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막 뒤의 후견인
장안성의 삼월은 황하변의 유채화(油彩花)와 더불어 시작된다. 고도 장안성의 후미진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채의 장원이 있다.
일컬어 노류장원.
장안 사람들은 노류장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를 휘휘 내젓는다. 노류장원은 흡혈장(吸血莊)으로 불리고 있다.
노류대부인은 장안성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던가.
헌데, 노류장원 바로 곁에 한 채의 고아원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고아원을 세운 노류대부인의 저의를 의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아원을 세운 장본인은 신비 속의 인의대인(仁義大人)이라는 소문을 듣고서야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이날, 노류대부인은 지하밀실에서 여러 명의 강호야학들을 만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강호계에 뛰어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노은현(老隱賢)들이다.
노류대부인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전설적 인물들.
그런데 열여덟에 달하는 강호은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류대부인에 대해 진실된 존모의 정이 담긴 눈빛을 흘리고 있다.
이들을 일컬어 중원십팔장로(中原十八長老)라 불린다.
전진교(全眞敎)의 냉하거사(冷霞巨師), 모산(茅山)의 풍운혈장로(風雲血長老), 음산(陰山)의 거두 음산신옹(陰山神翁), 적지천리객(赤地千里客) 위지발(尉遲發), 대하표객(大河 客) 곡검표(曲劍 ).
고월죽자(孤月竹子), 무당(武當)의 쌍청(雙靑)으로 불리는 태청(太淸)과 소청진인(少淸眞人), …….
하나 같은 강호의 노은현들이 아닌가.
이들은 젊음을 바쳐 반원열사(反元烈士)로 활동하였으며, 원이 물러나고 명이 건국된 이후에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여기고 죽림에 파묻혀 일신의 수양에 전념해 오고 있는 은자들이다.
이들을 추종하는 무인들은 아직도 많다. 이들이 방을 이룩한다면 하룻밤 새 십만여 무사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십팔인이야말로 당금의 중원을 이끌고 있는 거봉들이라고나 할까?
하기에 만천하 강호인들은 이들을 일컬어 중원십팔장로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하석(下席)에 자리잡고 있고 미천한 고리대금업자인 노류대부인이 상석에 머물러 있다니…….
방안 가득히 감도는 향기는 자단목향(紫檀木香)이다.
노류대부인은 여전히 산반을 쥐고 있다. 산반이란 그녀에게 목숨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산반 알을 퉁기는 가운데 일신상의 번뇌를 모조리 퉁기어 버리곤 했다.
지금, 그녀는 십수 년간 자신과 더불어 초엽방을 구축해 온 십팔대장로(十八大長老)와 더불어 십 년 만의 장로회의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 날의 회합은 초엽방 창건 이후 가장 중요한 회합이다.
아아……, 초엽방!
무시하는 사람도 많고 존경하는 사람도 많은 독특한 방파이다.
초엽방이야말로 진실로 중원무림의 뿌리이다. 비록 거목의 거대한 뿌리는 아닐 것이되, 초엽방의 실처럼 가는 잔뿌리로 인해 중원이라는 대지가 굳강히 버티어내고 있다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현실이다.
중원십팔장로는 하나같이 초엽방의 장로들이다. 그것이야말로 강호 최고의 비밀이다.
다시 말해, 초엽방은 강호의 기존 거대세력들과 철저히 밀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밝혀진다면 강호계는 발칵 뒤집혀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무등선사의 공적이다.
그는 과감히 승적을 포기하면서까지 세속의 평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솔직히 말해, 노류대부인은 무등선사를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일생을 다 바쳐 무등선사를 위해 헌신해 왔던 것이다.
"선사는 머지않아 숭산으로 돌아가실 것이외다!"
노류대부인은 장로들에게 향차 한 잔씩을 권하며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애잔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무등선사는 초엽방의 창건자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이다. 그가 초엽방을 떠난다는 것은 초엽방의 반이 허물어지는 이상의 손실이다.
장로들은 노류대부인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류대부인은 장로들이 반문하기 이전 먼저 중요한 안건을 꺼냈다.
"오늘의 회합은…… 선사가 은밀히 키우신 인물의 거취에 대한 것입니다!"
순간,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하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대륙비룡(大陸飛龍)!"
대륙비룡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십 년 전부터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하지만, 초엽방의 원로들이라 하더라도 아직 그의 얼굴을 본 바 없다. 대륙비룡이 누구인가는 노류대부인과 무등선사만이 아는 비밀이다.
노류대부인은 다시 한 차례 산반을 퉁긴다.
산반 알에는 손때가 얼룩져 있다. 산반 알을 퉁기는 것은 머리 속에 상념이 가득 차 있을 때 하는 습관이다.
노류대부인의 뇌리에는 한 청년의 고독한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음지(陰地)에서 지내셨습니다. 그 오랜 한은 영웅의 웅비(雄飛)로써 보상받으실 것이외다.'
그녀는 이 회합 가운데 대륙비룡이 누구인가를 밝힐 예정이다. 초엽방주는 만천하 초엽방도에게 무상의 권위를 지닌다.
초엽방의 저력은 강호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방대하다.
강호 육백주(江湖六百洲) 어디에도 초엽방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무등선사는 일생을 바쳐 초엽방을 구축했다. 초엽방은 그에게 있어 목숨 이상이다. 그러한 초엽방을 뇌우에게 물려주고자 했다는 것은 그가 뇌우를 자신의 친아들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 분의 나이 아직 삼십이 되지 않으셨소이다. 아직 경륜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나이, 하기에 십팔대장로께서 신임방주를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외다."
노류대부인은 정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밤, 노류장원 구석구석 야무(夜霧)가 깔리고 있다.
언제부터일까?
탁! 탁!
파열음이 단속적으로 들려온다.
장원에서 가장 후미진 곳, 자그마한 연못이 파여 있으며 연못 위에는 수련(睡蓮)이 둥둥 떠 있다. 수련은 밤 안개에 뒤덮이는 가운데 벙긋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몹시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정경이었으되 그는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다.
"……."
그는 아까부터 한 쌍의 눈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 눈은 텅 빈 눈이다. 등신대(等身大)의 석상 하나가 서 있다. 석상의 다른 부분은 다 만들어졌으되 눈 부위만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눈을 깎기 직전의 순간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석상의 형용은 괴벽하게 생긴 노선사(老禪師)의 형용이다.
아아……, 그 형상은 바로……?
중원무림사를 시작한 비조(鼻祖)가 있다.
불행히도 그는 중원인이 아니다. 그는 천축(天竺) 향지국(香至國) 출신이다. 그는 선종(禪宗)을 전파하고자 중원으로 접어들었으며, 양자강(揚子江)을 건널 때, 갈대잎 하나를 사용하는 기적을 발휘했다.
그 기적은 후세인이 일컬어 일위도강(一葦渡江)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불법을 전파하며 중원을 떠돌았으며, 결국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가 황하(黃河)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거산(巨山) 속으로 칩거해 들어갔다.
그곳은 효문제(孝文帝) 때에 건설된 절이다.
그 절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천축승 발타(跋陀)를 위한 절이었다. 그는 발타보다 삼십 년 늦게 그 절로 들어섰고, 그후 구 년에 걸쳐 면벽(面壁)하여 결국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중원인들은 그를 일컬어 이렇게 칭송하여 불렀다.
摩訶迦葉(마하가엽) 제이십팔대 佛徒(불도) 菩提達磨(보리달마).
그렇다.
그가 깎고 있는 것은 대달마상(大達磨像)이었다.
달마조사는 지극히 어렵게 혜가(慧可)라는 후예를 만나 선종을 전수했다. 그의 일생은 후세에 알려진 것처럼 화려하지 못하다. 그는 생애에 제왕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그가 최후를 마친 곳은 우주(禹州)라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여하튼 그는 불가선종의 비조이고, 중원무학에 있어서는 개파종사(開派宗師)로 손꼽히고 있다. 만에 하나, 그가 중원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가 숭산의 소림사에 당도하지 않았더라면…….
강호사는 거의 다 뒤바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달마는 좌선(坐禪) 가운데 졸리움을 없애고자 눈시울을 떼어 버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하나의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고, 그것을 일컬어 차(茶)라고 하기 시작했다는 전설도 있다.
하여간 달마는 천축인이기는 하되 강호의 마지막 하늘로 우람히 버티고 있는 영원한 거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중원의 아해(兒骸)들이 장난감으로 갖고 노는 오뚝이가 있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달마조사의 형상을 본따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달마조사로 인해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다.
자고로 선(禪)이란 행하기 힘들고 깨닫기는 더욱 힘든 것이다. 선은 문자(文字)로 전해지지 않는다.
선승들은 이러한 말을 하곤 한다.
<아비(父)를 만나면 아비를 죽이고, 조사(祖師: 달마)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선의 가르침은 다시 태어나는 가르침, 그리고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가르침이다.
선종의 거두인 조주화상(趙州和尙)에 얽힌 설화가 무문관(無門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활인도(活人刀)와 살묘도(殺猫刀)의 전설이…….
달마의 눈은 대각(大覺)을 상징한다. 자고로 소림화상(少林和商)들은 달마의 눈을 얻고자 했다.
하되, 죽음을 불사하는 면벽수련을 수십 년 거친 무수한 선사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달마의 눈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하다면…….
무등, 그의 일생 가운데 법의로 검게 물들었던 반생(半生)은 결국 대달마의 눈을 얻기 위한 멀고도 험한 고행이었단 말인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그는 천천히 정을 쳐들었다.
순간,
번쩍―!
너무나도 가공한 안광이 폭출한다. 밤을 유린해 버리는 전광(電光)과도 같은 눈빛이다.
"대달마여……!"
무등의 입매가 일그러지고 짐승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전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보라, 그의 일신을 휘어감고 있는 무시무시한 강기의 회오리를…….
거의 여든한 겹에 달하는 보리달마강기가 그의 일신을 칭칭 휘어감기 시작한다.
콰르르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무등의 몸뚱이는 결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천천히 떠오른다. 대지의 흙모래가 거대한 모래기둥을 이루며 솟아올랐기에 무등의 형상은 모래로 이룩한 연화대(蓮花臺) 위에 올라앉은 듯 보였다.
"이제…… 그대를……."
콰― 콰― 콰―!
무서운 기의 폭출이다. 가히 환우를 허물어뜨릴 듯한…….
"대달마 그대를…… 죽이겠소!"
무등은 굉천동지할 폭갈 가운데 일성을 가했다.
쩌엉―!
시퍼런 불똥이 퉁기어 오른다.
한순간, 달마상의 눈이 번쩍 뜨여진다. 그 눈은 천하에서 가장 광오(曠傲)한 눈이다. 가장 철저하며 냉혹한, 그리고 엄밀하고 비정한……!
인간의 정서 가운데 강인하고 철인(哲人)에 도달한 모든 정서가 함축되어 있는 그런 눈이다.
어찌 여긴다면 비인간(非人間)의 눈이고, 또 다른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해탈자(解脫者)의 눈이다. 그 눈은 지금 허공에서 부릅뜨여진 무등의 눈이기도 했다.
하여간 달마상의 두 눈은 순간적으로 뜨여졌고, 직후, 달마상은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파흔(破痕)을 끌면서 세로로 쪼개져 버렸다.
모든 게 한바탕의 백일몽(白日夢)인 듯, 이제 연못가에는 모래무더기가 무심히 쌓여 있을 뿐이다.
'드디어…… 득의(得意)하셨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오만하신 분이여.'
아까부터 무등을 살펴보고 있는 한 쌍의 고독한 눈빛이 있다. 그는 무등이 대달마상의 눈을 점안(點眼)시키는 것을 보았고, 대달마상이 형해(形骸)도 남김없이 으스러지는 것을 바라봤다.
그의 내공은 고금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수준이라 할 수 있으되, 방금 전에 본 무 등의 파해일격(破骸一擊)만은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리라.
무등은 땀에 흥건히 젖은 이마를 소매끝으로 닦아낸다.
다분히 지치고 허탈한 표정이다. 숨어 보던 자는 그가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무등은 술을 마시고 싶어할 때마다 눈빛을 여지없이 흩트리곤 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내고 있을 때였다.
팟―!
경쾌한 파공성과 함께 월동문 위를 타넘어 표표히 날아드는 야행인(夜行人) 하나가 있었다. 그는 허공 오 장 지점에서 신형을 바로잡으며, 천근추신공(千斤錘神功)이라는 무공으로 몸을 무겁게 하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그가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미미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놀라운 경공이다. 일컬어 천왕항세(天王降世).'
숨어 있던 자는 홀연히 출현한 자의 경공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등에 쌍검을 십자로 비끄러매고 있다.
그는 정중한 자세로 장읍을 취한 다음에 말문을 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헛허……, 성(城)으로 갈 때이던가?"
"그렇소이다, 뇌대협(雷大俠)."
"아, 나는 성에 가지 않을 것이오. 상관영반(上官領班)."
"가지 않으시다니오?"
상관영반은 어리둥절해 하며 무등을 바라봤다. 무등은 자애스럽고 또한 탈속한 표정을 짓는다.
"오랫동안 길러온 머리카락이 부담스럽소. 상관영반, 부탁이 하나 있소. 지금 내 머리를 삭발해 주시지 않으시겠소?"
"삭발이라니오? 그럼…… 다시 출가(出家)를?"
"헛허……, 따지고 보면 그 분으로 인해 세속의 큰 짐을 졌던 것뿐…….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불제자(佛弟子)였소. 갑자기 사찰로 복귀한다는 것이 그 분께 죄스러운 일이긴 하되 이제는 내가 없어도 조직이 잘 움직일 것이니……."
"뇌대협이 입사(入寺)하신다면 십수 년간 비밀리에 구축된 모든 기반이 여지없이 와해될 것이외다."
"아미타불……, 그것은 기우일 뿐이오. 세상에는 용봉(龍鳳)이 그득하오. 나는 장강(長江)의 앞물결에 지나지 않소. 이런 속담이 있지 않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헛허, 난 강호에 나와 대악(大惡)만 저질렀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산사에 파묻혀 범종(梵鐘) 하나를 깎는 것이랄까. 그 옹골찬 노선사께서 날 받아들이실는지 모르겠으되."
고집에 가득 찬 말이다.
상관영반은 어떠한 말로도 그를 설복할 수 없음을 문득 느꼈다. 무등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이 세속의 우정으로 날 하산시켰을 때 그 분과 한 언약이 있소. 언제고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허허, 이삼 년 후에야 떠날 날이 오리라 여겼는데 한 마리 용이 예상보다 빠르게 비천(飛天)해 오른 덕에 속세를 떠나는 일이 이삼 년 단축된 것이오."
무등의 결심은 이미 오래 전에 굳어진 것 같았다.
그는 거목 중의 거목이다. 상관영반은 한때 휘하에 칠만 무사를 거느린 바 있는 노영웅이었으되 감히 무등의 눈빛을 허물 수는 없었다.
◆
자욱한 안개 가운데, 번룡신검(飜龍神劍)의 날이 번들거린다.
회색빛 거친 머리카락이 이지러진 어깨 위로 날아내리고, 모래밭 위에도 떨어져 내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흩날려 연못 위로도 뿌려진다.
뇌우는 숨어서 삭발의 의식을 훔쳐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든 의무를 나에게 떠맡기시고 단신으로 허허로이 떠나실 수 있으십니까.'
뇌우는 당장 몸을 이동시켜 상관영반 앞으로 뛰어나가 그가 쓰고 있는 삭발검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무등선사는 뇌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떠날 것이외다. 이 지겨운 강호계를……!'
뇌우는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강호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가 강호계에서 처리해야 할 몇 가지 일이 있기에 아직 강호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은 절대로 남에게 미룰 수 없는 일들이다.
'숭산의 전설을 빌어 조직을 이룩하고 피의 처형(處刑)을 거듭했던 자, 스스로 제왕처럼 처신하며 암중에 강호의 질서를 조종해온 자, 그 자는 무심노사마저 감히 상대하지 못할 일세의 효웅이다. 난 그를 만나야 한다.'
뇌우의 낯색은 무서리가 주는 느낌보다 차가웠다.
'그를 죽여 천하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가 죽어야 할 자라면 죽이리라.'
새벽 안개가 유난히도 차갑다.
안개는 넓게 퍼졌으며,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찬란히 떠오르는 조양(朝陽)의 햇살로 인해 여지없이 으스러지고 말리라.
무등선사는 조용히 노류대장원을 떠났다. 그는 다시는 산문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살계를 저지를 죄과를 씻기 위해 평생을 면벽하며 지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황하에는 무수한 배가 머물러 있다.
상관영반은 그 가운데 한 척의 배로 올라섰다. 배는 얼핏 보아 미곡을 실어 나르는 선박으로 보였다. 배는 상관영반이 선실로 접어들기 무섭게 돛을 올리고 출범했다.
배는 성숙해(星宿海) 쪽으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배가 황하를 따라 나아가기 얼마 후, 아스라한 안개 너머로 귀문석굴(鬼門石窟)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팟―!
선실 안에서 하나의 암영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새처럼 빠르게 떠오른 암영은 단숨에 강의 북안(北岸)으로 날아내렸고, 직후 또다시 등천해 올랐다가 울울한 송백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거의 같은 순간, 미곡선의 바닥부분에서 푸른 그림자가 떠올랐고,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꿰뚫고 나아가면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철저한 위장이로군.'
추적하는 자는 이제까지 배의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강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속도로 인해, 배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두 시진 넘게 그러한 상태로 은잠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낯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만리라도 추적하겠다.'
그는 세 번 몸을 탄신(彈身)한 이후 앞서 치달리는 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앞서 나아가는 자는 누군가 자신의 뒤를 유유히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경우 제 눈을 의심하며 눈을 뽑아버릴 것이다.
그를 추적하는 자는 중원사상 가장 빠른 자이다. 그는 영원히 추적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추적하는 자는 바로 뇌우였다.
◆
상관영반은 오백 리마다 복장을 바꿨다.
그는 일곱 번에 걸쳐 준마(駿馬)를 바꾸어 탔으며, 준마를 타고 치달리지 않을 때에는 준마가 달리는 속도에 버금가는 육지비행공(陸地飛行功)으로 치달렸다.
닷새째 되는 날, 그는 거대한 성채를 향해 다가섰다. 그가 밤비를 가르며 거성의 벽 아래로 다가설 때, 닷새 내내 오십 장 거리를 유지하고 추적을 거듭해 오던 뇌우의 눈살이 미미하게 떨린다.
그는 거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몇 차례 그 성을 넘은 바 있다.
일컬어 만리장성(萬里長城).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축조물이다. 중원과 변황을 가르는 장대한 거벽의 행진이 만리에 걸쳐 이어진다.
만리장성이 진시황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되, 실상 성은 진시황 때 완성된 게 아니라 수백 년 세월 내내 바쳐진 수많은 중원인의 피와 땀 가운데 완성되었다.
상관영반은 만리장성 아래 위치한 거성으로 접어들었다. 뇌우는 그를 따라 경신술을 시전했다.
얼마 후, 그는 끝없이 너른 광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웅자를 자랑하고 있는 거대한 전각을…….
뇌우의 입술이 파리해졌다.
'이곳은 연경(燕京)이다. 저 웅대하고 화려한 축조물은 자금성(紫禁城)이다.'
오래 전 중리마격으로 위장한 천무를 제거하기 위해 연경에 오지 않았던가.
사실, 뇌우의 운명은 천무를 만남으로써 바뀌지 않았던가.
그때 태대환단을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뇌우는 아직도 호법살마문의 살수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뇌우는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상념을 지우며 상관영반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상관영반은 뇌우가 한 번 거친 바 있는 양가장(楊家莊)이라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황궁시위부의 비밀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양가장 안에는 학자풍의 청년들이 오백여 명 모여 살고 있다. 외부사람들은 그들이 한림원에 들기 위해 불철주야 학업에 열중하는 학사들이라 여기되 실상 그들은 삼품시위(三品侍衛)의 영패(令牌)를 소지하고 있는 일급 무사들이다.
뇌우는 양가장 안까지 들키지 않고 추적해 들어갔다.
그는 이미 연경을 구석구석 누빈 바 있다. 그러한 체험이 없었더라면 황궁시위부의 대외무반(對外武班)의 거점을 그리도 유유히 돌파하지는 못했으리라.
'중원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자가 관부(官府)의 인사였단 말인가.'
뇌우는 더욱 강한 분노를 느꼈다.
그에게 암살을 지시한 최후의 인물이 있다. 그는 모든 음모의 창시자이다. 무심노사라 하더라도 그에 비한다면 하수인에 불과하다.
뇌우는 그를 추적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구문제독(九門提督)일지도……,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에 의해 좌지우지하기엔 중원무림이 너무나도 넓지 않은가.'
상관영반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밀실로 접어들었다.
일단 그는 철전포(鐵戰袍)로 갈아입었으며, 등에 메고 있던 쌍검을 벗는 대신 허리띠 삼아 찰 수 있는 연검(軟劍)을 몸에 지녔다.
시종은 벙어리였기에 아무 말 없이 의복 시중을 들었다.
"그 분이 꽤나 노여워하시리라. 이 너른 천하에 그 분과 더불어 대작할 사람은 뇌대협 한 분에 불과하였거늘, 그 분이 재출가 하셨으니……!"
그는 중얼거리다가 턱끝을 쳐들었다.
시종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방을 물러났다. 상관영반은 방문을 안에서 잠근 다음에 시선을 유등 쪽으로 돌렸다.
이어, 그는 유등을 잡고 좌로 세 번 비틀고 나서 우측으로 두 번 비틀었다.
직후, 바닥에 진동이 일어나더니 북향벽이 쩌억 갈라지며 암도가 나타났다. 상관영반은 암도 속으로 접어들려 하다가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절세고수에게는 범인이 상상하기 힘든 감각이 있다. 그것을 일컬어 초감각(超感覺)이라 하며, 세인들은 그러한 감각을 육감(六感)이라고 표현한다.
상관영반은 역전의 노장이다. 그는 청년시절 행협(行俠)하며 강호를 누비며 흑도거마(黑道巨魔)들과 수십 차례 싸운 바 있다. 그는 최근에 이르러 금단지기(金丹之氣)를 연성하며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돌입했다.
문득 느껴지는 기운은 너무나도 미세하여, 얼마 전이었다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것이다.
'설마 누군가 이 안에……?'
그는 의혹에 휘어감겼으며, 강호의 노영웅답게 반사적인 동작으로 연검을 뽑아들고 허공에 무수한 검우(劍雨)를 흩뿌렸다.
치리리릿―!
그가 필생을 바쳐 완성한 팔방풍우만변검(八方風雨萬變劍)!
단 삼초일검에 불과하되 한 번 출수되면 방원 오장 안의 모든 경물이 난도질당한다. 그 위력이 너무나도 가공하기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시전하지 않는 필살의 초식이다.
파파파팟―!
삼면의 벽에 파흔이 가득 찬다.
"아무도 없군? 내가 문득 허상에 사로잡혔던가?"
상관영반은 연검을 쳐든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직후, 그는 흐릿한 그림자가 뒤쪽에서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는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일컬어 편복무흔비( 無痕飛)의 은형술이다.
상관영반은 그것을 느꼈을 때, 등줄기로 무형의 경력이 퍼부어졌다.
파팟―!
그의 등줄기 혈도 일곱 군데가 연쇄적으로 점혈되며 그의 의식은 사라지고 말았다.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