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 숭산 嵩山(3권) 7.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ㅎHㅅiㅅi]

제7장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거금각(巨金閣).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이다.
그들이 지닌 힘은 대명황실(大明皇室)에 버금간다고 한다. 거금각이 자금줄을 조인다면, 만천하 상권은 여지없이 휘청이고 만다.
대저 강호인들은 무력(武力)을 지닌 무사집단이 강호를 지배한다고 여기기 마련이되, 사실 강호를 지배하는 자는 거상(巨商)들이다.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를 낸 자들도 상인이며, 머나먼 천축국(天竺國)의 무예를 중원으로 수입한 자들도 상인들이다. 화상(華商)은 중원뿐만 아니라 서역(西域)이며 동영(東瀛), 대식국(大食國)에까지 힘을 미치고 있다.
거대한 지도에는 거금각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표행( 行)이며 은장(銀莊)이 붉고 푸른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단옥상은 뇌우에게 거금각의 이모저모를 구경시켜 주는 가운데 뇌우의 낯색 변화를 힐끔힐끔 살펴봤다.
'소심하시기는…….'
그는 거금각이 천하 사백구십 개 소에 분타를 거느리고 있으며, 수백 명의 순찰들이 천하를 암중에 누비며 대륙의 상권을 조정한다는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리며 고개를 휘휘 저을 뿐이다.
"나는 은자 일곱 냥에 열두 냥을 더하는 계산도 잘 하지 못하는데 그 엄청난 조직을 경영하시는 각주야말로 천하의 신인(神人)이시오."
"호호호, 거금각은 강호의 삼대 주도세력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럼 강호에 거금각만한 세력이 둘이나 더 있단 말이오?"
"그럼요. 사실 그들은 거금각을 훨씬 능가합니다. 결국 거금각은 천하에서 셋째 가는 세력이라 할 수 있지요."
"대체 어떠한 세력이 거금각을 능가한단 말이오?"
"첫째 숭산 소림사가 그러합니다."
"아……, 소림사."
"그들은 강호정세에 끼여들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되 그들은 수천 년간 강호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강호의 풍운아들 가운데 대다수는 숭산무맥(嵩山武脈) 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숭산은 잠자는 산이다. 그리고 소림사는 잠들어 있는 거인이다.
중원무림의 영원한 거인 대소림사, 그들의 진짜 뛰어난 점은 대세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인재를 기르는 데에 있다.
강호사(江湖史)에 빛나는 혜성(慧星)의 풍운아들 가운데 대다수는 숭산 소림사와 어떻게든 접맥되고 있는 것이다.
단옥상이 아는 것은 소림의 겉모습뿐이다.
소림에 호법살마문이 있고, 아수라가 바로 뇌우라는 것을 안다면 단옥상은 아마도 기절하고 말리라.
단옥상은 숭산 소림사의 믿어지지 않는 전설에 대해 장황히 말하다가는 두 볼에 옴폭한 보조개를 만들었다.
"뇌공자는 그 가공스러운 소림사보다 더 거대한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아십니까?"
"호호, 강호의 노래를 모르십니까?"
"강호가(江湖歌)라……?"
"세상 어디에도 초엽(草葉)이 있다…… 라는!"
"초……엽……!"
뇌우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졌다. 단옥상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초엽의 무리는 초엽방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초엽방도들의 숫자는 거의 백만에 육박하는 바, 그들의 이목이 가 닿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지요. 초엽방의 우두머리는 대륙비룡(大陸飛龍)이라는 자로써 방대한 세력을 치밀히 구축하고 경영함에 있어 한 치의 오류도 범하지 않습니다."
"대륙비룡이라, 그 이름을 들은 것도 같소이다."
"그 자는 구름 속의 신룡과 같은 자입니다. 본각에서도 그 자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수백 명의 비밀순찰을 파견하여 그 자의 정체를 추적 조사하였으되, 이제껏 그 자에 대한 일말의 단서도 잡지 못한 실정입니다."
"아……!"
뇌우는 또 다시 탄성을 발한다.
만에 하나, 단옥상이 눈앞의 인물이 바로 대륙비룡으로 안배된 자라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표정을 지을는지…….
"그가 바란다면 강호에는 대란(大亂)이 일어납니다!"
"대륙비룡이라는 인물은 나 같은 낭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목이구료."
뇌우는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다.
'아마도 그 자는 영원히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영원히.'
뇌우가 쓴웃음을 애써 삼키고 웃음을 가장할 때,
"호호호……, 그나저나 각주님께서는 뇌공자께 흠뻑 빠지신 듯합니다."
"그 분이 왜 나 같은 강호의 피라미에게 관심을 주시는 건지……."
뇌우는 지저분한 동작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의 자세는 정갈하지 못하였고, 단옥상이 불쾌히 여길 만도 한데 단옥상은 그가 어떠한 모습이든 좋다는 표정이다.
"뇌공자는 행운아십니다. 호호……, 어쩌면 각주님께서 뇌공자님을 의질(義姪)로 삼으실지도……!"
"그건 너무 과분한 인연이오. 아마도 각주님은 나의 소소한 의술로 병마에서 쾌차하시게 되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날 좋게 보시는 것뿐이지……. 나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자에게 각별한 정을 느낄 리 있겠소?"
뇌우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때,
"호호, 하여간 저녁 무렵 각주님이 뇌공자와 더불어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싶어하십니다."
단옥상의 볼이 발그레해진다. 그녀의 시선은 뇌우의 얼굴 한가운데 초점이 맺히고 있다.
뇌우는 애써 얼굴을 초라하게 보이도록 꾸미고 있다.
그는 역용환(易容丸)이나 변성약(變聲藥)을 쓰지 않고도 용모와 목소리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축골(縮骨) 통비공(通臂功)을 자유롭게 시전하여 키를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
지금 그의 용모를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다만, 희던 얼굴빛을 누렇게 했고, 입매를 어느 정도 일그러지게 했다. 머리카락을 부스스 흩트려 그를 한번 본 바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쉽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을 했다.
그리고 음색을 거칠게 하여 세련미보다는 촌티가 나게 위장한 상황이었다.
단옥상은 그의 외양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미에 빠져들었으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정염의 불꽃이 가득한 것이다.
"차(茶)라……!"
뇌우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다선십덕(茶扇十德)에 이르기를 차는 우울한 기분을 흐려주며, 졸음을 깨게 하거니와 기력을 양생하고 병을 제거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목소리 또한 젊은이다운 소리가 아니라 중늙은이 같은 목소리이다.

다도(茶道)에는 여러 종류의 어려움이 있다.
그릇(器)과 불(火), 물(水), 굽기(炙), 달이기(煮), 그리고 마시기(飮)가 그것이다.
당조(唐朝)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에는 차를 달이는 물의 품계가 적혀 있다. 강서성(江西省) 여산(麗山)의 폭포수물이 으뜸이고, 혜산사(慧山寺) 석천수(石泉水)가 둘째이다.
절강성 깊은 산 속의 물은 십칠위로 기록되어 있다.
"다경(茶經)에 이르되 산천(山泉)의 청결한 물이 최상이라 하였지요. 강수(江水)가 그 다음이고 정수(井水)가 그 아래이고……!"
초엽홍은 송하(松下)에 있다.
지금 하늘에는 달빛이 찬란하다. 손수 차를 달이고 있는 초엽홍의 자태는 신비를 넘어선다. 그녀의 나이가 중년을 넘어섰고, 오랜 투명으로 인하여 머리카락이 눈처럼 희어졌다고는 하되 그러한 것이 그녀의 미모를 훼손시키진 못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환상이었다. 그녀의 어깨위로 달빛이 춤을 춘다. 뇌우는 그 많은 영웅들이 초엽홍으로 인해 일생을 망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는 강호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뇌우는 초엽홍의 파리한 뺨을 바라봤다. 그녀는 뇌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뇌공자는 늘 강호를 자유롭게 주유하시는 분이신데, 나로 인해 거금각에 갇혀 지내게 되시었으니 송구스럽습니다."
"천만에요."
"호호, 뇌공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낯익게 느껴져요."
초엽홍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권한다. 뇌우는 다향을 음미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철관음차(鐵觀音茶)군요."
"그렇습니다."
초엽홍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뇌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뇌우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한 남자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실, 그와 뇌우는 모든 점에서 다르다.
그는 강하고 뇌우는 연약하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뇌우에게는 천지를 멋대로 떠돌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두 남자 사이의 공통점을 느꼈다.
차 향과 더불어 송진 내음이 풍긴다. 허공에는 달빛과 더불어 송화 가루가 흐드러진다.
뇌우는 고아로 자라며 철저한 한을 맛보았으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쓰라린 한이 보상받는다고 느꼈다.
'저로 인해 괴로움 받지는 마십시오. 이대로 평화롭게 사십시오.'
뇌우는 그녀에 대한 한이 봄눈 녹듯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초엽홍은 자애스러운 눈빛을 흘리며 핏기 없는 입술을 떼었다.
"뇌공자는 의원이니 나의 상태를 잘 알겠지요."
"그런 셈이지요."
"난…… 병이 심합니다. 특히 심마(心魔)가 유난히 커서 판단력이 흐려지곤 합니다. 하되 거금각주로서의 일과는 지극히 번잡하면서도 대단한 결단력을 요구하는 생활인지라 견디기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각주님은 가주로서의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음풍농월 소일하시며 정양하시는 게 좋습니다."
"음풍농월할 수는 없어요."
"……!"
"난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니오?"
"난…… 한 아이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초엽홍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뇌우는 그녀의 눈썹 끝에 매달리는 흰 이슬을 본다. 그녀는 고독하고 불행한 여인이다. 그녀가 왜 자신을 무심노사에게 맡겼는지 모르되, 그녀가 그후 내내 지독한 번뇌에 휘말려 살아왔다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그대가 낳아 남에게 맡긴 아이가 지금 그대를 용서하고 있으니까요…….'
뇌우는 목젖까지 치밀어 오른 그 말을 씹어 삼켰다. 초엽홍의 뺨을 타고 눈물이 굴러 떨어진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출생입니다."
"그 아이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번뇌가 심해지면 다시 발작이 일어나 주화입마에 빠지십니다."
"아……, 그 아이에게 사죄하고자 거금을 모았습니다. 거금을 유산으로 상속하는 것으로 그 아이를 세상에 내던진 죄를 씻으리라 여기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아이에게는 영원한 죄인인 듯하군요."
초엽홍이 흐느낄 때, 뇌우는 문득 손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베수건이 쥐어져 있다.
초엽홍은 감사해 하며 베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뇌공자를 은밀히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
"나는 많은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난 이 년간 병석에 누워 세상과 떨어져 살았는지라 강호정세에도 해박치 못합니다. 지금 이런 상태로 거금각을 이끈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주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니 거금각을 통솔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저 또한 어느 정도의 도움이나 드릴 것이고."
"뇌공자께 장로 지위를 맡아 달라고 강권하여 허락을 받아냈으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장로 지위만 하더라도 과분합니다."
"아니에요. 뇌공자는 특수한 분입니다. 고요한 가운데 타인을 압도하는 권위를 지닌 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인간에게는 독특한 기도(器度)가 있기 마련……! 뇌공자의 그릇은 강호의 어떠한 대인(大人)이며 거목(巨木)에 비해 뒤지지 않습니다."
초엽홍은 다관을 기울여 다시 찻잔을 채웠다. 백자 잔에 초록빛이 가득하며 선향이 몽롱히 퍼진다.
"절 어찌 여기는지요?"
돌연한 질문이다. 뇌우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서 가장 고독한 분 같군요."
"그래요, 난 강호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입니다."
초엽홍의 미소는 슬퍼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월의 시련을 거친 진지한 아름다움이다. 뇌우는 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는 참이었다.
물론 그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출 작정을 했었고, 그러한 결심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으리라.
"내게 벗이 있다면 뇌정룡이라는 사람뿐이지요."
"뇌정룡……!"
"그는 강호의 기재이며 진실한 영웅이지요. 그는 언제고 한 사람을 내게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초엽홍의 눈에는 실망의 빛이 그득하다.
뇌정룡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무심노사, 아니 소림사 무등선사(無登禪師)의 속가명(俗家名)이다.
"언제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인간이 소유하는 세월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요."
초엽홍은 철적(鐵笛)을 거머쥔다.
철적은 그녀의 가장 진실한 벗이다. 그녀는 철적의 음률 가운데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는 힘을 키웠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음률은 그녀의 목숨 빛깔과도 같다.
그녀는 철적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물론 들어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어떠한 부탁이신지요? 가능하면 들어드리지요."
"날…… 어머니라고 불러줄 수 있나요?"
"……!"
뇌우의 낯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숨을 멈출 때, 초엽홍은 예민한 여인답게 그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알아차리고 다분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난 뇌공자처럼 헌헌한 장부의 어머니가 되기엔 부족한 여인이겠지요. 미안해요. 뇌공자, 괜히 그러한 부탁을 해서……! 거절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아, 아닙니다……!"
뇌우는 손을 휘휘 저었다.
"뇌공자는 강호야학(江湖野鶴)으로 멋대로 돌아다니시는 분인데, 세속의 인연으로 뇌공자를 붙들고자 하였으니……, 소견 좁은 여자의 쓸데없는 말이라 여기시고 다 잊으십시오."
초엽홍의 눈에는 고해(苦海)가 그렁거린다. 뇌우는 그녀야말로 자신보다 고독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들 모자는 중원에서 가장 고독한 모자이리라.
뇌우는 너무도 강한 모정(母情)을 느꼈다. 그의 수양이 깊지 않았더라면 감정의 폭발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고 말았으리라,
"오히려 제게 영광입니다."
"그럼 날 양모(養母)로 삼아 주시겠습니까?"
"제 일생의 영광입니다."
뇌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초엽홍은 그가 양자 되기를 허락하자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
초엽홍은 일생을 철적에 바쳤다. 그녀의 음공은 철적신니(鐵笛神尼)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철적신니에게서 전수받은 철적단장구곡(鐵笛斷腸九曲)을 완성하였고, 이후 자신의 심득을 더해 열여덟 개의 곡조를 만들었다.
일컬어 장한십이가(長恨十二歌).
초엽홍은 뇌우가 자신의 양아들이 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장한십이가를 밤새 전수해 주었다.
◆
어느새 여명이다. 연보라색 안개가 요지(瑤池)를 휘어감는다. 초엽홍은 이 장 앞에 머물러 있는 초출한 낯색의 청년을 바라봤다.
'가히 천하기재이다. 그 오묘한 음의(音意)를 모두 깨우치다니.'
대기 속으로 아름다운 음률이 퍼지고 있다.
장한십이가 가운데 세 번째 곡인 백화비접(百花飛蝶),
고요한 가운데 생명력을 지닌 음파가 흐르자 일대의 모든 생명체가 펄펄 날며 춤사위를 추는 듯하다. 초엽홍은 뇌우의 자못 심각한 표정에서 과거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 한 남자를 생각해 냈다.
'아무리 봐도 비슷하군.'
그녀가 뇌우의 얼굴 속에서 과거의 화려하고도 처절했던 기억의 순간을 더듬고 있을 때,
사박 사박―!
안개 속으로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초록색 옷을 걸친 귀여운 소녀가 쟁반 하나를 들고 다가선다. 다분히 멍해 보이는 인상이다. 뺨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눈빛이 몽롱하다.
초엽홍은 그녀를 힐끗 보며 피식 웃었다.
"아랑(啞娘), 정말 오랜만이구나."
"아바바바……."
아랑은 벙어리답게 말을 더듬거렸다.
아랑은 초엽홍이 주워다 키운 계집종이다. 아랑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과일과 과자가 담기어 있다.
삘리리리―.
뇌우는 곡의 마지막 부분을 불고 있다. 그는 음률에 흠뻑 빠진 듯 아랑이 다가서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랑은 천천히 다가섰다. 초엽홍은 아랑에게 다정한 몇 마디 말을 계속 해주려 하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넌 아랑이 아니구나."
"……!"
아랑의 걸음이 주춤해진다. 초엽홍의 눈에 노여움이 가득하다.
"아랑에게 준 팔찌가 있지. 아랑은 늘 그것을 차고 있다. 헌데 넌 팔찌를 차고 있지 않다. 넌 아랑이 아니다."
초엽홍은 엄숙히 말하며 손을 허리에 대었다.
과거였다면 허리에 패옥검(牌玉劍)이 매달려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다. 가짜 아랑은 그녀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왼손 장심(掌心)이 불꽃처럼 달아오른다.
그녀가 시전한 내공의 힘은 혈모니인(血牟尼印)이라는 밀종절학(密宗絶學)이다.
'내가 귀하에게 행할 자비라면 고통 없이 죽이는 것……!'
가짜 아랑은 십성 내공을 끌어올린 이후 장심을 통해 혈모니인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는 혈류(血流)가 초엽홍의 가슴에 닿는 찰나, 일대가 침묵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리도 현란하게 허공을 누볐던 철적의 음률이 문득 사라짐과 동시에 묘한 침묵이 송림 가득히 깔렸다.
휘리리리 링―.
혈모니인이 초엽홍의 심장을 으스러뜨리기 직전, 무엇인가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내렸고,
"으음……!"
초엽홍은 이상한 피곤함에 사로잡히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순간, 혈모니인은 그녀를 조용히 제혈(制穴)한 자의 가슴에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찢겨졌다. 그의 피부에는 손바닥 그림자가 선명히 찍혔다.
신비롭게도 피부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다. 혈모니인은 강철을 녹이는 파괴력을 발휘하는데, 그의 피부에 붉은 손도장을 찍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불사마체(不死魔體)……! 네가 누구기에……?"
가짜 아랑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숙우륵의 자객, 넌 완벽한 암살자다. 넌 오류를 거의 범하지 않았다."
봉두난발의 청년 뇌우는 거금각주 초엽홍을 안아든 채 히죽 웃었다. 흰 이빨이 드러날 때 가짜 아랑의 이마 위에 땀방울이 맺힌다.
'이제 보니……?'
그녀의 눈빛은 여지없이 흐트러진다. 뇌우는 그녀가 실패의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간 암살자를 기다렸지. 어디에도 살기를 지닌 자가 없기에 숙우륵이 자객을 보내지 않았다 여기고 그냥 떠나려 했었지. 헌데…… 떠나기 직전 나타나 주었으니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으으……, 너…… 너는?"
가짜 아랑의 상체가 휘청인다. 그리고 목소리의 음색도 완연히 달라졌다.
순간 뇌우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 목소리는……?'
뇌우는 등에 도끼를 찍힌 듯 휘청였다. 그리고 대기 가득히 지독한 한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초엽홍과 더불어 그의 일생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한 여인이 있지 않은가.
그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그에게 인생의 진실을 알려준 냉혈비정녀(冷血非情女).
'그래……, 넌 잔향이구나.'
뇌우의 눈에 살광이 떠오른다.
가짜 아랑은 옥잔향이었다. 숙우륵은 초엽홍에 대한 살수로 혈련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보니 고고하고 우아한 한 송이 핏빛 연꽃이시군?"
뇌우의 눈에서 마광이 폭출한다.
"살, 살아났군요."
옥잔향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자세히 본다면 그녀의 연잎처럼 매끄러운 얼굴을 두 줄기 눈물이 촉촉이 적시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후후…… 너 따위에게 죽을 뇌우라 여겼더냐?"
뇌우는 그녀 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옥잔향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괴로움에 가득 찬 표정이라기보다는 기쁨에 겨운 표정이다.
"꼭 한마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래, 내게 할 말이 뭐지? 바보같이 속아주어 고맙다는 말이냐?"
뇌우는 천천히 왼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은 손목까지 희게 물들었으며, 일곱 자 길이에 달하는 백마강살(白魔 煞)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대에 무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백마강살은 극음지기(極陰之氣)를 품은 마공이다.
뇌우의 백마강살은 사성 수준에 불과했으나 일대는 두터운 서리에 뒤덮이고 있었다.
뇌우는 극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마성이 폭발한 것이다. 그는 옥잔향의 신체를 얼린 다음에 작은 조각으로 부숴 버릴 작정을 하며 백마강살을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마공이 완성되었더라면, 아마도 일대 백 장이 눈보라에 휘말리고, 옥잔향의 오장육부는 이미 냉각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옥잔향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우는 재주는 여전하군?"
뇌우의 노여움은 눈물로 인해 더욱 격해졌다.
"아……,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하여간 상공이 쾌차하심을 보니 기쁩니다."
"닥쳐, 천박한 계집!"
뇌우는 이를 악물며 손을 휘저었다.
휘리리리― 링―.
무시무시한 백마강살이 옥잔향의 상체를 휘어감을 때, 옥잔향은 혈관의 피가 모조리 얼어붙는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 조용히 이빨 하나를 깨뜨렸다.
'안녕……! 내가 진실로 사랑했던 낭군이시여.'
팟―!
가짜 이빨은 쉽게 깨어졌다. 이빨 안에는 무형독단(無形毒丹)이 들어 있었고 그것은 이빨이 깨어짐과 더불어 산산이 깨어졌다.
순간, 백마강살이 그녀의 가슴을 강타하며 그녀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왜 도망치려 하지 않지?"
뇌우는 노해 소리치며 청운적성술(靑雲摘星術)로써 그녀를 뒤쫓았다. 뇌우는 단숨에 그녀보다 높은 위치까지 치솟아 올랐으며 금나수 가운데 절정으로 평가되는 곤륜(崑崙) 종학금룡수법(縱鶴擒龍手法)을 시전하여 그녀의 팔목을 거머쥐었다.
직후, 뇌우는 그녀의 맥이 끊어졌음을 느꼈다.
"자결용 독단을 깨물었군. 넌 쉽게 죽지 못해, 넌 나를 조롱한 죄로 처절한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야 한다."
뇌우는 무서운 광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네겐 쉽게 자살할 자유도 없다!"
◆
단옥상이 숲 속의 폭음에 기겁하며 호법무사들과 더불어 송림으로 접어들었을 때, 송림바닥은 한 치 두께 서리에 뒤덮여 있었다.
단옥상은 일단 초엽홍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초엽홍은 바위 위에 누워 있었고 혼절한 상태였다.
그녀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 그녀의 상반신은 구겨진 푸른 장포에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철적이 그 위에 눌려져 있다.
'이 옷은 뇌공자의 옷인데?'
단옥상은 어디에도 뇌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초조해하며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일각 넘게 찾아봐도 뇌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단옥상은 초조해하며 모든 무사들에게 일대를 샅샅이 뒤지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침이 환히 밝아올 때, 등룡애(登龍崖) 일대를 뒤지던 무사들이 호각을 불어 단옥상을 불렀다. 단옥상은 뇌우가 발견되었는가 싶어 급히 가보았으되, 무사들이 발견한 자는 뇌우가 아니라 아랑이었다.
아랑은 본래 걸치고 있는 옷과는 다른 옷을 걸친 채 누워 있었다. 그녀를 쓰러뜨린 점혈법은 몹시 특수한 것인지라 누구도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그녀가 굶어 죽지 않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안배에 의한 결과였다.
그녀를 쓰러뜨린 자는 아랑이 굶어 죽을까 우려한 나머지 아랑에게 세 알의 벽곡단을 먹였던 것이다. 하기에 아랑은 며칠째 누워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누구였을까, 아랑으로 행세했던 자는.'
단옥상은 아랑을 새삼 살펴봤다.
문득 아랑의 신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몹시 화사한 빛의 꽃신이었다.

[여여풍]

감사합니다.

[슈퍼맨]

잼 납니다

[얼음골]

즐감했습니다.

[신두]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