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그대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어느새 원소절(元宵節)이다.
원소절은 일월 십오일을 뜻하는 말이다. 해가 바뀌어 첫 번째 맞이하는 보름날은 봄기운이 시작되는 날이라던가.
하기에 북방의 거도 장안 근교는 적설 가운데 은근한 봄기운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뇌우는 잔설(殘雪)을 디디며 청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꽤 여러 날을 유곡(幽谷)에서 보냈다. 그는 노류장원에도 묵지 않고 청산장에도 묵지 않았다.
그가 혼자 풍잔노숙을 하며 종남산(終南山)의 후미진 골짜기에서 이십여 일을 보낸 이유는 포달랍궁에서 얻은 뇌특달뢰의 심득(心得)을 완벽하게 터득하기 위함이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은 산에서 전해졌다.
하나같이 가공한 무공이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뇌특달뢰의 무공은 그에게 하나의 서광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는 유곡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포달랍궁의 무공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었다.
…….
청산장에는 현판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뇌우의 뜻이기도 했다. 청산장은 황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황하 바로 곁에 세워져 있다면 풍광이 더욱 좋을 것이되, 그러할 경우에는 황하가 대 범람할 때 수마(水魔)에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 하기에 장원을 세운 이는 풍수지관(風水地官)에게 촉탁하여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으며, 쾌적하고 온유한 삶을 만끽할 수 있는 담아청려(談雅淸麗)한 장소에 장원을 지은 것이다.
청산장은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뇌우는 늘 천하게 살아왔다. 청산장주로서의 삶은 그가 꿈에서라도 그리워해 마지않았던 공자대부의 삶이되, 정작 그러한 삶이 시작되자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드는 것이다.
여하튼 그는 시묵회(詩墨會)에 참하기 위해 소항(蘇杭)에 다녀 오기라도 하는 듯 느긋한 걸음으로 장원으로 접어들었다.
길을 쓸고 있던 하인이 그를 알아보고 절을 한다. 그러나 경박하게 수다를 떠는 자는 없다. 하인들 가운데는 벙어리들이 많다. 그것 또한 총령주의 안배로 비롯된 일이다.
뇌우는 느릿느릿 걸어 내원으로 들어서는 가운데 청력을 발휘해 일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만에 하나라도 상승무학을 지닌 자가 있다면 살기를 품은 호흡소리이나 맥동하는 심장소리가 그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다.
일대를 아무리 유심히 살핀다 하더라도 은잠자가 있는 흔적은 없다.
'총령주의 배포는 대단하다. 그는 날 믿고 있다. 빌어먹을…….'
뇌우는 총령주를 세 번 만났을 뿐이다. 수석교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억을 할 수 있으되 총령주에 대해서만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그는 소림사의 요인이리라. 어쩌면 소림사의 장문인 자신일지도 모른다.
호법살마전은 소림의 전통과는 완전하게 상반된 조직이다.
그들은 일반 강호세력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부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다. 그리고 제거해야 할 대상에 따라서 수많은 보조인물들이 동원되곤 한다.
모든 조직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진다. 상위자는 하위자를 알아도 하위자는 상위자에 대해 알 수 없다. 또한 극소수 인물을 제외할 경우에는 정작 장소를 이동하고, 누군가를 만나 연락을 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여하튼 뇌우는 조직의 핵심이다. 그가 사라진다면 조직은 절반 이상 허물어진다.
다른 강호집단이라면, 늘 누군가가 뇌우를 추적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뇌우는 누구에게도 추적당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늘 누군가 뇌우를 추적했었다.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은 바로 수석교두.
그러나 몇 달 전부터는 누구도 뇌우를 추적하지 않았다. 사실, 뇌우가 탈출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뇌우를 잡을 수 없다.
수석교두, 그 역시 뇌우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잔향…… 그녀가 인질이다.'
뇌우는 뜰을 가로질렀다.
기녀였다가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 그녀를 그리도 한스럽게 사랑했으면서도 그녀를 정작 소유하게 된 이 시점에 그녀를 상대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너무나도 고독한 탓일까, 누군가와 짝이 된다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일까.
가까운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젯밤 비가 성기고, 바람도 스산하더니, 깊은 잠도 남은 술기운을 지우지 못하네.
묻노니, 밤길을 걷는 사람이여 해당화(海棠花)는 괜찮나요?
압니까, 모릅니까, 정히 초록은 살찌고 분홍이 야위려 함을……?
초록이라 함은 봄기운 가운데 살아나는 신록을 뜻하는 말이리라. 그리고 분홍은…….
그것은 달빛 아래 반짝이는 눈의 빛깔이리라.
뇌우는 창을 통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금석(金石)에다가 낙관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은 조각도로 정성스럽게 조각을 하는 그녀의 이마에는 몇 방울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화장을 한 여인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건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옥잔향이 소녀시절부터 기녀로 살았다 하되, 그 이전 그녀는 명문대가의 후예로 귀족적으로 살았었다.
하기에 그녀가 지니고 있는 취미는 강호명문의 요조숙녀들이 즐기는 고급 취미이지 시정(市井)의 유녀(遊女)들이 즐기는 저속한 취미가 아니다.
옥잔향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하며 일에 열중했다.
뇌우는 강호를 주유하며 여러 여인을 만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그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여인은 별로 없다. 지금 그의 망막에 아름다운 얼굴을 투영시키고 있는 여인 이상으로 그를 흥분시킨 여인은 하나도 없었다.
하기에 뇌우는 그리도 강렬히 옥잔향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대하는 감정이 약간은 다르다.
지난 수년 이래 지금처럼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게 되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환상도 신비도 주지 않는다. 그녀는 어느 정도 아름다운 여인일 뿐이다. 실로 기묘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와 맺어진…….
아마도 그녀에게는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뇌우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했다.
내일 아침 땅을 휩쓰는 봄바람이 사나우면…….
아아, 볼 수 있을까, 녹엽(綠葉)에 잔홍(殘紅)이 머무는 것을……!
애잔하며 달콤한 노랫소리 가운데 뇌우는 한 여인을 기억했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여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손을 가진 여인, 아직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인.
빙혈군주(氷血君主).
자꾸만 그녀가 떠오른다.
뇌우는 그녀의 신비한 푸른 눈을 기억하고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를 생각하다니, 어리석게도…….'
빙혈군주는 너무나도 먼 곳에 있는 여인이다.
뇌우는 그녀의 회유를 거절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는 뇌우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바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여인과 다르다.
그녀는 강철의 날개를 가진 나비이다.
과거 뇌우는 남을 부리는 지위에 있는 여자들을 경멸한 바 있다. 그러한 여자들은 천한 처지의 남자들에 대해 동물시하는 습성이 있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생활한다. 그러하기에 뇌우는 그러한 처지의 여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복수심을 키워왔던 것이다.
조직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이 지닌 두 가지 재산인 암기력(暗記力)과 용모, 가운데 용모를 선택하며 그러한 여인들을 농락하는 풍류남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이되 만감이 교차한다. 그럴 즈음이다.
"기왕 여기 오셨다면 안으로 드십시오……."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옥잔향이 다가섰다.
'아……, 내가 긴장을 풀고 있었군.'
뇌우는 옥잔향의 체취를 맡으며 얼굴을 창백해졌다.
살수는 한순간이라도 방심해선 아니 된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연결되는 사선이다. 헌데, 옥잔향 곁에만 서면 무공이고 뭐고 모든 것을 잊고 마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그러하다.
그는 호흡을 감추고 맥박소리를 감추는 훈련을 받았는데, 무공을 모르는 자처럼 신음 소리를 내고 장탄식을 토했던 것이다.
옥잔향은 뇌우가 마른 나뭇가지 밟는 소리를 알아듣고 방을 벗어난 것이다.
"밤이 늦었소. 들어가 주무시오."
뇌우는 무뚝뚝히 말했다.
"제게 너무 무정히 대하지 마십시오. 절 선택하신 이상 절 마음대로 대하십시오."
"으음……."
"그리고 절 불신하지 마십시오. 제가 노류장화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여인의 갈 길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처지입니다."
옥잔향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여인의 눈물처럼 강한 무기는 없다. 뇌우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임을 느꼈다. 그는 십만 무사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이상의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하여간 안으로 드십시오. 그러잖아도 지난 가을에 신첩이 담가둔 황국주(黃菊酒)가 잘 익었을 것 같아 사람을 기루에 보내어 술독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황국주는 주담자(酒曇子 :술을 담는 항아리)에 담겨 있다. 방안의 조명은 황촉에 의한 것이되, 달이 환한지라 구태여 촛불이 필요 없다.
"재앙을 쫓는 도소주(屠蘇酒)로 여기고 마시십시오."
옥잔향은 주담자에 국자를 담갔다가 꺼냈다. 그리고 그윽하고 강렬한 술 향기가 방안 가득 퍼졌다.
술을 청자 잔에 따랐다.
"이 잔을 세 번 거듭 비우시지 않으신다면 신첩 흐느낄 거외다."
"잔을 비울 테니 울지는 마시오."
뇌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잔을 쥐었다.
일순 남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교차된다. 과거였다면 묘한 전율을 느낄 것이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마치 애검을 매만지는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한번 안아본 여인은 극단적 감정을 주기 마련이다. 지극히 좋아하게 되거나 지극히 혐오하게 되거나…….
세 잔 술을 비우는데 일각이 걸렸다. 그 가운데 창 너머 폭죽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옥잔향은 뇌우가 술잔을 비우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생끗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천하의 미남자이십니다."
"후후……!"
"정말입니다. 송옥(宋玉)이라는 전설상의 미남이라 하더라도 상공을 능가하지는 못했을 것이외다."
"과찬이오."
"사실, 예전 상공에게는 천박함이 있었는데 지금의 상공에게는 그러한 면모가 조금도 없습니다."
"……."
"죽림의 학자나 자금성의 고급관리라 하더라도 상공 같은 기품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천한 기질이 사라졌다면 성장한 게 아니라 타락한 것이오. 사실 과거의 나는 은자 한 냥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었으되 현재의 나는 이 장원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은자 오백 냥은 써야 하는 처지……!"
뇌우는 옥잔향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강하게 불타고 있다. 늘 냉정하기만 했던 그 눈에 이러한 정염을 불사르기 위해 수년을 바쳤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정작 그 소원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쁨보다 묘한 부자유함이 느껴지는 건 그의 체질이 철저하게 고독한 체질이기 때문이리라.
"할 말이 뭔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혹시 기거에 불편이 있는지, 아니면 파혼을 생각하는지……."
"파혼이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다시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신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버리거나 다시 기루에 들어가 많은 남자들과 멋대로 어울려 몸을 망쳐 버리겠습니다."
"미안하오."
뇌우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과거에는 뇌우가 적극적이고 옥잔향이 피하는 입장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러한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옥잔향의 숨소리가 가빠진다.
"상공은 늘 출타하시고…… 하인들과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으니 하루를 지내기가 적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미안하오."
"상공에게 늘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
"남자란 집안에 틀어박힐 경우 왜소해지기 마련입니다. 남자란 환갑을 넘은 후 은거를 해도 됩니다. 젊어 은거를 하다 보면 정신상태가 병적이 되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상공이 늘 나만 생각하고 가깝게 머무는 소인(小人)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상공이 그럴 분이라 여겼다면 아무리 돈으로 절 샀다 하더라도 제 진정을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바라는 게 뭐요?"
"아,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뇌우는 할말을 잊고 말았다.
'아아……!'
생각해 보면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일가를 이룬다면 아이를 가져야 한다. 옥잔향이 어찌 뇌우의 입장을 알 수 있으랴. 뇌우는 고아로 자라났고 직업살수로 성장했다. 그는 직업살수 생활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가정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신의 자식을 낳아 고아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에 옥잔향을 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류했던 것이고, 숭산에서는 그를 안정된 장소에 붙잡아두기 위해 옥잔향과 강제로 맺어지게 하여 뇌우를 당황시킨 것이다.
"남아도 좋고 여아도 좋습니다."
"……."
뇌우는 아까부터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달빛이 창을 물들인다. 원소절의 달답게 크고 화려하다.
"쌍둥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여간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정을 주어 훗날 의지할 대상으로 만들고도 싶고……! 사실 상공의 업을 잇기 위해 아이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은 여자의 좁은 소견에서 생긴 생각입니다. 여러 날 거듭 생각해 내린 결심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은 어떠한 말로도 바뀌어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옥잔향은 미녀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다. 그녀는 한 가정의 정실부인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아이 하나가 생긴다면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상공이 절 싫어하여 다른 여자를 거느리겠다면…… 차라리 제가 나서서 상냥하고 아름다운 첩실을 골라 드리지요."
"그런 소리는 마시오."
"아아……, 아닙니다. 상공은 제게 아까운 분이되 너무나도 먼 분이기도 합니다. 상공은 고독 속에 머물러 계시는 분입니다. 하기에 제가 어떠한 지성으로 상공을 봉양한다 하더라도 상공은 결국 혼자 천하를 주유하실 분입니다."
옥잔향의 눈에 습막이 촉촉하다.
뇌우는 문득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옥잔향은 뇌우의 그러한 감흥을 느낀 듯 보다 요염한 자태를 취했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 하더라도 남자에게는 강하기 마련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여자이기에……!
여자에게는 남자를 분석하는 본능의 더듬이가 있기 마련이다. 옥잔향은 유난히 강한 더듬이를 가진 여인이다.
"정사 횟수가 거의 없기에 아이가 들어설 기회가 없었나 봅니다. 지난번 달거리도 멈춤이 없었으니……!"
옥잔향의 볼이 붉어진다.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피를 쏟는다. 그로 인해 여자는 보수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이 세상 여인들에게 임신의 공포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강호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고쳐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거의 다 남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제가 날짜를 짚어보니 오늘이 길일(吉日)이더군요. 하기에 오늘 안으로 상공이 오시기를 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옥잔향의 입술 빛에 촛불 빛이 어른거린다.
그녀는 처녀라면 감히 부끄러워하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아내라는 지위는 이렇듯 여자를 용감하게 만드는 지위인지…….
"이 밤 혼자 잠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옥잔향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뇌우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뇌우의 손에 냉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밤공기가 싸늘했기에 옥잔향의 뺨이 차갑게 식은 것이다.
옥잔향은 뇌우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에 닿는 순간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호흡소리는 점점 뜨거워졌다. 뇌우의 손가락은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느릿느릿 애무를 시작했다.
최소한 이번의 정사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까.
그는 여자를 즐겁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과거, 그는 그러한 일을 하여 돈을 번 바도 있다. 그는 소년시절 코피를 쏟으며 일곱 여자를 하루에 경험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여인들의 음부에서 풍기는 악취를 몇 시진이고 거듭 맡아야 했다. 그리고 한 줌 은자를 거머쥐고 난 후 그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그 지독한 악취를 입에서 없애기 위해 독한 죽엽청을 사발로 들이키는 일이었다.
옥잔향을 만나 이후 그러한 생활은 정지했다. 그날은 바로 조직이 그를 선택한 날이기도 했다. 수년 사이 정사를 했다면 옥잔향과의 정사뿐이다.
뇌우는 장안의 파락호, 돈을 벌기 위해 터득했던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가장 완벽한 풍류남자는 자신을 위해 정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오직 여자를 생각할 뿐이다. 자신의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 여자를 거느리는 자가 듣는 것은 그 여자가 자신의 돈을 노리고 일부러 내는 흐느낌 소리일 뿐이다.
보통 여자들은 늦게 달아오른다. 그러하기에 일단 여자를 흥분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짙은 애무가 필요한 것이다.
뇌우의 손가락은 나비가 된다. 옥잔향의 피부는 꿀을 숨긴 꽃잎이다. 나비가 꽃잎에 날아내렸다가 떠오를 때마다 꽃잎이 파르르 떨린다.
나비는 꽃잎이 더욱 깊은 속으로 들어가고…… 꽃잎은 떨어져 내릴 듯 흔들리다 못해 흐느낌 소리를 낸다.
뇌우는 옥잔향을 침상에 눕히고 발가벗겼다.
옥잔향은 뇌우가 자신의 바지를 쉽게 벗기게 하기 위해 엉덩이를 살짝 쳐들었다가 내렸다. 옷을 다 벗은 여인은 신비를 잃은 전설과 같다.
한 번 정복당한 여인 또한 사라진 신화이다. 그러나 지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옥잔향의 여체야말로 모든 남자들을 굴복시킬 영원한 우상이었다.
뇌우는 천천히 침상 위로 올랐다.
그는 옥잔향이 자신의 모든 체중을 감수할 경우 고통을 느끼리라 생각하고 손바닥으로 침상을 짚어 몸의 자세를 고정시켰다. 옥잔향은 두 팔을 쳐들어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은 상태다.
뇌우는 천천히 방아찧는 자세를 시작했다.
옥잔향의 표정은 고통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들에게 성교란 지독한 고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성에 길들여짐에 따라서 지독한 환희로 뒤바뀌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석녀(石女)는 첫 경험으로 지독한 폭행을 당한 여인이기 십상이다. 그러한 여인들은 성을 혐오하기 마련, 하기에 남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 마련이고, 일생 내내 침상 위의 환희에 대해서는 무시를 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옥잔향은 그러한 점에서 불행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독한 고통 가운데 첫 경험을 치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뇌우의 모든 장단점을 받아들이리라 맹세하였기에 그 지독한 형벌의 기억을 잊고자 노력했다.
지금 그녀는 뇌우가 정신적으로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자신을 얼마나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남자인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상하체가 물가로 끌려나온 물고기의 몸체처럼 퍼득 댄다. 뇌우는 숙달된 어부가 노를 저어 나가듯이 그녀의 쾌락을 항해시켰다.
쾌락은 파도처럼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은 세 차례 이상 거듭되었다.
뇌우는 사정이 임박할 때마다 눈오는 봉우리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흥분을 억제시키고 사정을 늦춘다.
옥잔향은 아까부터 흐느끼고 있었다.
몸을 휘어감는 육체의 흥분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그녀는 도리어 울고 마는 것이다.
뇌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오."
"아, 아니에요. 신첩…… 주고 싶을 정도로 행복합니다."
옥잔향은 뇌우의 등을 꽈악 껴안았다.
그녀의 콧잔등이 뇌우의 배를 간질였다. 뇌우는 점점 더 그녀의 몸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정 미안하오.'
뇌우는 다시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가 옥잔향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건 옥잔향이 상상도 하지 못할 이유 때문이다. 뇌우는 아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 덮인 산봉우리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살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자신의 복잡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극히 유치하고 경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여자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푸른 눈빛에……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손의 빛깔을 가진 여인.
세상에서 가장 건방지고 냉혹한 여걸.
'빙혈군주…….'
뇌우는 모든 것을 몸 밖으로 쏟아내는 듯한 자세 가운데 한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자 했다. 하지만 뇌우가 유인된 대상은 그녀 자신에 불과하다.
옥잔향과의 정사 순간까지 그녀가 기억될 줄이야…….
하기에 뇌우는 진심으로 옥잔향에게 대해 속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정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옥잔향은 행복해 하는 표정 가운데 뇌우의 품에서 잠들었다. 뇌우는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몇 가지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그는 자신이 지닌 재물 가운데 반 가량을 옥잔향에게 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과거 그는 재산을 위해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에게는 재산으로는 평가하지 못할 엄청난 능력이 있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사소한 생각은 그의 일생을 흩트릴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침 햇살이 눈을 시리게 한다.
'나머지 반은 그들에게 주자.'
뇌우는 오늘 안으로 그들을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