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대륙천리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
만호도의성(萬戶 衣聲)
추풍취부진(秋風吹不盡)
총시옥관정(總是玉關情)
…….
이백(李白)의 자야오가(子夜吳歌)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이날, 곡강(曲江) 기슭의 관제묘 안에서는 특이한 회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관제묘란 본시 관제성군(關帝聖君)을 모시는 사당이다.
관제성군은 삼국지의 주인공이기도 한 관우(關羽)의 화신이다. 관우는 살아 만리의 영웅이었고, 죽어서는 모든 중토인(中土人)이 숭앙하는 신이 되었다.
관우의 진실된 공헌은 대륙천리 도처에 관제묘라는 것이 세워지게 하여, 오갈 데 없는 천민들이 하룻밤 노숙 신세를 면하고 관제묘를 객잔 삼아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날 관제묘에는 유독 천민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털조끼조차 걸치지 못한 단삼(短衫) 차림의 인물들 대부분은 길에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마부들이 그러하고, 떠돌이 장사꾼이 또한 그러하다.
정해진 거처가 없이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들, 이들을 일컬어 초엽(草葉)이 무리라 하던가.
그렇다. 이들을 바로 초엽방의 방도들이다.
오랜 전, 이들은 백련교(白連敎)로써 뭉친 바 있다. 이들이 원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궐기하지 않았더라면, 원은 아직까지 중토를 차지한 채 중화인을 벌레처럼 취급하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다는 농공상(農工商)의 천민들, 누구도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이들이 없다면 천하는 당장에 중지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초엽방은 규모에 있어 개방을 능가한다. 개방은 역사가 오래된 강호세력이었지만 초엽방 강호세력이기보다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천민들의 결사이다.
그러하기에 초엽방의 단결력은 유독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초엽방의 방주 대륙비룡, 그는 아직도 얼굴을 드러낸 바 없다.
어찌되었든 그는 강호오패왕(江湖五覇王) 가운데 하나에 끼며,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당금 소림사 방장인 천우선사(天宇禪師)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초엽방에는 엄격한 규율이 세 가지 있을 뿐이다.
하나는 방도끼리 서로 돕는다는 것.
둘째, 근면히 일해야 한다는 것.
셋째, 아무리 적은 돈을 번다 하더라도 매달 번 돈의 백분의 일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
초엽방도들은 위의 세 가지 규약만 지킨다.
만약 여긴다면 지극히 단순한 율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이 바로 오늘날 초엽방을, 개방을 능가하는, 거대한 방파로 키운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초엽방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文盲)이다.
그들은 복잡한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기에 천민이 되었다. 초엽방이 생기기 전만 하더라도 초엽방도들은 난세를 틈타 준동한 강호세력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초엽방은 그들에게 배경이 되어 주었고, 아사 직전의 천민들이 초엽방의 일원으로 재생의 길을 걷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각설하고, 오늘의 모임은 매월 한 번씩 있는 모임이다.
장안성의 타주 되는 자는 대장간을 하고 있는 포대목(鮑大木)이다.
포대목이 하는 일은 방도들이 모은 돈을 계산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라 그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이다.
그는 아직 초엽방주를 본 바 없다.
초엽방주 대륙비룡(大陸飛龍)은 초엽방 사람들에게 있어 황제보다 더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대륙비룡은 절세미남자라고 하고, 강호에서 가장 초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던가.
그가 뜻을 가진다면, 강호는 사흘 안에 그에게 장악되리라…….
초엽방들은 거의 다 그렇게 믿고 있다.
타파 무사들이 아무리 그들을 비웃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지극히 단순한 성격들이기에, 누가 뭐라 하더라도 자파의 지존에 대해 철저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대륙비룡이 거검(據劍)을 명한다면, 남칠성 북육성, 도합 육백주(六百洲)에 걸쳐서 초엽방도들이 일제히 준동하게 될 것이다.
"강호세력들 사이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기 쉬우니 당분간 조심하라는 게 위대하신 방주님의 훈령이시다. 그러니 오늘 이후에는 강호세력에 속한 자들이 검투를 벌이는 곳에 되도록 가지 말기 바란다."
포대목은 사백여 명에 달하는 천민들을 둘러보며 일장연설을 한다.
기실 그가 할 말이 별로 있겠는가.
일반 강호방파라면 타주(舵主)에게 상당한 권한이 주어지기 마련, 그러나 초엽방의 타주라는 지위는 지극히 볼품이 없는 지위이다.
초엽방은 특정한 거점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분타를 유지하는 실정이기에 회합을 하는 경우에는 관제묘나 쓰러져 가는 사당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강호인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는 게 있다면 타주인 내게 친히 보고해 주기 바라오."
"……."
"……."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들이되 이 자리에서만은 상당히 숙연하다.
이들은 초엽방도라는 지위를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에게 긍지가 있다면 대륙비룡이라는 얼굴 모를 영웅에 대한 긍지이다.
그는 언제고 정체를 드러낼 것이며, 스스로 천하제일인임을 입증하리라. 초엽방도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지금의 시련을 이겨나가는 것이다.
포대목은 며칠 전, 비합전서구를 통하여 전달받은 사항을 조목조목 이야기한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매달 백일조를 내는 것이다. 초엽방도들은 대부분 가난한지라 한 사람이 내는 돈은 은자 한 냥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돈이야말로 대륙을 위해 정말 소중하게 쓰여지는 돈이라 할 수 있다.
'자금 사정이 조금 나아진다면 궁핍한 난민들을 많이 도울 수 있을 텐데…….'
포대목은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의 보따리를 보게 되었다. 누가 갖다놓은 것인지 꽤 두툼한 보따리가 발 아래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보따리를 끌렀다.
보따리에서 나온 것은 한 다발의 종이뭉치였다. 그는 거기 적힌 글자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만다.
"이건…… 환각이다."
◆
뇌우는 약간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길을 걸었다.
'이백사십만 냥을 흔쾌히 포기할 수 있는 자가 될 줄이야.'
그는 눈을 디디고 가되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과거에는 거부가 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정작 거부가 되자 몇 달도 못 가 다 써버리고 말다니, 후후……. 나는 태생이 가난하게 살 놈인가 보다.'
뇌우는 몇 년 전에 초엽방에 약간의 신세를 진 바 있다.
당시 그는 초엽방에 대해 재평가를 한 바 있다. 강호세력은 대부분 형식에 치우쳐 있었다. 그들은 천하무림계를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감춘 채 군자인양 행세를 한다.
초엽방은 힘으로 뭉쳤다기보다 의리로 뭉친 방파. 다른 거대 방파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솔함이 있다.
초엽방은 거대방파들에게 있어 눈에 가시와 같다. 하기에 많은 세력이 암살자를 보내어 초엽방주를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되 누구도 초엽방주의 거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대륙비룡은 구름 속의 운룡인양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대륙비룡은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한 진실된 영웅이 있다는 게 중원의 자랑이다. 그에 비한다면 나는 지독한 냉혈한이다.'
뇌우는 다분히 자조적으로 웃으며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환락가로 접어들었다. 관사(管事)는 오랜만에 쾌화방(快花房)을 찾은 뇌우를 보며 히죽 웃었다.
"오랜만이로군? 요즘 팔자 폈다는 소문은 들었지."
"운이 좋았수다."
뇌우는 빙긋이 웃으며 한 알의 자옥신주를 꺼내 든다.
관사는 보석이 흘리는 은은한 자색 광채에 놀라워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걸 다 걸 작정은 아니겠지, 적어도 삼만 냥은 되어 보이는데?"
"솔직히 말해 이게 나의 전 재산이오."
"……!"
"얼마 전 장사를 해 한탕 했는데……, 재수가 없어 거의 다 날리고 이것만 남았소. 이것 갖고 장사를 하자니 약간 부족하고 해서 다 잃어버리고 적수공원으로 시작하거나 이것을 밑천으로 하여 거금을 따서 장사를 크게 해보거나 하려고……!"
"하여간 잘 왔네. 지난번 운이 이어진다면 크게 딸 수 있을 거야."
관사는 시종에게 뇌우를 안으로 안내하라 지시했다.
뇌우가 밀실로 접어들 때, 그는 조용히 탁자 아래의 줄을 잡아당겼다.
줄에는 방울이 매달려 있기에 줄을 잡아당기면 내실의 방울이 울리게 안배되어 있다. 방울이 울리면 쾌화방의 전문 도박사 가운데 가장 솜씨 좋은 자가 도박장으로 나가게 된다.
'지난번 먹은 걸 다 토해내야 한다. 바보녀석……! 후후, 나갈 때에는 빚문서를 한 장 갖고 가게 되리라.'
관사는 오래 전부터 뇌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뇌우는 한 번 크게 딴 적이 있다. 그 일로 인해 도박사가 갈린 바 있다.
'현명한 놈이라면 오지 말았어야지.'
도박계에는 불문율이 있다. 한번 잃은 상대에게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금을 회수해야 한다. 원금을 회수 못할 때에는 도박장 문을 닫아야 한다.
◆
"고수와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새로운 도박사는 나이 열아홉 정도에 불과한 여인이었다.
다분히 슬픈 눈빛을 한 미녀, 그녀의 이름은 원예랑(元藝娘)이라 했다.
그녀가 쾌화방에 온 지 세 달째, 그녀는 천하의 내로라 하는 도박사들과 돌아가며 겨루었는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패한 바 없다.
그녀는 방주의 애첩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금 전 지독한 명을 받은 바 있다.
― 모조리 따고 가죽을 벗길 것!
온갖 사기수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이다.
어지간한 경우에는 그런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다. 그러한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는 오직 하나의 경우에 불과하다.
과거 쾌화방을 크게 턴 자가 올 경우에만…….
'도박사다운 용모는 아니다.'
원예랑은 상대에게 별다른 예리함을 찾아내지 못했다.
도박사들은 서로 알아보기 마련이다. 도박을 많이 한 자는 눈빛이 흐려진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져, 얼핏 보면 석고 조각을 연상시킨다. 또한 손가락을 유심히 살피면 상대가 도박의 달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도박의 달인들은 손가락의 예민성을 얻기 위해 사포(砂布)로 손가락 끝을 문지르곤 한다. 하기에 도박사의 손가락은 빛깔이 창백하며 몹시 얄팍하다.
지금 원예랑 앞에 있는 청삼서생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풋내기처럼 보일 뿐이다.
조는 듯한 눈빛이며 수줍어 보이는 인상.
그는 주춤거리며 패를 만진다.
원예랑은 그의 콧등이 아주 멋들어지게 생겼다고 느꼈다.
코란 예전부터 성의 상징이다. 그런 이유로 여인들은 코가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저 자와 더불어 침상에 든다면…….'
원예랑은 패를 만지면서 마른침을 삼킨다.
그녀는 천하가 알아주는 채양음녀(採陽陰女)이다. 얼핏 보면 열아홉 살 정도로 보이되 이미 서른다섯이 넘었다.
그녀가 제 나이보다 열다섯 살 아래로 보이는 이유는 동남(童男)들과 교접을 즐기며 원양진기(元陽眞氣)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묘강에서 미고술(迷蠱術)을 터득하였고, 눈빛이며 방향(芳香)으로 상대를 뇌쇄시키는 여러 가지 기법을 터득한 지 이십 년이 넘는다.
남자를 유혹하는 법에 대해서는 세 권의 책을 쓸 정도이며, 특히 침상에서의 재주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강한 것이 있다면 백치소혼공(白痴燒魂功)이란 사술이다.
남자들은 여자들 위에 군림하기 좋아한다. 그러하기에 백치미를 가진 여인은 남아의 흑심을 자극하기 마련.
'풋내기…… 넌 세 판도 안 돼 다 털린다.'
원예랑은 상대가 이미 자신의 백치소혼공에 사로잡혔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눈빛이 벌써 흐트러지고 있다.
내가고수라면 정순한 내공을 지니기 마련이고, 내공의 힘이 눈빛의 신광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러 눈빛을 갈무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신비로운 기도로 남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뇌우라는 이름의 청삼서생에게는 특징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는 모든 점에서 평범했다.
특히, 조는 듯 노곤한 눈빛은……
'빚을 잔뜩 안겨준 다음에 노비로 부려먹자.'
원예랑은 아까부터 뇌우와 더불어 전라가 되어 방사를 즐기는 상황을 상상하며 숨을 할딱거렸다.
뇌우는 부끄러운 듯 가끔 그녀를 훔쳐보다가는 묘한 한숨 소리를 흘렸다.
원예랑은 뇌우가 자신의 미염공(美艶功)에 걸렸다고 여겼다. 그녀의 미염공은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사실, 그녀는 뇌우가 제 패를 뒤집으며 멋쩍게 웃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이겼다고 여겼던 것이다.
"운이 좋아 이긴 듯하외다, 낭자."
뇌우는 한 시진 안에 사만 냥을 땄다.
이후 일각마다 따는 돈은 일만 냥씩 추가되었다. 원예랑은 온갖 사기수법을 다 동원하여 뇌우의 패와 자신의 패를 바꾸었으되 묘하게도 패가 뒤집어질 때마다 이기는 쪽은 뇌우였다.
뇌우는 두 손을 모두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다.
손이 탁자 밑에 가 있다면 사기를 친다고 여길 것이되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사기를 치는 쪽은 원예랑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는 쪽은 무조건 원예랑이니…….
원예랑의 얼굴은 그리도 자랑하던 우윳빛 살결에서 석탄 빛깔로 검어진 지 오래이다.
'제발…… 이번만은…….'
원예랑은 신을 찾으며 패를 뒤집었다.
그녀는 상당히 높은 끗수를 쥐었는데, 뇌우가 뒤집는 패보다는 한 단계 낮았다.
"오늘은 운이 정말 좋은데? 또 이기다니……."
뇌우는 전표를 제 앞으로 끌어당기며 순박하게 웃었다. 그때, 그의 귓속으로 모기 소리처럼 가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살수들이 깔리기 시작했어, 장난 그만 치고 나가자!"
익히 듣던 목소리이다.
'수석교두다.'
뇌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전표를 세었다.
이제까지 딴 돈은 칠만사천 냥이다, 그는 십이만 냥을 딸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 원예랑은 그를 상대로 일곱 가지 사술을 썼다. 그 가운데 그가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원예랑은 불행히도 강호에서 가장 도박을 잘 하는 자에게 사술을 썼던 것이고, 그 덕에 판마다 패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뇌우가 시전하는 역최혼술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사람은 언제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는지 모르는 수석교두 한 사람에 불과했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적당히 두세 판 져주고 일어나라. 너에게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방 안에는 살기가 흉흉히 깔리고 있다.
뇌우는 쾌화방의 두 달 수입을 따낸 것이다. 뇌우가 한 번 더 이긴다면 다섯 명의 살수에게는 뇌우를 제거하라는 밀명이 떨어질 것이다.
뇌우는 다섯 살수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다 알고 있는 처지이다. 그는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쾌화방을 상대로 모든 도박수를 다 써볼 작정이었다.
'다음에 한번 더 와야겠군. 그때에는 백만 냥을 따겠다.'
뇌우는 수석교두가 오른쪽 뒤쪽에 서 있다는 것을 대충 파악했다.
그는 단 한번도 제 얼굴로 나타난 적이 없다. 그는 여러 개의 신분으로 자유자재 화신하고 있으며, 나타날 때마다 목소리도 다르게 사용한다.
그러나 뇌우는 숨결만으로도 그를 간파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뇌우는 그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여간 뇌우는 네 번에 걸쳐 사만오천 냥을 잃었다. 그 덕에 딴 돈은 이만육천 냥으로 줄어들었다.
"젠장, 아까 끝을 낼 것을……!"
뇌우는 욕설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예랑은 자신의 사기술이 네 번에 걸쳐 성공하자, 이제는 되었구나 여겼는데 뇌우가 도박을 그만두려 하자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넌 갈 수 없어, 내 눈 한번만 보면.'
그녀는 스스로의 최안술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는 여마두이다. 그녀는 뇌우를 영적으로 정복하고자 마안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뇌우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실없이 웃는 그 순간 원예랑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잊고 갑자기 몸을 뒤틀며 비음을 흘렸다.
'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저 눈.'
이상하게 또 몸이 확확 달아오른다. 체열이 심해지고, 사타구니가 간지러워진다.
'더, 덥다.'
누구든 남자기만 하면 안고 뒹굴고 싶다는 음탕한 마음이 분수처럼 피어오른다.
"하아…… 악……!"
그녀는 참다못해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두 손을 가슴에 갖다댔다.
부욱―.
꽤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랴, 실로 잘생긴 두 개의 수밀도를 보는 것은…….
원예랑은 젖가슴을 다 드러낸 채 손바닥으로 젖가슴을 주물러대며 비음을 연발했다. 그녀의 기이한 광란은 도박장 주인이 성이 나 다가와서 따귀를 세 차례 거듭 후려갈긴 이후에야 정지되었다.
"개 같은 년! 이게 무슨 짓거리냐?"
도박장 주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원예랑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원예랑은 머리채가 한 웅큼 뜯겨져 나가는 아픔 가운데 문득 정신을 되찾았다.
'내, 내가 어이해……!'
그녀는 그제야 제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육봉이 드러난 채 출렁거린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박장 주인은 그리도 믿었던 원예랑의 패배로 거금 이만육천 냥을 잃기는 하였으되 그래도 원예랑을 총애하기에 몇 대 따귀로 죄를 용서해 줄 작정이었다.
바로 그 순간, 원예랑의 얼굴이 야릇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우욱……!"
그는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상체를 휘청였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흑발이 반백이 되고, 팽팽하던 피부는 주름에 뒤덮인다.
그는 원예랑의 화장기 짙은 얼굴이 갑자기 주름살에 뒤덮이는 것을 보고는 그러한 마음을 송두리째 증발시켜 버렸다. 원예랑은 갑자기 오십 넘은 여인으로 늙어 버렸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변화를 목격하고 기겁을 할 때,
"용, 용서해 주세요. 주인님, 호호! 제가 이따가 안마를 해드릴게요."
그 기이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 유일한 인물의 입에서는 갈가마귀 우는 듯 듣기 역겨운 목소리가 자꾸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예랑은 이십 년간 색혼술로 얻은 미염공을 한순간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못하는 사이에.
◆
"그 요녀의 색혼술을 격파한 수법은 중원수법이 아니던데?"
수석교두는 눈 덮인 송림에 숨어 말했다.
뇌우는 얼음덩어리 위에 한쪽 발을 세우고 앉은 채 메마른 갈대줄기를 이빨 사이에 끼우고 질겅질겅 씹었다.
"일컬어 유가심공(瑜 神功)이라는 것이오."
"그렇다면 포달랍궁 수법이군?"
"그렇소. 포달랍궁에서 훔쳐 배운 무공이오."
"흐음……!"
"원예랑이라는 천한 요녀는 가장 저질스러운 묘강의 색혼술을 시전했소. 그러한 색혼술은 원양진기를 계속 흡수해야만 유지되는 것……. 다시 말해 원예랑은 자신의 미색을 위해 최소한 오십 명의 동남을 희생시켰던 것이고, 아마도 앞으로는 영영 색혼술을 시전하지 못할 것이외다."
"유가심공이라면 색혼술의 극성이지, 그것은 소림사의 비전절학 가운데 으뜸인 부동심공(不動心功)과 쌍벽을 이루는 서장항마공(西藏降魔功)."
"……!"
"네가 그것을 익혔다니 대견스럽다."
수석교두는 눈 속에 은잠해 있었다.
뇌우는 그가 칠 장 사척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몸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뇌우는 그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간파하였으되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는 체할 뿐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총령주를 상위자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수석교두도 승려일까?'
뇌우는 문득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러한 호기심을 포기하고 마는 쪽을 선택했다.
그때, 수석교두의 호흡이 약간 흐트러지는 듯하며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대영웅이 될 만한 자다! 아니……, 넌 이미 천하 최절정이다. 볼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
"……!"
뇌우는 침묵일 뿐이다, 수석교두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하고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듯.
"다만 정식으로 무공수업을 받은 시기가 짧은 것이 유감이다. 그리고 총령주가 널 교육시킬 때 살인수법만 골라 터득시킨 게 애석하다. 그 덕에 너의 살인술은 막강하되 무공의 전체적인 기반이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무공의 성취가 더뎌진다."
"……."
뇌우는 여전히 말이 없다. 다만, 갈대줄기를 작은 토막으로 만들어 뱉을 뿐이다.
"……."
살을 에는 눈보라 소리 속, 수석교두의 말이 이어진다.
"어찌 여긴다면 넌 행운아가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불행한 녀석일지도……!"
"크크, 왜 그리 감상적인 말을?"
뇌우가 오랜만에 침묵을 깨어뜨렸다.
"뇌우……, 그 산을 어찌 여기느냐?"
"산……!"
"그 산이 네 숙명을 바꾸었거늘 그 산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많을 텐데?"
"지겨운 이야기는 그만 두시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이번에는 누굴 죽여야 하는가, 그것뿐이오."
뇌우는 질겅질겅 씹고 있던 갈대줄기를 뱉어냈다.
동천(冬天)이 다시 눈발을 토한다. 하늘의 회색이 아무리 암울하다 하더라도 뇌우의 눈비보다 어둡지는 못하다.
수석교두는 뇌우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자신으로서는 절대 뇌우를 좌지우지 못한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결국 저 녀석은 총령주의 철저한 추종자이다, 내 심복으로 만들기 힘든……! 놈이 속으로 소림을 불살라 버리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소림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처리하고 말리라.'
'숭산에 불만이 많되 반역하지는 않을 녀석이다.'
수석교두는 약간의 좌절감을 느끼는 가운데 봉서 한 장을 뇌우에게 던졌다. 봉서는 허공에서 몇 차례고 방향을 바꾸다가 뇌우의 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또 누군가를…….'
뇌우는 봉서를 섭물진기(攝物眞氣)로 빨아들이며 그것을 불살라 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를 죽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상대가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살인이란 역겨운 일이다.
"후후……, 그 산에는 반역자도 많군?"
뇌우는 비웃듯 말했고,
"율법이 엄하기 때문이다. 넌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그 산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를……!"
"그럴지도…… 하지만……!"
뇌우는 뒷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했다면, 수석교두는 이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 나 같은 놈을 만들었다는 것 하나로 그 산의 율법은 모두 위선이 아니겠소?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아마도 이번 겨울을 마지막으로 장식되는 눈이리라.
퍼부어지는 눈보라 속, 뇌우는 어깨에 쌓인 눈발을 툭툭 턴 다음에 몸을 바로 세웠다.
숭산은 그에게 또다시 살인을 지시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오계를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듯하되 속으로는 아수라를 키워 피로써 강호를 계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숭산 소림사는 천년에 걸쳐 이룩된 강호의 하늘이다.
하지만, 그 하늘의 숭고함이 허위와 위선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이라면, 그 산은 영원한 하늘일 수 없다.
절대로…….
뇌우는 팔짱을 낀 채 말문을 열었다.
"기왕이면 총령주를 만나길 바랐소."
"왜?"
"날 선택한 장본인은 귀하가 아니라 총령주가 아니겠소?"
"나와 총령주는 한 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다 할 수 있다."
"후후…… 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일도 귀하가 할 수 있는지."
"……!"
대답소리가 없다. 뇌우의 냉막한 말이 수석교두를 당혹케 했음에 틀림없는 말이다.
"난 총령주에게 손과 발을 바치고 있을 뿐이오. 다시 말해, 내가 그 산에 영혼을 바친 것은 아니라는 말이외다. 귀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고."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수석교두의 음색이 약간 달라졌다.
"그럴지도……!"
뇌우는 마치 타인에게 대한 일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넌 모를 구석이 많은 놈이다. 하여간 총령주는 사람을 선택하는 안목이 대단한 사람이다. 만천하를 다 뒤진다 하더라도 너보다 이 일에 적합한 자는 없다. 너는 밑바닥 인생에 대해 두루 알고 있고 진짜 세상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자비하면서도 유연한 데가 있다. 만에 하나, 네게 십만무사를 준다면 너는 삼 년 안에 강호의 반을 정복할 수 있을 지도……!"
"……!"
"넌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너의 무공은 이미 총령주나 나의 수준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였더라면 반역을 생각했을 것이다."
"반역? 후후……, 솔직히 난 매일 매시각 반역을 생각하고 있소."
"으음……!"
"하되 총령주는 따지고 볼 때 은인(恩人)이 아니겠소? 무식하고 천박한 장안성의 파락호를 강호의 대살수로 키워 주었으니 말이오."
"만약에 그를 죽여 너의 자유가 생긴다면 그를 죽이겠느냐?"
"……!"
뇌우의 표정이 굳어진다. 수석교두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가운데 이어진다.
"너와 내가 힘을 합해 대륙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나와 연수(連手)하겠느냐?"
"……거부하겠소."
뇌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흔쾌히 대답했다.
"왜?"
"솔직히…… 자신 없소."
"자신이 없다고?"
"나더러 귀하, 수석교두를 죽이라 한다면 죽일 자신이 있으되 총령주를 죽이라 한다면 자신이 없소. 그는 내가 아는 모든 자 가운데 가장 은밀한 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찾진 못할 것이오."
"총령주를 존경하는가?"
"천만에!"
"……?"
"그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즉시 그를 죽이고 그의 가죽을 벗겨 이불로 만들어 덮고 자고자 할 것이오. 후후후……."
희디흰 치열이 드러난다.
퇴영적이고 잔혹해 보이기만 하던 얼굴에 문득 고뇌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뇌우는 소인배가 아니다. 강호는 그의 그릇을 크고 넓게 깎아냈다.
그는 이미 대인(大人)이다. 수석교두는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의 기도를 느끼고 있었다.
전신에서 흘러 넘치는 숭고한 엄숙한 기세, 뇌우가 이룩한 성취는 이미 수석교두를 능가한다.
"내가 짐작컨대, 귀하 또한 총령주에 대해선 하나도 알지 못할 것이오."
"그, 그렇지만은 않아!"
"후후……,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충고하겠는데 총령주의 권위에 도전하려 하지 마시오."
"……!"
"최근 들어 총령주가 날 직접 만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소. 사실 그는 내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오. 하기에, 귀하가 자기 대신 보내어 나를 통솔케 하는 것이오. 어쩌면 귀하는 총령주를 능가하는 야심가일지도, 그리고 날 이용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할지도, 그러하기에 나에게 유난히 친밀히 대할지도……! 하되 모든 걸 포기하기 바라오."
뇌우는 비정히 말하다가 다시 옷자락의 눈발을 털어냈다. 한동안 번뜩대던 눈빛이 다시 나른하고 졸리운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특징이 전혀 없는 눈이다.
그런 눈을 가진 자는 조심해야 한다. 가장 완벽한 살인자만이 그런 눈빛을 흘린다. 그러한 눈을 가진 자에게 살인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에 불과한 것이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떠나겠소!"
"……!"
눈보라 속에서는 대답소리가 없다.
뇌우는 히죽 웃다가 위로 떠올랐다. 그의 뒷모습은 한순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하나에서 열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눈 더미가 흐트러지면서 건장한 체구의 회영인(灰影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회색 마괘자를 걸치고 있고, 가죽신을 신었다.
"뇌우……, 천박한 암살자 취급하기엔 너무 성장했다. 녀석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성장한다. 사실 이제까지 천하에서 나와 더불어 쟁패할 수 있는 자는 총령주와 초엽방주뿐이라 여겼다. 헌데, 어쩌면 진실로 강호의 패권을 놓고 다툴 도전자는 뇌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수석교두는 산야를 바라봤다.
눈보라에 덮인 산야의 빛깔은 온통 회색이다.
사실 이 산야는 그의 산야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중원은 이국(異國)이다. 그에게는 숭산보다 더 갈망하는 대지가 있다.
아버지의 대지…….
그는 과거 그 찬연했던 영광을 재현코자 하는 야망을 품었기에, 십수년의 은신처로 숭산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숭산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맡기까지 십팔 년을 썼다.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준비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소년시절부터 대륙을 쩌렁쩌렁 울리던 천재가 아니었던가.
대란(大亂)만 없었더라면, 그는 황실의 요직에서 막강한 권위를 발휘하며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년시절의 모든 꿈은 주씨성(朱氏姓)을 가진 도적에 의해 유린되었다.
원장(元章)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박한 자, 그 자는 난을 틈타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 와중에 그의 가문도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꿈은 신기루가 흐트러지듯 무산되었다.
그는 가문이 무너지고, 부모형제가 모든 자살하던 그 날을 기억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배를 마시고 얼굴과 팔뚝이 썩어 가는 상태에서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었다.
― 원은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가지에서 뿌리까지 모두 썩었으니까!
몽고(蒙古)의 조상은 중원을 얻고자 목숨을 바쳤거늘, 우리 후예들의 오만과 나태, 방종으로 인해 중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우리 세대의 무능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졌다. 그러하기에 나는 자결하는 것…… 그러나 넌 살아 남아야 한다.
네겐 원의 유업을 이을 책임이 있다. 몽고의 회천대업(廻天大業)을 네 어깨에 맡긴다.
륵(勒), 너는 원의 좌태상(左太相)이다. 언제고 군주(君主)가 나타나리라. 군주는 원의 마지막 황손(皇孫)……. 그에게 절대 복종하라, 그리고 다시 제국을 일으켜라…….
가라, 숭산으로…….
오직 그곳만이 널 거목(巨木)으로 길러주리라.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었다고 여길 때에만 하산하라. 서두르지 마라, 네 나이 백 세 되는 해까지 인내하더라도 늦은 게 아니다.
눈보라 속에서 아버지의 유언이 들려온다.
'숭산은 날 거목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을 완성하였으며 불가정종(佛家正宗)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가운데 서른다섯 가지를 터득했다. 숭산의 폐물들 몇을 제외할 때 나를 능가할 자는 강호에 없다. 게다가 나에겐 은밀히 기른 거대한 기업이 있다.'
그는 치밀한 병법가이다.
그는 부흥의 때를 기다리며 수십 년간 칩거해 왔다. 그는 십 년 후에야 때가 오리라 여겼었다. 헌데, 조직이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총령주는 그의 은인이다.
'그 자는 율법을 수호하고자 살인조직을 세웠다. 후후……, 그리고 나는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이룩한 호법살마문(護法殺魔門)을 이용하며 그 산을 접수하는 것이다.'
그의 눈에서 푸른 섬광이 뿜어졌다.
호법살마문의 태반은 그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총령주의 명을 따르는 자보다 그의 명을 따르는 자가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거사를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간 실수할지도 모른다. 변황 어딘가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누란군주(樓蘭君主)가 중토로 접어든다면, 대원의 충신스러운 수하들이 일제히 그의 휘하로 들어간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나는 지존이 되지 못하고 서열 삼위자에 불과하게 된다.'
그는 눈을 밟으며 비행에 나갔다.
'그 어린 계집아이 휘하에서 굽실거릴 수야……!'
그의 무공은 뇌우가 추측한 것보다 두 배 이상 고강했다. 그는 무공을 숨기고 다니는데, 그의 측근이라 할지라도 진실된 무공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영락이라는 잡배가 원의 후예들을 추살하기 위해 모종의 조직을 만들 위험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는 탄식할 때마다 이십칠 장씩을 이동해 나갔다.
'큰 승부에는 시기가 중요하다. 시기를 잃는 자는 승부에서 지고 만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시기이다. 잡다한 세력이 비등한 규모로 맞물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강호를 접수할 절호의 기회이다. 일단은 숭산을 접수해야 한다.'
츠― 팟―!
그는 두 팔을 활짝 편 채 바람을 타고 떠올랐다.
'그 일을 위해선 뇌우를 제압하는 게 급선무이다. 놈은 완벽하다. 천 명의 일급무사를 써도 생포하기 힘들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혈련(血蓮)을 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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