러 묘소를 만든 초혼묘를 찾아 제법 경사가 있는 야산을 올라 초혼묘를 참배했는데, 표지판에 산 위로 ㅣ킬로미터를 가야 생가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산위에 생가가 있을리는 없고 산 너머에 생가가 있다는 얘긴데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내려 오니 아우내체육관 옆으로 생가를 향하는 길이 있었다.
차 안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던 깜돌이와 함께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우내체육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현대인재개발원이 있고 지나쳐 좀 더 가니 오른 쪽으로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보이고 일단의 관광객과 버스가 보였지만, 일단 그냥 지나쳐 계속 앞으로 갔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으로 치안과 공산당 색출에 힘쓰시고, 6.25 때는 내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하셨지만 이승만대통령과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하였다가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육군의료센터에서 병사하셨던 유석 조병옥 박사의 생가가 바로 코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병옥 박사의 생가를 방문하고 발길을 돌려 유관순 열사의 생가로 향했다.
내가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치자 앞 서 서 있던 관광버스가 떠나고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적막만이 감돌고, 멀리서 변견의 짖는 소리만 들렸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다는 매봉교회가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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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기념관의 추모각과 영정 그리고 초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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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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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생가와 생가관리사, 그리고 매봉교회
그 날의 일정이 거의 마무리 된 상태인데 배가 고파 순대로 유명한 아우내 장터에 가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 순대국을 주문해 먹었는데, 유명세에 비하면 그리 좋은 맛이나 서비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먹은 순대국 보다 고명이나 반찬이 부족했고, 너무 뜨겁게 내어 와서 맛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입 안이 데지 앟게 조심해서 먹느라고 애를 먹었다.
어쩌면 맛에 자신이 없어서 맛을 음미할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뜨겁게 해서 내어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금요일에는 아산 현충사를 다녀 오려고, 가는 길에 이순신 장군님의 묘소 입구에 있는 생수터에서 생수를 길어 오기 위해 물통을 챙기고 친구이자 요즘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깜돌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이순신 장군님의 묘소는 여러번 갔었고, 참배도 몇 번 했던 터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참배하기로 하고 물만 길어 현충사로 향했다.
처음 가 본 현충사는 성웅을 기리는 사당과 기념관등 규모가 크고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곳을 갈 때면, 윤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존재했다던 윤회사상이 어떻게 우리 조상들에게 전해 졌는지 모르겠지만, 부처도 인간으로 보고 자신의 수행과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소승불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부처는 신의 화신이며, 몇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열반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는 편이었으니 북방불교를 통해 중앙아시아 중국등을 거쳐 우리나라로 윤회사상이 들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우리 조상들이 "전생에 죄가 많아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라는 말을 해 오신 것을 보면, 기독교에서는 윤회사상을 이단이라고 규정했다고 하지만, 윤회는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겻이 또한 나의 견해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열들은 그래도 그 전생이 대부분 잘 살았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일을 하시도록 태어 났고, 나 같은 사람은 전생을 아주 잘 못 살아서 이렇게 고달프고 슬픈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게다.
어쩌면 세종대왕님이 미국의 오바마로 다시 태어 나셨을지도, 워싱턴이나 링컨이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으로 태어 났을지도, 성웅 이순신 장군님이 전생의 공덕으로 팝의 황제 마이틀 잭슨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로 태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든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니 현생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여 종교에서 얘기하는 천국이나 극락에 들지 못하면 다시 돌아 와서 고해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충사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관람하고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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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과 현충사의 모습들
이제 한 달 쯤 후에 부산으로 내려가서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 사업을 해 보려고 하는데, 떠나기 전에 할 일들을 하나 씩 하려고 한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더러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가지 가까운 곳에 있는 고용산(일부 사람들은 솟을 용<聳>을 용룡<龍>자로 써서 고룡산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을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은 것이다. 경비실 앞에서 보면 바로 보이는 고용산은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의 헬기들이 이착륙 연습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 헬기장이 있다.
텔레비젼에서 시리아난민들이 고무보트에 삼십여 명 씩 타고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에 상륙하고 있고 자원봉사자들이 물과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보이는데, 나도 그 곳에 가서 봉사를 하고 싶기는 하지만 시간도 그렇지만 그리스는 고사하고 동남아나 중국도 마음 놓고 갈 수 없는 형편이니 마음으로만 난민들을 응원할 뿐이다.
부산에서 할 일에 타인을 위한 마음을 유보해야겠다.
첫댓글 연안인님...
늘 말씀하시더니 드디어 용기를
내시는군요.
많은 계획된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석오 이동녕선생님이 연안이가였군요.
훌룡하신 분이 이 고장 출신이란게
자랑스럽습니다.
좋은 마무리속에 새로운 출발을 하시길
바라며 늘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
충절의 고장 충청도 사람이신 관조님도
자랑스러워 하셔도 좋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고
한가위 즐겁고 항복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광복 70주년에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에 대한 역사 그분들에 자취....
계획하셨던 일들이 부처님에 가호로 잘 되셨으면 합니다.
건강하시고,복 짓는 행복한 나날되세요.
감사합니다. 여러 법우님들 께서 응원해 주시는
덕분에 일이 잘 진행 되리라 믿으며
복을 많이 짓게 된다면 우리 법우님들께
부처님의 가피가 임하시도록 기도 드리고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