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3대 요정 - 대원각. 삼청각. 선운각.
성북동., 대원각 1951년 개장 성북동., 삼청각 1972년 개장 우이동., 선운각 1967년 개장. 대원각 - 1960~80년대 권력자 요정정치 근거지 & 밤정치 무대, 삼청각 - 7.4 남북공동성명 만찬장,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장소 선운각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내연의 처' 장정이 운영 최고급 요정.
1972년 문을 연 삼청각은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정치인, 재벌, 고위장성 등 실세들 간에 비밀 화합장소.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뒷거래를 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 삼청각은 1980년대 룸살롱 성행으로 타격, 기생 파티장. 밀실 요정 한정식집으로 쇄퇴. 1998년 중소건축업체인 화엄건설에 넘겨졌고 1999년 12월 30일에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1972년 정부의 필요로 만들어졌던 삼청각은 7.4남북공동성명 만찬장, 남북적십자 회담장 1975년부터 정재계 인사들이 드나들었던.,요정.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은 극소수 실세들의 비밀화합 장소 대원각, 청운각과 함께 ‘북악산 3각’이라고 불리웠던 삼청각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로비와 접대로 얼룩진 요정정치· 밀실정치의 산실로 명성을 떨치며 번성. 1980년대 이후 점잖은 요정보다 화끈한 룸살롱이 성행. 삼청각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고 이 시기 많은 요정들은 일본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파티장으로 운영됐다. 성북동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은 “예전엔 일본인들도 많이 왔었다”며 “요정에서 일하던 기생들 중에 일본인 부자의 후처로 간 사람들도 봤다” 전했다. 1970/80 년대 3대 요정.,대원각 삼청각. 선운각. 통행금지 제도 하에서 통금이 없던 관광특구지역. 3대요정 종업원에게도 야간 통행증이 발급되었다.
당시 3대요정은 국가경제발전를 위한.,주요 외화수입원. 3대요정 종사자들은 국가경제발전을 위한.,관광산업 전사. 1960/70/80년대 3대요정 종사자들은 특권의식을 가질 정도. 국가 외화획득을 위한., '굴뚝 없는 공장'들. 국가 경제를 위해 황금알을 낳는.,산업 전사들. 외국어에 능통한 미모의 명문 여대생들도 많았다.
.................야간 통행금지 제도......................... 1945년 실시후 1954.7/5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1시간이 단축되었다가 그후 12~4시로 4시간 동안 실시되었다. 단, 신정 연휴, 광복절, 크리스마스, 제야의 밤.,일시적으로 해제. 통행금지시간에 통행하려면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으며, 위반하면 즉결심판, 경찰서 보호소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통금 해제는 1964년 제주도, 충북 관광지·도서지방에서 해제. 전방 휴전선 부근지역과 일부 해안 취약지구 등 안보치안상 특수한 지역인 총 52개군의 292개 읍·면 지역을 제외하고 1982년 1월 5일부터 일제히 해제되었다. ...........................................................................
우이동 선운각
우이동 부침바위.
^ 현재, 길상사 극락전 v
성북동은 분명 서울에 있는 곳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 북악스카이웨이는 미시령도로처럼 좁고 꼬부라진데다, 첩첩산중 같다. 강원도 못잖게 녹음(綠陰) 또한 풍부.
..................북악 스카이웨이............... 1968년 9월에 개통되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동 창의문(자하문)~성북구 정릉동 입구' 도로.| 경복궁의 진산을 이루는 북악산의 북쪽 능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져 있고 11.8㎞, 폭 10~16m 2차선 도로. 높이 342m인 도로 정상에는 북악팔각정휴게소. 북악산과 서울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자하문 ~ 정릉 아리랑고개' 10km는 관광도로. 자동차로는 30분 이내에 관람 가능한 코스이다. 창의문 옆길을 통해 창의문쉼터라는 곳에서 표찰을 받고 시작 북악산길은 성북구민회관 앞까지 코스이며 총 6.8km의 산책로. 팔각정은 북악스카이웨이 중간쯤에 서울의 전망대이자 휴식처. 북악스카이웨이 산책길 쉼터에는 다양한 운동기구와 정자. 약 10km 길이 산책로 및 관광도로는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 ............................................................................... 주변에는 세검정·정릉·삼청공원·경복궁·국립중앙박물관 등 이 도로는 '자하문~인왕산길', '정릉~성북동길'과 이어진다. 1968년 이 도로 개통 후, 대원각은 국내 3대요정으로 부상한다. 이어, 삼청각은 1972년 건립되어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된다. 북한산 우이동에 위치한 ‘선운각’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후처 '장정이' 1967년에 문을 열었던 고급 요정이었다. 1968년 북악스카이웨이 개통된 이후 우리나라 3대요정으로 부상된 선운각.
북악 스카이 웨이
성북동.,삼청각
삼청각은 성북동 안에서도 미지의 영역과도 같은 곳. 종로구 삼청동 쪽에서 어둠 짙은 삼청터널을 통과 후 삼청각 입구로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삼청각 언덕 위에 자리 잡은 6채의 한옥은 이채롭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어느 샌가부터 들리지 않는다. 이내 도심에서 산중으로 순간 이동을 한 듯 착각에 빠진다. 성북구 대사관로 3에 있는 삼청각. 사람들은 소나무숲으로 둘러 싸인 고요함을 삼청각의 매력으로 꼽는다.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적십자대표단 만찬 장소로 1972년 지어졌던.,삼청각. 대지면적은 2만115㎡, 연면적은 4399㎡. 일화당과 유하정, 청천당, 천추당, 취한당, 동백헌 등 6개 한옥으로 이뤄진.,삼청각.
삼청각은 근현대사 사건들을 담은 공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체결되면서 남북적십자대표단 만찬 장소가 필요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병대까지 투입해 석달 만에 뚝딱 짓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건축가 고(故) 정재원씨 설계 현대건설 시공. 하나로 조화를 이룬 공간이란 의미의 삼청각 한옥. 남북 대표단 만찬 그당시 남측 대표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 북측과 축배를 들었던 공간이다.
'봄의 맑은 물소리'.,청천당 삼청각 전체로 보면, 별채 쯤에 해당된다. 특이한 점은 보통 한옥 단청에 연꽃을 쓰는데 유하정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쓰였다. 삼청각은 1974년 이후 국빈접대 정치회담장으로 운영. 사실은 ‘밀실정치’가 이뤄졌던 고급 요정으로 활용된 것. 청운각, 대원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히었다. 기생들과 노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1996년 ‘예향’이라는 음식점으로도.,개명. 그러나, 경영난으로 1999년에 문을 닫았고, 민간 건설사가 고급빌라를 지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2000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서울시가 삼청각을 인수해 시민 문화공간으로 조성. 2001년 세종문화회관이 운영, 프라자호텔에 부분위탁. 2005년 다시 파라다이스가 민간위탁사로 이곳을 운영. 2009년부터 현재까지 세종문화회관 삼청각이 위탁운영. 삼청각 청천당. 이 한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찾던 곳
삼청각., 유하정.
보통 한옥의 경우 단청에 연꽃을 쓰는데 유하정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특징.
유하정 현재, 삼청각은 식당과 공연장으로 주로 이용. 특히 특색있는 결혼식과 돌잔치를 원하는 시민이 삼청각을 찾는데, 봄가을엔 예약이 힘들만큼 붐빈다. 일화당 앞마당에서 열리는 전통혼례는 예비부부들이 한 번쯤은 결혼식 장소로 생각해보는 ‘로맨스’장소로 꼽히기도 한다. 삼청각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지 16년째. 서울시는 한식 집대성 공간으로 만들 계획. 당장 내년에 진입로 앞 주차장 자리에 한식 연구·전시·체험 교육과 쇼핑을 할 복합문화체험공간이 들어설 계획이다. 전통 혼례 등을 열 개방형 다목적홀로 계획 나머지 한옥들은 반가음식, 궁중음식, 사찰음식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테마 한식관으로 운영된다. “삼청각이 한식을 집대성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면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즐겨찾는 문화공간이 될 것” -삼청각 홍보담당-.
1950∼1970년대 '밀실정치의 무대'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3곳은 '걸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 출입자는 없던 요정. 마당에 큰 오동나무가 있다 하여 오진암은 서울 1호 등록식당.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지만 식당으로 문을 연 시기는 1953년.
그무렵 야인시대 협객 김두한의 단골집으로 유명세를 탔고,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만나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하며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문을 연지 57년 째가 되던., 2010년 8월.
당시 소유주인 건설업체가 비즈니스호텔을 짓겠다며 오진암을 철거했기에 종로 구청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 한옥 건물 중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대문, 화장실 등을 부암동으로 옮겨 이축. 지난 1970~80년대 '요정 정치' 무대였던 오진암(梧珍庵)이 자리를 옮겨 보존된 것. . 종로구(구청장 김영종)는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던 오진암을 구청 소유 땅으로 옮겨 복원해, 문화시설로 활용하기로 한 것. 이전ㆍ복원 비용 10억원은 오진암을 사들여 그 자리에 호텔을 지으려는 ㈜이솔티에서 부담. 종로구 관계자는 "오진암은 20C 초 한옥이면서 주거용이 아니라 상업용 한옥이라서 의미가 있다. 요정 정치 산실로 손꼽혔던 만큼 얽힌 이야기가 많고 장소의 역사성도 있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 요정정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요정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거래, 공직기강의 해이. 풍기문란, 일부 지도자 계층 축첩문제 등이 국민들의 반감을 살 정도였다.
'요정정치'는 국가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후 요정은 쇠퇴기를 맞아 전통음식점으로 변모. '요정정치 산실' 대원각· 삼청각도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폐쇄되었고 '요정이 사찰로 탈바꿈을 한 것.'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자야 김영한. 법정스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요정 대원각을 통째로 송광사에 기증했던 것. 법정스님이 여주인의 법명인 '길상화'를 따서 대원각터 사찰에 '길상사' 이름을 명명했던 것. 대한민국 최초 근대 요정 오진암은 2010년 부동산개발회사에 매각되어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으로., 탈바꿈. ........................ ......................... “1950년대 폐허가 된 서울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鐘三) 여자들 만이 문인(文人)들의 고향이었다.” - 고은.
문인들은 기생을 사랑했고,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는 시인(詩人)들에게 빠져들었다.
종로에는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밀애와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이와의 떠들썩한 사랑. 파고다극장에는 시집 출간을 앞두고 요절한 기형도. 익선동에는 <임꺽정> 소설을 쓴 홍명희의 의기가, 돈의동에는 풍과 흥취가 넘쳐흐르던 요정 ‘명월’.
종로를 들었다 놨다 한 기녀들, 그리고 그녀들을 사랑한 문인들. 이제 100년 전의 요정은 사라지고, 예인들의 노래는 축음기 속에 남았다.
백석과 이상, 기형도가 사랑한 종로 해어화, 그 풍류의 길은 종로 뒷골목 도시속 한옥거리. 익선동 중심으로 낙원동, 돈의동 등 오래된 동네.
조선의 화려한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나온 종로는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견뎌낸 흔적들.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익선동. 192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 100여 채. 비좁게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주택개발사 ‘건양사’를 지어 분양하고 그 돈으로 독립열사를 후원했던 곳이다.
북촌 부지를 대부분 양반이나 부자들에게 분양했다면 도시형 개량한옥이 많은 익선동은 중산층이 타깃이었다. 1920년대에 조성된 익선동 도시형 한옥 마을에는 예인들과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았다.
△오진암은 1970/80년대 3대 요정정치의 산실. 1953년 한국 최초의 한옥상업시설이자 요정1호.
▶익선동은 100년 전부터 관광요정 '풍류의 거리'
익선동에 위치한 ‘국내 1호 관광요정’ 오진암은 제3공화국의 실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단골집. 손님들이 화투를 치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던.,요정.
‘오진암’과 ‘대하’는 전통의 강호로 1950년대부터 요정으로 운영돼왔고 1973년생 ‘명월’과 ‘청풍’은 신진 세력. 1970년대 말 관광요정으로 지정된 ‘명월’은 1980년대 전성기. 1960년대 청풍(익선동 99번지)은 2012년까지 번성(요정 ‘도원’).
“많은 음독사건이 일어났지요. 다른 기생과 외도를 한 남자를 기다리다 목숨을 끊는 처녀들”(북촌문화연구소 은정태 소장)
1970년대 관광요정 문화가 창궐하며 다시 살아난다 . 1971~1973년 기생이 하루에 공무원 월급을 벌 정도. 1990년대 해외 관광수요 증가로 완전히 사라진 요정.
오진암터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인사동 외벽에는 대문과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길, 부암동 이전을 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 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인숙 사건과 선운각, 한일회담과 청운장, 남북회담의 삼청각과 오진암에 대한 기록은 그당시 요정과 정치의 밀월관계를 대변해준다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익선동에는 작가이자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홍명희를 시작으로, 조선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했던 '동편제 명창' 송만갑. 당시 대부분의 기생들은 송만갑의 창법을 따랐다 내시 서예가 관광요정 ‘오진암’ 주인 이병직 등 거주. 관광요정 ‘대하’, ‘명월’(현재 비즈웰오피스텔), ‘오진암’ 익선동 골목길에는 한복집, 점집, 악기점 3가지가 많았다 . 3대 요정(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주변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사글세로 많이 살던 탓.
1921년 문을 연 명월(돈의동 145)이 있던 돈의동은 한때 약 80개의 요정이 즐비했다. 일제강점기 신탄 시장이 1930년대 없어지면서 술집들이 들어섰고 전쟁을 거치며 사창가가 형성.
돈의동 유곽 ‘종삼’은 탑골공원에서 종로5가까지 동서로 1km, 남북으로 100m 여성은 한때 1500 명. 서울에서 가장 밑바닥 주거형태 8000원짜리 ‘꼬방동네’ 1970년대 후반 가출 청소년숙소 ‘동광엄마네집’(하루 300원)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임춘앵 집(돈의동 75-1).
1950년대 중반 극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판소리 국악의 인기는 꺾이고 집을 담보로 해서 재기공연을 준비했던 임춘앵은 좌절감에 빠져든다.
1968년에 생긴 낙원상가는 종로에 생긴 가장 큰 변화. 해방 후 소개지 낙원자유시장에 ‘텍사스촌’이 형성됐고, 유흥업소 활황, 악사 인력시장이 생기며 낙원상가 형성.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없어지며 낙원상가는 타격. 낙원동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기형도(1960~1989) 시인. 1970년대 후반부터 파고다극장 중심으로 수많은 게이바 형성. 1990년대 이태원으로 신세대 이전하자 구세대 게이바 만이 낙원동에 남게 된다. ............................ ............................ '문단의 꽃미남' 백석 & 기생 자야(김영한)의 사랑. 백석이 시를 쏟아내면 어떤 여자도 감당 못할 정도. 백석은 이국적인 생김새로 여자들에게 인기 높았다.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 교사 회식 자리에서 '함흥권번'의 기녀 ‘자야(子夜, 김영한)’와 사랑에 빠진 백석.
그는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서 둘이 본 <전쟁과 평화> 영화 속 여주인공 나타샤를 자야에 빗대 쓴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두 사람이 종로 청진동에 살림을 차린 비슷한 시기에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는 천재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함께 살림을 차린다.
자야와 함께 살 방법을 찾아 만주로 떠난 백석.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과 함께 헤어진 두 사람. 26살에 떠나 보낸 그를 평생 기다린 김영한은 평생 모은 1000억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 부지를 10년 삼고초려 끝에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고 운명.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1960~80년대 최고급 요정 현재 성북동의 사찰 길상사가 바로 그 대원각이다. 백석이 84세로 북한에서 사망한 4년 뒤인 1999년 겨울 그녀도 영면, 그녀의 유언대로 흰눈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 마당에 뿌려진 유골.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시대에, "사랑했던 백석 시인의 시(詩) 한 줄이 시주한 1000억 재산보다 값지다." - 자야.
스물 둘의 기생 자야가 백석 시인과 헤어진 이후 김영한 보살이 되어 남긴 말.
백석 & 자야 16살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간 자야(김영한)는 가곡과 궁중무를 배우며 삼천리문학에 수필 발표.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기예가 출중했던 예인. 최초 재즈가수이자 여배우 1세대 복혜숙. 300편 이상의 영화, 연극, TV극에 출연했고 콜럼비아 사의 제의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나운규의 연인 류신방은 영화 <벙어리 삼룡>에 출연했으며 ‘꽃중의 꽃’ ‘화중선’을 기명으로 한 여류명창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때 임방울과 함께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다.
종로구 부암동.,무계정(옛 오진암)
. 오진암이 옮겨간 부암동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곳. 오진암의 신축지 인근에는 형님인 수양대군에게 밀려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집터인 무계정사가 있고, 구한 말 유명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도 오진암 인근의 무계정사 터에 머물렀다. .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부암동에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정사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무계정사 주변에는 현진건 집터와 무계원, '청계동천(靑溪洞天)' 각자도 볼 수가 있는데 윤동주 문학관이나 창의문에 가게되면 이곳에 잠깐 들러서 모두 다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1951년 성북동에 문을 열었던 대원각은 여주인이자 월북한 천재시인 백석의 연인이었 故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를 시주하면서 길상사로 변신.
처음에는 사양하는 법정 스님을 10년에 걸쳐 설득하여 뜻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화제였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에 김영한 여사는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고 2년 후 타계.
.............................. 조선 후기., 화당(花堂). ................................
“꽃 같은 얼굴이요, 달 같은 태도로다. 정신(精神)은 추수(秋水) 같거늘 성정(性情)은 춘풍(春風)이라. 두어라 월태화용(月態花容)은 너를 본가 하노라” - 안민영,《금옥총부》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철종 때의 가인. 자는 성무, 호는 주옹으로 서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과 가곡원류 간행. 조선의 풍류객들은 무수히도 많은 시조와 노래를 남겼다. ......................... ......................... 중국에선 홍등가, 일본에선 유곽, 우리나라에서 집창촌으로 불리는 공간. 조선 말, 선조들은 화당(花堂)이라 일렀다. 꽃이 모여 사는 집이란 뜻 ‘화당’은 몸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곳. 조선의 화당은 주로 어디에 밀집해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 여인들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법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불법 임은 조선시대 또한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았으되, 법이 금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음지(陰地)에서 더욱 성행했던 풍경 또한 오늘날과 매우 유사(類似).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 (현재 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 즉, 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북상화당(北賞花堂). 그후, 일제 강점기에 지금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명치정'이란 요정 거리. 여기에서 개화기에는 주로 매음(賣淫)이 이뤄졌다
조선 후기 화당(집장촌) 밀집 지역은 주로 청계천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농포안 (현재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새로운 상화당이 생기면서 두 지역의 구분을 위해 북상화당, 남상화당이라 했고, 오늘날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명치정 요정거리 유곽에서 매매춘.
명치정 유곽
일본에서는 유곽, 한국에서는 집창촌 조선시대에는 화당(花堂) 중국에서는 홍등가로 불리는 공간을 조선후기 선비들은 참 점잖게 일렀다. '꽃이 사는 집'이란 의미로 ‘화당(花堂)’은 몸 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생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등급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 기생으로 분류.
일패는 시서화 가무에 능한.,'예기', 이패는 가무를 주로 하되 매음을 해 ‘은근짜’ 삼패는 외양으로는 기생이나 매음을 주로 하며 일패와 이패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행동했다. 이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나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자리 잡은 북상화당(北賞花堂)이 있었다. 기생을 찾는 사내들이 모여드는 청루에서는 사소한 시비로 일어나는 주먹다짐이 빈번했다. 젊은 사내와 중년 남성의 싸움이 무엇을 위해선지 혜원 신윤복 그림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유곽쟁웅>, 신윤복, 지본채색, 18세기 말, 28.2*35.6cm,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매춘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조선시대 법으로 만 막을 수 있었으랴. 매음 기생들이 사는 청루를 제외하고 화당(花堂)에 적을 두지 않은 매춘부들은 화랑유녀, 여사당패 등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한양 기생은 어려서부터 교방 또는 장악원에서 기예를 익혀 한 명의 예인으로 성장했으나, 멀리 지방의 관아에 속한 관기는 고을 현감이나 관리의 명에 의거 기예보다 수청 드는 일이 주 업무. 법으로는 매춘을 금했으나 현실에서 근절하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일종의 편법을 취한 셈. 예를 들면, 함양 관기 연화의 사례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4년 4월 27일 자 3면 '娼女定區 창녀정구' 기사. 사진 = 한국언론진흥재단 창녀들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정에서 이들의 거주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다. 조선 말 개항 이전까지는 관기를 통한 합법적 매춘, 사기를 통한 매춘 만 가능. 이러던 것이 갑오개혁 이후 어려운 생활에 매춘에 뛰어든 여성이 증가하며 정부 차원에서 매춘여성 거주지 제한 조치가 시급. 매춘 여성 증가로 주거지역에서도 암암리에 매음이 이뤄지자 황당한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유지하는 악습이 심한 까닭으로, 외국인이 때때로 시골집으로 가서 창녀 유무를 묻고 하여 거주민이 놀라 근심하기에 이르니...” 그 중 한 사건을 옮겨 적으며 이들의 거주지 이전 공고를 보도. 이 기사에 따르면 경무청은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 근처로” 이들의 거주지를 제한했다.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은 지금의 명동2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지명이.,명치정. 종각 덕에 '종로'라 이름 붙은 보신각종 근처는 100년 전, 옛 서울에서도 상업 가옥이 즐비하고 전차와 우마차가 북적거리는., 조선 최대 번화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경제 중심지였던.,종로. 밤이면 조선인 노점상 야시장 & 창경원 벚꽃놀이. 일본인들과 상류계층의 번화가는 명치정과 본정통 충무로 본정통에는 미쓰코시 백화점(현 한국은행) 등. 북촌., 종로와 남촌.,본정통~명치정 일대는 일본 대자본 투입으로 점차 공간 분리. 일제강점기 해가 거듭될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오늘날, 명동이.,그당시 명치정. 일본식 과자를 판매하는 왜각시(게이샤)들을 구경하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명치정. 일본 상인들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과자나 요리와 함께 각시를 파는 요정을 세워 일본식 유곽문화를 도입했던 곳. 대한제국 궁중연회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관기(官妓)들의 모습. 종전 기생은 학식 높은 사대부를 손님으로 상대 그러므로,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해야 했다. 지역의 특색에 따라 읽고 읊는 책도 달라졌는데 유교적 학풍이 발달한 안동 기생은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 기생은 관동별곡을 읊었으며, 호방한 기풍이 강한 함흥 기생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노래하는 등 수준이 높았다.
개항 이후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사회, 경제 기반이 흔들리자 고고했던 기생의 지위도 함께 흔들렸음은 물론 생계수단 잃은 여성들이 매춘에 나섰다.
종전에야 기생이 아닌 매춘여성(화랑유녀, 여사당패)은 사대문 안 출입이 금지되어 도성 안에서의 매춘은 어려운 일 국가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매춘에 나선 일반 여성도 늘어나자 정부는 이들을 한 지역으로 모아 '거주제한구역'인 홍등가 형성. 인근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명동2가)에 모여 살게 한 경무청은 이주기간을 40일로 한정해 인근 초가집 값이 마구 급등하는 촌극. 높은 집값으로 인해 이곳에 이주한 여성들은 한 집에 5~7명이 함께 기거하면서 대문에 ‘상화당’이란 문패를 써 붙이고 생활했다. 일본식 요정을 본 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비슷한 시기 형성된 일본식 유곽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조선의 기생문화를 싸잡아 공창으로 간주 교방의 명칭 또한 1914년엔 일본식인 권번으로 바뀌었다.
성매매 관점에서 조선시대 창기의 매음은 개인이 성을 파는 프리랜서의 개념이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도성 안 청루나 음방에서도 그 접촉이 매우 은밀했고, 색주가(色酒家, 술과 함께 몸을 제공하는 작부)를 만나려면 남대문 밖 잰배(현재 중구 순화동)나 홍제원 현재, 서대문구 홍제동과 같은 도성 바깥을 직접 찾아야 했다.
본격적인 집창의 개념은 고종 갑오년 이후 늘어난 매춘인구에 따라 남상화당과 같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집창촌의 등장에 부쳐 “성병이 무서우니 각국의 법에 따라 기적(기생명부)를 편성하여 검미(檢微)할 것을 제창한다”고 제언했다. 집창촌의 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대두된 성병 문제는 이후 일제가 공창제로 기생을 관리하는 좋은 구실로 작용. 이는 조선시대 당대의 예술인이자 지식인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생의 몰락이자 추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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