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손병희가 발표한 ‘고(告)국민대회’ 포고문에 언급된 따르면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가 마련한 ‘한국민족은 일본의 어진 통치에 순종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각계각층의 대표자 명의로 된 조작증명서 서명에 고종이 크게 진노하자 일제는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을 사주하여 독살을 꾀해 고종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를 매수하여 야참 식혜에 독약을 넣어 시해했다고 한다. # 그리고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도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무려 3명이 윤덕영을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증언을 남긴 셈이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축구장 8개의 면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부르는 그 집.
세상 사람들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까닭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23일 기사 내용
1933년 2월 기준 윤덕영의 재산은 당시 화폐로 100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민병석이 30만 원을 가졌다고 한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으며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년)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으며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金福綏, 1872~1950)[5]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써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6]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이재곤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윤덕영은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요절했기에 윤덕영의 종손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윤덕영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같은 해 윤덕영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된데다 습작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윤강로는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당대의 유명 내과의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지며[7] 1965년 5월 22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zLkMekcAoY 이완용의 열배 받은 윤
순종 효황후 가 옥새를 치마속으로 감추자 윤이 옥새 빼았고 강제로 순종 손잡고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