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開拓者)★
1.노숙 [191~195]
191
“믿을 수 없어.”
단호하게 말한 안국철이 싸늘한 시선으로 송규호를 보았다.
“피터 일류신이 했다는 증거가 있나? 내가 보기에는 김명천이 일류신과 우리의 전쟁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둘을 다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그럴리가 있습니까?”
30대 후반의 송규호는 구소련 시절에 학교 교원을 지내다가 무역업에 뛰어들어 한국은 물론이고 북한을 여러 번 왕래한 경험이 있다. 따라서 융통성이 좋았고 남북한에 인맥이 많아서 이런 일에 적격이었다. 송규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안국철을 보았다.
“동지, 보위부 부부장 이성남 동지를 제가 잘 압니다. 이성남 동지에게 제가 말한 내용을 말씀드려 주시면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허, 이동무가.”
눈을 치켜뜬 안국철이 이를 드러내더니 으르렁 대듯 말했다.
“동무, 부부장 동지와의 인연을 팔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큰 실수를 한거야. 동무 때문에 부부장 동지 입장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돼.”
“동지께서 오해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한랜드측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정색한 송규호의 목소리도 굵어졌다. 송규호가 안국철을 똑바로 보았다.
“김 사장님은 사건을 듣자마자 바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부디 동지께서는 속단하지 마시고 대국을 위해서 잠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흥, 대국을 위해서라구?”
안국철이 다시 이를 드러냈지만 기세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만일 경솔하게 행동했다가 대국을 깨뜨린다면 그 때야말로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송규호가 입에 올린 보위부 부부장 이성남은 현역 인민군 중장으로 실력자인 것이다.
“좋아.”
마침내 안국철이 잇사이로 말했지만 눈은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렇다면 김 사장이 우리한테 호의적이라는 증거를 내놓도록,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거야.”
송규호의 시선을 잡은 안국철이 말을 이었다.
“우리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겠다는 뜻이야. 알겠나?”
“사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송규호가 길게 숨을 뱉았다.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죄인 취급을 하면서 욱박지르기만 하십니까?”
“상황이 그렇지 않나?”
안국철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물증이 없으면 심증으로 잡는 것이야. 나를 저격할 용의자는 김 사장 일당밖에 없었어.”
“일류신이 그것을 노렸던 것이지요.”
입맛을 다신 송규호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안국철의 저택 응접실 안이었다. 그들 주위에 둘러선 7,8명의 사내들은 아직도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들이 었는데 몇 명의 얼굴은 불만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기한은 내일까지야.”
안국철이 송규호에게 던지듯 말했다.
“내일 중으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이번 사건의 책임을 져야 될거야.”
송규호는 안국철로부터 시선을 돌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송규호가 방문을 나갈 때 안국철이 소리치듯 말했다.
“피바람이 불거라고 전해!”
한랜드는 새로운 대한민국이다. 헬기 창밖으로 눈덮인 대지를 내려다보던 안재성이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안세영에게 말했다. 그들은 한랜드를 이틀째 시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광대한 영토를 다 돌기만 해도 헬기로 일주일 예정을 잡아야 했다. 엔진의 소음이 컸으므로 안재성이 소리치듯 말했다.
“나는 내가 이룬 모든 것을 한랜드의 기반을 굳히는데 이용하겠다. 이곳은 5000년 역사의 한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펼쳐가는 곳이다.”
안세영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이었다. 안재성은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꿔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안재성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은 미지의 땅이야. 에스키모도 러시아인도 한번도 발을 딛지 않은 불모지란 말이다. 이곳을 우리 한민족이 개발하는 거야. 임차기간 따위는 이제 소용이 없다.”
이를 드러내고 웃은 안재성이 손으로 창밖의 대지를 가리켰다.
“보아라, 이 광대한 대지에 우리가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거야. 50년이면 2대가 번성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몰아내겠느냐?”
그때 스피커에서 기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방의 눈보라가 심해서 잠시 착륙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헬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안세영은 머리를 돌려 반대편 창밖을 보았다. 함께 비행하던 두 대의 헬기도 기수를 낮추고 있었다. 러시아제 10인승 헬기 3대에 탑승한 안재성 일행은 지금 한랜드의 서북방 지역에 와 있는 것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베르호얀스크 산맥 아랫쪽이다. 헬기 3대는 낮은 구릉 밑의 평탄한 대지위에 나란히 착륙했는데 이곳은 바람도 잔잔했고 시야가 탁 트여서 3면의 지평선이 모두 보였다. 그러나 기온은 영하 25도였으므로 모두 털코트인 슈바깃을 여미고 있다. 눈이 엷게 깔린 대지에는 마른 잡초도 자라지 않았지만 바람결에 땀 냄새가 맡아졌다. 비린것 같으면서도 포근한 냄새였다.
“벌써부터 한랜드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안재성이 발을 떼면서 말했다. 수행원들은 멀찌기 떨어져서 두 부녀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앞쪽을 응시한 채 안재성이 말을 이었다.
“북한측 책임자를 누가 저격했다는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임자 대신으로 부관이 맞아 사망했다.”
놀라 눈만 깜박이는 안세영을 향해 안재성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김사장이 그 일로 북한측의 의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럼 김사장이.”
“김사장의 연락을 받았는데 피터 일류신의 짓이라는군.”
“…....…”
“일류신은 한랜드의 주도권을 쥐려고 경쟁상대인 북한측 책임자를 제거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거야.”
“…....…”
“놈들의 요구조건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이주민을 두당으로 계산해서 착취를 할 계획이더군.”
“아버지.”
발을 멈춘 안세영이 정색한 얼굴로 안재성을 보았다.
안재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안세영이 낮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죠?”
“넌 한랜드에서 살아야 된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안재성이 즉시 말했다.
“내 대를 이어서, 한랜드의 지도자로.”
안세영이 머리를 들고 안재성을 보았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바램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 안재성이 손을 들어 안세영의 말을 막았다.
“안다. 내 욕심이라는 것을, 그러나 조금만 두고 보도록 하자. 내 뜻이 이루워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안재성이 몸을 돌렸을 때 부녀간의 대화가 끝난 신호로 보였는지 비서실 직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회장님, 제 27지점에 김명천 사장이 도착 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가선 직원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날아 왔다고 합니다.”
“그래?”
하늘을 올려다본 안재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행하기 괜찮다면 27지점으로 이동하기로 하지.”
“예, 회장님.”
직원이 물러가자 안재성회장이 머리를 돌려 안세영을 보았다.
“북한측이 김사장을 압박하고 있겠지. 어쨌던 잘 왔다.”
192
제 27지점은 동쪽으로 300㎞ 정도 떨어진 평원지대로 활주로가 닦여져 있다. 김명천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직행으로 27지점에 날아온 것이다. 한 시간쯤 후에 그들이 27지점 임시 공항에 내렸을 때 슈바에 털모자 차림의 김명천이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김명천의 뒷 쪽에는 7, 8명의 고려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질서가 정연했다.
거기에다 옷차림도 검정색 모피코트에 부츠, 거기에다 털모자 차림으로 모두 군복을 입은 것 같았다. 김명천의 고려인 조직원들이었다. 헬기에서 내린 안재성에게 다가간 김명천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회장님.”
“응, 잘왔어.”
김명천의 어깨를 감싸안은 안재성회장이 나란히 걸었다.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지금까지 안재성은 누구한테도 이런 행동을 해본적이 없는 것이다.
활주로 근처의 통나무집은 공항 관제소겸 한랜드의 파견원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페치카 옆의 의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안재성이 비서실장 박수근과 전자사장 전기용까지 불렀으므로 4명이었다. 거기에다 마실 것을 나르라면서 안재성은 안세영을 참석시켰다. 탁자 위에는 이미 마실 것이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안재성의 배려는 속이 보였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 급하게 날아온 것 같은데.”
페치카 열에 얼굴이 금방 달아오른 안재성이 웃음 띈 얼굴로 김명천은 보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강한 것을 보면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안국철의 저격 사건은 보고 드린 대로 일류신의 소행이었습니다.”
차분한 표정으로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일류신 조직에 심어 놓은 정보원이 그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증거를 만들 수 있겠나?”
안재성회장이 묻자 김명천은 머리를 저었다.
“일류신 조직의 정보원을 증인으로 내세워도 안국철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약점을 쥐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김명천이 가늘게 숨을 뱉더니 머리를 돌렸다가 옆쪽에 앉아있는 안세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안세영은 정색하고 김명천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김명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북한측과 일류신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양쪽 모두 약아빠져서 전면전은 피하려는 눈치가 보이니까요.”
“김사장 생각은 어떤가?”
안재성이 묻자 김명천은 입을 굳게 다물더니 한동안 탁자위를 보았다. 김명천의 굳은 표정을 보면서 안세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김명천이 이끄는 분위기에 자신은 물론이고 안재성까지 끌려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김명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회장님을 뵈러 온 것입니다.”
안재성이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입술끝만 구부리고 웃었다.
“지금까지 저는 한랜드의 인수자인 일성전자로부터 용역을 받은 공식적 위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저를 일성전자의 대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리고는 김명천이 정색하고 안재성을 보았다.
“그래서 아무르교역과의 계약을 파기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의 조직과 북한, 또는 일류신 조직과 문제가 생겨도 일성전자는 공식적 책임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안재성회장은 눈을 크게 뜨고 김명천을 응시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안세영은 다시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김명천의 의도를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일어나면 김명천 혼자서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었다.
안재성이 입을 연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먼저 일류신 조직을 치겠습니다.”
김명천이 거침없이 대답 했으므로 방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어졌다. 안세영에게는 김명천이 마치 일류신 조직과 축구 시합을 하겠다는 말처럼 가볍게 들렸으므로 충격이 더컸다. 김명천이 안재성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일류신의 요구조건은 가혹합니다. 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일류신 조직을 분쇄시킬 계획입니다.”
“그러면.”
헛기침을 한 안재성이 그때서야 나섰다.
“북한측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이제 방안 분위기는 완전히 김명천에 의해 압도 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김명천이 입을 열었다.
“내일 북한측 안국철 대리에게 우리들의 결정 사항을 통보해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국철은 저에게 이틀 여유를 주었는데 그 기한이 내일입니다. 내일까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통보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김명천이 다시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하지만 내일 일류신 조직과의 전쟁이 일어나 둘 중 하나가 치명상을 입게 되면 안국철은 놀라 독촉하지 못하겠지요.”
“그럼 내일.”
안재성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내일 일류신 조직을 기습할 계획입니다. 회장님.”
“……....”
“이미 준비는 다 끝내 놓고 왔습니다. 저도 공격조를 이끌고 선두에 섭니다. 그래야 부하들이 믿고 따르기 때문에.”
“……...”
“만일의 경우에 저한테 문제가 일어나면 강철규, 그 다음은 신해봉, 송규호 등의 순서로 조직을 이끌어갈 고려인을 선정해 놓았고 모두에게 충성 맹세서를 받아왔습니다.”
가슴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낸 김명천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한랜드와 대한민국, 그리고 일성그룹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맹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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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회의를 마친 김명천이 통나무집을 나왔을 때 뒤에서 안세영이 불렀다. 몸을 돌린 김명천의 앞으로 안세영이 다가와 섰다. 걸음은 당당하게 걸었지만 얼굴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저기요.”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안세영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뭔데?”
“저하고 이야기 좀 해요.”
“나, 바쁜데.”
팔목시계를 드려다보는 시늉을 했지만 김명천이 곧 머리를 끄덕였다.
“저기로 가지.”
그리고는 김명천이 통나무집 건너편에 세워진 건물을 턱으로 가리켰다. 역시 통나무집으로 한 쪽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난로 옆에 모여섰던 서너명의 사내가 일제히 머리를 들었다. 일성의 선발대로 파견나온 사원들이었다.
“오셨습니까?”
그중 선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들이 김명천과 안세영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20평쯤 되어보이는 넓이의 사무실 안은 따뜻했고 서너개의 책상과 소파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파견원의 사무실이었다.
“잠깐 이곳에서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김명천이 양해를 구하자 사내들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거 미안하구만.”
쓴웃음을 지은 김명천이 아직 긴장한 표정의 안세영을 보았다.
“먼저 휴게실이나 커피숍을 지어야겠어. 회장님한테 건의를 해.”
“오빠.”
안세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꼭 그렇게 선두에 서야 돼요? 목숨을 내놓고 일을 해야 되느냐구요.”
눈만 껌벅이는 김명천을 향해 안세영이 쏟아붓듯 말했다.
“선두에 서지 않으면 부하들이 믿고 따르지 않는다구? 말두 안되는 영웅심리야. 오빠는 전쟁 영화나 소설을 너무 많이 본것 같아.”
“…....…”
“오빠 후계자로 누구 누구 순위를 매겨 놓은 건 또 무슨 짓이야? 거기에다 서약서까지 받았다구? 웃겨.”
“가만.”
입맛을 다신 김명천이 손바닥을 안세영의 얼굴을 향해 펼쳐 보였다. 그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안세영을 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본론을 말해.”
아직 숨을 고르고만 있는 안세영을 향해 김명천이 다그쳤다.
“널 웃긴적 없어. 그럴 생각도 없었고. 자, 무슨일이야?”
“가지마.”
그러고는 안세영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세영이 짧게 흐느꼈지만 시선은 그대로 김명천을 향해져 있다.
“가지 말란 말이야. 으응.”
떼를 쓰듯이 울던 안세영이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어린아이 같은 동작이었다.
“그렇게 가면 어떡해? 죽으면 어떡하냐구?”
“이런 젠장.”
낮게 투덜거린 김명천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무실은 물론 비어 있다.
“그만해, 그만 울어.”
김명천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을 때 안세영이 와락 다가와 가슴에 안겼다. 김명천은 가슴에 안긴 안세영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에서 은근한 향내가 맡아졌고 상반신에서 부드러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김명천의 가슴이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감동이 온 것이다.
“그만, 그만해.”
김명천이 낮게 말하고는 안세영의 양쪽 팔을 쥐었다. 떼어내려는 시늉이었다.
“그만 가야겠다.”
“가지 마.”
이제는 응석을 부리듯이 안세영이 어깨를 흔들어 김명천의 팔을 털었다.
“그냥 여기 있어.”
심호흡을 한 김명천이 마침내 안세영의 허리를 두손으로 감아 안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난 맨손으로 시작한 놈이야. 내 배경은 아무것도 없다.”
머리를 숙인 김명천이 안세영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머리도 뛰어난 편이 못돼서 학벌도 시원치 않았고 물론 금력이나 권력과도 거리가 먼 태생이지.”
“……....”
“나에겐 야망과 그것을 실천시켜 줄 육신 밖에 없어. 네가 날 막는다면 난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밖에 안돼.”
“싫어.”
“만일 내가 그런 존재였다면 우스운 일이지만 네가 이렇게 내 가슴에 안기지도 않았을 테지.”
그때 안세영이 머리를 들었는데 두 눈이 아직 물기에 젖었지만 생기있게 반짝였다.
“오빠, 키스해 줘.”
안세영이 정색하고 말했다.
“얼른, 응?”
당당한 표정이어서 순간 놀랐던 김명천의 얼굴도 곧 차분해졌다. 김명천의 시선을 잡은 안세영이 눈을 감더니 턱을 조금 윗쪽으로 올렸으므로 입술이 더 가까워졌다. 김명천은 안세영의 허리를 더욱 당겨 안고는 머리를 숙였다.
입술이 부딪쳤을 때 안세영이 양팔을 들어 올리더니 김명천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김명천은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안세영의 말랑한 혀를 입안으로 가득 받아 들였다. 젤리 같은 혀가 곧 김명천의 혀를 감고 문지르고 밀기 시작했으므로 사무실 안에는 거친 호흡소리로 가득찼다.
“오빠.”
겨우 입을 떼었을 때 안세영이 젖은 목소리로 김명천을 불렀다. 아직도 안세영은 눈을 감은 채였다.
“나, 오빠 사랑해.”
안세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난 그말 하려고 오빠를 부른거야.”
그리고는 안세영이 눈을 떴다.
“오빠를 빼앗기지 않을테니까.”
그 순간 민경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므로 김명천은 길게 숨을 뱉았다.
“이제 가봐야 돼.”
안세영의 팔을 쥔 김명천이 다시 밀었을 때 이번에는 몸이 떼어졌다.
“미안해.”
김명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난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배신할 수는 없어. 더구나.”
길게 숨을 뱉은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더 좋은 조건을 차지하려고 배신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오빠, 제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안세영이 퍼뜩 눈을 치켜떴다.
“선입견을 버려, 난 오빠의 선입견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는 문쪽을 향해 먼저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나도 똑같은 여자야, 공평하게 대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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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로 다가가는 동안 김명천의 굳어진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혼란과 분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민경아를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안세영의 적극적인 태도 앞에서 무력해졌던 것이다. 매정하게 자르지 못한 것은 안세영에 대한 미련 때문이 분명했다.
안세영과 결합한다면 한랜드의 차기 통치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으며 그때는 야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거대한 한민족의 새 영토에서 이상향을 건설하게 된다. 더구나 안세영은 매력이 있는 미모의 여자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차없이 자르고 돌아서는 남자는 그야말로 옛날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20인승 비행기 앞에서는 신해봉이 부하 서너명과 함께 서서 김명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신해봉은 김명천이 안세영과 만나고 온 것을 아는 것이다. 김명천이 잠자코 비행기에 오르자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신해봉이 입을 열었을 때는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신해봉이 갑자기 생각이 난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전에 연락이 왔습니다만 안국철이 부하들을 대폭 증강 시킨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부하들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증원을 받은 모양입니다.”
“……....”
“정보원의 보고로는 약 350명 정도, 무장은 휴대용 미사일까지 보유한 중무장 전력입니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신해봉이 조그맣게 입맛을 다셨다.
“우리들의 현재 전력보다 두 배 이상이 됩니다. 물론 한 달쯤만 지나면 우리들이 앞서겠지만 말입니다.”
현재 김명천의 휘하에는 약 500명의 고려인 조직이 있지만 전투 전력은 150명 정도였다. 나머지는 정보원과 관리요원인 것이다.
“일류신은?”
김명천이 묻자 신해봉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지금 아무르 강가의 제 2별장에 있습니다.”
“…....…”
“별장 경비 병력은 약 20명 정도인데 경비 위치는 모두 파악 되었습니다.”
“오늘 밤에 결행한다.”
앞쪽에 시선을 준 채 김명천이 낮게 말했다.
“그 다음 순서가 북한이야.”
“알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신해봉이 다시 길게 숨을 뱉았다.
“일류신을 제거하면 북한측의 태도가 변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현재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전쟁이야.”
“대비하고 있습니다.”
“만만하게 보이면 안 돼. 그것이 중요해.”
“알고 있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신해봉이 입술만 구부리고 웃었다.
“한번 기세가 꺾이면 세우기 힘들지요. 국가 간이나 조직간 전쟁도 어린애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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