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두 지도자-朴正熙 대통령과 李光耀 수상의 善意의 경쟁에 관한 逸話(월간조선 1999년8월호)
●美 타임誌가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의 20大 인물」에 들어간 위대한 두 지도자-朴正熙 대통령과 李光耀 수상의 善意의 경쟁에 관한 逸話
●李光耀:『제철소는 다른 나라에도 있다. 문화 유적지나 보여달라』
●朴正熙:『지금 싱가포르 하고 있는 걸 보면 잘 하고 있지. 잘 하고 있지만 거 뭐 조막만한 거 가지고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
金聖鎭 전 문화공보부 장관
朴正熙와 李光耀의 공통점
아시아인들에게 지나간 20세기는 歐美(구미)의 帝國主義(제국주의)와 軍國主義(군국주의)그리고 共産主義(공산주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世紀(세기)였다. 그러면서 민족적 自我(자아)에 눈뜨고 歐美세력들과 경쟁하면서 독립투쟁과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인 세기였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를 보내며 아시아에서 위대한 지도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朴正熙(박정희)와 日本(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戊), 그리고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를 뽑겠다.
朴正熙 대통령은 남북 분단과 이념 대결이라는 제약 속에서 농업국가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을 근대화시켜 민주주의 틀 속에서 근대 공업국가를 건설했다. 日本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敗戰(패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가해지는 미국의 압력과 일본 국내 좌파세력의 반대를 지혜롭게 극복해 가며 오늘의 日本을 이루는 토대를 확보해 냈다. 李光耀 수상은 공산주의를 물리치며 西歐式(서구식) 정치논리에 대항하는 동양적 가치관에 기초한 超(초)현대식 과학도시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이 세 지도자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自國民(자국민)을 설득하고 때론 독려하면서 서구로부터의 압력을 이겨내며 국가 근대화에 성공한 리더십의 소유자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朴正熙 대통령과 李光耀 수상에 얽힌 逸話(일화)를 말하려 한다. 평생 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작은 삽화 한 토막은 두 偉人(위인)의 성격과 사상을 後世(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에피소드라고 생각된다.
내가 아는 朴正熙 대통령과 李光耀 수상의 공통점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儒敎的(유교적) 가치관을 공유했으며 그 장점을 현대 사회에 되살리려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우리가 歐美 사회에 뒤질 이유가 없다,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당당히 歐美 열강과 경쟁했다는 점이다. 셋째 國家改造(국가개조)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에서 朴대통령과 李光耀 수상은 서로 「내가 앞선다」는 식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던 점도 사실이다. 그 라이벌 의식은 善意의 경쟁의식이었다.
「에스코팅 미니스터」
1979년 10월16일 싱가포르 李光耀 수상이 6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에스코팅 미니스터(정부를 대표해서 國賓(국빈)의 안내를 담당하는 국무위원)」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래된 이 제도를 급히 적용시켜 李光耀 수상을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李수상은 기개가 높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었다. 朴대통령과는 은근한 경쟁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비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듯했다. 우리 외무부가 李光耀 수상을 초청하려 외교 경로를 통해 수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보류되곤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초청을 수락한 데는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공부한 李光耀 수상은 미국의 저명한 학자나 정부 고위 관료들과 私的(사적)인 교분이 두터웠다. 예컨대 조지 슐츠와의 경우는 슐츠가 美국무장관으로 임명받자 李수상은 즉시 비서 한 명과 서류가방 하나 달랑들고 미국으로 날아가 슐츠의 집에 밤새 머물면서 세계문제를 논의하곤 했던 사이였다.
슐츠만큼 가까운 사람이 미국의 공공정책과 국제관계를 주로 연구하는 허드슨 연구소 소장 허만 칸이다. 李光耀는 허만 칸으로부터 싱가포르의 경제, 사회발전에 관한 많은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그런데 내가 1970년대 초 청와대 대변인으로 재직할 때 우연히 허만 칸과 알게 되었고 서로 왕래가 잦았다. 내가 뉴욕에 가게 되면 허만 칸은 내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찾아 와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朴대통령이 10월유신을 선포한 다음해인 1973년 11월에 처음 訪韓(방한)한 허만 칸은 그 후 1975년 2월과 1978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朴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朴대통령에게 신뢰를 넘어 감동까지 받았던 모양이었다. 허만 칸이 李光耀 수상에게 『당신이야말로 한국의 朴正熙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면 서로 의기투합할 것』이라고 권했던 것이다. 허만 칸의 권유에 李수상은 한국 방문을 수락하게 됐다. 허만 칸 덕분에 한국의 외무부도 체면이 살았다.
「제철소나 조선소 없는 나라 어디 있나」
청와대 의전수석실과 외무부측은 李光耀 수상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朴대통령이 李光耀 수상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추렸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긍지를 갖고 있던 포항종합제철소와 울산조선소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성과였다. 우리 정부는 그 동안 訪韓했던 외국 지도자들에게도 으레 이런 코스로 안내해 그들을 놀라게 하곤했던 노하우가 있었다.
李수상 일행의 일정표를 작성한 외무부는 싱가포르 외무성으로 문서를 보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싱가포르 외무성측(실제로는 李光耀 수상)은 우리가 제시한 일정표에 반대 메시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이유인즉 「제철소나 조선소는 다른 나라에 가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李光耀 수상의 질투어린 감정이 그대로 배어나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너희 나라 문화를 봐야겠다」면서 慶州(경주)의 「佛國寺(불국사)」를 지목했다.
이때문에 우리측에 비상이 걸렸다. 게다가 싱가포르 외무성에서는 李光耀 수상이 즐겨 마시는 음료수, 술 그리고 포도주 이름과 연도까지 지정해서 보내왔다. 보통 까다롭지 않은 國賓(국빈)이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특별히 「에스코팅 미니스터」를 붙여주기로 결정하고 나에게 그 特命(특명)이 내려졌다.
그렇다고 우리측이 포항종합제철소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國賓이 경주를 가기 위해서는 잘 닦인 고속도로를 구경시켜주면서 안내하는 것이 VIP 코스였으나 우리는 이 경로를 피하고 비행기를 이용해 포항비행장에 착륙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포항비행장에서 경주로 가려면 포항종합제철소 경내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면서라도 보라는 뜻이었다.
1979년 10월17일, 李光耀 수상 일행은 중앙청 환영식에 참석한 뒤 崔圭夏(최규하) 국무총리를 예방하고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등 공식 일정으로 하루를 보냈고, 이 날 저녁엔 국무총리 만찬에 참석했다.
다음날인 10월18일 일정은 성남비행장(지금의 서울비행장)에서 특별기편으로 포항까지 이동한 뒤 승용차로 경주 일대를 관광하기로 되어 있어 일찍 잠을 자 두려고 했다. 그런데 막 잠자리에 들 무렵 청와대로부터 급히 들어오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부랴부랴 달려 가보니 긴급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뒷날 「釜馬사태」로 알려진 부산 마산 지역의 시위 때문이었다. 국무회의에서 부산 소요사태에 대한 비상계엄령을 1979년 10월18일 0시를 기해 선포하기로 의결한 다음 나는 기자실에 들러 이 소식을 알리는 한편 공보 업무를 지시하는 등 뒤치다꺼리를 마친 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잠을 자려는 데 갑자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國賓을 모시고 관광에 나서야 하는데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이 사실을 李光耀 수상에게 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李光耀 수상이 일정을 취소하자고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잔 채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침 일찍 성남비행장에 나갔다.
명색이 정부를 대표하는 안내 장관인데 李光耀 수상에게 계엄령선포 사실을 말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공항 귀빈실에 도착한 李光耀 수상 일행에게 다가선 나는 아침인사를 한 뒤 「가는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예정대로 갑시다』
『수상 각하. 한 가지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뭡니까』
『부산에서 소요사태가 있어서 오늘 새벽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발동했습니다』
그런데 李수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아 그래요? 알았습니다』라고만 했다. 그때 李수상을 수행하던 큰 키의 吳作棟(고촉동·現 싱가포르 총리) 무역공업相이 끼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이 소요를 일으켰습니까?』
『反정부세력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이죠』
『아, 그래요? 정부에 반대하면 그 사람들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오?』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한 측근이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거, 북한정권을 지지하면 그냥 북한으로 가면 될 텐데 말이오』
이 말에 찬성도 반대도 못한 채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수상 각하 일행께서 경주 지역을 시찰하시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안심시켰다.
李수상은 예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알겠소. 예정대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비행기는 순조롭게 가을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나란히 앉은 李수상 부부는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씩 아래를 내려다 보곤 했다. 이윽고 포항비행장에 도착한 일행은 경북 도지사의 영접을 받으며 승용차에 올랐다.
李光耀 수상 부부가 앞차를 타고, 나는 바로 뒤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李수상의 心氣(심기)를 읽고 있었다. 차량들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니 李光耀 수상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경치를 보고 즐기는 듯했다. 잠시 후 차량이 포항종합제철소 경내로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부터 李光耀 수상의 고개는 정면을 향해 딱 정지되어 있었다. 「절대로 안 보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 왔다. 옆에 앉은 부인과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거대한 구조물이 沿道(연도)에 불쑥불쑥 나타나도 李수상의 고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李수상인지라 눈길조차 흘리지 않았을 것이란 게 뒷자리에 앉은 나의 짐작이었다. 나는 식은 땀이 흘렀다.
경주에 도착하여 佛國寺 경내를 둘러보면서 비로소 李光耀 수상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는가 싶더니 석굴암을 구경하면서부터는 종래처럼 밝아져 있었다. 이 날 일정은 경북 도지사의 저녁 만찬과 함께 끝났다. 내일 아침엔 비행기로 上京(상경)하는 일만 남았지만 나에게는 큰 짐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한 포항종합제철소에 대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李光耀 수상 일행을 다시 제철소 경내로 통과시키면서 공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노선을 변경해 대구비행장까지 國道(국도)와 고속도로를 이용하자고 했다. 경호실에서 즉각 반대를 해 왔다. 대통령의 결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청와대의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왔던 길을 또 다시 갈 수는 없지 않소.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가다 보면 주변 농촌 풍경이 아름다우니까 그걸 보여줍시다. 대통령께 말씀드려 경호실 협조를 받도록 해 주시오』
「善意의 라이벌」
잠시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朴대통령의 결재가 났다는 것이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일행은 경주에서 대구를 향해 차량 이동을 시작했다. 국도를 타고 가다가 京釜(경부)고속도로로 달렸다. 들판은 마침 가을 추수가 한창이었다. 포항종합제철소 경내를 통과할 때엔 고개는커녕 말 한 마디 않던 李光耀 수상이 고개를 연신 좌우로 둘러보며 부인과 무슨 얘기인지를 나누곤 했다. 올 때와는 정 반대였다. 나는 속으로 참 잘됐다고 생각했다.
대구비행장에 도착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李光耀 수상 부부가 창가에 나란히 앉았고 나는 복도 사이를 두고 옆에 앉았다. 李光耀 수상을 힐끗보니 좌석벨트를 맨 뒤 자기 신발을 보는지 고개를 숙이고는 도무지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니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야단났다 싶었다. 뭔가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고도를 높여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사인이 들어오자 李光耀 수상은 벨트를 푼 뒤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미니스터 킴』하고 불렀다.
『예』
『당신네 나라의 농촌은 실속있게 아주 잘 사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나는 「에라, 잘됐다」 싶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하게 경제발전이 잘 된 것은 고급 두뇌들의 역류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으킨 분이 朴대통령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다른 후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공부한 사람들이 전부 외국으로 빠져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이 집권한 뒤 외국에 있는 고급인력들을 끌어오기 위해 장관보다 많은 월급을 주면서 그들을 불러들여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라는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묶어서 공업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농업개발에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입니다. 고급 두뇌들의 역류 말입니다』
『잘 알겠소』
그리고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한 참동안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제서야 李光耀 수상이 대단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느냐」에 철두철미하게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朴대통령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상경한 뒤 朴대통령에게 내가 겪은 이야기를 했다.
『각하, 싱가포르도 대단한 나라지요. 李光耀 수상도 어지간한 분입디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응. 지금 싱가포르 하고 있는 걸 보면 잘 하고 있지. 잘 하고 있지만 거 뭐 조막만한 거 가지고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하며 싱긋 웃었다.
李光耀의 침묵
10월19일은 청와대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李光耀는 朴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1991년에 駐(주)싱가포르 대사로 임명받아 李光耀와 재회했다. 1994년 1월19일, 대우그룹 부회장으로 있던 나는 月刊朝鮮을 위해 李 前수상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등소평)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약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한 사람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