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도시 4가 또 한번 누적 관객수 1천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게다가 범죄도시 시리즈가 1편을 제외하고 2편 3편 4편이 모두 1천만명을 넘어섰다는 것은 한국 영화 시리즈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누적 관객 1천만명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영화감독이 그야말로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의 숫자가 바로 1천만명 관객 동원입니다. 한국의 인구가 5천만명이니 그 가운데 1/5이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영화의 본 고장인 미국에서도 미국인 3억 5천만명의 1/5이 특정 영화를 관람한다 이것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만큼 한국에서 1천만명 돌파가 주는 임팩트는 엄청납니다. 감독은 물론 제작사 그리고 출연자들도 로또에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의 향연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야말로 꿈의 향연입니다. 하지만 산이 깊으면 골도 깊은 법이고 태양이 강하면 그림자도 거센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특정영화에 쏠리는 현상이 영화사 그리고 그 주변 환경탓에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지적은 다른 영화 관련 전문가들이 할 분야이고 저는 왜 이 범죄도시같은 처절한 폭력영화에 한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가를 들어다 보고 싶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한국영화는 정말 순정적이 면이 많았습니다. 순애보적인 사랑과 가족애 그리고 애절한 우정 등이 주를 이뤄었습니다. 가족의 진솔한 정과 이웃과의 끈끈한 연결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는 폭력이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됐습니다. 특정 영화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폭들이 등장하고 그런 조폭들의 행동이 마치 멋진 소재가 됐습니다. 미국의 god father 같은 폭력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가 아닌가 보여집니다. 폭력이 미화되는 그런 시스템이죠. 그런 폭력영화 그러니까 폭력을 동원하고 조직폭력들이 등장하면 흥행하더라는 공식이 만들어지면서 한국 영화는 엄청나게 거칠어졌습니다.
거칠다는 미국 영화를 가볍게 뛰어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제 영화에서 폭력이 나오지 않으면 심심하다 못해 졸린 영화로 치부되는 상황입니다. 거칠다 못해 잔인함의 상징적인 영화가 바로 한국 영화라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이제 한국 영화의 잔혹함과 잔인함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폭력적인 영상을 즐기는 외국 감독들이 절대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가 한국영화라는 말은 이제 뉴스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가 왜 이렇게 잔인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한국의 사회상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한국인들이 뭔가 눌려 있다는 것입니다.정서적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압축 성장속에 짓눌린 정서가 폭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일반인들은 이제 넘볼 수 없는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가 만든 병폐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그 엄청난 권력과 부 그것도 상당부분 불법과 편법으로 만들어진 현상에 억눌린 일반 서민들이 그들의 카타르시스 즉 하수구로 폭력적인 영화를 찾는다는 설명이지요. 그렇다고 폭력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장르를 폭력적 요소에서 찾는 것이지요.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정치 경제 사회적 폭력에 대해 마초적 주인공이 단번에 해결하는 그 카타르시스 그리고 그 해방감을 맛보고 싶은 단순한 논리가 작용합니다. 영화 한 편 보는데 무슨 철학이 필요하겠습니까. 단순히 즐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영화에서 무슨 철학을 논하고 감독이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의미를 찾는 그런 노력 이제 소용없다는 모습 아닙니까. 그냥 즐기고 엉겨있는 마음 풀고 나오면 됩니다. 뭔가 불의를 주먹 한방에 해결하는 그런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의 모습에 자신이 대리 만족하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죠.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의에 한 방을 퍼붙는 그 주인공에 열광하는 것에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미국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 우악스러운 근육의 소유자들이 영화 관객들에게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한방에 해결하는 그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관객들의 심정은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미국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속에 젊은이들이 방향타를 잃고 있다는 말이 많습니다. 럭비공이라는 특정 정치인이 등장하고 나서 더욱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화 한 편에서 소용돌이치는 그 심적 불만을 해소한다는 풀이가 가능합니다.
한국 영화 범죄도시가 대단한 흥행을 기록하는 것에 불만 전혀 없습니다. 억눌린 서민들 그리고 젊은 층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감합니다. 하지만 처참한 폭력으로 심적 대리 만족을 얻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일시적으로 해결은 되지만 그런 심적 해소법이 축척되면 더 많은 폭력 장면을 동원하게 되고 그런 관객의 요구를 따를 경우 한국 영화는 온통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벗어나 동남아를 무대로 온갖 폭력을 일삼은 조폭들 그리고 그들을 추적해 한 방으로 해결하는 엄청난 괴력의 경찰, 그 단순한 구도에서 조금 벗어나는 방도를 찾아보는 것은 어떤지요. 한국 관객들을 온통 한 방에 의존하는 그런 단세포적인 관객을 만드는 작업에서도 해방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폭력영화로 세계적인 흥행 그리고 명성을 얻지 못합니다. 폭력 그것도 오로지 폭력을 이기기 위한 폭력은 정말 하찮은 소재이자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5.16 쿠데타가 일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치 폭력의 원초이기도 한 날이 바로 범죄도시 4가 1천만명을 돌파한 날이기도 합니다.
2024년 5월 16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