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남자
박미정
여행 중이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촌 호수가 있다. 해그름에 석양이 보고 싶어 호반을 찾았다.
호수 저 멀리 롯데월드가 보인다. 주말이라 그런지 놀이기구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숲 속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자지러진다. 잔잔한 물결 위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다.
산책로를 배회하다가 뒷모습이 심상잖은 중년의 남자를 보았다. 벤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운동화 한 켤레, 소주 한 병, 남자는 혼자서 독주를 하고 있다. 운동화는 왜 바닥에 두지 않고, 벤치에 올려 두었을까. 남자의 앞 모습이 궁금했지만, 선뜻 다가설 수 없는 분위기다. 술 한병을 모두 비우면 호수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갈 것만 같다. 그럴리는 없겠지, 가던 길을 재촉해 보지만 웬지 마음이 불안하다. 다시 돌아와 남자 뒤에서 한참을 지켜본다.
남자는 술잔으로 사용하던 종이컵을 구겨서 벤치에 놓는다. 그것은 술이 동이 났다는 뜻일 게다. 바라보던 나의 눈동자가 더욱 커진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신발을 신어야 할텐데 그럴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남자는 긴 하품을 하며 호숫가로 걸어간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댄다.
살금살금 남자의 뒤를 따른다. 호수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온다. 다행히 호수 데크길은 안전대가 길게 드리워져 있어 일부러 다리를 올려 넘지 않으면 호수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다. 나도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제발 뒤돌아 와서 신발을 신었으면.
남자는 좀처럼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석양이 호수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담배를 꺼내 물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머슥해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어~ 신발 신는 걸 잊어버리셨나봐요? 저기 벤치 위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네, 발이 갑갑해서 공원에 오면 더러 벗습니다."
내친김에
"저도 가끔씩 맨발 산책을 합니다. 우리 잠시 맨발로 걸을까요?"
술기운이 완연한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는 샌들을 벗어 들고 앞서 걸어간다. 올까. 말까. 주춤하던 남자가 나를 따라온다. 녹음이 완연한 숲길에 바람이 분다. 걷다가 뒤돌아 본 그의 얼굴에 노을빛이 어린다.
첫댓글 우리 협회에는 멋진 여성분이 많네요
별 말씀을요. ㅎ
여행길에 만난 호반의 남자!
가끔씩 떠오를 것 같습니다.
불안하던 마음이 평온해 졌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요즘 맨발걷는 게 대유행인데 행여나하는 걱정을 잘표현하셨네요.
기분 좋은 작품입니다.
제가 혹시
행여나! 가
역시나! 가
될까봐 우려되었나 봅니다. ㅎ
반전이 재미있습니다
맨발걷기와 혼술은 좀 안어울리지만 그 남자는 편안할까 궁금하네요
읽는내내 조마 무서운 생각이 들었는데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하는 하루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