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연작 시리즈가 되어버린 한국 위스키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옛날 위스키 중에 제일 유명한 위스키는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아닐까 합니다. 최백호 본인이 '내가 도라지 위스키를 마셔본 마지막 세대'라고 자칭 할정도로 나이 지긋하신 분의 추억에나 존재하던 고전입니다. 묘하게 토속적인 이름이 인상적인데, 60년대 중반까지 팔리던 도라지 위스키는 실은 도리스 위스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위스키는 도라지 위스키와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가 있었습니다.
광고 크기만 봐도 점유율이 대충 어땠을지 감이 옵니다.
이 시절의 위스키는 위스키가 아니라, 주정(양조알콜)에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을 섞은 '위스키 맛 소주'였습니다.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위스키는 청양산업이 주월 국군용으로 판매한 군납 위스키였습니다. 물론 이쪽도 위스키 원액이 20%미만인 기타 제재주였습니다.
시중에 위스키가 시판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입니다. 1973년에 백화양조와 진로가 해외수출을 조건부로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습니다.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백화양조도 진로도 처음 만든 위스키는 인삼 위스키였습니다.
일단 수출용 위스키를 위해 원액을 수입했지만, 역시 최종 목표는 국내에 위스키를 판매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화 양조는 '죠니 드레이크' 진로는 'JR위스키'를 발매합니다.
죠지드레이크와 JR의 싸움은 죠지드레이크의 승리였습니다. 일년 일찍 시장에 나온 덕분도 있겠지만, 병 모양이 발렌타인과 비슷해서 잘 팔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JR 위스키 역시 이름도 그렇고, 녹색병에 노란색 병으로 JB 위스키를 빼다 박았습니다. 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병모양은 후대에도 이어집니다.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정통 스카치 위스크를 자처하지만,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당시 법에 따르면 위스키가 아닌 기타재제주였습니다. 위스키라는 이름을 쓰려면 원액 함량이 20%가 넘어야 하지만, 200%인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원액 함량을 아슬아슬하게 19,9%에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먹고 살기 시작하면서 수입양주을 대체하기 위한 국산양주를 만들기 위해,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시설을 갖추는 대신 위스키 생산허가를 내줍니다. 이때 생산 허가를 받은 곳은 여러군데지만 결국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게 되는 곳은 백화양조와 진로, 그리고 브랜디를 열심히 만들던 해태주조 세 군데 뿐이었습니다.
무려 정비석 선생님이 출연한 TV광고가 있을 정도로 광고에도 힘을 들였지만, 백화양조의 베리나인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태주조의 드슈는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고 백화양조 베리나인의 독주를 진로의 길벗이 가까스로 따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길벗 로얄의 증언식 광고의 백미는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배리나인 골드를 마셔본 적이 없는 저는 당시 베리나인 골드의 인기의 비결을 모르겠습니다. 베리나인 골드의 압승으로 위스키 전쟁은 일단락 되는 듯 했습니다만......
세계 114개국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패스포트는 시그램 계열인 윌리엄 롱모어사에서 1968년에 발매한 스카치 위스키입니다. 말하자면 라이센스 생산인 셈인데, 과연 진짜 패스포트하고 맛이 같았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3차전에서 베리나인 골드 킹이 망한 이유가 안일한 수평적 브랜드 확장이었다면, 진로 VIP가 망한 이유로 '안일한 마케팅'으로 꼽는사람도 있었습니다. 진로 소주에 끼워 팔기를 했다고 하니 당시에 진로 소주가 잘나가긴 잘 나갔던 모양입니다.
기사를 읽어보니 아직 100% 국산 위스키를 만들기에는 원액의 비축량이 모자르기 때문에 89년까지 점차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었군요. 이렇게 국산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오비씨그램의 디프로매트와 진로의 다크호스가 발매됩니다.
옛날 위스키 중에 제일 유명한 위스키는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아닐까 합니다. 최백호 본인이 '내가 도라지 위스키를 마셔본 마지막 세대'라고 자칭 할정도로 나이 지긋하신 분의 추억에나 존재하던 고전입니다. 묘하게 토속적인 이름이 인상적인데, 60년대 중반까지 팔리던 도라지 위스키는 실은 도리스 위스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경향신문 1960년 3월 1일>
갑자기 이름이 바뀌는데 2월에 도리스 위스키를 만드는 국제 양조장 사장이 명예훼손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이름과는 달리 도라지는 안들어갔습니다.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위스키는 도라지 위스키와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가 있었습니다.
광고 크기만 봐도 점유율이 대충 어땠을지 감이 옵니다.
이 시절의 위스키는 위스키가 아니라, 주정(양조알콜)에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을 섞은 '위스키 맛 소주'였습니다.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위스키는 청양산업이 주월 국군용으로 판매한 군납 위스키였습니다. 물론 이쪽도 위스키 원액이 20%미만인 기타 제재주였습니다.
시중에 위스키가 시판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입니다. 1973년에 백화양조와 진로가 해외수출을 조건부로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습니다.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백화양조도 진로도 처음 만든 위스키는 인삼 위스키였습니다.
<매일경제 1973년 9월 13일. 백화양조 진셍위스키 발매>
<경향신문 1975년 12월 9일, 진로 에릭사 국내 시판 광고>
<동아일보 1975년 12월 27일, 죠지 드레이크 발매>
<매일 경제 1976년 12월 6일 JR 위스키 발매>
좀 먹고 살기 시작하면서 수입양주을 대체하기 위한 국산양주를 만들기 위해,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시설을 갖추는 대신 위스키 생산허가를 내줍니다. 이때 생산 허가를 받은 곳은 여러군데지만 결국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게 되는 곳은 백화양조와 진로, 그리고 브랜디를 열심히 만들던 해태주조 세 군데 뿐이었습니다.
위스키 시장을 일단 정리한 정부는 제일 잘 팔리던 죠지드레이크에 철퇴를 가합니다. 죄명은 양두구육. 위스키의 이름을 걸고 기타재제주를 판 죄를 물어 법인세 6천만원을 추징합니다. 시범 케이스인 셈이죠.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아파트가 천만원 하던 시절)
그래서 백화양조는 죠지드레이크 대신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인 베리나인을 진로는 JR대신 길벗을 출시합니다. 그리고 새로 참전한 해태주조가 드슈를 출시하면서 위스키 전쟁의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라는 것은 위스키 원액 함량이 20%이상이라는 뜻입니다.
<동아일보 1977년 7월 4일. 백화양조 베리나인 출시>
<동아일보 1977년 8월 8일.해태주조 드슈 출시>
<경향신문 1977년 7월 28일. 길벗 출시>
영어로 Gilbert이라 쓰고 길벗이라고 읽는 진로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이지만, 오히려 이 토속적인 이름과 이미지 때문에 훗날 실패한 브랜드 네이밍 사례로 두고두고 이야기 됩니다.
무려 정비석 선생님이 출연한 TV광고가 있을 정도로 광고에도 힘을 들였지만, 백화양조의 베리나인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태주조의 드슈는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고 백화양조 베리나인의 독주를 진로의 길벗이 가까스로 따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25% 위스키 시대는 금방 막을 내리고 30% 위스키 시대가 옵니다. 정부의 국산주류 개발계획에 따라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기타제재주 규모를 줄이고 조금 더 위스키 원액 함량을 올린 30% 위스키를 만들게 합니다.
해태주조가 손털고 나간 자리엔 씨그램과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백화양조 베리나인 골드, 진로 길벗 로얄,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이 발매되면서 본격적인 위스키 삼국지의 막이 오릅니다.
이미 업계1위인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 골드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길벗의 패배를 되새긴 진로는 새 위스키 길벗 로얄의 컨셉을 정반대로 잡았습니다. 병도 그때 그분이 좋아했다는 외국의 유명 위스키를 연상시키게 만들고, 길벗이라는 이름은 조그맣게, 로얄은 커다랗게 써서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시바스 리갈과 거의 비슷한 맛으로 블렌딩 했다.'고 스스로 자처할 정도였습니다.
<매일경제 1978년 11월 29일. 길벗로얄 출시>
그것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증언식 광고로 세계수준에 손색없는 위스키라는 이미지를 심으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1981년, ABC라디오 한국 특파원 케네스 L 칼리어>
<1981년, 서울 하이앗트 호텔 부 총 지배인 프란츠 F 돈하우저>
이 광고가 실린 1981년에 한국에선 '11회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박스(Park's)축구대회라고 불리던 대회였는데, 얼마 전에 정권을 잡은 육사 골키퍼 출신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외국팀을 초청해서 대규모로 개최합니다.
당시 화랑팀(국가대표 1진, 2진은 충무팀)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고, 2대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납니다.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 출전했던 아르헨'띠'나 팀의 증언식 광고입니다.
다른 것 보다 '제가 영국에서 마셨던 위스키와 똑같은 맛과 향'이라는 대목에서 손이 오글거립니다. 아르헨티나 사람을 불러다 영국 위스키 맛을 증언시키다니......
<1978년, 길벗 로얄 위스키 TV광고>
진로는 로얄 길벗으로 베리나인 골드를 꺾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지만, 시바스 리갈과 거의 비슷한 맛으로 블렌딩 했다고 자랑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참전한 OB씨그램의 씨그램은 바로 시바스 리갈을 만든 회사였으니까요.
<경향신문 1981년 8월 12일. 오비씨그램 블랙스톤 출시>
<경향신문 1983년 2월 8일. 씨그램 라인업>
<블랙스톤 TV광고>
후발주자지만 씨그램과 OB의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은 무섭게치고 올라왔습니다.
80년대 초반 1급 위스키(원액함량 30%) 시장이 제일 치열했습니다. 일단 배리나인 골드가 시장의 절반은 석권했고, 나머지 절반을 블랙스톤과 길벗 로얄이 반반씩 갈라먹고 있었습니다.
<매일경제 1981년 10월 15일. 특급위스키 판매량>
배리나인 골드를 마셔본 적이 없는 저는 당시 베리나인 골드의 인기의 비결을 모르겠습니다. 베리나인 골드의 압승으로 위스키 전쟁은 일단락 되는 듯 했습니다만......
특급 위스키와는 반대로 위스키맛 기타재제주의 경우에는 진로 길벗 올드의 압승이었습니다. 19.99% 한계까지 위스키 원액을 채워 넣은 기타재제주 길벗 올드는 아무리 봐도 어떤 유명한 위스키를 그대로 배꼈습니다. 길벗 로얄은 시바스 리갈을 연상시키는 정도지만 이건 올드파하고 같이 놓으면 구분이 안갈 정도입니다.
<매일경제 1981년 5월 25일. 길벗 올드 광고>
만화 바텐더의 에피소드로도 유명한 '자빠지지 않는 올드 파'까지 재현하다니. 광고가 좀 가증스럽군요.
광고 내용은 한방울(0.01%)의 차이지만 가격은 절반이라는 기타재제주의 장점을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위스키 가격의 대부분은 세금이라(공장 출고가의 318%가 세금으로 붙음) 주세만 절반을 낮춰도 꽤 저렴하게 팔 수 있었죠. 그래서 위스키의 이름은 쓰지 못하지만 위스키 타입이라는 이름으로 기타제재주가 꽤 많이 나왔습니다. 길벗 올드도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다고 할 뿐, 직접 위스키라고는 안 합니다.
길벗 올드 위스키가 많이 팔렸던 이유 중에 하나가 가짜 양주 만들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1986년 8월 10일. 길벗 올드를 고급 양주로 속여 팔던 요정 주인 구속>
저 시절에 2,500 만원이라니 지금이라면 몇 억 규모로군요, 길벗 올드를 사다 빈병에 채우는 것은 가장 손쉬운 가짜 양주 만드는 법이었을 겁니다. 위스키 회사가 기술력을 총동원한 '위스키 맛 술'이니까요.
이 시절의 피튀기는 경쟁에 얽힌 에피소드(과대광고 싸움, 원액 수령 싸움, 보사부와의 갈등, 점유율 싸움)를 일일히 언급하다가는 포스팅이 몇 배로 늘어 날테니 가장 크고 굵은 사건 하나만 소개합니다.
다들 우리가 만드는 위스키가 12년 몰트 위스키를 사용해서 만드는 '세계 수준의 위스키'라며 신문 지상에서 원액의 수령 문제를 가지고 박터지게 싸우다가, 3개 회사 모두 깨갱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습니다.
<동아일보 1982년 1월 26일. SWA의 시정요구>
영국 스카치위스키 협회에서 12년 숙성 표기를 빼고, 원액 30%에 주정 70%로 만든 위스키라는 사실을 명시하도록 통보해왔기 때문입니다. 3회사 모두 영국에서 위스키 원액을 수입하고 있으니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씨그램과의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이 제일 먼저 권고를 따릅니다.
국산 위스키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었을까요? 다들 지금쯤 잊고 있으시겠지만 원래 저 3회사는 '국산 위스키 원액'을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위스키를 팔고 있었습니다. 다들 80년대 초반에 위스키 제조 공장을 세우고 83년 전후로 첫 생산에 들어갑니다.
<매일경제 1983년 2월 16일. 베리나인 진로 연말께부터 위스키 원액 생산.>
오비씨그램이 좀 일찍 생산에 들어갔지만, 위스키 원액이라는 게 만든다고 바로 쓸 수 있는게 아니죠. 적어도 4~5년은 숙성을 시켜야 '위스키 원액'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빛을 보려면 좀 기다려야 합니다.
1984년 위스키 삼국지의 마지막 전투인 특급 위스키 대전이 벌어집니다.
위스키 원액 30%에 주정 70%를 섞는 1급 위스키가 아닌 위스키 원액으로만 만드는 진정한 위스키를 만들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옵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맞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술을 만들라는 것이었죠. 아직 쓸 수는 없지만 '국산 위스키 원액'의 생산도 들어갔으니 위스키에 대한 고삐를 조금 늦춰도 되리라고 판단 했던 것 같습니다.
<매일경제 1984년 6월 8일 베리나인 골드 킹 출시광고>
백화양조는 베스트셀러 베리나인 골드에 킹을 붙여 베리나인 골드 킹을 출시했고, 진로는 V.I.P 그리고 오비씨그램은 패스포트를 출시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특급 위스키 대전의 승리를 거머쥔 것은 오비씨그램의 패스포트였습니다. 지금도 마트에 가면 팔고 있을 정도니까요.
<동아일보 1984년 7월 7일. 패스포트 출시 광고>
세계 114개국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패스포트는 시그램 계열인 윌리엄 롱모어사에서 1968년에 발매한 스카치 위스키입니다. 말하자면 라이센스 생산인 셈인데, 과연 진짜 패스포트하고 맛이 같았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동아일보 1984년 7월 12일, VIP출시 광고>
3차전에서 베리나인 골드 킹이 망한 이유가 안일한 수평적 브랜드 확장이었다면, 진로 VIP가 망한 이유로 '안일한 마케팅'으로 꼽는사람도 있었습니다. 진로 소주에 끼워 팔기를 했다고 하니 당시에 진로 소주가 잘나가긴 잘 나갔던 모양입니다.
1984년에 위스키 원액을 100% 사용한 특급 위스키가 발매되고, 1987년에 드디어 국산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위스키가 나옵니다.
<매일경제 1987년 1월 7일, 3월부터 국산 위스키 시판>
베리나인을 만들던 백화양조는 1985년에 오비씨그램에 합병되었습니다. 백화양조가 만들었던 위스키 원액은 디프로매트 만드는데 쓰였겠죠.
이렇게 국산 위스키의 전성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국산 위스키도 외국에서 사온 원액을 블렌딩해서 만들고, IMF지나면서 주류회사들이 외국계 주류회사들에 합병되 이리저리 갈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죠.
<동아일보 1987년 3월 5일. 오비씨그램 디프로매트 출시 광고>
<동아일보 1987년 3월 4일. 진로 다크호스 출시 광고>
의욕적으로 발매한 국산 위스키지만, 판매는 지지부진 했습니다. 아직 위스키 원액 생산능력도 높지않고 부족한 국산 원액 때문에 주정을 70%섞어 만든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매일경제 1987년 9월 5일. 국산 특급위스키 판매부진>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죠,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니까요. 원래 위스키 산업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통 안에 든 원액이 십년 십이년 숙성되야 그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지요......
제목을 보고 '도대체 국산 위스키 최후의 날은 언제 나오는거야?'하고 기다리셨던 분들의 허를 찌를 정도로 갑작스럽게 국산 위스키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국산 위스키 원액은 1991년에 사라집니다. 큰 돈을 들여 공장도 설립하고 수년동안 묵혀서 만든 위스키 원액을 겨우 5년 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을 포기하게 된 이유로 장기숙성에 따른 재고 부담과 외국 수입 원액과의 가격차이를 이유로 꼽고 있는데,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척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니워커 칵테일 스쿨(구 오비씨그램 칵테일 스쿨)에 다닐때 당시에 국산 위스키 원액을 만들었던 공장장님에게 들은 이야긴데, 한국에서 만들던 위스키 원액은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무려 5%였다고 합니다. 숙성시키는 오크통에서 자연히 증발되는 천사의 몫은 보통 2% 정도로 알려져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스코틀랜드하고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북쪽으로 사할린 끝까지 올라가야 스코틀랜드하고 비슷한 위도가 됩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타케츠루 마사타카가 산토리 위스키를 나와서 홋카이도 요이치에 닛카 위스키를 세운 것도 '조금이라도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환경'을 위해서라고 하죠.
천사의 몫이 5%라는 것은 12년 숙성을 시키면 원액이 55%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2년 숙성이 이러니 15년 18년 숙성은 꿈도 못 꿉니다. 21년 숙성 시키면 34%, 3분의 2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셈입니다.
애초에 수입 위스키 원액을 대체한다는 목적만 갖고 있던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은 채산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알려지자 딱 오 년 만에 국산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위스키는 사라지게 됩니다.
1991년쯤 되면 슬슬 먹고 살만해져서 해외여행도 자유화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영국에서 스카치위스키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이 들어올 정도였죠.
국산 위스키가 첫 선을 보인 1987년, 이때 제일 각광을 받았던 것은 오비씨그램에 합병은 됐지만 이름은 남아있던 베리나인에서 나온 '썸싱 스페셜'이었습니다.
<썸싱 스페샬 광고 1986년>
오비씨그램은 조니워커의 디아지오 코리아가 되었고, 패스포트는 페르노리카 코리아에서 나옵니다. 시그램이 페르노리카에 먹힌거니까 IMF의 영향으라고 보긴 힘들지만. 진로 위스키도 외국계 기업에 팔렸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은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위스키의 역사를 살펴보니, 정부 정책과 세금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본고장 위스키 산업'다워보입니다. 애초에 스카치 위스키라는 게 세금을 피해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와서 만들기 시작한게 시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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