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새하얀 캔버스 앞에 앉았다. 그는 팔레트 위에 어린 아이의 볼살처럼 예쁜 분홍색 물감을 섞었다. 앤틱가구처럼 낡았지만 고급스런 붓에 분홍색 물감을 잔뜩 묻힌다. 장난스럽고 얄궂은 분홍색은 까슬까슬한 붓끝을 거쳐 새하얀 캔버스에 내려앉는다. 붓은 호수 위를 노니는 어여쁜 백조처럼 춤을 추며 족적을 남긴다. 붓의 춤이 멈추자, 캔버스 위에는 핑크빛 고래가 그려져있다. 싱그러운 미소의 고래는 헤엄을 치는지 하늘을 나는지 알 수 없는 몸짓을 하고 있다. 바다인지 하늘인지 알 순 없지만, 고래는 꽤 행복해보였다.
사내는 핑크빛 고래를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사람들은 고래의 몸짓에 즐거워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림을 보던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 핑크빛 고래가 어디있어?". 구경꾼들은 그의 말에 동요했다. 그리고 수근대는 이야기. "흰 고래라면 어땠을까?", "고래의 수염을 좀 더 디테일하게 그리면 어땠을까?", "핑크색은 너무 유치한 색깔 아닌가?".
수근거림이 이어지는 사이, 고래를 감싸던 핑크빛 물감은 말라갔다. 굳어버리고 딱딱해진 물감은 균열을 보였고 생명력 넘치던 물기도 잃어갔다. 그림은 캔버스 위에 똑같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림은 점점 지쳐가는 듯 보였다.
사내는 그림이 지쳐가는 것을 알고 전시를 포기했다. 그림을 아끼던 팬들은 축복을 원하는 것처럼 그림이 다시 전시되길 기다렸다. 하루... 이틀... 기다림은 간절해졌고 더욱 커져갔다. 그러다 언젠가는 그림이 다시 처음 그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물감의 균열이 심해지던 어느날 밤, 균열은 오랜 가뭄을 맞이한 땅처럼 점점 커져갔다. 조각 나 바닥으로 추락하는 물감들, 겨울을 준비하는 단풍나무처럼 물감 조각은 추락했다. 그리고 물감 너머, 나타난 핑크빛 고래.
고래는 꿈틀대며 캔버스를 벗어났다. 구름처럼 두둥실 날던 고래는 창문 밖으로 나가 마을의 하늘을 날았다. 그림이 다시 전시되길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 창 밖을 바라봤다. 두둥실 하늘을 날며 마을을 빙빙 돌던 고래. 이젠 누구도 고래 그림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고래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새로운 꿈을 향해 훨훨 날아갈 신혜진의 미래에 행복이 가득하길...
첫댓글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ㅠㅠ
핑크고래의 꿈과 미래 모두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온 맘 다해 응원합니다!
예쁜 글 감사합니다ㅜ! 며칠동안 계속 싱숭생숭한데 이 글 읽고 조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네요ㅜㅠ
정말 잘 쓰시네요.. 물감이 말라서 떨어져도 분홍고래는 유유히 날아간다... 진짜 딱 맞는 표현입니다.
저도 왠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글이에요
이틀전에 써놓고 문제시 자삭할 각오로 올렸는데 좋은 반응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울컥 하며 보게 되는 글이고 잔잔하면서도 잘 와닿은 글인거 같아요... 핑크빛 고래의 행복이 곧 고래 그림의 전시를 기다리던 팬들의 행복이겠죠 분명 모두가 행복 할 수 있을거라 믿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