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0
#벨기에신앙고백서 18.#성육신 (1)
So then we confess that God fulfilled the promise which he had made to the early fathers by the mouth of his holy prophets when he sent his only and eternal Son into the world at the time set by him.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술로써 우리의 선조들과 맺으신 언약, 즉 당신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 자신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언약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뒤늦게 수립된 구원방안이 아니다. 도리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더 나아가 세상이 창조되기 전인 영원 전부터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누구를 구원하실지, 어떻게 구원하실지를 정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시대와 장소에 따라 택하신 성도들에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영원 전의 구원협약에는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들 뿐만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참여하셔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이유는 실제로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구원사역을 이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별개의 분리되고 독립된 존재로서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시고 성자와 연합하시며 성령께서 완전충만하게 거하시는, 신비한 연합과 교통의 방식으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여호와께로부터 택하심과 부르심과 언약을 받은 신앙의 선조들은 지금은 계시지 않으나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당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께서 장차 이 땅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로 오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 것이었다. 즉, 구약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여호와는 다름아닌 장차 이 땅에 오시게 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이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보내셨던 것은, 그들 스스로는 그들 자신이 처한 죄의 비참함도, 구원에 대한 소망과 믿음도 가질 수 없는데다가, 설령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간의 힘에 억눌려 금세 희미해지는 한계와 연약함을 고려하셨기 때문이다.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와 함께 거니셨으나 범죄한 그들을 심판하시고 쫓아내신 분은 바로 사람으로서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3백년 동안 에녹과 동행하신 후에 그를 하늘로 들어올리시고,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며 노아 가족을 보존하신 분은 사람이시며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노아의 후손들이 높은 탑을 쌓는 것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으신 분은 사람이시며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그를 축복한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소돔과 고모라를 순찰하러 가시다가 아브라함에게 접대를 받으시고 대화를 나누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며 축복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고 모든 영광으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모세에게 등을 보이신 여호와는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리고를 점령하러 가는 여호수아 앞에 칼을 들고 나타나서 여호수아에게서 절을 받은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사 기드온에게, 그리고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서 제사의 제물을 받은 사람형상의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 에스겔이 보았던 그룹들을 타고 다니는 천상의 인간과, 선지자 다니엘이 강가를 거닐다가 보았던 가슴에 우바스 정금 띠를 두른 천상의 인간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보았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신 모습 그대로 구약 시대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 전 영원 전에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존재해오셨었다.
The Son took the "form of a servant" and was made in the "likeness of man," truly assuming a real human nature, with all its weaknesses, except for sin; being conceived in the womb of the blessed virgin Mary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without male participation.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는데, 이는 참으로 죄를 제외한 모든 연약함을 가진 실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처녀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되셨는데 이는 그녀가 남자와 상관함이 없이 오로지 성령만의 능력으로써 이루어진 일입니다.
사람의 상태를 종의 형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성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귀와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도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면 종의 형체라는 용어 대신에 원수의 형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종의 형체로서의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이전에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이신 성자로서만 계셨다가 비로소 인성을 가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사람으로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셨었다가 때가 되어 죄의 종노릇 하는 비참하고 비천한 사람의 수준으로 한없이 낮추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므로 영으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다거나, 혼으로는 죄악된 의지를 품는다거나, 육으로는 정욕적인 충동에 휩싸인다거나 하는 죄를 불러 일으킬만한 요소는 전혀 없으셨고 단지 인간 본성의 연약한 것들만 그대로 똑같이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시던 태아 및 영유아 시절을 겪으셔야 했고 지혜의 성장과 성령충만의 과정이 필요하였으며 하늘에 계셨을 때의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셔야 했다. 육신으로는 생명으로 취급되지도 않는 태아 세포부터 시작해서 부모의 양육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유아 및 청소년 시기를 거쳐 요셉을 도와 험한 목수의 일을 하셔야 했다.
사도신경을 제외한 그 이후의 모든 고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시면서 그녀의 인성 중 육체의 형질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혼을 비롯하여 사람의 영혼이 생성되는 방식이나 죄의 유전이나 악인의 영혼 생성 등 설명이 불가하고 성경을 거스르는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고백할만한 진리라고 여겨지기 어렵다. 게다가 신약성경의 사도들은 한결 같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신앙을 가르치므로 이 신앙이 우상숭배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필연적으로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여야 하고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이셔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교부들을 비롯하여 신앙개혁가들과 청교도 등의 신실한 선생들이 이 진리를 고의적으로 훼손하고 왜곡했다고 여겨서는 안되며, 단지 헬라 철학의 영향과 인간 지성의 한계로 인해 가리워짐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최선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의 살과 피가 전혀 섞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과 자손이라는 성경의 기록을 풀이하기 위해서 마리아와의 혈연관계를 입증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요셉의 계보로 되어 있으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직계임을 밝히려는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과는 피 한 방울의 혈연관계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즉 요셉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자가 아니라 양자일텐데도 성경이 그리스도를 요셉의 직계로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으신 것이 입양의 원리를 따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요셉의 양자가 되셔서 예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마리아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굳이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을 취하지 않으셨어도 사람이 되셔서 구속사역을 이행하시는데 아무런 제약과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마리아에게서 취한 것이라 해석하고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말고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도 영원 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라고 한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형상을 본따서 지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취한 것이 아니어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셨다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에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신 상태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독생하셔서 성령 하나님으로 당신의 영을 완전충만하게 채우셨었는데, 마리아에게 잉태되시려면 당신의 인성을 한없이 낮추셔야 했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 당신의 인성 전체를 맡기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의 뱃속에서 태아세포 수준으로 낮아지셨을 때 조차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한시도 분리되지 않으셨다.
#요한계시록 #Revelation 2:8-9
서머나 敎會에 보내는 말씀
8 서머나 敎會의 使者에게 便紙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myrna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him who is the First and the Last, who died and came to life again.
Et angelo Smyrnæ ecclesiæ scribe : Hæc dicit primus, et novissimus, qui fuit mortuus, et vivit :
Καὶ τῷ ἀγγέλῳ τῆς ἐν Σμύρνῃ ἐκκλησίας γράψον Τάδε λέγει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ὃς ἐγένετο νεκρὸς καὶ ἔζησε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만 처음이시자 마지막이신 분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처음이시자 마지막이신 분으로서 창세 전 영원 전 태초부터 말씀이자 지혜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 영원하신 독생자이시다. 주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하신 것은 주님께로부터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피조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감히 사람의 지성으로 짐작할수도 없는 창세 전 조차도 그분의 주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는 항상 살아계신 분이셔서 죽으실 수가 없으므로 사람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그 신앙의 토대 위에서 우리가 모든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겪고 견디며 감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당신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 칭하신 것은 그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더 주님과 복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교회와 성도들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처음이시자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진리이어야만 한다.
9 내가 네 患難과 窮乏을 알거니와 實狀은 네가 富饒한 者니라 自稱 유대人이라 하는 者들의 誹謗도 알거니와 實狀은 유대人이 아니요 사탄의 會黨이라
I know your afflictions and your poverty--yet you are rich! I know about the slander of those who say they are Jews and are not, but are a synagogue of Satan
Scio tribulationem tuam, et paupertatem tuam, sed dives es : et blasphemaris ab his, qui se dicunt Judæos esse, et non sunt, sed sunt synagoga Satanæ.
Οἶδά σου τὴν θλῖψιν καὶ τὴν πτωχείαν, ἀλλὰ πλούσιος εἶ, καὶ τὴν βλασφημίαν ἐκ τῶν λεγόντων Ἰουδαίους εἶναι ἑαυτούς, καὶ οὐκ εἰσίν ἀλλὰ συναγωγὴ τοῦ Σατανᾶ.
서머나 교회가 받아온 환난과 궁핍은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하신 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인해 당하는 참된 고난이었다. 아마도 서머나 교회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나 집을 몰수 당하여 굶주리며 떠돌아 다니거나 동굴에서 지내고 붙잡혀 고문을 당하여 건강과 생명도 빼앗기는 고초를 당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신앙은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곧건하고 고결한 것이어서 그 어떤 핍박으로도 꺾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육적으로는 가진 것 없이 비천해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누구보다도 더 부요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신 것이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모습은 겉으로는 화려해도 정작 복음에 있어서는 헐벗은 가난뱅이에 불과하다는 책망을 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정반대로 대비된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시대나 지역에서의 교회와 성도들은 주변으로부터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핍박을 받기 일쑤였다. 따라서 그렇게 주님과 복음으로 인해 환난과 고통을 당하던 교회와 성도들은 비록 육적인 서머나 교회는 아니었어도 영으로는 서머나 교회와 같아서 이 편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의 위로를 체험하며 견뎌냈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나 지역이라고 해서 서머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친한 사람의 결혼식이나 중요한 가족모임에 불참한다거나 연인과의 데이트를 포기한다거나 당장 시급한 시험공부를 잠시 멈춘다거나 중요한 계약을 포기하거나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가게나 장사를 쉰다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하거나 하는 것들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듣기에 거슬려 하더라도 복음의 진리를 가감없이 꿋꿋하게 전하고 가르치는 것도 서머나 교회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내밀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해주고 속옷을 빼앗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줌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고 조롱하는 배우자나 부모나 자녀나 친구들에게 악담과 조롱과 비방으로 대꾸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와 이해충돌이 생겼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편파적인 부당함과 피해와 손해를 당하더라도 감내하는 것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다니는 교회가 교회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해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자신의 신앙을 올바르게 유지하면서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것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교회와 담임목사의 불법과 불의를 정당하게 규탄하는 것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하셨던 할례와 제사법과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것을 보고 헛되이 고생한다고 비방하며 조롱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더이상 헛고생 하지말고 자기들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제사 의식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자고 회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유대인들의 전략은 어느 정도 유효해서 사도 바울 시대의 몇몇 교인들이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 유대교로 전향하는 배교를 저지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히브리 동족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다시 유대교로 전향하는 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며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영원한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 정죄하였고 주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아예 사탄의 회당이라고 단호하게 정죄하신다. 역사적으로 그런 사탄의 회당인 자칭 유대인의 계보는 중세 시대 로마 카톨릭이 이어받게 되었다. 신앙 개혁이 발생한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이러한 사탄의 유대인 계보를 잇는 행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한두가지로 요약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온갖 권모술수와 궤계를 가지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주님과 복음을 악용하는 몇몇 대표적인 초대형 교회들은 사탄의 회당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책임지고 앞장서서 복음의 원리를 따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교회를 보존한다는 미명하에 평판에 해가 될까 감추고 은폐하며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교역자들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의 회당에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의 형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온갖 물질적인 권리와 혜택은 있는대로 취하면서도 결국 교회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목사는 사탄의 회당의 사역자이다. 특정 정치이념에 사로잡혀서 교회와 신자라면 마땅히 어떤 체제나 정당이나 정치인만을 지지해야 한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적그리스도 취급하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탄의 회당에 동참하는 자이다. 과학적 이론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창조 진리를 대적하여 진화도 하나님의 섭리라 주장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을 무식쟁이로 취급하는 것은 사탄의 회당에 합류하는 것이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자꾸 이 땅의 것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사탄의 회당에 합류하는 것이다.
#신명기 #Deuteronomy 4:1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에 못이 배기도록 잔소리처럼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은 자나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앉으나 서나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고 생각하며 지키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참된 생명과 복을 얻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듣는다는 것은 율법에 정통한 선생에게서 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 선생의 가르침 없이 혼자서 깨우치고자 한다면 십중팔구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한대로만 자의적으로 왜곡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참된 율법 선생에게서 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은 여호와의 복을 누리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사도는 전하는 이가 없이 복음을 들을 수 없으며 믿음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난다고 하였고, 제자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를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서 신앙고백을 하게 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목회자들의 가장 우선하는 사역이어야 한다. 율법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귀로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듣는다는 것은 가르침을 받고 심령에 주의하여 새겨서 자기의 삶에서 실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것이다.그래서 모세는 율법을 들으라고 하면서 바로 그것을 준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가르침에 불과하고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의 더러운 것을 보고서도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며 주인으로부터 금 한 달란트 또는 한 므나를 받고도 아무런 유익없이 땅에 파묻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예전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는 구원받은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전도한답시고 전도 대상자에게 기계적으로 신앙고백을 시켜놓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미련하고 우둔하며 무식한 전도법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까 우려스럽다.
율법을 준행하라는 것은 어려움이 수반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내포한다. 다른 이방 족속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장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헛된 신을 섬기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자기 만족과 유익을 추구하는 생활을 할 때,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섬겨야 하고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되었으며 7일 중 하루는 안식일로서 반드시 쉬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짐승들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가난한 이웃과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밭의 일부는 거두지 않고 남겨두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러한 여호와의 율법들은 이방 족속들 눈에는 어리석고 미련해 보일뿐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방 족속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이 율법을 준행하는 것만이 여호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 햐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가볍고 쉽다고 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아무리 행위를 갈고 닦는다 한들 절대로 그 공로로는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분의 복음이라는 멍에를 지는 것으로써 더욱 쉽고 편하게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각자의 십자가의 길이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며 험한 길이라고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복음대로 준행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라도 더 공부하고 일하며 돈벌어야 하는 세상 사람들은 꼬박꼬박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을 미련하다 비웃는다. 어떻게든 부귀영화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는 자들은 기꺼이 이웃을 위해 자기 권리와 유익을 내려놓고 내어주며 손해를 당하는 성도들을 우둔하다 조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복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하고 충만한 기쁨의 생명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복음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고난과 핍박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지로 가볍게 여겨 거뜬히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참된 성도들은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는 더이상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참된 신앙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데다 도리어 세상이 경악할 정도로 악귀를 닮아 악을 행하는 것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기독교라는 명칭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악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코로나보다 일곱 배의 일흔 배나 더 한 성령의 불시험으로써 기독교가 소멸되고 예루살렘의 포로들처럼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어보인다.
#20200210 #창세기 #Genesis 31장.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은 라반이 비록 자기에게 외삼촌이자 장인이었어도 마지막까지 홀대와 만행이 이어지자 급기야 두고보지 못하고 그를 질책한다. 그러나 야곱의 질책은 자기 화를 절제하지 못하여 손윗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직과 성실, 라반의 불의함 등을 근거로 한 정당한 반박이었다. 이 때 야곱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부짖듯이 라반을 책망하기보다는 자기의 억울한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듣는 사람이 도리어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조목조목 따졌을 것 같다. 왜냐하면 라반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는 상대방이 흥분하여 감정적으로 나오면 그 틈을 파고 들어와서 약점을 잡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더이상 라반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얕보지 못하도록 예의를 갖추면서도 차분하게 라반의 불의함을 하나씩 조목조목 깨부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윗사람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자기가 받은 수치와 모욕 때문에 그 윗사람을 증오하거나 아무런 존중함 없이 억울한 자기 감정에만 치우쳐서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황이 악화되면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무례하고 감정적인 대응은 친부모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받아주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으며 자기 평판만 안좋게 할 뿐이다. 윗 사람이 자기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윗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공경과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정중하게 그 오해와 부당함을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정당하게 예의를 갖춰 대응하더라도 우리 기대와는 달리 오해와 부당함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 윗사람을 마음으로 증오하거나 어떻게든 보복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허락하는대로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당함과 윗사람의 부당함을 모두 지켜보고 계시고 자기를 보호해 주시리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에 정직과 성실로 임해야 할 것이다.
주 안에서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은 무조건 윗사람의 지시에 맹종한다거나 자기를 비굴할 정도로 낮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 근거한 확고한 판단기준을 가지고 좌우를 분별하여 윗사람을 섬기라는 것이다. 윗사람이 정당한 지시와 대우를 하면 마땅히 그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성경에 어긋난 지시를 강요할 때는 예의와 공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윗사람이 지속적으로 불의한 지시를 강요한다면 복음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가 당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불의한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불의한 일에 연루된 많은 자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변명은 자기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이는 2차 대전 후 아이히만이라는 독일 나치 전범이 재판 중에 스스로 변호한 내용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변명을 하는 자들은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죄책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자기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만한 지성과 양심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런 변명을 설령 사회법적 책임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심중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런 비참하고 치졸한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경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야곱은 라반의 양떼를 돌보면서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군말없이 자기 소유에서 물어내었다. 야곱은 열 번이나 라반에게 부당한 임금변경을 당했으면서도 깎인 임금을 채우기 위해서 몰래 라반의 소유를 도적질 하지도 않았고 양떼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은폐하려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야곱은 라반이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신앙양심에 못이겨서 자기 것으로 충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는 직장에서 어떤 자세로 업무를 해야 하는지를 조금 가르쳐준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아마도 회사의 대우가 많이 부당하고 부족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직장인들의 생각이 맞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당하는 부당함을 회사의 자산을 오남용 하는 것으로 충당하거나 해소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업무와 무관한 사적인 일에 법인카드를 사용한다거나 정해진 인당 비용을 초과하고도 다른 직원 명의를 차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일은 워낙에 비일비재해서 하나의 은밀한 문화처럼 자리잡았기 때문에 혼자서 그런 문화를 거스르는 것은 많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우리가 주위로부터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라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그런 회사의 모든 자산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켜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근태이다. 직장인의 근태란 업무시간을 잘 지키는 것과 업무 시간 중에 나태하지 않고 성실히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기준은 어느 회사나 직장이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소이다. 근태에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회사의 시간이라는 무형 자산을 훔치는 것이고 그 회사의 궁극적인 대주주이자 소유주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다.
야곱은 라반의 양떼를 20년 동안 돌보았다고 했으므로 라헬이 요셉을 낳기 30년 전에 라반을 떠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야곱은 91세가 되어서야 라헬에게서 요셉을 얻었기 때문이다.
야곱과 라반의 언약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야곱의 정당한 책망에 할 말이 없어진 라반은 야곱의 소유가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원론적이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 바쁘다. 그리고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서 돌무더기를 쌓고 하나님을 두고 서로 침해하지 말자며 맹세하자고 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야곱이 자기를 먼저 해하려 한다거나 아내들과 자식들을 학대라고 할 것처럼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십사 한다는 가증스런 뻔뻔함도 보인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손을 들어주신 반면에 라반에게는 그의 불의함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시고 전부 보셨다고 하셨으므로, 라반은 자기가 경솔하게 내뱉은 말에 심판을 받게 될 뿐이다.
야곱은 라반이 서둘러 화제를 돌리자 그를 붙잡고 더 꼬치꼬치 파고들지 않고 책망을 멈춘다. 그리고 라반과 쌍방 언약을 맺은 후에는 자기를 해하려고 추격한 라반의 일행들을 데리고 음식을 나눔으로써 그들과 너그럽게 화해한다. 야곱으로서는 20년간 자기를 착취한 라반과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해 온 라반의 일행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에게 도망쳐 오기 전에 자기가 형 에서를 두 번이나 속이고 아버지 이삭까지 속여 큰 유익을 훔친 것을 떠올리고 그 20년 동안의 모든 부당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아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라반과 그의 일행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야곱은 라반의 일행들과 음식을 나누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 때도 아마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 간다. 자기 형들에게 시기 질투를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에게 복수하기보다는 도리어 그간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심을 인정하면서 형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욥은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가장 친했던 세 친구들에게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당해 친구 관계를 끊을 정도까지 갔으나 하나님께서 욥 대신 세 친구들을 꾸짖으시고 욥에게 용서를 받으라 하셔서 욥은 세 친구들을 기꺼이 용서하였다. 다윗은 까닭없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두 번이나 해치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공경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예수님과 스데반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분쟁이 생기면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용서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어떻게든지 나에게 이런저런 손해를 끼친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증오심과 복수심이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빙자하여 사적인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나에게 끼친 물질적 손해보다 백 배의 손실을 당하게 해달라거나 내 심신을 힘들게 한 것의 백 배의 고통을 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는 우리의 억울하고 미운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를 빌미로 상대에 대한 저주까지 합리화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