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강연 처음이었다"…100세 김형석 교수가 흠모한 도산 안창호 | 중앙일보
김형석 교수는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더라"고 말했다.
“그릇을 크게 가져라”
#풍경1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는
독립운동가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배후로 체포되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과
연루돼 4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도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던 큰 인물이다.
도산 안창호는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항일 독립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도산 선생은 크리스토교인이었다.
청ㆍ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 배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평양에서 서울로 왔다.
안창호는 당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다.
거기서 3년간 공부하며
서구 문물을 접하고 크리스토교인이 되었다.
그 뒤에는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신민회 등에서
활약했다.
1902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을사조약(1905년 11월)의 비보를 듣고
구국 운동을 펼치고자 돌아왔다.
그런 도산 선생이 평양 부근의 송산리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장소는 송산리 교회였습니다.
이 설교가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설교,
마지막 강연이었다.
저는 참 궁금합니다.
도산 선생은 목사가 아닙니다.
종교인도 아니다.
오히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그가 설교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어떤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던졌을까.
그의 마지막 설교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라도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형석 교수는 간디, 톨스토이와 함께 도산 안창호를 마음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중앙포토]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있다.
도산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송산리 교회에서 직접 들은 사람이 있다.
누구냐고요?
다름 아닌 올해 102세인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풍경2
김형석 교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마지막 설교에서 남긴
메시지를 말이다.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김형석 교수는
차분하게 당시 설교 현장을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송산리 교회에는 청중이 200명 정도 모였다.
도산 선생은 1시간가량 설교를 하였다.
당시 교회에서 하던 설교 시간으로 따지면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김형석 교수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를 기독교로 인도한 두 분의 목사님도 있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도산 선생 이야기를 할 때
존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1918년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
왼쪽부터 안필선, 도산 선생, 안수라, 안필립, 안수산, 이혜련 여사. [사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내게 신앙을 가르쳐주신 분은 두 목사님이다.
두 분 다 말년에 그렇게 존경받는
크리스천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다르더라.”
무엇이 그렇게 달랐을까요.
목회자의 설교보다
더 깊이,
더 강하게 ,
더 울림 있게
열일곱 김형석의 가슴을 적신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풍경3
김형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목사님들의 설교는 비슷비슷했다.
주로 교회 이야기를 하거나
크리스토교의 교리 이야기를 했다.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달랐다.
그는 ‘우리 사랑하자’고 웅변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주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는 달랐다.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시를 회고하던
김형석 교수는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저 어른은 애국심이 있어서,
크리스토교를 저렇게 크게 받아들였구나’ 싶었다.”
김 교수는 그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신학자다, 장로다, 목사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더라.”
그 말을 듣고서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릇의 크기’라는 말이
제 가슴에 날아와
깊숙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토교인이라고
다 같은 크리스토교인이 아닙니다.
불교인이라고
다 같은 불교인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릇의 크기’가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앞줄)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두 차례에 걸쳐 4년이 넘는 옥살이를 했다.
[사진 흥사단]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그가 가진 ‘그릇의 크기’는 얼마만큼이었을까요.
또 석가모니 붓다는 어땠을까요.
그의 내면을 담아내는 그릇은
과연 얼마만 한 크기였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세례를 받았고,
교회에 다니니까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겠지.
그렇게 마침표를 꾸욱 찍고서
내 신앙의 크기,
내 그릇의 크기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걸 더 키우고, 더 넓혀나갈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다”는
김형석 교수의 일갈은
아프게 날아와 박힙니다.
김 교수는 “그릇을 크게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큰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신앙밖에 못 가진다.
크리스토교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릇이 컸다.
그들의 그릇은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그릇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컸겠나.
그릇이 큰 만큼,
기독교 신앙 역시 그들은 크게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의 사진. 앞줄 가운데가 도산 안창호다. [사진 흥사단]
물론 작은 그릇, 작은 신앙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작은 신앙이 뭔가.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만 위하는 신앙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지금도 작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나.”
#풍경4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평양 근처 송산리 교회에서
마지막 강연을 하고서
8개월쯤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차례의 옥살이로 건강이
무척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두 차례 옥살이를 한 도산 안창호의 여윈 모습이다. [사진 흥사단]
지금 돌이켜봐도
도산 선생은 큰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거인을 아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서 푸념합니다.
종교계도 그렇고,
정치권도 그렇습니다.
왜 이 시대에는 큰 인물이 없느냐고,
왜 갈수록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도산 선생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자신의 어록에 남겼습니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지 않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도산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대한의 후손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적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나’에게로 돌리자.”
지금 되씹어봐도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조언입니다.
공적은 ‘나’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우리’에게 돌리는
2022년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향한
뼈아픈 충고로 들립니다.
결국 ‘그릇의 크기’더군요.
우리가 크게 보고
크게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종교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가 목사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도산 선생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세상에 화평이 있을 것이다.”
나의 편,
나의 신앙,
나의 진영만 담아내는
작은 그릇을 가진 우리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큰 그릇’을 가지라고
간곡하게 말합니다.
교수님은 25년간 일제 강점기를 사셨다.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나 같은 세대의 사람에게 일본과 손잡자고 하면 참 힘들다.
그렇게 힘들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 나가야 한다.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 우리도 결국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악은 더 큰 악을 낳고, 그건 또 더 큰 악을 낳는다. 우리가 더 높은 수준의 인격으로
마음이 좁은 일본을 불쌍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도산 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도산 선생은 뭐라고 말했나.
“일본을 타도하자고 하지 않았다. 원수를 갚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일본과 동등하게 살아야겠다고 했다.
우리도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말고, 뚜렷하게 국가를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했다.
그걸 위해 나라 밖에서는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나라 안에서는 모든 면에서 일본을 앞서자는 애국 운동을 했다. 도산 선생은 지금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이 일본 사람보다 더 높아지자고 했다.
더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갖자고 했다.”
[출처] “그릇을 크게 가져라” 김형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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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선생은 한때 흥사단 이사장직을 맡았을 정도로 도산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나에게 행운을 빼앗겼다는 아쉬움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자기는 꿈에 한번 도산 선생을 뵌 일은 있으나,
나(김형석)는 직접 뵈었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나 도산의 마지막 강연과 설교를 듣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열일곱 살 때 일이다.
도산이 병 치료를 받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선생이 평양 서남쪽에 있는 대보산 산장에 머물고 있을 때
20리쯤 떨어져 있는 우리 고향 송산리를 방문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덴마크의 농민 학교를 모방해 설립한 학교가 있었고
주변 마을에서 신도 200여 명이 오는 교회도 있었다.
그해 초가을이었다.
도산이 찾아와 내 삼촌 집에 머물면서 토요일 오후는 마을 유지들에게 강연했고
이튿날에는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신사 참배 문제로 1년간 평양 숭실학교를 쉬면서
고향에서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행사가 도산의 마지막 강연과 설교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선생은 얼마 후에 다시 수감되었고 이듬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 일생에 가장 서글픈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도산의 강연을 들었기에
82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내용과 인상을 잊지 못한다.
안병욱 교수가 나를 부러워할 만도 하다.
도산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 사랑과 인재 교육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잊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랑을 애국정신으로 보답하자는 간곡한 호소였다.
도산은 웅변가였다고 하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더 컸다.
웅변이기보다는 기도하는 열정이었다.
설교를 끝내고 마을을 떠나다가 자그마한 기와집 뒤 길가에서였다.
저만큼 살려고 하면 몇 평쯤 농사를 지어야 하며
소와 돼지도 기르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도산의 그 표정에서 나는 우리 민족 모두가 저 가정만큼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드리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얼마 전에 나는 사흘 동안 충남의 아산, 예산, 부여 지방을 다녀 본 일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 도산공원에 들렀다. 도산 동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선생님 마음 편히 쉬십시오.
지금은 독립했고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세월이 지나면 국민 대부분이 선생님이나 저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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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한 세기의 삶. 100년 가까이 사는 어른들이야 있지만,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처럼 한 세기를 ‘온전하게’ 영유한 이는 손에 꼽을 것이다. 말 그대로 ‘구구팔팔’, 백 세를 바라보면서 몸도 정신도 팔팔하다.
1920년생, 세는 나이로 아흔일곱인 김 명예교수는 요즘도
매일 산책과 하루걸러 수영하고,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닌다.
강연을 가면 청소년기에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희끗희끗한 초로가 돼 인사를 한다.
한국 철학계의 1세대 교육자이자 수많은 젊은이의 멘토가 됐던 베스트셀러 수필가,
신학자나 목회자를 넘어서는 깊이를 가진 신앙인.
김 명예교수의 삶은 크게 세 측면에서 조명된다.
해방 후 크리스토교를 탄압한 북한 정권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월남한
그는 반(反)공산주의자가 됐지만, 정치적으로 ‘열린’ 보수로 평가받는다.
개신교 일각에선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볼 만큼 물신(物神)을 좇는
세속화된 교회에 쓴소리하는 종교적 진보주의자다.
그가 한 세기에 걸쳐 만난 사람들을 엮으면 우리 현대사가 된다.
수시로 오욕과 질곡이 교차했던 풍랑의 세월에서 김형석은 흔들림 없이 잔잔하고
올곧게 우리 사회에 맑은 물줄기를 대준 어른이다.
김 명예교수를 지난 12월 18일 그가 30년 넘게 몸담은 연세대 부근 카페에서 만났다.
쌀쌀한 날씨에 연세대 교정으로 모셔 사진촬영을 하느라 송구했으나,
꼿꼿한 걸음이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고,
사진기자의 이런저런 주문에도 내내 미소로 응해 주셨다.
―건강하고 편안해 보이십니다. 얼마 전 TV에 나오셔서 말씀하시는 거 보니,
수영도 계속하시고요.
“하루건너 한 번씩 가죠.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게 30분 될까.
운동이라기보다도 그저 내게 맞는 것 같아서. 이제 한 30년 넘었네요.”
―선생님께서는 뭐든 한 번 하시면 길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운동은 50대 중반쯤 건강에 마음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영을 해왔죠.
연세대에도 31년간 재직했고, 특수대학원 강의까지 치면 50년을 강단에 섰습니다.
교회 등에서 외부 강연도 수천 번을 이어가고 있죠.”
―요즘 일상은 어떠십니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산책도 하고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딴 생각할 틈이 없이 열심히 사는 것,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게 건강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선생님, 어릴 때는 병약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많이 나빴습니다. 한 이십 될 때까지 나는 항상 어느 정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살았어요.
사십 되니까 늦게까지 건강할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요.
오십이 되니까 이제는 나도 남과 같단 말이지요.
그런데 칠십 되니까 남들보다 건강해졌어요.
젊어서 건강한 사람들도 보면,
내 몸이 건강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무리하다가 일찍 죽어요.
나처럼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오래 살아요.
백수(白壽)하신 한경직(1902∼2000) 목사님도 그런 글을 쓰신 적이 있어요.
나도 그편에 들죠.”
―선생님이 건강하게 되시고 오래 일하시는 데
신앙생활이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옛날 얘기인데 초등학교 졸업할 14세 때,
건강에도 자신 없고 집도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정월 초하룻날 밤에 꿈을 꿨는데,
내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있다가 하늘을 올라가 버리더래요.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허약한 우리 집안 장손이 올해 죽으려나 보다, 하셨대요.
당시 교회는 조금씩 다녔죠.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한테 한 번 매달려봐야겠다.
그래서 철은 없지만 내 생애에서 기도다운 기도를 드리게 돼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건강을 주시면, 그 건강이 허락되는 동안 나를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테니까 나한테 건강을 주셔야겠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해 중학교에도 가고 서서히 건강이 좋아져서 뜀박질하다가 쓰러지는 일이 없어졌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를 한 게, 잠재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가 뭔고 하니 삶이 끝날 때까지 일하는 것, 그렇게 됐죠.”
당시 기도를 통해 갖게 된 순명(順命)의 자세는 건강을 되찾은 것뿐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 듯하다.
그의 고향은 평양 만경대 부근 송산리(松山里)다.
평양은 한반도에서 크리스토교를 처음 받아들인 곳이다.
송산리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법 큰 장로교회가 있었다.
크리스토교를 떼어 놓고 그를 얘기할 순 없다.
―부모님이 크리스토교 신앙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우리 아버님이 무엇이 계기가 돼서 크리스천이 됐는지 난 몰라요.
그런데 성경을 많이 읽은 분이에요.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내용을 준비하면서 아버지한테 많이 물어보곤 했어요. 아버지는 열심히 교회를 나가지는 않으셨어요.
누구에게나 신앙을 권고하지도 않으셨어요. 집사도 아니고, 그런데 욕심을 내지도 않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신앙이 있나, 없나, 좀 의심했어요.”
부친은 어떻게 보면 ‘교회주의’보다 ‘성서주의’ 신앙인으로 볼 수 있다.
부친의 이런 신앙적 자세가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명문인 숭실중학교를 다니셨습니다.
“당시로선 드물게 기숙사가 있어서
북간도의 용정을 비롯해 부산, 전남 등 전국에서 학생들이 왔어요.
나이는 세 살 많았지만, 시인 윤동주와 같은 반이었어요.
키가 커서 뒷자리에 있었어요.
장로교 계통의 미국 선교사가 교장이었던 시절이에요.
당연히 신사참배를 거부하니 총독부에서 학교 문을 닫으라 했어요.
그러니까 교장이 떠나야 했거든요.
우리는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에 다니느냐, 거부하고 학교를 그만두느냐가 고민이었어요. 결국 윤동주는 용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나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어 휴학을 했어요.
1년이 지나 주변 어른들이 ‘강요당하는 참배가 신앙적으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더 큰 목적을 위해 복학을 하라’고 타일러 복학을 했어요.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처음 신사참배를 하는데, 당시 정두영 교장 선생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해요. 그걸 보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더 다져졌어요.”
―당시 평양에는 민족과 교회 지도자분도 여럿 계셨는데, 기억할 만한 일들이 있는지요.
“고당 조만식 선생님 강연도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 설교도 듣곤 했어요.
송산리 바로 옆 대보산에 도산 선생의 산장이 있었어요.
그분이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건강이 악화하자 일제가 가석방을 해줬어요.
물론 사회활동을 하면 큰일 났죠.
그래도 이 어른이 우리 동네에 오셔서 우리 삼촌 집에서 하루 머무시며
동네 사람 20∼30명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하셨어요. 교회에서 설교도 하셨고요.
내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여서 그 마지막 설교를 아직도 기억해요.
도산 선생은 애국심으로 가득한 분이에요.
그저 민족, 국가 걱정만 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가셔서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도산 선생의 마지막 강연, 설교를 내가 들은 셈이에요. 참 많이 배웠어요.”
―일본 유학을 가시게 됩니다. 신학을 택하지 않고 철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 한때는 목사, 신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와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을 봐서,
신학은 세계사 흐름에서 좁고 철학은 신학보다 더 먼저 있고 더 멀리 가는 큰 학문이라고 느꼈어요. 철학을 어느 정도 하고 신학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니 신학으로 못 가게 됐어요.
예를 들면, 연세대 신학대학에 서남동(1918∼1984) 교수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해 신학 교수가 됐거든요.
그분이 늦게 미국에 가서 신학을 다시 정리하려니,
거기 신학자들이 프로이트를 보거든요.
나중에 그분이 연대신문에 ‘내가 지금까지 신학 공부를 한 것이 모두 헛것이었다.
그저 성경만 읽고 인간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출발해야겠다’고 고백을 했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목사들, 신학자 중에 프로이트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근래 스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나오는데 목사나 신부가 쓴 책은 왜 없느냐고 해요.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교리만 얘기하고 스님은 인생을 얘기하니 그런 거예요.
예수는 무슨 얘기를 했는고 하니 교리 얘기는 안 하고 인생에 관해 얘기했어요.
그게 진리라고.
그랬으면 우리 목사·신부도 인생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동양에서 2500년 된 고전인 공자의 ‘논어’를 읽은 사람이 없어요. 그것은 정신적 지도자로서는 결격이거든요.”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들어가셨습니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조치대는 가톨릭 계통이었지만, 기독교 교육과는 상관이 없었죠.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후배였어요.
나는 사상적으로는 니체에서 키르케고르에의 길을 밟았지만,
그리스 정신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는 길이었고,
무신론을 받아들여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일본은 기독교인 수가 적지만 신자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요.
크리스토인은 도덕적이고 지성적이며 모범적인 인물이라는 대접을 받죠.
일본에선 500명만 모이면 큰 교회고 교회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여러 일본 교회를 다녀봤지만,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된 것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같은
걸출한 개신교 사상가가 나왔기 때문이에요.
크리스토교계뿐만 아니라 일본 지성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인물이죠.
무교회주의자로 불린 그분의 강연 모임에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등도 참여했어요.”
대학생활을 끝낼 무렵, 그는 강제징집당할 위기에 놓인다.
이를 거부하면 구속됐는데,
숭실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윤동주는 잡혀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김 명예교수는 극적인 행운으로 현해탄을 건너는 배편을 구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이번에는 공산 정권의 크리스토교 탄압에 봉착했다.
―선생님 자서전(‘나의 인생 나의 신앙’, 2004)에 짧게 언급됐습니다만,
북한 김일성과 동향(同鄕)이었고 만난 적도 있다고요.
“그게 이렇게 돼요.
만경대가 김일성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만경대 옆 동네가 우리 집 송산리,
거기서 6㎞쯤 떨어진 칠골이 김일성이 태어나 자란 곳이에요.
그때는 김성주였죠. 김일성 어머니(강반석)가 친가인 칠골에 와서 김일성을 낳거든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젖이 곪아서 못 먹였어요.
내 외할머니뻘 되는 분이 강 씨인데,
큰 외삼촌을 낳으려고 칠골에 왔다가 거기서 석 달 동안 김일성에게 젖을 먹였다고 해요. 나중에 그이의 아들이 공산당에 잡혀가니 ‘내가 김일성이를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우리 아들을 잡아갔다’고 한탄했어요.
연배가 (김형석 보다) 여덟 살쯤 많아 본 적은 없지만,
김일성은 내가 다닌 창덕소학교를 먼저 다닌 선배예요.
열여섯 살쯤 만주로 갔다고 해요.
해방되고 그해 여름에 김일성이 만주에서 고향에 왔어요.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성주 너는 공부 많이 못 했지만,
형석 군은 일본 유학도 다녀오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다, 하고 저에게 소개도 했어요.
김일성의 조부모와 저의 삼촌, 사촌들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죠.”
―김일성과 대화도 나눠 보셨습니까.
“종전 뒤 고향에 온 김일성과 하루 오전을 함께 보냈어요.
김일성한테 해방돼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야겠느냐 물어보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첫째 친일파 숙청, 둘째는 토지 국유화, 셋째는 자본가를 다 추방하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 등 여섯 개를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봤죠.
그런데 그이가 평양으로 가고,
두세 달 후에 김일성 환영회가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렸어요.
동네 사람들이 갔다가 저녁에 오더니,
‘김일성이 누군가 했더니 칠골 살던 성주래. 성주가 김일성이야?’하며 모두 놀랐죠.”
현대사학계 일각에선 ‘가짜 김일성설’에 대해 학술 가치가 없다고 일축한다.
김 명예교수는 김성주가 김일성이 되는 경로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당시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증축하고 중학교를 재건해 교장으로 있던
그는 점점 죄어 오는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결국 38선을 넘기로 한다.
가족과 헤어져 고초와 우여곡절 끝에 말 그대로 사선을 넘어 월남에 성공하고
가족과 재회한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만든 중앙학교에서 교감을 지내시는 등
7년간 교편을 잡다 연세대에 발을 딛게 되십니다. 당시에 어떠셨나요.
“중앙중·고등학교에 한 7년 있으면서 학생들하고 참 정이 들었어요.
그때 고민한 게 교육자로 남느냐,
아니면 대학에서 학자가 되느냐였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대로 오게 됐어요.
당시에 중요한 결정을 했다고 보는데,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사람이 하는 일을 내가 혼자 담당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첫째는 철학 교수로서의 책임, 나한테는 소중했죠.
그다음, 연세대에 오기 전에 가르친 학생들이
‘왜 우리를 버리고 가느냐’고 안타까워했어요.
대학에 와서도 키워야 할 어린애를 버리고 온 어머니 같았어요.
지금도 고교생을 위해 강연해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갑니다.
그것이 수필을 쓴 계기가 됐어요. 세 번째는 물론 종교생활이고요.
신앙운동, 종교운동은 제가 보기에 어느 목사 못지않게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세 가지를 혼자서 다 한 셈이에요.”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잘해오셨는데, 선생님은 국민에게는 수필가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셋씩이나 했으니 하나도 성공한 게 없지요, 허허.
그래서 이다음에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 보는데 수필의 영향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중앙학교 시절 제자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려고 수필을 썼어요.
당시엔 우리나라에 수필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피천득 서울대 교수가 ‘인연’이라는 책을 내면서 수필을 알렸지요.
그다음에는 수필다운 게 별로 없었는데, ‘고독이라는 병’을 처음 내고 ‘영혼과 사랑의 대화’가 나오니까 피천득 선생 다음에 많은 독자를 가진 사람은 내가 됐죠.”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수필집으로써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다.
―얼마나 팔렸을까요.
“내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그 책이에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박계주의 장편소설 ‘순애보’였는데, 여러 해 동안 6만 부였어요. 그런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1년간 그보다 몇 배 나갔다고 해요. 처음으로 비소설 분야가 소설 분야보다 더 많이 판매된 책으로 기록됐지요. 이 책을 내게 된 일화가 있어요. 1년 동안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는데, 대학에서 본봉은 나오지만 수당은 안 나오거든요. 애들은 많고, 생활이 걱정돼 책을 내면서 출판사에 경제적 어려움이 오면 도와달라고 했어요, 갚아 주겠다고. 그런데 아내가 다른 얘기는 다 해도 돈 걱정은 안 하데요. 그런가 보다 하고 1년 뒤 돌아와서야 베스트셀러가 된 걸 알았지요.”
그의 책은 지금도 힘을 발휘한다. 지난해 10월에 낸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철학과현실사)가 반응이 좋고, 9월에 낸 ‘예수’(이와우)는 출판 불황기에 아주 이례적으로 1만 부 정도가 팔렸다. 종교 서적으로는 ‘대박’ 수준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보-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세계가 흘러온 것을 봤으면 좋겠어요. 20세기 전반까지는 세계 역사가 좌우로 갈려서 적대적인 사고방식 하나만 있었어요. 이제는 열린 가치관, 다원적 가치관으로 바뀌었어요. 철학도 절대적인 가치관에서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넘어왔어요. 미국이 왜 강한 나라가 됐는가, 공화당이 더 열린 사회로 가느냐, 민주당이 더 열린 사회로 가느냐로 경쟁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나라보다 앞서 다원사회로 갔어요. 폐쇄사회로 가는 것은 희망이 없어요. 우리나라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주의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 진보예요.”
―폐쇄적 진보란 말씀이군요.
“폐쇄적 진보는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건강한 보수가 앞으로 몇 년간은 더 필요해요. 열린 보수가 앞으로 나타나서 우리 사회를 다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우리가 거기에 힘을 모아줘야 해요. 젊은 사람들은 보수를 싫어하지만 열린 보수라면 이 문제는 해결돼요.”
―보수도 너무 기득권만 지키고 부패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해 보수가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텐데요. 우리가 힘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나 법이 지배하는 사회까지는 올라왔어요. 그런데 지금 정치를 보면 다시 내려오려고 해요. 제일 나쁜 게 정치 지도자들이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나는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바로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예요. 질서란 말에는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질서가 지배하는 것은 선한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예요. 질서사회는 윤리와 도덕과 교육이 군림하는 사회예요. 여기로 올라가야 하는데 못 가고 있어요. 보수가 이런 지향점을 명확히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열린 보수가 되는 길이에요. 그 바탕이 되는 사람들의 변화는 정치가보다 교육자, 종교지도자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교육자를 말씀하셨지만, 교육의 위기라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노무현정권 때 교육정책에 영향을 끼친 한 원로교수가 세미나에서 교육정책을 얘기하면서, 우리나라도 중·고등학교가 평준화됐으니 이제 국립대가 평준화되면 된다고 해요. 서울대 평준화하고 사립대 평준화까지 가면 성공한다고 하대요.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정의를 평준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봐요.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대학들도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야 해요. 또 하나 우리 교육에서 제대로 된 책 읽기가 부활해야 합니다. 학생 때 고전을 읽혀야 해요. 그게 첫 번째예요. 지난 1세기 동안 독서를 가장 많이 한 나라들만 성공했어요.”
―우리 개신교가 교회 대형화와 목회세습, 세속화로 어느 때보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너무 폐쇄돼 있다, 좁아졌다, 그런 생각을 해요. 인류에 기독교가 더 공헌했느냐, 아니면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이 했느냐. 인문학이 더 했거든요. 교회가 교회주의에 빠져서 교권과 교회권만 있지 교리보다 중요한 인생의 진리는 외면했어요. 하나님만 찾다가 인간이 없어지면 그 종교는 필요가 없잖아요. 한국 교회는 이제 병들었어요. 헌금 안 하고 교회에 안 나와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은 죄인입니다, 그렇게 설교했으면 우리 사회악이 많이 줄지 않았을까요.”
인터뷰 = 엄주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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