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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결정을 할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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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결정을 할 때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도 회의의 결과를
안티오키아 교회에 알리면서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다고 하지 않고 성령과 같이 결정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지는 아주 쉽게 답이 나왔습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청소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공부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대화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요리를 해도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특히 요즘 저는 여기 밥상을 하면서 저의 조리가 정성을 넘어 사랑이 되고,
식탁에서의 봉사와 대화가 사랑이 되고 영적 대화가 되게 하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애를 써왔지만, 오늘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부족함, 곧 '성령과 함께'가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뭐든 사랑으로 하기로 잘 결정했다고 안심하였는데
사랑으로 하기로 성령과 결정하지 않고 그래서 사랑도 성령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그리고 제힘으로 하려 하는 잘못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옳고 좋은 것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고 완수하느냐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등급 매기기를 자주 하는데
결정과 관련하여 등급을 매기면 이럴 것입니다.
결정에 있어서 제일 미성숙한 것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을 남에게 미루는 것일 겁니다.
결정 장애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수준으로 결정 못하는 경우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이든 수도원 입회든 결정을 제때에 못하여
뒤늦게 수도원에 지원하는 비율이 높아지는데 부모의 사랑이 넘쳐서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그런 부모 밑에서 결정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자녀가 순종의 미명하에 결정을 미루다 보니 그리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비해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도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정하면
그만큼 성숙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럴 경우, 자기 결정에
책임지기 위해서 결정한 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성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잘하는 것도 성숙함이지만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이 더 성숙합니다.
같이 결정 내리지 못하고 독불장군식으로 결정한다면
이런 결정을 가지고 성숙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보다 우리 신앙인에게 더 성숙한 것이
바로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성령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원의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성령 송가’를 부르며
회의를 시작하는데 시작은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자기주장들을 내세웁니다.
이런 경우 이것을 절반만 성공한 것이랄까,
절반만 성숙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지만,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성령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의 결정으로부터 배우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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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이제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시사해줍니다. 곧 타인은 나의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동반자로 짝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고 하십니다. 이는 이미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 그 사랑을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손수 보여주실 바로 그 사랑,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고 하십니다.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대체 친구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이요, 또 하나는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친구 되는 조건은 주인이 하는 일, 곧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이는 한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 친구가 되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도 그리고 우리 서로 간에도 친구입니다.
한편,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라야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배척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놓을 때라야 친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벗으로 선택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호소를 듣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네 친구들 사이에서 그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면, 그 열매는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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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후회 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양보하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조건을 내걸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헌신적 희생의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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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팬데믹이 끝나면서 신문사에도 손님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올해에도 선배 신부님이 한 분 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면서 손님맞이가 시작됩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장을 봅니다. 숙소에 들어오면 간단한 안내를 합니다. 세탁기 사용법, 문의 비밀번호,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위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지하철을 타려면 매트로 카드를 빌려줍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지내면 됩니다. 기상시간이나, 식사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여행을 왔으니 편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좋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분은 공원이나 산으로 가고, 문화를 좋아하는 분은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합니다. 직원미사에 함께 하기도 하고, 주일미사에 같이 가기도 합니다. 후배 신부님도, 동창 신부님도, 선배 신부님도 잘 지내다 가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모처럼 교구의 이야기도 듣고, 사제들이 함께 있으니 신학교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신학교에서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신학교에서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났습니다. 6시 30분에 아침기도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8시에 아침식사가 있었습니다. 9시부터 수업이 있었습니다. 12시에 양심성찰이 있었습니다. 12시 30분에 점심식사가 있었습니다. 2시 30분에 오후 수업이 있었습니다. 6시에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7시 15분에 묵주기도와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10시에는 취침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10년을 신학교에서 지냈습니다. 규칙이 있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규칙이 있어서 학업과 기도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녀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땅을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은 신학교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제가 되면 굳이 신학교의 규칙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도 식사 표시만 하면 되었습니다. 안 먹는다는 표시를 하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도시간을 따로 정하지는 않지만 알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시간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만의 기도시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사도들을 보내면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회는 아직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이방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유대인들의 관습인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환영하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조상들의 제사문제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고,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상들의 제사는 한국의 고유한 관습이며 전통이었는데 교회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인정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설날과 추석에 조상들에 대한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사랑이라는 날개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율법과 규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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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에서 가장 기부를 잘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낯선 사람 도와주기, 금전적 기부, 자원 봉사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세계기부지수(영국자선단체 자선자원재단과 미국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매년 발표합니다) 순위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나라가 있습니다. 동남아에 있는 미얀마(2022년은 5위입니다)였습니다. 이 나라의 1인당 국민 총생산(GDP)은 우리나라의 1/3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잘 사는 우리나라의 순위는 어떻게 될까요? 조사 대상 119개국 중에서 88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2년 보고서에 나오는 상위 10개국 중 우리보다 못 산다고 평가받는 나라가 너무 많습니다. 1위 인도네시아, 2위 케냐, 6위 시에라리온, 8위 잠비아, 9위 우크라이나. 모두 1인당 GDP가 현저히 우리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기부는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행복한 사람,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남을 위해 기부한 뒤에 심리적 포만감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라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엔도르핀 분비가 정상치의 3배까지 올라가며,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고,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가 증가해서 불면증과 만성 통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나 선한 일을 쳐다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만 봐도 건강해진다는 ‘마더 데레사 효과’).
주님께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받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특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 자체가 결국 나를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라는 분이 먼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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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죄악이어야 한다(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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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내 영혼아 잠 깨어라,
거문고야 기이타야 잠을 깨어라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시편57,9)
화답송 시편이 좋습니다. 꼭 새벽을 흔들어 깨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나
‘소’씨라면
이름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겠다”
소나무 사랑을 고백한 짧은 시입니다. 예전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껴안아보며 쓴 짧은 자작시 입니다. 한곳에 오래 정주하다 보면 정주의 산과 나무들에 대한 애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써온 시들을 보면 산과 나무가 소재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요즘 5월 신록의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특히 날마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즐비한 수도원길 하늘길, 새벽길을 걸을 때면 나무들의 사열을 받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우러러 별들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똑바로 걷곤 합니다. 저절로 느껴지는 충만한 기쁨, 충만한 행복입니다. 2009년 심었던 애목들이 2023년 14년만에 이처럼 울창한 숲을 이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오랜시간이 흐른후 나무들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나무의 성장을 알 듯, 우리의 내적 성장도 나무처럼 우리는 몰라도 하느님은 아실 거란 생각이듭니다. 얼마전 원장의 강론중 아기가 얼마나 주변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르듯, 사람도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를거란 언급도 생각납니다.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사랑은 날로 성장, 성숙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적성장과 성숙을 상징하는 사랑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는 섬김의 학교로 정의하지만, 같은 규칙서를 사용하는 형제회인 시토회는 사랑의 학교로 수도공동체를 정의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의 학교, 인생에 대한 정의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이요, 아무리 공부해도 하느님 사랑에 비하면 사랑에는 언제나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추기경님은 고등학생 같습니다.”
예전 살아계실 때 도봉산을 산행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도선사에 잠시 들렸을 때 장난기 가득한 젊은 스님이 던진말에 추기경님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나 재수생입니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여전히 재수생으로 머문다는 뜻이겠습니다. 아마 평생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재수생으로 머물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랑도 선택이요 배움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나이만 먹었지 사랑에 무지한 이들이, 여전히 사랑에 참으로 미숙한 철부지 어른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학교,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성장하는 나무처럼 날로 성장하는 사랑의 여정인지 묻습니다.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3일간 요한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명하신 주님은 오늘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주님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분명히 드러나는 사랑의 롤모델인 예수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초연한 사랑,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산을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산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생명과 빛’의 ‘봄볕’같은 무사無私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제 집무실옆 짧은 길, 꽃길이지만 순간 꽃들을 보며 아카시아꽃 그윽한 꽃향기를 숨쉬며 꽃길을 걸을 때는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파스카의 꽃이된 듯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계속되는 복음 말씀의 진리가 참 좋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예로운 칭호가 주님의 친구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자들입니다. 저 역시 주님의 절친(切親)답게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하루하루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주님과 우정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소수의 엘리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누구에게나 주어진 영예로운 칭호, 주님의 친구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답게 품위있게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까? 주님의 친구답게 살아간다면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없이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참 맑고 향기로운 사랑에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사람이니 우리말의 묘미가 기막힙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함께가는 형제자매들과의 깨끗한 사랑의 우정입니다.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원로 사도들이 인정한 두 제자의 사랑입니다. 유다와 실라스를 이들과 동행시키며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 서간문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이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절친인 제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바르나바와 바오로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베드로, 야고보를 위시한 모든 사도들과 원로들 역시 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았던 무수한 주님의 절친들인 순교자들 덕분에 이렇듯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2000년 유구한 살아 있는 전통을 살아가는 가톨릭교회입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도 결정적이요 은혜롭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하나하나 주님께서 친구로 뽑았으니 풍성한 사랑의 열매로 친구답게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절친들이 되어 주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주님의 뜻에 정통하기에 이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꽃향기보다 더 깊고 그윽한 향기가 열매 향기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익어가는 사랑의 열매 향기는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요! 저는 날마다 주님 뵈올 기쁨에 한밤중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납니다. 설렘하니 생각나는 기사가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참 곱고도 아름다운 ‘설렘’이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25년 이상 한국적 성화를 그려온 심순화 가타리나 화백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가톨릭신문 2023.5.7.11면).
“제 작품활동의 원동력은 설렘입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설렘입니다. 저는 이 설렘 때문에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붓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첫사랑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의 모든 수행에 임한다면 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사람들’인 주님의 절친들인 사도회의 원로들의 결정은 얼마나 멋지고 지혜로운지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품위있는 편지의 전범을 보여줍니다.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할수록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형제들 서로간의 사랑의 우정도 깊어져 기쁨의 향기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늘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 까지 당신 진리 미치시기에,
높직이 하늘 위에 주여 나타나소서,
온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2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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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끔 우리 사회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평생 모은 것을 기부했다든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누군가를 구했다든지….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아직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따듯하구나.’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따듯합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과 같은 희망차고 따듯한 소식이 자주 들리길 바랍니다. 그러나 따듯한 뉴스가 자주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희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뉴스로 다뤄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친구는 무엇인가요? 어릴 적 한동네에서 살았던 사람? 같은 학교는 다닌 사람? 같은 나이인 사람? 분명 친구라는 명칭은 이러한 질문들 안에 걸쳐있겠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부족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한 동네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며 같은 나이라고 해서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친구를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주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친구가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그런 친구를 한 명이라도 가졌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말입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중에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겠지만 우리에게 전부를 나눠주는 친구는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친구에게 나눈 것처럼, 그대들도 그대들 안에 있는 사랑을 나눠주세요. 그렇게 서로 사랑하세요.
무죄 추정의 원칙
Nemo malus nisi probetur!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무죄!
섣부른
단죄를 조심하십시오.
한쪽 말에 현혹되어
다른 쪽을 죄인으로 낙인찍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죄를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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