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요한복음 10:10
제목 : 생명과 풍성한 삶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반갑습니다.
어제 축구 안 보신 분만 나오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우리 아이들이 청년이다 보니까 새벽 세시에 카톡방이 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아, 이겼나 보다 하고 그때 일어나서 씻고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퀴즈 하나를 드리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퀴즈는 제가 만들어낸 거 아니고요,
제가 선교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 땅에 돌아왔을 때, 저희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아이들이 10년이 넘게 외국에서 자라다 보니까 한국말도 좀 어렵고
그렇다고 현지어를 아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한국에 적응하기가 좀 어려울 때였습니다.
저희 막내가 중국말도 안되고 영어도 안되고 한국말도 안되는,
(그래서 선교사 자녀 하면 어느 나라 말도 잘 안되니까, 0개 국어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한테 어떻게 숙제를 줬냐 하면,
'학교 가서 친구를 사귀어서 친구들한테 아빠가 맞추지 못할 만한 퀴즈를 갖고 와라'
그러면서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기회를 줬습니다. 제가 맞추지 못하는 퀴즈를 갖고 오면, 만원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용돈이 천 원일 때 만 원은 큰 돈이니까 아이가 열심히 가서 친구들한테 퀴즈 같은 걸 많이 물어왔습니다.
웬만한 건 제가 다 맞췄는데, 제가 첫번째로 못 맞춰서 만 원을 준 퀴즈가 있습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여러분께 한 번 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저희가 수원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는 뉴스가 종종 나오고 그랬는데, 하필이면 아이가 자살에 관한 퀴즈를 갖고 왔습니다.
'아빠, 집에 엄마. 아빠. 자녀 셋 이렇게 다섯 식구가 있었어. 그런데 다섯 식구가 너무 어려운 일을 동시에 당해서
아파트 30층 꼭대기에 올라가 뛰어내려서 다같이 자살을 했어요. 그런데 한 명도 죽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빠가 안 죽은 이유는 아빠가 제비족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새엄마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언니는 날라리, 오빠는 비행 청소년이었답니다. 뭔가 다 날아 다니는 거죠.
그래서 네 명이 안 죽었는데, '막내가 안 죽은 이유는 뭘까' 하는 이게 퀴즈였어요.
왜 안 죽었을 것 같아요?
아빠는 제비, 엄마는 새 엄마, 언니는 날라리, 오빠는 비행 청소년이었어요.
막내는 왜 안 죽었을까요? 저도 웬만한 퀴즈는 다 맞췄는데,
이걸 못 맞춰서 결국은 생각하다 하다 만 원을 주면서 정답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정답은 뭐였냐 하면, '덜 떨어져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날아 다니는 것만 생각하니까 전혀 못 맞췄지요.
만 원을 주니까 아이가 너무 기뻐하면서 만 원을 가져간 거예요.
그리고 방에 들어갔는데, 제가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 거예요.
왜 안 좋지? 왜 안 좋지? 그랬었는데, 제 속에 있던 옛날 사건들이 많이 떠오르는 거죠.
제 딸이 만 원 가져갔다고 해서 제가 기분 나쁠 리는 없는데,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많이 듣던 얘기가 '이 덜 떨어진 놈아' 이 소리였거든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덜 떨어졌다는 얘기를 딸한테 들은 얘기이면서 옛날 생각이 쫙 돌아오게 되었던 겁니다.
왜 저의 어머님은 아들한테 좋은 얘기는 안해 주고 덜 떨어졌단 얘기를 많이 했을까요?
그건 부부관계가 안 좋으시니까 그런 것일 수 있지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저의 아버님은 알콕중독이셨습니다.
술을 항상 달고 사셨고, 술만 드시는 것이 아니고 술을 드시면 나가서 놀음을 하시는데 돈을 한번도 따 오신 건 없지요.
항상 돈을 갖다가 사람들한테 퍼주고 사셨고, 가정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가정을 두 개나 갖고 계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안 살고 딴 집에 살고 계셨으니까 태어나서 봤더니
아버지는 딴 집에 살고 계시고 저희 집에 오셔서 어머니한테 돈을 가져가시는데
돈을 안 주시니까 거의 폭력을 많이 쓰셨어요. 어머님이 돈을 그냥 주시면 되는데, 밤새 맞다가 주셨어요.
맞다가 참지 못하면 주시거나 사람들이 말리러 오면
저희 아버님이 그 말리는 걸 오히려 화가 나시니까 어머니의 머리를 끌고 길거리에 나가서 옷을 벗기면서 때리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걸 말려본 적이 없어요.
말려봐도 안 되니까.. 경찰도 없고 그러니까.. 제가 여섯 살, 일곱 살, 초등 3학년까지
사람들이 '집에 있지 말고 네 엄마 아빠 좀 말려봐라'고 하는데, 가면 말릴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힘도 세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희 집을 볼 때마다 알콜중독이 있는 집, 맨날 딴 집보다 더 시끄러운 집
저희 집에는 저보다 여섯 살 많은 누님이 계셨는데, 그 누님은 태어날 때부터 정신박약에 소아마비였습니다. 장애인이셨죠..
밥도 먹여줘야 먹을 수 있고, 소대변을 앉은 채로 싸고 그랬습니다.
저희 집이 산동네 살았었는데, 손님이 아주 가끔 오시면 짜장면을 먹는 게 큰 행사였습니다.
손님 오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짜장면인데, 지금은 배달하면 아파트 찾아오지만
옛날에는 짜장면집 가서 주문을 하고 그 배달하는 형님, 아저씨랑 같이 집에를 와야 되는 그런 시대였는데,
짜장 배달하러 가서 짜장 두 개에 탕수육 하나 시켜오라고 손님이 왔으니 손님이 돈을 내는 거니까, 짜장면 집에 가서 얘기합니다.
'짜장 두 개에 탕수육 하나요' 그러면 보통 나보고 앉아 있으라고 하고 저를 따라와야 되는데,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거예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아세요?'
'그 바보 있는 집..' 이렇게 아는 거죠..
저희 집은 그러니까, 승재네 집도 아니고, 누구 집도 아니고, 바보 있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사실 때, 얼마나 힘 드셨겠어요.. 남편은 거의 집에 안 계시고,
새벽 네 시에 나가서 공장살이(쪽가위로 옷에 묻은 실밥 뜯어내는 일)를 밤 늦게까지 일하고 와서 겨우겨우 번 돈을 아버지가
거의 폭력을 행사해서 그걸 술집에다가 노름집에다가 다 갖다 바쳐서 하는 집에 살고 있었으니, 저희 어머니가 너무 힘드셨겠죠.. 그래서 항상 저한테 '너희 안성이씨 집안은 드러운 놈의 씨종자다' 이렇게 욕을 하시고 덜 떨어진 놈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가서는 손 들고 발표를 한다든지, 도시락을 제대로 싸 간다든지 못했습니다.
저는 부러운 친구 누가 있느냐 하면, 도시락 뚜껑을 열면 거기 계란후라이가 하나 있는 애는 너무 부러운 겁니다.
그 계란을 먹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 어두운 배경 속에서 자라면서도 저는 희망을 갖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저만 가난한게 아니고 동네 사람들 거의 다 대부분 가난했거든요.
친구들 만나러 나가면 걔네들도 똑같이 아버지가 알콜중독인 사람 많고, 이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 집만 더 못 살아' 이렇게 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동네에서 아는 형을 만나게 되는데, 저보다 네 살 정도 많은 저희 아랫집 사는 형이 저를 동생 삼아 줍니다.
'승재야, 너희 집이나 우리 집이나 똑같이 아버지도 그렇고 다 그런 거, 너희 집도 아들 하나 우리 집도 아들 하나...'
제가 5대독자거든요. 저의 어머님이 저를 낳으려고 승려가 되셔서 3천배를 드렸대요. 매일같이..
그래서 3년 동안 치성을 드려 낳은 부처의 힘으로 태어난 사람, 5대독자고, 그 형은 2대독자였고
그러니까 아주 좋은 친구관계처럼 맺으면서 저를 동생 삼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배워야 될 건데, 저보다 네 살 많은 그 형으로부터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 형이 저한테 제일 먼저 알려준 건 담배 피는 거였습니다.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는 술 마시는 것과 당구를 알려주고, 그러면서 같이 공장에 갔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졸업하면 모든 사람이 다 공장에 갔어요.
대학생이 아무도 없는 동네였는데, 그 형이 고3 때 독서실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서 제 인생에 충격이 오게 됩니다.
아, 맨날 술 담배 먹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공부를 한다 그래서 저희 동네엔 전문대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그 형이 1년 2개월(한 14개월) 만에 저희 집에 다시 왔는데, 똑같이 가방 들고, 그 가방 속에는 항상 술병이 들어 있었어요.
그날도 우리 집에 가방을 들고 놀러 왔는데, 거기 술병이 가득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오늘 실컷 마시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가방 속에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죠..
그 형이랑 책이랑 안 어울리는데, 저한테 책을 건네 주는데 여러 권, 수학의 정석 이런 걸 막 꺼내 놓으면서
'승재야, 내가 너한테 술 담배 밖에 알려준 게 없는데, 너도 공부해라'
그러면서 저한테 뭐를 하나 보여 주셨는데,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합격해서 오신 겁니다. 저는 깜짝 놀랬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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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제 목사는 인간이 만들어 쌓는 공든 탑을 우상으로 삼는 불교의 종교성에 의지하여 살았던,
반승려 반평신도였던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분이셨고, 누나는 소아마비이이면서 정신적장애자였다.
고교시절에, 그렇게 성실하지 않았던 동네 형이 한양대 전기과에 진학한 사실에 자극을 받아
재수와 배짱지원을 한 끝에 명지대학교 전기과에 진학을 했다.
명지대학교가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사실은 진학한 후에야 알았다. 명지대학교 CCC에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순수하게 보이는 여학생의 4영리 소개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영접기도까지 함께 하면서, 기독교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에 4박5일의 기독교 청년 수련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그 집회 분위기속에서, 우연히 어느 목사님(김준권 목사)의 설교중의 몇 마디인,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예전에 소아마비 정신장애자 누나에게 행한 못된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죄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CCC에서 맨 처음 만났던 그 순수하게 보이던 선배누나와 결혼을 하고,
용인에서 대학 캠퍼스 사역, 또 동아시아 선교 사역을 담당했고, 현재는 가까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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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하게 사셨던 우리 어머니 이야기로 오늘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충청도 시골의 한 가난한 집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가 보지 못한 채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
식모살이를 하며 꿈도 키우고 돈도 조금 모으고 있던 중에,
멋있는 남자를 만나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18세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은 38세까지 약 20년간 불임이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4대 독자여서 아들을 기다렸는데 불임이어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아마도 아들을 얻기 위해 아버지는 다른 가정을 만드시고, 어머니는 소박을 맞은 채로 할머니(시어머니)와 함께 사셨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을 때도 천일 기도를 해서 낳았다는 할머니의 권유로
어머니도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3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매일 1천배를 드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아버지도 잠시 집에 들리셨다가 취한 김에 어머님과 동침하셔서 내가 잉태되었다.
그래서 내 어릴 적 별명은 오독(5대 독자), 또는 부처님 아들이었다.
그래서 오른쪽 주머니에는 늘 염주를 들고 다니며 살았다. 어머니는 불교를 강요하지는 않으셨지만
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절에 가서 초등학교 입학 때 천 배, 중학교 입학 때 이 천 배, 고등학교 입학 때는 삼천 배를 시키셨다.
종교심이 강하다고 하기보다는 내 탄생 배경과 내 안전을 기복하는 마음이셨다.
아버지는 알콜과 도박 중독이셔서 어머님이 생활비를 버셨지만,
어머님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빼앗아 술을 드셨기 때문에 집안은 늘 가난했다.
나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여섯 살 손위의 소아마비를 앓아 뇌성마비가 생긴 정신박약아 누나가 있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서 늘 가족들이 누나의 대소변 뒷처리를 해주어야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굽어 바지를 벗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뒤처리를 할 때마다 누나의 오물을 묻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게 소망이 있었던 것은 그 산동네는 대개 비슷한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동네에 아는 선배 형이 있었는데 나와 엇비슷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양대 전기과를 가셨다.
나는 그 형을 role model로 삼았는데, 술과 담배와 당구를 그 형에게 배웠다.
공부하는 자리 등 모든 것을 그 형을 따라 하려 노력하며 공부했으나 재수까지 해도 계속 대학에 떨어졌다.
명지대 전기과가 후기 대학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어서 배짱 지원을 했는데 겨우 합격을 했다.
입학해서야 명지대학교가 미션스쿨인 것을 알았다. 내가 처음 경험한 기독교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예수님이 나오는 재미 없는 영화를 2시간 동안 억지로 봐야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채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어느 날 (5/20) 채플을 마치고 나가다가 어느 분이 나를 여러 달 지켜보았다며 함께 캠퍼스를 복음화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불신자임을 얘기했는데도 조금만 예수님에 대해 더 알아보라며,
본인이 기독학생회장이라며 학생회관 4층의 기독교 동아리에서 만나자고 해서 얼떨결에 약속을 해버렸다.
후에 겨우 찾아간 4층에는 온통 기독교 동아리들이어서
어디에서 그분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교회'자가 들어간 곳 바로 CCC(한국 대학생 선'교회')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수수한 옷차림의 여학생 선배에게 마음이 끌려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했다.
그 후로 나는 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CCC에서는 지독하게 나를 찾아왔는데,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수련회 초대를 받았고 그저 즐겁게 여학생들과 놀 마음으로 신청하고 참석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찬송과 설교와 기도만을 하는 것이었다.
수련회 장소는 전주대학교였는데 며칠 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식사만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식후연초 불로장생'을 얘기하며 담배를 피우고 시냇가에서 놀았다.
그래도 마지막 날에는 억지로 예배 자리에 앉았는데, 그동안 귀에 들어오지 않던 설교가 귀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
처음에는 나는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나, 계속 설교를 듣다 보니 내 죄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구타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자라나서 고등학생 시절에는 식칼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방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울면서 말리셔서 포기하고 밤새 집밖을 헤맸다.
다음날 마음이 심란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정박아 누나가 내가 숙제 해 놓은 페이지들을 찢어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속의 울분이 터져 나와서 누나를 마구 때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고 가장 잔인했던 날이었다.
누나의 온 몸이 멍들 정도였다. 그 멍이 어머니께 들킬까 봐
내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누나를 돌봄으로써 그 구타 사건을 감추었다.
3년 뒤 누나가 26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가 재수할 때였다. 완전 범죄였던 그 일이 그 예배에서 내게 떠오른 것이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죽었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때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 되었는데,
'희망이 있는데 죄를 알지 못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초청에 나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내가 처음으로 드린 기도는 '우리 바보 누나 천국 가게 해 주세요.'였다.
말도 안되는 기도였지만 죽은 누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었고, 나같은 것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라는 생각이었다.
눈코 가리지 않고 물을 쏟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눈코입은 없으나 웃는 얼굴 같은 파란 빛이 들어오는 체험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갔는데 비가 고인 아스팔트 길이 흑진주를 깔아 놓은 것 같고 나무와 모든 자연이 아름답게 보였다.
예수 믿은 기쁨이 넘쳤다. 그 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5세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많은 고생을 하며 자라난 분이었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수련회의 어느 분이 기드온 신약성서를 주면서 요한복음부터 읽어보라고 해서
읽다가 10장 10절 말씀에서 '생명'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때 체험하고 느끼던 일이 바로 '생명'임을 알 수 있었다.
불공 드릴 때처럼 내 정성을 예수님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풍성한 삶이란 무엇일까?
갑자기 부자가 되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내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것이 풍성한 삶일 것이다.
내게 결핍된 것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 행복한 가정을 꿈꾸면서도,
아버지의 폭력성을 내가 갖게 될까 봐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동아리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여학생들을 소개 받아 사귀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CCC 간사로 지내던 내게 내 장단점을 적어주며 끝에 '나는 어때?'하고 물어 준 그 누나와 사귀게 되어
이제 결혼한지 벌써 29년이 되었다.
아내는 4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온화한 성품으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서
다행히 나도 결혼생활 30년 가까이 되도록 언어 폭력 한 번 쓴 적이 없다.
대학생을 전도하는 선교단체 간사로 살면서 신혼 살림을 용인에 꾸리게 되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아내가 만삭일 때 집주인에게 전세를 떼이기도 했고 경매에서 경쟁자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했지만,
아내는 그 상황도 이해하고 덮어주자고 했다. 그런 아내 덕분에 큰 다툼 없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이제 동아시아 선교를 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제 가정에는 연년생으로 아이 셋이 태어났다. 너무 무섭게 잠만 잤다 하면 애기가 생겼다.
첫아이가 세 살 때 되었던 해에 우리는 동아시아 선교사로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평신도 선교사였고 파송교회 없이 선교생활을 할 때라서 늘 재정은 압박이었다.
선교사님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우리집은 한 방에서 애들 세 명이 자며 살았는데,
어느 날 맏딸이 6학년일 때 파자마 파티를 하러 대기업 주재원이어서 무척 넓은 집에 놀러 간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주눅들까 봐 걱정했는데 돌아온 아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아빠, 난 결혼하고도 아빠랑 아빠 근처에서 살고 싶어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가 어렸을 때 아빠가 함께 놀아 주셨듯이 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면 좋겠어요.'
그 혼잣말을 듣고 나는 감격해서 울었다. 내게 있어 풍성한 삶이란 물질의 풍성함이나, 로또 당첨이 아니라,
아이랑 소통되고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아이에게 우리 가정이 좋은 가정이라고 심겨졌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풍성한 삶이었다.
이런 삶이 내게는 풍성한 삶이었다. 지금은 자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했다.
주택 청약 생각도 했었는데, 아이들은 믿음의 유산 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이런 삶이 내게는 풍성한 삶이다.
나는 대학생선교회 간사로 26년간 지내면서 스물 다섯 살에 용인의 다섯 개 캠퍼스 담당자가 되었고,
동아시아 선교사로 10여년 지냈고, 2012년 선교한국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6년 전에는 교회를 개척해서 즐겁게 목회하고 있다. 목숨을 다해 사역을 했지만, 내 사역의 중심은 늘 '가정'에 있었다.
깨지고 결핍한 가정에서 자란 내가 행복한 가정을 누리는 것이 풍성한 삶이었다.
내가 동아시아 선교사로 사역한 지 10여 년이 되었을 때, 큰 아이가 고1일 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의 일이 경제적 이슈나 자녀 교육 등의 걱정이 컸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정리했다.
그러나 사역지의 모금 부담을 후임자에게 떠넘기려 하니 그것은 정말로 걱정이었다.
기도 중에 지혜를 주셔서, 그동안 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왕래가 없던 현지 한인교회에 캠퍼스 사역 후원을 부탁하려고 갔는데,
담임 목사님을 만나보니 어릴 때 내 role-model이었던 그 한양대 형이었다.
형이 간증할 기회를 줘서 400명 정도 성도 앞에 섰는데, 눈물만 흘리다가
끝 무렵에 현지 캠퍼스 사역 후원을 부탁했고 긴급 당회를 거쳐 후원 약속을 받았다.
내가 한 사역이 결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하심을 깨달았다.
풍성한 삶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동행함을 체험하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실수와 미숙함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어머님이랑 아버님이랑 심하게 다투면
어린 시절 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불 속에서 혼자 흐느껴 울던 그 순간에도 주님은 함께하고 계셨었다.
내가 원하는 환상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삶에는 실수가 없으신 삶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로는 '하나님 나라엔 쓰레기통이 없다. There is no trashbin in heaven.'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쓰레기통에 쳐박고 싶은 사건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사건들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 아니라
고쳐 쓸 수 있는 것들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장애인 누나를 구타했던 그 날은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가장 어둡고 수치스럽고 미안한 날이다.
그러나 그날이 아니었으면 내가 죄인인지 알지 못했던 날이었다.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시던 날들은 무섭고 이를 직면하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는 척 했던 밤들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데, 그 사건들로 인해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다.
크레용을 살 돈이 없어서 청소시간에 남들이 버린 조각을 몰래 주머니에 담았다가 그것으로 미술 시간을 버텼던,
창피했던 그 사건들이 그 가난이 그 사건들이 쓰레기통에 쳐박고 싶지만
그 사건들로 인해서 가난이 무엇인지 무엇이 사람들 앞에 부끄럽게 살게 되는 요소인지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고통들도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면 비록 고통스럽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이 재해석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의 눈이 열릴 줄 믿는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저와 여러분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해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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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들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듯이, 그것이 우리의 동일한 고백일 것이다.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자.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의 인생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해석이 된다.
우리 인생이 저주받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그 모든 것들이 재해석이 된다.
우리가 받았던 상처가 별이 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과거에 매여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알고 자유롭게 되자.
둘째, 그 복음의 광채가 내 가정에, 내 자녀와 가족에게도 비취게 해 주소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세요.
셋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그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그 삶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