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주의 깊게 자세히 살펴보시는 주님/ 시편 139:1-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oi6WoK7DEx0
저는 여러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일정 잘 소화하고 돌아왔습니다. Global Gateway University의 Doctor of Ministry in Preaching with Multimedia 학위식은 은혜로웠습니다. 총장님께서는 박사가운에 걸치는 후드는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명예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는 일하는 일군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청교도졸업여행도 은혜로웠습니다. 자동차로 이동한 거리가 무려 4,300KM나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10배나 되는 먼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장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이동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매일 예배를 드렸고, 수업도 받았습니다.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나눔의 시간은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충만했습니다. 참고로 자동차 안에서 부총장님이 퀴즈를 두 문제 냈는데 상금이 100달러씩이었습니다. 누가 받았을까요? 저와 마형락 목사님이 받았습니다. 마씨 집 안의 경사였습니다. 저와 마형락 목사님은 그 돈으로 42명에게 컵라면을 사줬습니다. 그리고 식사 한 끼를 바닷가에서 랍스타로 먹는다고 저에게 후원을 요청해서 300달러를 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지만 섬길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미국을 10번 정도 다녀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곳들이 있어서 늘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제가 가보고 싶던 곳을 다 가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졸업 여행은 저를 위한 일정이었다고 믿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랑케스터에 있는 사이트 앤 사운드 극장에서 뮤지컬 모세를 봤습니다. 이 극장은 성경을 기반으로 한 뮤지켤을 상영하는 곳입니다. 하루 2번 공연을 하는데 한 번에 4천 명씩 입장이 가능합니다. 하루 8천 명이 공연을 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공연이었습니다. 저는 그 극장을 보면서 기독교문화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극장을 통해서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고 계십니다.
아미쉬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그들은 18세기에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아미시파는 기독교 일파로써 1,720년대에 랭커스터에 정착했으며,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의 삶을 여전히 고수하며 살아갑니다. 자급자족을 통해 타인의 도움 없이 삶을 영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옷을 직접 만드는데 성장기 여자아이들은 드레스를 핀으로 고정해 입고 해가 갈수록 자라는 키에 맞춰서 핀을 조정합니다. 여전히 프로판 램프와 철을 사용하며, 심지어 냉장고도 가스로 작동한답니다. 우유를 짜고 우물물을 퍼 올릴 때는 압축기를 사용합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들은 2천 년대에 들어설 무렵에서야 태양열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켄터키주에 있는 노아의 방주를 다녀왔습니다. 실제 크기로 제작했는데, 노아의 방주는 성경의 기록대로 길이 300규빗(약 135m), 너비 50규빗(약 22.5m), 높이 30규빗(약 13.5m)의 건물 7층 높이, 축구장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규모로 전부 목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노아의 방주의 거대함에 놀랐고 내부의 디테일에 놀랐습니다.
저는 맨하탄에 네 번 가봤습니다. 하지만 벌집 모양의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조형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슬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봤습니다. 저는 졸업여행을 가기 전부터 베슬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을 가졌는데, 가이드가 그냥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제가 맨하튼을 벗어나기 전에 “베슬을 보지 않나요?”라고 질문하니 가이드가 “아참!”하고 버스를 돌려서 베슬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슬은 허드슨강 일대를 약 28조원을 들여서 새롭게 개발했는데 그 중 일부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1층만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세계적이 명문 예일대학교 물을 먹은 사람입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식수를 마셨습니다. ㅎㅎ. 저는 하버드를 나온 사람입니다. 하버드는 건물이 220개나 되기 때문에 문이 많은데, 그 중에 한 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저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두 학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세워진 학교이지만 그동안 신앙의 색깔은 지워지고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하버드 생들이 사탄숭배를 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지훈집사와 윤현경집사를 대신해서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하게도 두 사람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윤형경집사는 학교에서 네 명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적은 올 A를 받았고요. 제가 버지니아에서 총 4번의 설교를 했는데, 두 사람은 윤집사의 시험 때문에 첫 번째 설교는 듣지 못했고 세 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저의 마지막 설교들 들은 후에 숙소에서 받은 은혜를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그동안 미국인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있었고, 제 설교를 영상으로 보고 있으면서 채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집회에 참석해보니 채워진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두 사람에게 저를 대면하며 들었던 설교가 큰 은혜가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이 미국생활 잘하고 귀국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과 세계 보건을 위하여 위대하게 사용되어지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설교를 들었던 분들의 반응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조목사님은 전에 20년 동안 매년 한 번씩 미국에 와서 집회를 해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워싱턴목양교회 안성식목사님은 수많은 목회자들 가운데서 저의 절친인 조목사님에게 제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제가 한 설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고무적인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좋은 교제가 될 것 같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여러분의 기도 덕에 시차 없이 미국 일정을 잘했기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자! 이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니체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목사라고 아들에게 목사의 신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만난 목사님 중에 한 분은 아들이 여호와의 증인에 빠졌습니다. 그것이 목사님이게는 큰 고통이지만 자식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은 딸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답니다. 그 목사님은 그 상황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니체는 19세기 자유정신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정신이란 그 어떤 체계와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극히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방랑하는 정신, 관습적인 것에서 해방된 정신, 또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식에 이르는 길을 허용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자유정신이란 탈 체계, 탈 규칙 그리고 탈 관습과 탈 권위에 이르게 합니다. 결국은 진리의 절대성마저 부정하게 합니다.
니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불쌍한 한 영혼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1월에 그는 졸도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정신착란 상태로 살다가 1900년 56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편14:1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의 인생의 말년은 정신이상으로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니체는 천제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존재였습니다.
1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살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피다’는 히브리어로 ‘חָקַר’(하카르)입니다. 영어로 ‘search’입니다. 뜻은 ‘찾아보다, 살펴보다, 뒤지다, 수색하다’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자세히 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대충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깊게 자세히 살펴보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김상복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우리를 적나라하게 보신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자세히, 주의 깊게, 적나라하게 살펴보시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며, 나를 자세히 살피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자세히 아십니다(1-6절).
요즘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이 시 139편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세히, 주의 깊게, 적나라하게 살펴보시기 때문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감찰하시는 눈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가까운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다 보십니다. 사람은 너무 미세한 것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직관하십니다. 적외선 카메라 비교 사진을 봤습니다. 대단한 기술입니다. 한 사진은 낮 12시의 사진이고 다른 사진은 밤 12시의 사진입니다. 밤 12시에도 그렇게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마치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낮의 사진보다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시간과 장소와 거리를 초월해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십니다. 심지어 사람의 깊은 속까지 살피십니다.
시편기자는 2절에서 주께서 자기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자기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고 말합니다. 2절 하반절에 보면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 같지만, 우리의 생각까지도 밝히 다 아십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의 생각까지도 다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주를 위하여 선한 생각을 할 때, 그 생각까지 살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을 해주십니다. 때로는 내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생각을 할 때도 하나님은 그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역사했습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는 그 마음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넘겨주고 은 30냥을 받기로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시치미를 떼고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자기 발을 내놓고 천연덕스럽게 앉자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요 13:27). 유다의 마음이 마귀에게 빼앗겨서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서는 주께서 시편기자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습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시편기자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삽니다.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쓸데없는 말과 행동을 하건 선한 말과 행동을 하건 주님께서는 정확하게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행심사를 아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16절에서 시편기자는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님이 자기를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기에 관하여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느 정도로 아십니까? 시편 기자는 ‘안다’라는 동사를 일곱 번 사용하였습니다. 왜 안다는 말을 일곱 번이나 사용했을까요?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데, 완전하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삶 전부를 알고 계시며, 멀리서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뿐 아니라 나의 길과 눕는 것, 나의 일과 쉼까지도 아시고, 내가 입으로 중얼중얼 댈지라도 주께서는 이미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실까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자세히, 주의 깊게, 적나라하게 살펴보시기 때문이지만 또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니 시편기자가 주께서 자기의 내장을 지으셨으며 모태에서 자기를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14절에서는 주님이 자기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시고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자기가 잘 안다고 고백합니다. 15절에서는 자기가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셨다고 할 때는 장성한 청년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와를 만드실 때도 똑같이 장성한 처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아상태로 만드셨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로 시작하게 하셔서 세상에 출생하게 하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의학이 뭡니까? 어느 분은 ‘의학이란 하나님께서 심히 기묘하게 만든 사람의 몸의 구조를 연구하여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확률상 정리해 놓은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의학은 사람의 몸의 원리를 찾고 연결 관계를 찾아 치료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 사람이 발견한 원리대로만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몸은 심히 기묘하게 만들어져서 의학과 과학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적인 치료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치료는 의학만이 아니고 정신도 마찬가지고 삶의 모든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과 정신과 몸과 관계와 환경의 치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가 쩔쩔매고 있는데, 어떤 노신사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내가 좀 봐드릴까요?”차 주인은 노인이 뭘 알까 싶었지만 그 신사가 하도 정중하게 말하기에 거절을 못하고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차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면 좀 봐주세요.” 노인이 차 보닛을 열고 잠간 살피고 무엇인가를 만졌습니다. 그리고는 “시동을 걸어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차 주인이 노인의 말을 듣고 시동을 거니 시동이 아주 쉽게 걸렸습니다. 차 주인이 깜짝 놀라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고장 난 데를 단 번에 찾아내고 그렇게 쉽게 차를 고쳤습니까?”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차를 만든 포드입니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를 잘 알듯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의 상황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크로닌이라는 분이 광산촌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 쫓겨 온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쫓겨 온 데다 월급마저 적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웃으며 여유 있고 자신 만만하게 일했습니다. 그녀는 진료시간이 끝났는데도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더 하곤 했습니다. 그런 간호사의 모습을 본 크로닌 박사는 안쓰러워서 간호사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실 텐데 말이죠” 그러자 간호사는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사의 그런 믿음이 불편한 환경에서도 당당하고 빛나는 삶을 살게 한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디에서 사느냐, 무엇을 하느냐, 얼마나 가졌는냐가 중요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동원목사님은 참 대단히 목회를 잘하시는 분이고 설교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이분도 대학에 떨어졌었답니다. 목사님은 자기 같은 사람을 왜 떨어트렸는지 지금도 대한민국 교육부가 의심스럽답니다. 그래도 공부를 잘 했다고 늘 생각을 했는데, 촌에서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로 왔고, 서울 와서도 공부를 잘했는데 처음으로 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황당하더랍니다. 인생이 노래 보이고, 죽어버리고 싶고. 거기다 그 무렵 목사님의 집안이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시고, 집이 파산상태였습니다. 목사님은 앞길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아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조계사를 찾았답니다. 그리고 불당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평상시에는 부처님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였답니다. 세상의 아무런 번뇌, 걱정, 근심을 모르는 얼굴로 보였답니다. 그런데 그날 방황하고 고통스럽고, 헤매고 있었던 청년 이동원에게는 부처님의 얼굴이 좀 다르게 보이더랍니다. 갑자기 그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뜩, 이동원 청년 속에서 문뜩, 솟아나는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저 분이 내 사정을 알까? 저 분이 내 사정 알까, 저 돌 속에 편안하게 앉아계신 저분이 나를 알까? 지금 인생의 문턱에서 좌절해버리고 꺾여버린 나의 고통과 내 좌절과 내 눈물과 내 아픔을 저 분이 알까, 저분이 과연 나를 알까’ 그러다가 갑자기 부처님 뒤에 close up되는 영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청년 이동원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몸부림치는 예수, 십자가에서 고통하고 있는 예수, 보기 흉한 예수, 젊은 예수,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의 영상이 Close up되면서 이동원의 마음속에 문뜩 이런 질문이 솟았습니다. ‘그 분이면 알까. 아냐, 그분이면 알지 몰라. 고통 받으신 예수, 몸부림치시는 예수, 그는 알지 몰라.’ 이 문득 일어난 호기심,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 예수에 대한 호기심.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은 불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니 내적인 만족이 있어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를 자세히, 주의 깊게, 적나라하게 살펴보시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나는 하나님을 도저히 피할 수 없습니다(7-12절)
시편기자는 5절에서는 주님께서 자기를 둘러싸시고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시편기자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둘러싸고’라는 말은 원어로 ‘צוּר’(추르)라는 말인데, 그 뜻은 ‘밀다, 압축하다, 누르다“입니다. 이 말은 군인들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피할 길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앞뒤를 밀착하여 포위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6절에 보면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아시고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자신이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 시편기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도 주님 앞에서 피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8절에 보면 시편기자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려갈지라도 거기 계시다고 했습니다. 9, 10절에 보면 시편기자가 바다 끝에 가도 주님이 거기서도 자기를 인도하시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11-12절을 보면 자기가 하나님을 피해서 흑암에 숨어도 하나님께 숨겨질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며 자기가 하나님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에게 사명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욥바에서 다시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욥바로 갈 때도 그를 보고 계셨고, 그가 배를 탈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배 밑층에서 잠을 잘 때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요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도원 원장님은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못 생기고 모든 것이 부족한 한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불평불만을 했습니다. 원장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래 좋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그것을 풀어 갖고 와 보라. 그러면 내가 왜 그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다.” 원장님은 제자들에게 새 한 마리씩 나눠주면서 “해지기 전까지 각자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새를 죽여서 가지고 오거라. 절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죽여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질 녘에 제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수도원 마당에는 제자들이 죽여 온 새들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었던 제자는 아직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한참 후 그 제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는데, 그 손에 새를 산 채로 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쾌재를 불렀습니다. 원장님은 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너는 새를 죽이지 않고 그냥 갖고 왔느냐?” 못생기고 둔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원장님! 원장님께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새를 죽여오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으슥한 곳을 찾아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기 때문에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원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제자를 총애하는 이유는 이제야 알겠느냐?”
요셉은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상인들에게 팔렸습니다.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의 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탐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요셉은 그녀에게 자기가 그녀와 동침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자기 손에 위탁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녀와 동침하는 것은 큰 악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요셉과 동침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일하러 주인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는 보디발의 아내만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편재성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든지 계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에도 계시지만 가정에도 계시고 직장에도 계십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 아내가 저에게 “당신은 강대상 위에서나 강대상 아래서나 똑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단한 칭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아내의 칭찬은 과찬입니다만 제 아내가 저를 그렇게 본 것은 아마도 제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지어 술집에도 계시고 카지노에도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다가 바쳤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바치기로 마음먹고 가진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면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꼼수를 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의 반은 감추고 반만 가져다가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과 그들이 품은 잘못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5: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의 마음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신령한 삶이고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3.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보배로운 생각을 하십니다(17-18절).
17절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에게 너무나 보배롭고 그 보배로운 생각이 너무나 많다고 고백합니다. 18절에 보니 자기가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을 세려고 해도 셀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이 모래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시편기자를 향하여 보배로운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시편기자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보배로운 생각을 하십니다. 그 수를 세려고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보배로운 생각을 많이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를 때릴 생각을 하십니까? 그를 괴롭히는 생각을 합니까? 아니죠. 상대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보배로운 생각을 셀 수 없이 많이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존재기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셨고 그런 구원의 역사를 베푸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답이 요한복음 3:16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즘 청년세대가 참 안쓰럽습니다. 취업전문 포탈업체에서 청년세대 2,88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결혼을 안하겠다가 아니라 포기하겠다고 표시했답니다. 내 집 마련, 출산, 연애도 포기했다는 응답이 각각 50%선에 가까웠습니다. 결혼을 포기한 이유 1위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입니다. 우리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난했지만 결혼을 못하리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없어도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결혼해서 살다보니 당연히 자식도 낳고, 살림도 늘어나고, 내 집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결혼과 내 집 마련과 출산, 연애 등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믿음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보셔서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청년들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합당한 짝을 준비해두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청년 때 결혼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게 없었습니다. 방 하나 장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결혼하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하던 제 아내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 아내에게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 제 아내가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님을 통해서 저를 소개 해주셨습니다. 그때 그 전도사님이 “우리 과에서 제일 괜찮은 전도사인데 만나볼래?”라고 했다더군요. 그 말은 과장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저를 만나보니 제가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아내가 기도하는데 “네가 그를 도와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두 아들도 주셨고, 살 집도 주셨고,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기적적으로 사택을 주셨습니다. 제게 돈을 구하게 하시더니 돈을 줄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마치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셔서 고기와 떡을 주신 것처럼 저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분이 670만원을 사택 계약금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이사하려고 전세를 뺏는데 그때 받은 계약금을 저의 사택을 얻기 위한 씨앗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100만원 씩 봉투에 넣어서 가지고 온 사람들이 50명이 넘었습니다.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희한한 방법으로 집을 갖게 된 예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볼 때 어두움으로 보는 경향이 큽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어둡게만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보배로운 생각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을 어둡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배로운 생각으로 보배로운 상황을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기적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