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李孝石, 1907년~1942년)의 생애와 문학
1.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
1)출생과 가족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이시후에게 오래 기다려지던 귀한 외아들이었다.
이효석의 부친은 1882년 6월 20일에 태어나서 1945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시후는 번안 저술을 하기도 했고, 1911년 6월 20일에는 벤저민 프랭클린릐
자서전을 편역한 『富蘭克林傳』을 보급서관에서 출판한 적도 있다.
그는 시를 쓰기도 했다는데 오늘날 그의 유작을 찾아볼 수는 없다.
1912년에 다시 평창으로 내려간 그는 10년간 진부면장으로 있었다.
호적에 의하면 이효석의 모친은 강홍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효석의 장녀 이나미에 의하면 강홍경은 이효석의 생모가 아니라고 한다.
그의 생모는 충주 출신으로 성씨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들이 다섯 살 되었을 무렵에
그러니까 1911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이나미의 주장이다.
어린 이효석과 계모 강씨의 사이는 별로 돈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친은 어린 아들을 약 40킬로 떨어진 평창 읍내의 평창국민학교에
입학시켜서 6년간 하숙을 하게 했다.
이효석이 중등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떠난 후부터 그는 사실상 강원도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시절과 대학시절을 통해 이효석과 막역한 친분관계에 있던 유진오는 훗날
이나미에게 이효석이 학창시절에 한번도 고향에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는 말은 종종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효석이 함경북도 경성에서 혼례를 올릴 때에도
부친만 올라왔을 뿐 계모는 따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이효석이 미처 철이 들지도 않은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잃은 후
사실상 부친으로부터도 격리된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만 했던 것이
훗날 그의 성격 및 작품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가령 그에게 혹시 상모증이나 혹은 고아 컴플레스 같은 정신적 결손이 있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이런 증세가 훗날 그의 인간혐오증이나 이기주의적 탐미의 습성과 직결되어
있지나 않은지 등의 핵심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노력은 뜻밖에 우리로 하여금
이효석의 문학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정신분석학적 과제를 두고 전문지식이 없이 섣불리
접근을 시도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다른 한 가지 것은 이효석에게
고향상실증같은 허전함이 늘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메밀꽃 필 무렵」같은 탁월한 단편을 썼지만 이 작품은 사실 영서지방을 무대로 해서
쓴 읽을만한 단편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효석의 고향상실증에서 의문을 풀 단서는, 그에게 평창 일대의 영서 지방은
사실상 국민학교 시절까지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고 성인이 되어 그곳에
살아본 기억이 비교적 박약했기 때문이다.
2)학창시절
이효석은 1910년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기까지 약 3년을 봉평에서 살았고
1912년에 다시 봉평으로 내려온 후에는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 다녔다.
이 봉평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훗날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몇몇 인물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 봉평에는 충주집이라는 주막이 있었고 이효석은
그의 글동무들과 함께 싸온 도시락을 이 주막에 맡겨 놓고 먹곤 하였다.
송싸라는 얼굴이 고운 여인이 주인으로 있던 이 충주집에는 장날마다 봉평에서
드팀전을 벌리던 <곰보영감>이라는 장돌림이 드나들며 주인과 통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성씨는 허씨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허씨와 함께 장을 돌던 사람으로는 조봉근이라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꾼도 있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허씨가 봉평장에 드나들 무렵에 봉평에는 조중원이라는 젊은이가 있어서
충주집에서 살다시피 했으나 장돌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봉평에서 이효석의 집안과 아주 가까이 지낸 인물로는 성공여라는 사람과 그의 딸
옥분이가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기울자 성씨 일가는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옥분이가 허씨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은 일이 있다는
소문이 충주집에서 흘러나왔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이효석은 훗날 이런 인물들을 허생원, 조선달 및 성서방네 처녀의 모델로 삼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불후의 걸작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다.
1920년 3월 25일에 이효석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국민학교 졸업성적이 우수했던 이효석은 졸업하던 해에 무시험 전형을 거쳐
경성제일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의 고보 시절 학업 성적은 늘 우수했다.
성적 평균은 대체로 85점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영어와 역사성적이 일관되게 좋은 편이였다.
상벌란에는 4학년 때와 5학년 때 우등상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행 근타란에는
<영리>, <활발>, <정직>, <근면>, <온량> 등의 긍정적인 평가만이 나와 있다.
고보 시절부터 그는 문학수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해일신보》1925년 1월 18일 자에 발표된 시 「봄」이 2월 1일자에
발표된 콩트 「旅人」이 바로 그것이다.
「봄」은 시에서 기본이 되는 은유와 아미지 등 비유법을 활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산문을 시행으로 나누어 놓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수업세대 문학청년의 습작 수준을 과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편 콩트 「旅人」은 소설에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플롯과 성격구성이
거의 되어 있지 않고, 오직 고난의 고개를 넘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제만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우화풍의 작품이 되고 있을 뿐이다.
제일고보를 졸업한 이효석은 그해에 경성제국대학예과로 진학하였다.
그가 택한 계열은 문과 A반, 즉 법학계열이였다.
이효석이 대학 예과 시절에 쓴 시들은 고보시절의 습작 「봄」에 비해 상당한 진경을 보여준다.
이 시는 원어가 일어로 쓰여져 있는데 습작시대의 이효석이 상당한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이후에 시를 더 쓰지 않고 오직 산문만 발표했다.
여기서 우리가 그 이유를 추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의 많은 산문 구절에 시적 색채가
농후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결론만은 내릴 수 있다.
대학 예과 시절에 이효석이 행한 창작활동중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1927년 2월에, 그러니까 그가 대학 본과로 진입하기 직전에, 《청년》이라는
잡지에 단편소설 「주리면-어떤 생활의 단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발표한 최초의 본격적 단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습작기의 작품답게 여러 모로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곧 이어 그가
쓰게 될 일련의 작품의 성격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즉 이효석의 문학세계에서 기본적으로 찾을 수 있는 인간관, 사회관 및
생활에서 아끼던 취향 등이 거의 이 단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27년 4월에 이효석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헉부 문학과로 진학하여
영길리어학영길리문학을 전공했다. 예과에서 문과 A반 과정을 마친 후에
법과로 진학하지 않고 영어영문학을 전공과목으로 택했다는 것은 일종의
방향전환이였지만 당시의 풍습으로 크게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에 보관되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본과 학적부에
의하면 그의 학업성적은 우수한 편이다. 그는 영문학 과목에서 주로
<우>를 받았고, 철학과 독일어에서만 <가>를 받았을 뿐이다.
그가 철학과 독일어 과목에서 영문학 과목만큼 좋은 성적을 올이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문학적 성향에 대해서 무언가을 암시해 주고 있지나 않을까 싶다.
가령 이효석과 마찬가지로 대학 예과에서 법학전공을 준비했던 유진오가 본과에
진급해서는 독문학이나 철학 전공을 원했던 적이 있었던 것과 이효석이
영문학전공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대조가 된다.
즉 이효석에게는 사변적이거나 분석적인 지성보다도 감각적이고 정감적인
감상의 능력이 더 많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학 성적에서까지
그런 능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28년 7월에 그러니까
그가 본과 2년생이던 해 여름에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문단에 데뷔하게 된 이효석은 1927년 단편 「기우」와 「행진곡」을 발표하는 한편
시나리오 「화륜」을 《중외일보》에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런 초기 작품들에 공통되는 것은 좌익이념을 선양하는 주제이다.
이는 이효석이 대학에 재학하던 5년간 (1925-1930)이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이 시기는 1925년 7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KAPF이 결성되어 동맹 안팎으로
이론적 논쟁을 벌이며 세력을 펴 나가다가 1931년 6월에 카프맹원의 제 1차 검거사건을 고비로
퇴조하기까지의 시기와 거의 겹치고 있기 때문에 이효석의 사상적 행적이 카프 예술운동의
성쇠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이효석이 1930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문단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경도하고 있는 신진작가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마치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이 작품을 쏟아 놓았다.
그 중에서 최초의 것은 「깨뜨려진 홍등」이다.
우리가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이것이
단편소설로서의 구색을 어느 정도 갖춘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왕에 나온 단편들, 이를테면 「도시와 유령」이라든가 「기우」같은 작품들에서는
사실 좌익이념이 생경한 구호로만 불려지고 있을 뿐 단편 소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기법도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문학적 가치가 의심받을 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깨뜨려진 홍등」은 그 서술방법에 있어서 상당한 진경을 보이고 있다.
이 단편은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이 자기네의 처지에 대한 진보적인
인식을 성취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기박한 팔자>라는 종래의 체념적 사고를 버리고
<이 문둥이 같은 놈의 세상>에게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성숙된 노동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란 뚜렷한 의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부영이나 채봉이 같은 인물들의 성격구성에 무리가 적고
그들이 자기네의 새로운 인식을 투쟁으로 승화시키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이효석은 작품 속에서 좌익이념을 열심히 펼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프의 예술운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당대의 술어를 빌어 말하건대, 한 사람의 <동반자 작가>로 남아서
카프 운동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유진오의 회고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동반작가라는 말은 프로 문학운동 조직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작품 경향은 프로문학과 비슷한 작가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기억한다.
사실, 효석과 나는 여러 차례 프로 문학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고 받았다.
그러나, 문학을 하는데 조직과 운동이 필요한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단 그 조직 속에 들어가면 동류 작가의 작품은 으레 칭찬하고 다른 작가의 작품은
으레 까야 하고 하는 것이 싫어서, 끝내 그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말았다.
석과 나는 만나면, 당시의 우리 작가들의 문학적 치졸을 이야기하고는 하였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에의 봉사를 위한 작가들의 무분별한 당파성을 <문학적 치졸>로 보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 쪽 사람들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카프 쪽 사람들은 카프에 가입한 작가와 동반자작가와의 차이는 그 사상이나
의식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할 의지의 유무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카프측에서 볼 때 소위 동반자작가들은 말만 있고 행동은 없는
위선가들로 비쳤을 것이며, 따라서 <동반자>라는 말은 어느 정도
멸시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효석은 이내 프롤레타리아 이념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탈피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상당히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19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그의 단편 소설들은
여전히 이 이념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효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직후에 일정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런 가난은 이효석을 몹시 자의식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극히 불행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 가난은 그가 바라는 이상적 삶을 실현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본능적으로
복장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이기도 했다.
1931년 3월경에 경제적으로 극히 곤궁한 상태에 있던 그는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으로 있던 중학시대의 은사 쿠사부까 조오지를 찾아가서 취직 알선을 부탁했고
쿠사부까는 그를 경무국 도서과 검열관으로 취직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 취직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실수였음이 이내 판명되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의 지식인들, 특히 글을 써서 발표하는 작가들은
경무국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효석의 취직을 배반이나 변절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효석은 취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갑기라는
카프계열의 청년을 길에서 만나 봉변하게 된다.
이효석은 이갑기에게 봉변한 후 한동안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도덕적 고립에 빠진 채 침통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유진오는 이 사건을 전기로 하여 이효석이 <종래의 ‘동반자’적 태도에서
순수문학의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단정적인
주장에는 언제나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건 이내에 이효석은 경무국을 그만두었으며, 이를 고비로 해서
효석의 왕성한 창작욕이 한동안 위축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온 작품들에서 이효석이 순수문학 쪽으로 완전히
전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좌익이념으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하며
새로운 창작 노선의 궤를 그리기 시작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1931년 7월에 이효석은 이경원과 결혼했다.
그녀는 경성에서 널리 알려진 부유한 양반토호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 슬하에서 성장했다.
이효석이 이경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29년 그러니까
그가 대학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효석의 맏딸 이나미에 의하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이효석의 고보 선배였고 일본서 고등사범학교에 다녔다는 박채길이라는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박채길은 경성보고의 교사로 있었는데 그 해 여름방학 때 이효석을 경성에 있는
이경원의 집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효석과 이경원의 사이는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며, 2년 후에
결혼할 때까지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효석이 자기의 부인을 여류문사로 만들기 위해 들인 노력은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가혹한 논쟁에 휘말리게 했다.
왜냐하면 1932년 1월호 《비판》의 「문단수침」란에서 이갑기는
이경원의 문필활동을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갑기가 이효석을 비난하고 있는 요지는 《삼천리》지에 실린
이경원의 글들이 실은 이효석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효석은 이 비난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고 이내 반박문을 썼다.
그는 자기가 형편상 잡지사 편집자의 양해 아래 이경원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려 한 적이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내 이경원의 이름으로 발표하려던 작품들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고 오직 한 편만이 《삼천리》에 실린 일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이경원의 작품발표를 둘러싸고 이효석이 이갑기와 논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그가 혼외정사를 가진 적이 있다는 최정희의 회고가 있다.
흔히 신혼의 열기가 식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여겨지는 시절에 그가 벌써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주므로 흥미가 있다.
이때 최정희로부터 비난을 받은 그는 <그 여자는 내게 색채 좋은 넥타이 정도일 뿐>이며
<좋은 색채의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걸을 것 같으면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게 된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외도에 대해서는 부인도 어느 정도 체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은 그의 자서전적 색채가 농후한 단편 「향수」에서 신병 요양을 위해
친정으로 떠나는 아내와 <나> 사이에 오가는 다음 대화에서 암시되고 있다.
나 혼자 남겨 두구 맘이 달지 않을까?
에이구 어서 없는 새 실컷 군것질해두 좋아요. 얼마든지 하라지
자금에 시작된 일인가 머. 이제 다 꿈만 하니.
큰소리 한다. 언제 맘이 저렇게 열렸던구. 진작......
이 대화가 얼마만큼이나 이효석 내외의 실제 심경을 반영하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군것질>은 그의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군것질>버릇은 그의 애정지상주의와도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이런 연애관은 그가 곧 쓰게 될 일련의 애정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탐미주의적이고
몰도덕적인 애정관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각별한 주목을 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화분』을 비롯한 많은 후기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애지상주의적 애정관은 그의 인간적 체질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심증을 우리는 별 무리 없이 굳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효석은 이갑기에게 봉변한 후 한동안 의기소침한 생활을 했음이 분명하다.
1932년에 그가 부인의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서울에서 처해 있던 답답한 형편으로부터 도피하자는 의도를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추측일 뿐 그 속사정은 알 수 없다.
하여간 그는 경성으로 내려가서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임하였다.
이효석은 1934년에 평양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그의 경성생활은 2년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비교적 짧은 기간은 두 가지 면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첫째로 이 기간에 그의 창작의욕은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이 침체는 1931년에 시작되어 1933년에 「돈」을 발표할 무렵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그는 「프렐류드」와 「오리온과 임금」을 발표했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둘째로 이효석의 경성시절은 그의 창작경향이 변화를 보이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돈」이 이 시기에 씌어졌다는 사실에서도 명시적으로 드러나거니와
그는 이 기간에 자기의 동반자작가로서의 역할에서 서서히 탈피하고 있었다.
「돈」은 그동안 그가 꾸준히 보여주던 좌익이념에 대한 관심을 전혀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좌익이념을 전혀 비치지 않은 최초의 소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편에 대해 주목해야 할 참다운 이유는 그가 장차 걷게 될 창작의 방향을
이 작품이 뚜렷하게 나타내 준다는 데 있다.
이 비교적 짧은 단편에는 식이라는 청년의 개인적 체험의 폭이 널리 담겨 있다.
식이는 자기가 애지중지 키워 온 암퇘지가 종돈장에서 겪는 일을 보고 분이라는
동네 처녀에 대해 자기의 간절한 애정을 떠올리는데, 이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이데올로기의 문맥을 떠나 애욕이 문제시되는 최초의 주요 사례이다.
「돈」이 발표되기 직전에 그가 구인회라는 순수문학 단체에
창립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구인회의 회원으로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경성 시절은 비교적 짧았던 편이지만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그로 하여금 자연과 자연의 변화에 새삼스럽게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합일이 그가 경성시절에 얻은 성과라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경성시절은 아주 소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성 시절이 그에게 참으로 중요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주을온천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빈번히 이 온천을 찾은 것은 그 지협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만주의 하르빈에서 온 많은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이 그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몇몇의 러시아인들과 사귀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하나하나 숭상하게 되었다.
이효석은 이국정취의 추구와 관련한 것들을 경성이라는 북쪽 벽지와 와서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이는 경성이 그의 처가고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보장해 주는 직장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가눙했다.
1932년 7월 19일에 그는 경성에서 장녀 나미를 얻었다.
1934년에 이효석은 평양으로 옮겨 가서 창전리 48번지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흔히 <푸른집>으로 불려지고도 하는
창전리 집에서 1940년까지 살다가 기림리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푸른집>에 살고 있던 1939년에 『화분』을 썼는데 이 집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활동중심지로 설정하는 것이 그의 상상력 발휘를 위해서 편리하다고 여겨졌을지 모른다.
이 집에 살고 있던 6년간은 이효석의 비교적 짧은 작가생활에 있어서 일종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였다.
그는 「분녀」, 「산」, 「들」, 「고사리」, 「메밀꽃 필 무렵」, 「장미 병들다」,
「낙엽을 태우면서」 등 수많은 소설과 수필을 썼다.
이효석은 숭실전문학교라는 평양 최고 학부의 교수로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고 있었고, 나미와 유미 외에도 장남 우현을 얻어
모두 다섯 가족이 창천리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1930년대 후반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편의상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는 동반자작가시절에 보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념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보이는 한편 그것으로부터의 조심스러운 탈출을 끈질기게 시도하고 있었다.
둘째, 그는 경성시절이 끝날 무렵에 쓴 「돈」을 기점으로 하여
셋째 이와 같은 창작 방향의 전환은 『화분』과 『벽공무한』같은
장편 소설의 집필로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 사상적 변모의 과정은 이효석의 소설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남죽이라는
여자인물의 변모를 통해 잘 형상화하고 있다.
「프렐류드」에서 혁명가적 정열에 몸을 사르던 여주인공 남죽은
「오리온과 임금」에서 나오미로 변장하여 능동적으로 애욕 속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다가 「장미 병들다」에 이르러서는 <벌써 좀먹기 시작한
그 어디인지 휘줄그러진 한 송이>꽃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주남죽이라는 여자 주인공이 걷는 사상적 행적은 곧 이효석이 한 동반자작가로서
걸어온 작가적 행적와 궤를 같이 하는 듯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흥미 있다.
그러나 이효석의 새로운 창작방향으로서의 선회는 그가 좌익이념을 아직 완전히 버리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오랫동안 그는 성을 문제삼는 작품에서조차 으레 좌익이념이 들먹여지게 함으로써
사상이나 성이 모두 어느 정도의 왜곡을 겪지 않을 수 없게 했지만 「돈」을 기점으로 해서는
성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들다시피 하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연도는 1936년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해에 「분녀」, 「산」, 「들」, 「고사리」, 「메밀꽃 필 무렵」등
일련의 중요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성의 문제이다.
산」은 자연의 포용력 속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노래하는
일종의 이효석 나름의 유토피아를 그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 중실은 자기에게 이 유토피아가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이웃에 살던 용녀라는
처녀를 산속으로 불러다 살림을 차려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성이 어떤 다른 이데올로기의 틀에 매이는 일이 없이 순수히 그 자체로만
절실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편, 「들」은 「산」에 비해서 좀더 명확하게 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나>는 좌익운동 끝에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하고 있던 중 동네 처녀
옥분이와 연분을 맺음으로써 성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뜬다.
「분녀」와 「고사리」는 모두 천진무구하던 소녀와 소년이 각각 성의 세계로 입문하는 이야기이다.
우선 「고사리」는 주인공 인동이 한 동네의 조숙한 소년 홍수와 역시 조숙한 소녀
순자와의 사귐을 통해 성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는 일종의 통과제례 이야기이다.
한편 「분녀」의 주인공 분녀는 성의 체험에 있어서 훨씬 더 발전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녀는 일련의 남성들을 겪어 나가는 동안 성숙한 성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이 마치 훔치고 뺏는 무엇인 양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명제가 은연중에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전편에 흐르는 시적 서정성 때문에 성의 문제가
묻혀 버린 채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단편에서도 주제는 성문제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이효석은 1938년 3월 31일에 숭실전문학교를 퇴임했다.
이는 바로 이 날짜에 이 학교가 폐교했기 때문이다.
1938년이면 제 2차 세계대전 및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각각 한 해 및, 세 해를 앞두고 있었지만
이때 이미 일제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해서 대륙침략을 시작해 놓고 있었다.
숭실전문학교의 폐교를 전후하여 일제는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강화하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를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
이효석은 수년간 재직했던 학교의 폐교로 인해 단순히 교수직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 때문에 우리말 대신에 일어로 작품을 쓰라는 압력까지 받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도움이 되는 소위 <신체제>의 글을 쓰라는 강한 요구까지 받고 있었다.
그래서 1940년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글줄이나 써서 발표하고 있던 작가들 중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그도 오늘날 우리들이 <친일 문학>이라고 부르는 글들을 몇 편 쓴 일이 있다.
1938년 3월 31일에 숭실전문학교의 폐교와 더불어 교단을 떠나야 했던
이효석은 1939년에 대동공업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이 무렵에 그의 생활은 반드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940년 1월에 그는 부인 이경원과 사별했기 때문이다.
이경원과의 사별은 그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그가 그 후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염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왕수복이라는 여인과 열애를 했는데 그녀는 영화배우를 한 적이 있는 가수로서
당시 평양에서 <방가로>라는 다방을 경영하고 있던 어떤 여인의 친동생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녀와 사귀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처음에는 두 사람이 친구관계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지고 그의 집에 그녀는 거리낌없이 출입했으며
그가 와병해서 세상을 떠날 때에 그를 극진히 간호한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1940년대 초엽부터 그의 건강은 악화하고 있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가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하고 만 것도 그의 기력이
쇠잔한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싶다.
나중에 밝혀진 그의 병명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그 당시의 의료수준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던 이 병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하여 1942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이효석-문학과 생애. 이상옥. 민음사(1992)
이효석. 이상옥. 서강대학교 출판부(1996)
김강사와 T교수 메밀꽃 필 무렵 외. 유진오, 이효석. 동아출판사(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