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사월무정(四月無情)
파― 파― 팟―!
우박이 화북평원(華北平原)을 질타하고 있다.
삼월말, 무성해지기 시작한 농작물의 잎사귀에 구멍이 뚫리곤 한다.
오원성(五原城) 깊은 곳.
일컬어 철필각(鐵筆閣)이라 불리는 누각이 있다. 철필각의 기와지붕에도 우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철필각 허공에는 거대한 물체가 떠 있다. 붕새처럼 떠 있는 물체, 그것은 바로 연(鳶)이다.
두 마리 용이 그려진 쌍용연(雙龍鳶)…….
연은 천잠사로 만들어졌기에 우박이 아무리 심하게 뿌려댄다 하더라도 망까지지 않았다. 쌍용연은 백 장 허공에 날아올려졌는지라 수십 리 밖의 농부라 하더라도 쌍용연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다.
귀족적인 사치가 아니랴.
우박으로 인해 농부들이 경악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거늘 하늘에 연을 띄우다니, 빌어먹을……!
◆
그는 창을 통해 연을 바라봤다. 오늘은 사월(四月)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에게는 실로 무정한 사월이다.
벌써 칠 일째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면서 연만 노려봤다. 그의 낯색이 유난히 푸르죽죽한 이유는 다섯 개의 마단(魔丹)을 한꺼번에 삼켰기 때문이다.
마단은 이름하여 탈명낙백단(奪命落魄丹)이다.
효과가 강하기는 하되 부작용이 심한지라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극약이다.
그는 두 다리 잘린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리고 전에 비해 두 배 강한 마공을 지니기 위해 탈명낙백단 다섯 알을 동시에 삼킨 것이다.
'사실…… 덫을 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계집이었다. 어리석게도 그 계집의 교활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좌태상 숙우륵, 그는 이가 아스러지도록 힘껏 입을 악다물었다.
'세력의 구할을 잃었다. 내가 살아 있는 이상 삼 년 안에 그것을 능가하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아직은 패한 것이 아니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하나의 산이 떠오른다.
오연하게 천하를 굽어보는 산, 그 산을 얻을 수 있다면 철왕성의 패배는 하루아침에 만회할 수 있다.
휘리리리― 링―.
표풍이 몰아닥친다. 그의 망막에 가득 찬 쌍용연이 더 높이 떠오른다.
그러던 한순간, 적송림 쪽에서 푸른 선이 떠오른다.
인간의 안력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비행해 오른 푸른 선은 연줄 가운데를 정확히 자르며 철필각 쪽으로 다가섰다.
순간 숙우륵의 눈에선 감루가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왔군.'
그 자는 천하에서 가장 핼쑥한 뺨을 지니고 있다.
큰 키에 약간 여윈 몸매, 꽤나 잘생긴 얼굴인데 표정이 냉막하기 짝이 없다.
"후후……, 널 기다렸다."
숙우륵은 천천히 다가서는 청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가서는 자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리라.
그는 안다, 일장 안으로 다가서는 자가 대륙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자라는 것을.
"아수라, 그곳에서의 살인은 당연히 성공했겠지?"
숙우륵은 종에게 말하듯 말했다.
그는 숙우륵을 빤히 바라보며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숙우륵이 생각건대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어야 한다. 그것이 심백(心魄)이 금제된 자의 특징이다.
지금 그의 표정에는 야릇한 미소가 흐르고 있지 않는가. 숙우륵은 일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 느꼈으며,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출렁거렸다.
"유감이되……, 내가 어찌 나를 기른 사람을 베겠소?"
"뭐, 뭐라고……?"
"후후……, 그대라면 사부를 벨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소."
뇌우는 여유 있게 웃으며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빌어먹을……, 이 놈이 백치상태에서 깨어났군.'
숙우륵은 기겁을 하며 손을 쳐들었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호각 하나가 입술 사이에 물려 있었다. 그는 거친 호흡 가운데 이빨 사이로 가는 목소리를 새어보냈다.
"다가서지 마라. 그 자리에서 멈춰라, 아수라……."
"호오……, 그 호각이 신통력을 발휘하는가 보오. 호각으로 날 위협하시다니……. 수석교두 나으리."
"이건 숭산 장보동(藏寶洞)의 보물이다. 일컬어 제령각(除靈角)! 이걸 불면 너의 옥침관(玉枕關) 금제부위가 터져버린다."
"후후, 그러하다면 부디 호각을 불어주시기 바라오. 한 많은 인생 고통 없이 마감할 수 있다면 차라리 기쁨일 테니까."
뇌우는 유유히 말하며 다가갔다.
"찢어 죽일 놈!"
숙우륵은 노해 소리치며 호각을 힘껏 불었다.
삐이이― 익―.
듣기 역겨운 음파가 퍼져나간다. 그러나 뇌우는 그 소리를 듣는 게 즐거운 듯 씨익 웃을 뿐이다.
"달콤한 곡조구료……!"
"으으……, 네놈이 옥침관의 금제마저 해소했구나?"
숙우륵은 치를 떨며 쌍장을 흔들어댔다.
콰광―!
마폭벽력화장(魔爆霹靂火掌)이 뇌우의 가슴에서 작렬한다. 푸른 냉기가 피어오르고 살 타는 내음이 퍼진다.
"케에에엑……."
처절한 비명소리 가운데 육구(肉球) 하나가 떠오른다.
절반 가량 타버린 살덩어리, 그것은 바로 숙우륵의 살덩어리였다.
쾅―!
숙우륵의 몸뚱이는 벽에 부딪치며 형체를 찾지 못할 정도로 무참히 으스러졌다.
'죽일 작정은 아니었는데.'
뇌우는 웃음을 거두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사이 그의 마공은 보다 강력해졌다. 그는 숙우륵을 상대로 칠성 내공을 썼을 뿐이다. 보통 때였더라면 숙우륵의 팔을 으스러뜨리는 것으로 내공이 흐트러졌을 것이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숙우륵의 상체가 불에 그을리며 산산이 으스러지고 만 것이다.
'내가 중원무림에 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공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뇌우는 산을 증오했으며, 그 산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데 묘한 운명은 그를 산의 주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마성의 제물이 된다면 산을 증오했던 환희행자의 저주가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뇌우는 금강부동신법으로 살성을 억제하고 있다. 한번 꿇어오른 살기를 억제하는 것은 절정고수 백 명과 싸우는 것보다 힘든 것도 사실이다.
아수라의 극한수업이 없었다면 이미 마성에 굴복했으리라.
뇌우가 착잡한 심정이 되어 있을 때,
핑―.
한 발의 자색 폭화가 허공을 꿰뚫으며 날아올랐다.
문득 뇌우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자색폭화는 그를 찾는 신호이다.
◆
동창은 창건된 지 삼 년이 되지 않는다.
영락은 동창에 막강한 권한을 주었고, 대명황부의 인재들을 동창에 소속시켰는지라 그 위세는 황부세력 가운데 가장 막강하다 할 수 있었다.
뇌우에게 보고를 하는 자는 동창제독(東廠提督)인 바, 그는 어이해 제왕이 이 초라한 옷차림의 청년을 동창제독보다 더 높은 지위의 제왕밀사(帝王密使)로 안배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여하튼 그는 영락이 지시한 바대로 뇌우에게 절대복종하고 있었다. 그는 누란군주가 영웅혈맹(英雄血盟)을 개최하는 장소에 대해 보고하고자 뇌우를 찾아왔다.
그 장소는 뜻밖에도 십만대산(十萬大山)이었다.
'대단한 계략가로군.'
뇌우는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황부무사들은 대부분 북방지역에 포진해 있다. 솔직히 누란의 휘하무사들은 몽고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헌데, 정작 누란은 남하(南下)하여 십만대산으로 접어든 것이다.
일컬어 조호이산지계(調虎移山之計),
누란의 계교로 인해 황부무사들의 방대한 포위망은 구멍 뚫린 그물이 되고 만 것이다.
"십만대산에서 혈맹이 열리는 날은?"
"정확히 닷새 후입니다."
"그렇다면 북방지역에 포진한 동창의 은살수들을 십만대산으로 이동시키기 불가능하겠구료."
"그, 그렇습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보름이 걸릴 것이외다."
"보름이라……!"
"아아……, 결국 혈란(血亂)이 일어나는 것이오, 밀사."
"천만에, 혈란은 일어나지 않소이다."
뇌우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예에?"
"후후……, 무림을 무시해선 아니 되오."
"무, 무림!"
"특히 하나의 방을……! 황부가 무시하고 있는 초엽방을! 후후, 이번 일은 초엽방의 독자적인 힘으로 처리될 것이오. 은살수들은 남하하여 십만대산에 모이기보다 옥문관(玉門關)일대로 북상하여 누란의 추종세력을 제거하도록 지휘하시오. 단 희생자가 많이 나지 않게끔 노련히 처리해 주기 바라오. 그건 황제폐하의 당부이기도 하오."
뇌우는 그렇게 말하며 뜰로 걸어나갔다.
뜰에는 거조가 날개를 접고 있다. 거조를 타고 간다면 사흘 안에 십만대산에 당도할 수 있다. 그는 십만대산에 가기 이전 그녀를 만날 예정이다.
어쩌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공과 싸우기 위해 절해고도로 갈 예정이다. 마공이 심성을 꺾는다면 그는 미쳐 발작하다가 자결하게 되리라.
동창제독은 그의 뒷모습에서 제왕의 품위를 느꼈다.
파락호로 자라 자객으로 대륙을 방랑해 온 고독한 무사, 뇌우. 그는 어느새인가 강호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만 것이다.
'거목이다, 너무나도 큰 뿌리를 지닌……. 아아, 누구이기에 저 나이에 저리도 엄숙한 기표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
거금각(巨金閣).
오랫동안 거금각을 휘어감았던 진세가 말끔히 풀렸다.
거금각 사람들은 뇌우가 불쑥 들어서자 죽은 조상을 만나기라도 한 듯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했다.
뇌우는 명실공히 거금각의 상속자이다. 뇌우는 특히 뜨거운 단옥상의 눈빛을 애써 피하며 물었다.
"어머니는?"
"한랑(恨娘)과 함께 계십니다."
"한랑이라면?"
"며칠 전 각주의 제자로 들어온 미인입니다. 호호, 실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눈독들이지 마십시오. 임자가 있는 여인이니까요."
단옥상은 뇌우를 다시 보게 된 게 형용할 수 없이 기쁜 듯 웃음을 한시도 거두지 않았다.
후원에는 금잔화(金盞花)가 가득하다. 뇌우는 느릿느릿 걷다가 그녀를 봤다. 그는 초엽홍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벌컥 냈다.
"차를 많이 마시지 말라고 부탁드렸거늘 잊으셨군요. 차가 몸에 좋다고 하되 몸이 허한 상태에서 약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요."
"뇌로구나……!"
초엽홍은 그를 바라보는데 낯색이 아주 좋아 보였다.
뇌우는 그녀의 심마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즉시 파악하고 속으로 감루를 흘렸다.
그녀의 뒤쪽,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바구니에 꽃을 따서 담고 있었다.
'저 여인이 한랑인가 보군.'
"얘야, 이리 와 봐라……. 한랑을 네게 소개해 주겠다. 사실 한랑은 네가 오면 피신하겠다고 했는데 네가 갑작스레 온 덕에 어쩔 수 없이 상견례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하하, 어머니의 새로운 제자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뇌우는 환히 웃었다.
한랑이라는 여인은 쉽게 뒤돌아서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주춤거리다가 초엽홍이 세 차례 거듭 질책한 이후에야 겨우 꽃바구니를 가슴에 안은 자세로 뒤돌아섰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몹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랑입니다요, 소각주님!"
"……!"
뇌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너였더냐?'
한랑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초엽홍이 지닌 신비로운 아름다움과는 달리 철저하게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입술이 파리하고 얼굴이 유난히 흰 여인, 그녀는 바로 옥잔향이었다. 뇌우는 분노하여 뭐라 말하려고 하다가 옥잔향의 뺨에 길고 깊은 상처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상처는 목 아래쪽까지 쭈욱 이어진 상처였다.
'설마…… 자결 기도를……?'
뇌우의 눈썹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불쌍한 아이다. 잘 돌봐주어야 한다."
초엽홍은 뇌우의 손을 꽈악 쥐었다.
한랑은 피투성이가 되어 단옥상에게 발견이 되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비수를 조금 더 깊이 찔렀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했으리라.
뇌우는 옥잔향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고 머뭇거렸다.
그때 옥잔향이 전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죽으려 하였으되 죽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 뱃속에 상공의 아이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으으……!"
가히 전율이다. 옥잔향이 뇌우의 아이를 잉태하다니…….
과거 그녀는 뇌우의 아이를 갖고 싶노라 애원한 바 있다. 결국,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출산한 후 아이를 각주님께 맡기고…… 영원히 떠날 것이외다. 그러니 부디 지금은 그냥 떠나 주십시오."
옥잔향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전음을 이었다. 뇌우는 한참 그녀를 쏘아보다가 역시 전음으로 대꾸했다.
"잔향, 만에 하나…… 나의 아이를 어미 없는 자식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내 너를 능지처참시키리라."
"으으……?"
옥잔향의 표정이 기묘히 일그러졌다. 뇌우의 눈빛 또한 기묘하다. 분노인지 증오인지…….
"내 어머니를 잘 섬겨라. 그게 며느리의 도리다! 딴 생각은 말고!"
뇌우는 엄격히 말한 다음에 초엽홍 쪽으로 다가갔다.
옥잔향은 한순간이나마 환각에 가까운 희열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놓쳤다 여겼던 사랑을 다시 얻은 것이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녀는 뇌우를 가장 잘 아는 여인이다. 그녀는 뇌우의 진짜 아내가 아니던가. 아내만큼 남편을 잘 아는 여인은 없다.
화향이 감미롭다. 옥잔향이 일생 동안 맡아온 어떤 향기보다도 진한 향기이다.
◆
십만대산(十萬大山)―.
가히 남방의 하늘이다. 그녀는 아까부터 암울한 하늘빛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녀는 유성(流星)이 천랑성좌(天狼星座) 사이에서부터 북두성좌(北斗星座) 가운데 개양성(開陽星)과 요광성(搖光星) 사이로 낙하(落下)해 내리는 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길조야……."
그녀는 천기를 읽을 줄 안다.
그녀는 천관서(天官書)를 오 세에 달통했다. 지금 그녀가 본 천기는 귀인(貴人)을 만나는 천기이다.
새벽에는 영웅혈맹이 개최된다. 혈맹의 개최장소를 북산관(北山關)에서 십만대산으로 바꾼 것은 그녀의 독단이었다.
그녀는 숙우륵이 끌어모은 세력 깊숙이 스며 있던 밀정들을 확인하였고, 그들이 거의 다 대명황실의 신흥조직에서 나타난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혈맹의 장소를 십만대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이곳까지 세력이 미칠 수야…….'
그녀는 강호를 일단 정복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자금성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당금 강호의 주인이 바로 자금성의 주인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왕성에 모였던 세력을 몽고로 이동시킨 것은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모든 것은 그녀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다.
지금, 혈맹에는 팔천의 절정무사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 그들은 누란군주의 명이라면 화약을 지고서도 불 속에 뛰어들 정도로 용맹스런 자들이다.
그들은 혈맹 이후 범선을 타고 연경 쪽으로 이동하리라.
그녀는 해전에 능한 동영의 무사들을 다수 확보한 바 있기에 선박을 이용한 이동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새벽까진 세 시진이 남았다. 며칠째 불면증으로 잠을 못잤으나 여전히 졸음이 오지 않았다. 그녀의 일생은 내일 새벽을 위해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어찌 여긴다면 여인의 삶치고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한 지 오래이다. 그녀는 극히 드문 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잊고 산다.
사실 강호가 넓다 하더라도 그녀를 놀라게 한 남아대장부는 없었다. 이제까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심어준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고독한 자객이었고, 언제고 그를 휘하에 끌어들여 중요한 임무를 맡겨볼 작정이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고 그림자가 따라 움직였다. 달빛이 사라지면 대륙의 역사가 바뀌리라. 많은 사람이 희생될 것이되 어쩔 수 없다.
역사란, 피를 먹고 자라나는 한 그루 혈목(血木)이 아니던가.
'모두 숙명일 뿐이야.'
그녀가 야릇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운남의 하늘 아래로 거조 한 마리가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
"사만구천(四萬九千)이라면 충분하지, 묘묘화(妙妙花)!"
뇌우는 만다라검을 매만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뇌우는 누란과의 일을 강호의 일로 여기고 있다. 동창의 세력이 개입된다면 강호는 황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가 동창의 힘을 거절한 이유는 그에게 환희교단이 있기 때문이다.
묘묘화는 예상보다 빨리 만나게 된 지존 앞에서 무릎을 꿇고자 하였으되 뇌우의 손에서 발휘되는 무형강기가 그녀의 오체투지(五體投地)를 계속 방해했기에 서서 말을 이어야 했다.
"교주께서 시전하시고자 하시는 삼라만상포박진(森羅萬象抱搏陣)을 이룩하기 위해선 최소한 십만이 필요하다 사려됩니다만."
"정확히 말해 십사만이다."
"그럼 십만이 부족하지 않은가요?"
"후후……, 환희교단에서 사만구천, 그리고 초엽방에서 십칠만이 동원될 것이니 인원은 오히려 넘친다."
"초, 초엽방이오?"
"프핫핫……, 이곳 운남에서 가장 방대한 세력이 환희교단이라 여기겠지만 그게 아니다. 묘묘화!"
"그, 그럴 리가?"
"초엽방도들은 운남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후후……, 대륙비룡이라는 자가 명한다면 삽시간에 사십만이 모여든다."
"대륙비룡이오?"
"바로…… 네 앞에 그가 있다!"
묘묘화는 입을 크게 벌렸다. 뇌우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의 표정은 전에 비할 수 없이 밝아 보였다.
묘묘화는 섬세한 여인인지라 그의 눈빛이 은은한 혈채를 뿌리기 시작한다는 데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공의 무서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환희행자가 그 대표적인 희생자가 아니던가.
'부디 마공과 싸워 이기시길…….'
묘묘화는 애써 마공을 화제로 삼지 않았다.
뇌우는 매일 두 시진 이상씩 운기행공을 해야만 마공을 억제할 수 있는 상태이다. 솔직히 말해 그것만 하더라도 그의 의지가 굳강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발광해 버렸으리라.
스슷― 스읏―.
어둠을 뚫고 수만의 무사들이 움직이고 있다.
무사들은 백팔조로 나뉘어 정해진 장소를 찾아 안개 흩어지듯 흩어졌다.
가장 앞선 자들은 불마검수(佛魔劍手). 능히 일당 백의 몫을 담당할 수 있는 무사들이다. 이들의 뒤를 따라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아간다.
십만대산은 거대한 산이다. 무사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이 숨어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
십만대산의 여명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만리운해(萬里雲海)가 일순 조양의 핏빛 혈륜(血輪)에 유린되며 피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누란은 뜬눈으로 방에서 여명을 맞아들였다.
그녀의 파리한 입매에는 늘 한기가 머금어지고 있으되,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도 아름다운지라 그 표정이 돌연 화사하게 풀린다.
그녀의 입가에 보조개가 번지기는 오랜만이다. 그녀는 발 아래 피어난 제비꽃 한 송이를 본다. 그녀는 제비꽃을 꺾고 싶다 여기고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꽃을 꺾으려다 또 다른 누군가 그것을 보고 기뻐할 사람이 있으리라 여기고는 가볍게 매만지다가 손을 떼고 만다.
직후,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직감하고 쌀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어떤 무례한 자냐?"
"후후후……, 낭객이오."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끼 낀 바위 위에 허름한 청삼을 걸친 청년이 서 있다. 그의 가슴에는 사척장검이 가죽에 둘둘 말린 채 안기어 있다. 봉두난발 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진 모습이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한 남성의 관능을 느끼게 한다.
'놀랍군……, 바로……?'
누란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어디서 본 인상이로군?'
뇌우는 누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녕 미의 세계에는 끝이 없는 듯하다. 어머니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그것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증명이 되었다.
오똑한 콧날에 강한 응시의 시선, 그리고 핏기가 흐르되 매우 선정적인 입매, 가늘고 흰 목덜미……
누란군주는 여인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녀는 젊고 신비하다.
'하여간 어디서 본 듯하군.'
뇌우가 기억을 더듬을 때, 누란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음색을 약간 바꾸어 말했다.
"감시가 엄할 텐데 여기까지 쉽게 들어왔군?"
"후후……, 오합지졸의 감시가 무슨 소용이겠소."
"내 목을 노리는가?"
"부정하진 않겠소."
"청부자객 같군. 그렇다면 내 목을 자르는 대가로 대금을 받을텐데 대체 얼마를 받기로 하고 날 죽이러 왔는가?"
"유감이오만 받는 돈은 없소!"
"호호, 섭섭하군. 내 수급이 그리도 무가치하다는 게……!"
"후후,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부자이기 때문이오."
"부자라고, 호호호……!"
누란은 어처구니없는 듯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 가운데 일대가 시끄러워지며 오백여 명의 무사들이 밀물 다가서듯 모여들었다.
파팟― 팟―!
"누가 감히 군주께 다가섰느냐!"
"저 놈을 베라!"
노호하는 소리 가운데 무사들의 움직임이 신속해진다. 순간, 누란은 손을 번쩍 쳐들며 엄숙하게 외친다.
"멈춰라! 이 잔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누란의 한마디 명령으로 인해 모든 무사들이 일제히 신형을 멈췄다.
그때 뇌우는 무사들 가운데 몇의 얼굴이 낯익다 느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누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였던가…… 빙혈(氷血), 그녀가 바로…….'
뇌우는 누란의 손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히 살아 있는 환상이다. 그 목은 영원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 목이 목을 조른다 하더라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오직 환희만이 느껴질 것 같다.
뇌우의 표정이 굳어질 때,
"호호호……, 이제야 피차 구면이라는 것을 안 듯하군. 뇌우."
"후후후, 미천한 중원무사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오, 누란군주."
"즐거운 일이 많았던 듯하군. 표정이 밝아 보이니……."
"가공한 회합이 벌어질 것이니 술과 음식이 흔할 게 아니겠소이까?"
"호호호……, 뇌우, 네가 혈맹에 관심이 있다니 반갑다. 네가 바란다면 이 자리에서 즉시 호법 자리를 주겠다."
"난 패자 쪽엔 달라붙지 않소. 솔직히 나 같은 자는 일종의 기생충……. 난 승자 쪽에만 달라붙는 비겁자요."
"내가 진다 여기느냐?"
누란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흥……, 난 영원히 지지 않아……. 몽고의 태양은 떠 있다."
"해는 매일 뜨고 지는 법이외다."
"……!"
누란은 기가 막힌 듯 말문을 닫고 뇌우를 한참 동안 쏘아봤다. 뇌우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모조리 받아냈다.
과거에는 누란의 시선이 훨씬 더 강했었다. 하되, 지금은 전혀 다르다. 누란은 뇌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깊이를 모를 혈하(血河) 속으로 빠져버리는 듯한 환상에 휘말려들었다.
뇌우는 백색마교의 마공 가운데 혈하번뇌안(血河煩惱眼)을 은연중 시전하고 있다. 그의 마공은 또 한 단계 증가되어 구태여 시전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마공이 시전되곤 하는 것이다.
누란의 무공 또한 마공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신공을 익힌 사람에 비해 강한 충격을 받는 것이고, 그것을 일컬어 이마제마(以魔制魔)라 한다.
'놀라운 진전이다. 가히 일취월장이다.'
누란은 뇌우의 무공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고강해졌음을 느끼고 한숨을 토했다.
"호법의 지위에 만족할 수 없다면 좌태상의 지위를 주지."
그녀로서는 엄청난 양보이다.
"후후……, 좌태상이란 쉽게 목 잘리는 지위가 아니오?"
"반역을 한다면 그러하지."
"후후……, 곧 무너질 군주의 세력에 누가 반역하겠소?"
"난…… 무너지지 않아!"
"글쎄……!"
뇌우는 느물거리는 표정 가운데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여간, 두 남녀는 미묘한 대치상황을 이루면서 연회장으로 접어들었다.
연회장에는 팔천 명을 위한 잔이 마련되어 있다.
연회를 준비한 사람들은 늘 누란을 따라 다니는 친몽혈위(親蒙血衛)들이다. 그들은 수십 년간 변황을 떠돌며 누란을 보필해 왔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무사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새벽이 되며 상당수의 무사들이 불안감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보라, 거의 모든 자리가 공석이지 않는가.
좌석을 꽈악 메워야 할 무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누란은 이각 넘게 무사들이 소집하기를 기다렸으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누란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할 때, 뇌우는 잔을 쳐들어 건배하는 자세를 취한다.
"내 짐작대로가 아니외까?"
"으으……, 어이해 무사들이 오지 않는 것이냐, 어이해!"
"그들은 영원히 오지 못할 것이오."
"네가 뭘 알기에 호언장담하느냐?"
"후후……, 진실을 안다면 실망하실 것이오!"
뇌우는 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에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잔은 가공한 속도로 날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잔이 허공을 가르는지가 향전음(響箭音)을 능가하는 가운데,
"우―! 우―!"
"와아아―!"
갑자기, 능선에서부터 무수한 인영이 치솟아 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끝없이 많은 인간의 장벽이 세워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사들이다.
거의 십사만에 육박하는 무사들은 연회장을 아홉 겹으로 포위하는데 촌각을 사용했다. 놀라운 것은 무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인질을 하나씩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혈맹에 참가하기로 안배된 무사들이다.
"이, 이럴 수가!"
"으으……, 모두 제압당하다니……."
"군주이시여, 저희들에게 명을 내려 주십시오. 즉시 저 자들을 도륙내겠습니다."
"어차피 혈맹이란 형식적인 집회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저 오합지졸이 제압되었다 하더라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누란군주 앞으로 몽고의 정예무사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결국…… 혈우를 멈출 수 없겠군.'
뇌우는 다시 한 잔 술을 마신다. 그는 피를 뿌리지 않고자 기대하였으되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살육은 불가피한 듯 여겨진다.
'다만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지. 그건 모험이되…… 해볼 수밖에.'
뇌우는 손아귀에 힘을 가했고 쇠로 만든 잔이 돌연 찌그러든다. 뇌우는 잔을 팽개친 다음에 팔짱을 끼고 누란군주 쪽으로 다가갔다.
누란군주의 눈에서는 독광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고, 그녀의 진의를 알아차린 시녀가 재빨리 검갑(劍匣)을 바쳤다.
검갑 뚜껑이 열리며 검이 나타났다.
뇌음구룡(雷音九龍)―.
누란이 뇌우를 회유하기 위해 꺼냈던 보검이다.
"뇌우, 내게 절한다면 검을 뽑지 않고 검을 네게 하사하겠다."
"유감이오. 내 무릎은 잘 굽혀지지 않아서……."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군?"
누란은 노해 소리치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스르르르― 릉―!
자색검집이 허공으로 퉁겨 오른다. 순간 기공할 폭음이 터져나왔으며, 허공에 아홉 마리 용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일대가 환영에 뒤덮이자 능선을 뒤덮은 초엽방, 환희교단의 무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뇌우의 안위를 걱정하는 표정이 된다.
묘묘화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누란 따윈 삼초 상대로 아니 되지.'
그녀는 뇌우의 쾌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뇌우가 도살을 원한다면 단신으로 모든 마인을 벨 수도 있다.
묘묘화가 마음속으로 확신을 거듭할 때, 뇌우는 용의 환영 속에 묻히고 있었다.
콰르르르― 릉―!
뇌성이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묘묘화의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다.
뇌우는 뻣뻣이 서 있을 뿐이다.
파파파팟― 팟―!
뇌우의 가슴팍으로 용영(龍影)이 뚫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용영은 형의검살강(形意劍煞 )이다. 한 마리 용영에 닿기만 하더라도 살이 썩어문드러진다.
뇌우의 몸 속으로 아홉 마리 용영이 파고들었다.
'유감이구나, 내가 감정을 절제 못하였으니…….'
누란군주는 뇌우의 가슴에서 뿜어지는 피를 본 후에야 냉정을 회복했다. 문득 눈앞이 흐릿해진다. 그녀도 이해 못할 감정이다. 오만하고 버릇없는 중원자객 하나를 베었기로서니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다니…….
바보처럼……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그 천박한 자를 연모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람은 상실 이후에야 대상의 가치를 안다던가. 짧은 순간이되 누란은 일생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혔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운이 좋았군……! 지난 밤 꿈을 잘 꾼 탓이야."
뇌우는 휘청이다가 몸을 바로잡는다. 출혈이 심한 탓에 낯색이 상당히 창백하다. 하지만 그의 의연한 기표는 점점 더 장대한 무게를 지닌다.
"살, 살다니…… 네가 어찌……?"
누란은 노해 외치며 다시 일검을 휘둘러댔다.
휘리리리링― 쾅―!
선풍(旋風)과 전섬(電閃), 그리고 검화혈우(劍花血雨).
인근 십 장이 핏빛 용영에 또다시 휘말린다.
파파팟―!
뇌우는 다시 한 차례 피비로 몸을 씻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어이해 내공을 감소시키시오, 누란군주. 후후……, 미천하기 이를 데 없는 중원자객에게 동정심을 갖고 계시기라도 하는 것이외까?"
"닥, 닥쳐!"
누란군주는 또다시 검을 쳐들었다.
그때 뇌우는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나풀거린다.
"날 죽인다면 나의 십사만 수하들이 몰려들 것이고 참극이 벌어질 것이오. 그리고 내가 군주를 벤다면…… 군주의 수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덤비다가 모두 죽을 것이오. 유감스러운 일이되 난 군주의 생각보다는 강한 편이오. 보시겠소?"
뇌우는 메마른 어투로 말하다가 돌연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탄지지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를 알아보기 위해선 고개를 뒤로 급박히 꺾어야만 한다.
뇌우는 날개를 단 짐승인 양 오십칠 장 허공까지 솟아올랐다. 일순,
"우― 우― 우―!"
경천동지할 포효(咆哮)로 인근 이십 리가 들썩인다.
그리고 보라,
우― 우― 웅―!
무엇인가 뇌우의 몸 뒤에서 빠르게 승천하기 시작한다.
그건 하나의 거대한 악마이다. 허공 가득 보이는 마녀(魔女)의 환상…….
머리를 풀어 흩트리며 충천해 오르는 악마의 환영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기만 하더라도 혼백을 빼앗길 것 같다.
악마의 환영은 점점 더 크게 확산된다. 그러는 가운데 수천 개의 검륜(劍輪)이 난무하며 허공 오십 장을 일거에 뒤덮였다.
어디 그 뿐이랴, 고막을 찢을 듯한 마검음(魔劍音)이 천지를 진동한다.
콰― 콰쾅―!
경천동지할 굉음이 거듭되며 삽시간에 칠십여 무사가 휘청이며 쓰러졌다. 그리고 뇌우는 다시 십장 떠올랐으며, 악마검영은 백 장 크기로 확대된다.
한순간, 천지를 뒤덮을 정도로 확대되던 마녀의 환영이 빠르게 축소되더니 한줄기 핏빛 무지개로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선형의 와류를 형성하며 장천(長天)을 가르며 맞은편 벼랑 쪽으로 폭출되어 나갔다.
콰르르릉― 쾅!
무시무시한 폭음과 더불어 백오십 장 높이의 벼랑 아래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집채만한 돌이 떨어져 내리고, 낙락장송이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떠오르다가 송엽을 분분히 떨군다.
모든 일은 삽시간에 벌어진다. 뇌우는 마공을 익힌 이후 처음으로 혼신의 내공을 발휘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넋이 나간 표정으 지으며 뇌우가 표표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봤다.
뇌우는 누란 바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이길 수 없는 자다.'
누란은 패배를 확신했다.
이제는 더 물러날 곳도 없다. 오직 하나의 탈출이라면 자결일 뿐이다. 그녀는 늘 소지하고 다니던 자결용 비수를 꺼냈다.
"부디…… 내가 군주답게 죽게 허락해 주길……!"
그녀는 단아하고 냉정히 말한다. 뇌우는 그녀가 자결을 시도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듯 주저함 없이 되받아 말했다.
"용감히 자결한다면 오백이 따라 죽을 것이니 몽고의 대역적이 될 것이고……, 비겁하나마 산다면 오백 명이 함께 살 것이니 몽고의 군주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난 어찌하든 개여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으으……!"
누란은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뇌우는 이제 모든 게 누란에게 달렸다 여기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그는 마음을 텅 비운 채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비수가 떨어져 바위에 부딪치며 들리는 맑은 강철음을 들으며 표정을 환히 풀었다.
누란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
"내가 잡혀 공녀(貢女)가 될 것이다. 부디 나의 수하들을 자유롭게 해다오. 뇌우."
누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건 피눈물이다.
"……!"
뇌우는 입술을 깨어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란, 그대는 진정한 군주요. 그대는 몽고의 영웅이며 위대한 강호여협이오.'
뇌우가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이 누란은 심신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뇌우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는 보기보다 날씬하고 가벼웠다.
뇌우의 가슴에 그녀의 부푼 가슴이 닿았고, 심장의 박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봉긋이 부픈 뜨거운 육봉의 질감도…….
뇌우는 정욕을 느꼈으되 억제했다. 누란은 매혹적인 여인이다. 그가 바란다면 그녀는 뇌우에게 마음의 문과 육체의 문을 열어주리라.
…….
뇌우는 일단 그곳에 가야한다. 모든 문제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이젠 악마의 휘장을 찢어야 한다.
뇌우가 며칠 내내 숙고한 바에 의한다면 만악의 괴수는 그곳에 있다.
뇌우는 자신의 추측이 그릇된 추측이기를 기대하며 누란을 더 깊이 안았다.
가슴이 촉촉이 젖는 이유는 누란이 혼절한 채 쉬임없이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누란은 마검의 환영 가운데 내공을 잃었다.
이제 누란은 뇌우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 몹시 힘든 일일 것이되 노력해야 한다. 하여간 지금은 떠나야 한다.
그만이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남아 있기에…….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